은 트위터 cyp_mambo 디엠으로 연락주세여
아니면 웹박수에 연락처 남겨주시면 됩니당
은 트위터 cyp_mambo 디엠으로 연락주세여
아니면 웹박수에 연락처 남겨주시면 됩니당
상권입니다.
R19/문고판/210P
16000원
망각의 정원(상권)
릭벨져. 상하...의 상입니다. 하권은 2월에 나와요
벨져를 잃은 릭이 과거와 현재를 왔다갔다하는 이야기입니다.
샘플 참고해주세요.
민증 검사 합니다.
숱한 꿈을 꾸었다. 그저 그대와 아이를 갖고 행복하게 웃고 지내는 꿈, 잘린 그대의 목을 곁에 두고 울지도 화내지도 못한 채 다만 주저앉던 꿈, 모든 것이 없던 일이 되어 꿈에서 깨어나던 꿈. 행복도 슬픔도 분노도. 꿈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게 깨어지는 순간 끝이 난다. 해도 뜨지 않은 새카만 새벽녘. 홀로 누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횟수는 이미 셀 수도 없다.
그렇기에 릭은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서도 몇 번이고 그렇게 생각한다. 이건 악몽일지도 모른다. 다시 눈을 뜨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언제까지 잘 생각이냐며 당신이 눈을 찌푸리고 있지는 않을까. 꿈 좀 꾸었다고 멍청한 표정을 짓는 건 그만 하라 타박을 주면서. 그러면 릭은 어찌 그렇게 쌀쌀맞게 굴 수 있냐고 괜히 툴툴댈 것이다. 엄살을 피우면서. 아, 끔찍한 꿈이었소,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이며 옷을 차려 입은 그를 끌어안을 것이다. 꿈이어서 정말 다행이오.
애석하게도 그런 꿈 같은 일은 없다. 악몽이 현실이고 그런 꿈을 꾸는 날이면 악몽은 더욱 지옥 같은 고통만을 릭에게 안겨주었다.
어느 땅도 자유롭게 밟을 수 있던 인생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며칠이 걸릴 거리도 릭 톰슨은 순식간에 원하는 곳까지 닿을 수 있었다. 공간에 자유로운 몸이었다. 능력이 닿는 모든 곳이 릭이 있을 곳이었고 그 능력은 공간이라는 단어로 이어지는 모든 곳을 허용했다. 허나 이제 두 발은 그 어느 곳에서도 땅에 닿은 것 같지가 않다. 그 어느 곳도 자신이 존재한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두리뭉실한 구름 위도 이보다는 견고하지 않을까. 그렇게나 되찾고 싶어 했던 것들인데도. 돌아온 고향과 일상은 그저 자신의 것 같지가 않고 아득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죄를 씻는 여행이 끝나던 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혹시나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 때. 언제, 언제부터…? 어느 순간부터 꿈이었을까. 사실은 알고 있다. 회피하고 싶을 뿐이다. 모든 현실로부터. 전부 악몽이다. 깨어난 순간 사라질 환상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했다. 릭 톰슨은.
잔인한 연인. 그토록 원했고 가지고 싶었다. 사람은 물건이 아니기에 소유한다는 것은 분명 적용할 수 없는 말임은 확실했으나, 릭은 언제나 벨져 홀든을 소망했다. 그의 연인이 되기를 원했고 벨져가 자신을 연인으로 여겨주기를 바랬다. 그 소원은 분명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릭 톰슨은 과거에 분명하게 확신했다. 그와 연인이라는 관계로 엮였던 모든 순간을 기억한다. 이제 와서는 정말로 그러했는지 불분명하지만.
-릭 톰슨.
자신을 부르던 벨져의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한다. 평소에 릭을 부르던 벨져와 조금도 다르지 않던 음성. 딱히 화가 났다거나, 조급하다거나, 아니면 들떠있다거나.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평소와 같았다. 잔혹하게도.
릭은 생각한다. 차라리 그대가 잔뜩 화가 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벨져 홀든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감정에 치우쳐, 그저 되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면. 그랬더라면 이 마음은 이보다 평온했을까?
그리고 바라기를.
그만, 그만하시오. 많이 들었소. 몇 번이고. 갖은 꿈. 머릿속에서 지긋지긋하리만치 반복되는 기억이 쇠사슬마냥 목을 옭아맨다.
벨져는 릭을 책망하지 않는다. 원망하지도 않았다. 미워하지도 않았다. 평소의 어조와 말투 그대로, 담담하게 당연한 사실을 전하듯 그저 입에 담았을 뿐이다.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너를. 너를? 입술이 움직인다. 보아선 안 된다. 악몽이다. 그 뒤로 이어질 말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르는 체 귀를 틀어막았다. 평생에 한 번 들으면 충분할 말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해답을 알려줄 사람은 곁에 없다. 저주 같은 말만이 귓가를 맴돈다.
나는 너를. 너를……단 한 번도.
이빨이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숨이 차다. 버릇처럼 손목을 만지작거린다. 벨져 홀든이 사라졌던 그 날. 함께 깨진 손목시계를 찼던 자리다. 이미 깨지고 움직이지 않던 그것을 손목에서 끄를 수가 없었다. 간신히 그것을 벗어 서랍에 넣은 게 고작 엊그제다. 이젠 모두 털어내야 한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대도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버팀목이었다. 정신을 좀먹는 전쟁을 바닥도 없는 죄책감에 빠진 채 걸어가면서. 메말라가면서도 그와 자신의 관계에 의지해 살 수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이 언제 끝날지 기약은 없었다. 다만 눈앞에 있는 하얀 빛이 밤을 끝내고 자신을 안식으로 인도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벨져는 릭이 원하는 안식을 가져다주었다. 다만, 영원히 잊을 수 없을 저주를 함께 주었다.
모두 거짓이었나? 아니면, 그 말에 다른 의미가 있던 걸까.
끈적한 잠이 몸을 잡아당겼다.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내려앉는 눈꺼풀 사이로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그를 붙들려 했다. 몸이 휘청이다가 쓰러진다. 잠이 든다. 아래로 꺼진 시야에 구둣발의 잔상만이 흐릿하게 남는다. 어느새 이런 걸 준비했소. 아, 그대는 정말 영리해. 정말이지. 증오스러울 만큼.
꿈의 끝은 언제나 같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벨져가 자신을 두고 떠나는 결말. 악몽 속에서 릭은 언제까지고 해답지가 존재하지 않는 문제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벨져 홀든은 릭 톰슨을 사랑했을까? 아니면, 거짓을 연기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다른 진실이 있을까. 그러면서도 확신한다. 벨져 홀든이 릭 톰슨을 사랑했을 것이라는 확신. 그 자신의 입으로 부정에 가까운 선언을 들었으나, 그럼에도 릭은 벨져가 자신을 사랑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허나 그저 확신하고 가슴을 펼 만큼 자신감이 넘치지도 않다. 혼란스럽다.
그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타들어가던 계절은 어느덧 얼어붙는 추위를 데려왔다. 볼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마저도 차게 얼어붙을 즈음이 되어서야 릭은 계절이 이토록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릭은 그때가 되어서 자신이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갈망해 마지않던 결과였다. 다시 평온하게 살 수 있는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얼마나 원했던가. 자신이 외면한 모든 것이 불러온 죄를 씻고, 그저 계속 살아왔던 평범한 삶으로.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수 있기를. 달조차 뜨지 않은 밤에 항상 기도했다. 하지만 밤이 갠 순간.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은 채 떠난 여행에서 원하는 것이 생긴 탓이다. 벨져 홀든은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흔적도 없이. 그가 죽었는지, 아니면 살아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지독한 상실과 공허만이 가득했다. 살아가면서도 우두커니 서있었다. 한참이나.
홀로 떠난 여행의 귀로를 외톨이가 되어 걷는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른다.
한평생 짐을 만들기 싫어 누구와도 거리를 두고 진실을 감췄다. 비밀을 밝히는 순간 자유는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 무엇보다도 자유롭고 싶었다. 그렇기에 언제나 가볍게, 아무것도 들지 않고. 어디든 마음이 가는 곳으로 훌쩍 닿았다. 원하는 때 다시 떠날 수 있도록. 모든 것과 거리를 유지하며 위험하면 손을 떼어버리던 생활. 소중하게 여겼던 것도 한 발짝 더 가까워진 순간 밀어냈다. 손에 넣기는 어려워도 버리는 순간은 아주 간단하다. 릭에게 물리적인 거리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으니까. 단박에 거리를 두고, 멀어지면 모두 끝이다. 단 하루의 인연에 아무런 아쉬움도 없었다. 그렇게 살아온 업보였을까? 한 평생 가장 잡고 싶었던 것을 기어코 손에서 놓치고야 말았다.
멍하니 침대에서 눈을 떴다. 창 밖으로 겨울비가 내리는 소리가 자글자글하다. 날이 싸늘할 것이다.
해는 아직 뜨지 않았다. 어슴푸레한 새벽. 손을 뻗어 머리맡의 시계를 가져다 보았다. 아직 아침까지는 한참 남은 시각이다. 다시 시계를 제자리에 놓고, 손을 뻗어 천장에 제 손을 드리워본다. 방금 전까지 느꼈던 후덥지근한 열기는 온데간데없이 겨울의 찬공기만이 피부에 감긴다.
손을 이마 위로 떨군다. 한숨이 푹 새어나왔다.
“후…….”
숨을 돌린다. 몸을 뒤척여 옆으로 돌렸다. 눈을 감았다.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모든 것이 생생하다.
숨 막히던 장미향. 여름의 열기. 몸에 휘감기던 치적한 비. 새빨간 꽃에 파묻힌 저택. 익숙한 어조로 저를 부르던 한참이나 어린 음성. 익숙한 예리함이 서린 푸른 눈을 있는 힘껏 위로 치켜뜨고, 발돋움을 하고 싶어 했다. 릭의 부드러운 녹색 시선이 자신에게서 떨어지는 걸 용서하지 않았다.
첫눈에 알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청년은 아닌 그 소년이 곧 벨져라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성숙하던 시절의 연인.
그러고 보면 사진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다. 꿈에서 본 바로 그 저택, 홀든의 본가에서. 몇 번 발을 들이지 않았지만 릭은 아직 그 집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산과 숲으로 둘러싸인 저택. 빨간 장미가 화사하게 핀 정원. 벨져와 잠시 그곳을 찾았을 때 그가 집을 나갔을 때 그대로인 벨져의 방에, 어린 시절의 벨져가 찍힌 사진이 있었다. 그 소년은 분명한 벨져 홀든이다.
잊으리라 결심했다. 이제는 완전히 잊어야 한다고 다짐한 건 그만큼 그를 갈망한다는 반증이다. 지금까지도 벨져가 나오는 꿈은 수두룩하게 보아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작 사진에서 본 게 다인 소년 시절의 벨져까지 꿈에서 보다니. 그것도 그렇게나 생생하고 상세하게…….
피식피식 웃음이 자꾸만 샌다. 간만에 이렇게 입가가 올라가는 것 같다.
‘이상한 꿈이군.’
이렇게까지 그를 그리워했나. 쓴웃음이 새어나온다.
사라진 연인이 돌아오지 못하리라 인정하는 데에도 몇 달이 걸렸다. 거기에 덧붙여 억지로라도 그를 잊으려 한 지는 이제 고작 몇 주가 되었을 뿐이다.
철철 넘치는 미련과 후회를 어떻게든 버리려 했다. 미칠 것 같은 감정은 여전히 전신을 짓눌렀지만 릭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벨져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라졌다. 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릭 자신이 세계 곳곳을 찾아 헤매고도 결국 발견하지 못하지 않았나. 더 이상은 단순한 망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자신은 이곳에 남아 숨을 쉬며 살고 있고 살아가야 하고, 벨져는 없다. 아무리 미련을 품어봤자 변하는 건 없다.
벨져 홀든.
끝까지. 마지막까지 알 수 없던 사람. 아직도 그가 냉랭하게 내뱉었던 말을 기억한다.
그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릭은 벨져가 자신을 사랑했다고 여전히 믿는다. 동시에 그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두 가지가 동시에 진실일 수 있을까?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신뢰한 적이 없다.”
항상 차디찬 말만 쏟아뱉던 입이다. 갖은 말에 익숙해져 있던 릭이었다. 하지만 이별의 순간 그가 뱉은 말은 릭의 심장을 꿰뚫어버릴 쐐기가 되고 말았다. 그 말이 진실이었는지 거짓이었는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릭 톰슨이야말로 벨져 홀든을 목격한 마지막 사람이었으므로.
누군가에게 해답을 물어볼까. 그런 고민도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진의를 파악하기에 릭 톰슨과 벨져 홀든의 관계는 너무나 특수했다. 어디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 아니, 할 수는 있을까. 누가 릭의 말을 믿을까. 벨져를 잘 아는 사람일 수록 릭 톰슨과 벨져 홀든의 관계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가능석은 적을 것이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연인이었다고. 그저 그가 너를 가지고 논 건 아니냐. 동정심 가득한 눈초리로 그리 부정하겠지. 릭도 알고 있다. 그와 잠자리를 함께한 사람이야 수두룩하다는 것 정도는. 벨져를 곁에서 보아온 릭이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하지만 장담컨대, 연인이라 할 사람은 자신뿐이었으리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벨져의 입에서 그들의 관계를 비밀에 부치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으나, 릭에게는 비밀이었다.
숨기고 싶은 마음도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서로 반반이었다. 타인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저 고결한 청년이 오직 자신만의 것이라는 구차한 독점욕. 굳이 밝혀서 이목을 끌고 싶지 않다는
예를 들어 그와 절친했던 홀든의 막내라면. 아마 차마 말 못하겠다는 식으로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뭐? 애인? 당신이? 작은형 애인? ……지금이니까 말하는 건데, 거짓말 아냐? 아니아니, 내 말은 그거지, 작은형이 당신한테 거짓말을 한 게 아니냐 하는 거. 작은형은 요 머리가 잘 굴러가니까. 뭐 작은형이 좋은 거 좀 줬을 것 같긴 한데…. 꼴 보아하니 형씨가 작은형 얼굴에 홀려서 헬렐레하니 뒤좀 대줘서 묶어놓고 당신을 좋을 대로 부려먹은 거겠네. 작은형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암 그렇고 말고. 하이고, 불쌍해라……. 힘내셔.”
확실하다. 중간중간 벨져의 혈육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평범하고 풍부한 몸짓을 섞어가며. 감정 넘치는 어조로 동정과 공감을 표할 것이다. 어깨를 툭툭 치고 고개를 숙이고, 한숨도 같이 쉬어주고. 이제 당신도 당신 인생을 살라는 둥. 그런 인사도 해줄 것이다. 릭이 생각하는 그의 작은형과 릭의 관계가 릭 톰슨 혼자 한 착각이라는 전제를 아주 당연하게 깔고.
직접 물어보고 들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단언하느냐. 이전에 벨져와 이글 사이에 가볍게 언쟁이 있던 순간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내가 작은형 취향을 가지고 뭐라 하진 않겠는데 좀 조심하셔? 오죽하면 내 귀에 다 들어오겠어?”
그런 그가 릭의 말을 믿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글도 벨져의 그런 표정은 아마 보지 못했겠지. 이따금 릭이 다른 곳을 바라볼 때면 어김없이 릭을 향하던 시선. 언제나 릭은 벨져를 눈으로 좇았다. 벨져는 이따금 릭을 바라보면서도 제 앞만을 향했다. 그렇게 항상 향하던 시선의 벡터가 아주 잠시 뒤집어지던 순간이다. 빤히 저를 보면서도 어딘가 불만스레 푸른 눈이 가늘어지고, 닫힌 입술이 일자로 꾹 눌렸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릭은 아주 잘 안다.
우습기 그지없었다. 항상 릭의 존재는 어찌 되어도 좋은 듯 고압적으로 행동하면서. 항상 자신을 향하던 두 눈이 잠시 다른 사람을 향한것 만으로 적나라한 불쾌감을 드러내다니. 이런 순간은 흔치 않다.
이따금 벨져는 그런 식으로 릭을 향해 감정을 드러내곤 했다. 다른 이에게 홀렸던 것도 아니다. 그저 길을 가던 아가씨, 아이. 움직이는 물체에 반사적으로 시선이 따라붙는 것처럼 단순하게 눈이 갔을 뿐이다. 고작 그뿐인데. 무엇이 방아쇠가 되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가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본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입가로 옅은 미소가 떠오른다.
“질투했소?”
장난스레 던진 질문에도 벨져는 표정을 바로잡을 생각도 않고 여전히 불쾌한 표정으로 릭을 흘겨본다.
“그러길 원하나?”
“아니. 귀찮은 건 질색이거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어깨를 들어올렸다. 조용히 저를 보는 벨져에게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린다. 절반은 거짓이었다. 질투 같은 귀찮은 감정은 번거롭기 그지없지만, 예외는 있었으므로.
본심을 내보이면 저 청년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까? 우위에 섰다는 우월감에 즐거워할까, 아니면 미치광이를 보는 경멸, 그도 아니면 놀랄까. 어느쪽이건 릭은 벨져와의 줄다리기에서 밀리고싶지 않기에 거기서 말을 끊는다.
‘하지만 그대는 그랬으면 좋겠군. 나를 그렇게 봐줬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을 그 푸른 눈에 담은 것만으로 감정이 격해지고, 그대가 나를 향할 때면 억지로 표정을 풀었다. 사실 벨져는 모두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총명하고 영특한 그이기에. 릭이 급하게 쓴 얄팍한 가면따위는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 해도 이상할 거 없지.
설령 그렇다 해도. 아니 그렇다면 더더욱.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느껴주기를 릭은 원했다.
‘내가 그런 것처럼.’
심장을 조이는 질투도, 목이 타는 갈망도. 전부 다.
출근길에 회사 직원 몇 명과 가볍게 술을 걸치고 나니 제법 밤이 깊었다. 두꺼운 코트 위로 두른 목도리에 얼굴 아랫부분을 있는대로 파묻고 밤길을 걷는다. 겨울의 찬 공기가 술로 후끈해진 피부에 서늘하다. 이따금 북풍이 세게 불어올 때마다 파르르 떨고, 기침을 한 번 했다.
주말을 앞둔 밤거리가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까 그 인원에서도 친하게 지내는 몇 무리는 더 마시러 간다고 했던가. 릭은 그 무리와도 적당히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시간을 함께하지는 않는다. 예전도 지금도.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제대로 취하기 시작하면 사람은 자신이 간직할 비밀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법이니까.
그래도 간만에 괜찮은 술을 입에 대니 은근하게 생각이 계속 맴돈다. 간만에 혼자 한 잔 해볼까. 프랑스에서 한 병 괜찮은 와인을 잡았다. 치즈 같은 안주거리도 조금.
여기에 꽃 한송이를 그럴 듯하게 곁들이면 제법 분위기 있는 밤이 되겠지. 혼자 즐기긴 아까운 밤에 적당히 말을 건네 낭만을 즐기던 때도 있었다. 지금이야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지만.
터덜터덜 인파를 지나 아파트에 도착했다.
계단을 오른다. 사는 층으로 가까워질수록 묘한 향이 짙어진다. 역한 냄새는 아니다. 꽃이나 식물에 가깝다. 이런 추운 계절에 여기까지 향이 짙을 만한 양이라니. 올라가면 갈수록 향은 더욱 확실해지고, 제가 사는 층에 도착했을 즈음 이것이 무슨 냄새인지를 기억해냈다. 꿈에서 지긋지긋하게 보았던, 장미였다.
누가 집에서 프로포즈라도 하나. 아니면 그런 향수라도 엎질렀나. 옆구리에 낀 와인병 안에서 와인이 미세하게 출렁인다. 불빛이 반쯤 꺼진 어두운 복도. 열쇠를 꺼냈다. 발밑으로 무언가가 채였다. 가볍게 짓밟히고도 딱히 이물감은 없어 릭은 깨닫지 못한다.손이 추위에 얼어붙은 탓인지 문을 여는 데에는 평소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을 밀어 연다.
틈이 조금 벌어진 순간 바람이 세게 몰아쳤다. 창문을 열고 나갔던가? 제법 높은 층이다. 설마 도둑이 들었을 리는 없고. 그런 걱정이 잠시 머리를 스치고, 그제야 발에 채이는 자잘한 감촉에 정신이 닿는다. 발밑으로 무언가가 잔뜩 깔려있다. 워낙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어렴풋하게 보이는 바로는 저 앞쪽까지. 발목까지 푹 잠기는 양이다. 한 발 디딜 때마다 짓이겨지고 파스스 사라지는 감촉이 선명했다. 허리를 숙여 한 장을 들고, 보이지도 않는 새카만 밤 속에서 뚫어져라 바라보고 냄새를 맡는다.
“장미…?”
그 냄새가 전부 제 집에서 나왔다니. 그나저나, 대체 무슨 장미란 말인가. 정말 도둑이 들었나. 술기운이 싹 가시고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아직까지 집에 있는 건 아니겠지. 여차하면 들고 있는 와인병으로 도둑의 머리를 내려쳐야 할지도 모른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와인병의 목 부분을 잡고 슬금슬금 현관에서 거실 쪽으로 이동했다. 약간 먼 창문이 건물 아래 가스등의 희미한 빛을 받아 흐릿하게 빛난다. 조용한 집 안에서 다른 이의 기척은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벽에 몸을 붙이고 귀를 기울여도 보았지만 역시 바람소리만 들릴 뿐이다.
기우였을까. 막 내리칠 기세로 들어 올렸던 술병을 다시 아래 쪽으로 늘어트린다. 도둑이 들었건 아니건 지금은 자신뿐이라 확신한다. 잠시나마 막혔던 숨이 트였다.
지독한 냄새에 파묻힌 짧은 복도를 걸어 거실로 나온다. 하얀 달마저도 전부 가려진 밤이기에 역시 창이 크게 뚫린 거실이라도 어둡기는 마찬가지다. 잠시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나마 주변을 둘러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나 하긴. 들고 있던 술병으로 어깨를 툭툭 친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기이한 능력자들이 모인 전쟁까지 참여했으면서 한낱 도둑 걱정이나 하는 신세라니. 벨져가 봤으면 한심하다며 혀를 찼겠지.
발밑으로는 여전히 출처를 알 수 없는 꽃잎이 굴러다닌다. 산뜻하면서도 묘하게 단 냄새가 계속 코를 찌른다. 도둑의 소행이라 하기엔 기묘한데. 그런 생각을 하며 전등을 켰다. 전기가 들어온 등이 지직거리며 깜빡이고, 방을 환하게 비춘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새빨갛게 뒤덮인 바닥이다. 바닥에 깔린 꽃잎은 알고 있었으나 새빨갛게 물든 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맙소사. 중얼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순간에도 빨간 꽃잎이 릭의 발에 짓이겨졌다. 고개를 들어 거실을 둘러본다. 빨간 잎이 비처럼 쏟아진 직후처럼 한가득 흐트러진 공간. 유독 새하얀 것을 발견한다. 숨을 들이켰다. 목이 막힐 정도로 달고 시큼한 향이 폐로 들이친다.
가까이 가야 할까? 아니면. 도망치나? 릭은 이도저도 못한 채로 그저 고개를 가로젓는다. 버릇처럼 깨진 시계를 찼던 손목을 매만졌다. 피부와 그 너머의 뼈만이 만져진다. 시계는 서랍의 어둠에 잠겨 있을 것이다.
숨 막히던 그날. 아지랑이마냥 릭의 눈앞에서 증발했던 청년이다.
새빨간 장미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릭이 아는 누구보다도 고결하고 고상한 사람. 릭 톰슨을 그토록 원하던 일상으로 돌려보내준, 잔혹한 구원자.
결코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던 연인.
마지막까지 그랬고,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전부 잊으려 했다. 그럴 수 없을 것을 알면서. 이미 사라진 자를 어떻게 하겠는가. 벨져는 그날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고 릭에게는 수단이 없었다. 이제 흘려보내야 할 때라 결단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있는 한 나아가야 했으니까.
병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꽃잎들은 모두 가루가 되어 바스라졌다. 유리병이 구르는 소리. 손이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정말 그대라는 사람은 내 소원은 하나도 들어주지 않는군.”
새빨간 장미를 즐기던 청년이었다.
본인은 항상 아니라고 했던가. 잘 어울리는군. 뭐가? 장미 말이오, 당신과 잘 어울려, 좋아하나봐? 아니, 좋아하는 건 아니다. 꽃병에 물을 넣으면서도 벨져는 내키지 않는 듯 고개를 약간 튼다. 말은 그렇게 해도 유독 그 빨간 꽃을 곁에 두었기에 릭은 그의 행동을 더 믿었지만.
릭 톰슨이 곁에서 보아온 벨져 홀든은 자신의 어떤 물건에도 크게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원하는 건 손에 넣으면 된다고 했던가. 동시에 그 가진 물질적인 소유물에 대해서 딱히 별 말이 없긴 했지. 자주 쓰는 찻잔이나 펜 같은 거야 있었다. 그러나 없어지면 다른 걸로 보충하면 그만이라며 없어져도 별로 애석해 하지도 않던 그인데. 유독 빨간 꽃만큼은 시들어갈 때마다 다른 빨간 꽃으로 바꿔두곤 하는 게 아닌가.
꽃을 항상 꽂아두던 크지 않은 꽃병만이 아니다. 설탕과 벌꿀에 절인 새빨간 장미 꽃잎. 그걸 매번 찻잔에 담아 차로 내어주면서 별로 좋아하는 건 아니라니. 이봐, 세간에선 그런 걸 좋아한다고 한다오. 그런 말을 건네봤자 어려서부터 집에서 자주 주던 것이라 익숙할 뿐이라고만 하지, 릭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항상 가볍게라도 부정하며 아니라고 하더니. 돌아올 때도 기어코 새빨간 꽃과 함께 오지 않았나.
아무리 흔들고 치고 불러도 눈을 뜨지 않는 연인을 들어 침대로 옮겼다. 훨씬 가벼워진 몸에 잠시 불안이 앞섰지만 눕혀 놓고 보니 다행히도 숨은 쉬고 있다.
그제야 열려있던 창문을 전부 닫았다. 그토록 넘치던 꽃잎은 어느새 전부 사라지고 없다. 분명히 만지기까지 했던 것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릭에게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까지는 남아있지 않다.
꼬박 하루를 보냈다. 하루종일 피곤한 것도 배가 고픈 것도 잊은 채 가만히 자신의 침대에 눕힌 청년만을 바라보며 있었다. 그러다가 배가 낸 꼬르륵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냉장고에 묵혀두었던 햄버거를 꺼냈다. 식탁에 앉아 다시 열어둔 방문 너머를 응시했다. 지금 입에 들어가는 게 햄버거인지 인간인지 모를 만큼 시선은 못박아둔 채 식사를 이어간다.
정말 벨져일까? 그냥 닮은 사람이 자신을 조롱하고있는 건 아닐까. 그런 의심을 스물넷 가까운 시간 동안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마다 릭은 고개를 저었다. 누가 벨져 홀든 특유의 느낌까지 그대로 닮고, 따라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자신이 그를 착각할 리가 없다. 아마도.
침대 옆에 끌어다 둔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거센 바람에 창이 덜컹거린다.
릭은 몸을 숙여 가까이에서 그 얼굴을 살핀다. 미동은커녕 잠꼬대도 없이 정말 숨만 붙은 채 잠든 청년. 조금 긴가 싶은 하얀 머리카락과 그에 걸맞게 깨끗한 피부. 단정이나 정갈이라는 단어는 이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있을 것이다.
벨져가 사라진 이래로 마냥 짧지만은 않은 시간이 흘렀다. 하루하루가 천년만년 같기도 했고, 때로는 잔인하리만치 빠르게 흐른다는 생각도 했다. 침대 위의 연인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릭이 가진 기억 그대로. 쓰러져 잠든 릭 톰슨을 두고 떠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입고있는 옷마저도-.
결론을 내린다. 릭이 알던 벨져 홀든이 분명했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덜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러니까.
이대로 지내도 괜찮지않을까.
잔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어차피 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이렇게 품에 두고 놓지 않는 것도 방법일지 모른다. 설령 그 차갑고 시린, 푸른 두 눈을 다신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어디로도, 누구에게도 가지 않고 곁에 있어준다면.
딱히 그가 눈을 뜨지 않아도 괜찮다. 이렇게 앞에 나타나준 것만 해도 기적이 아니던가. 그렇게 자위하면서도 다시 그 음성을 듣고 시리도록 푸른 눈으로 저를 보고 싶다며 갈망한다. 동시에 그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워 눈을 뜨지 않기를 빌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가 잠이 든 채 죽어버리는건 아닐까 악몽을 꾼다.
그대는 어느 때도 나를 괴롭게 하는군.
검을 들고 앞을 걷던 시절도, 증발하듯 사라지고 나를 홀로 남겨뒀을 때에도, 다시 나타난 지금도.
벨져 홀든의 존재는 항상 릭을 고뇌에 빠트린다. 그리고 릭을 번뇌와 고민에서 구원한다. 벨져를 탓할 수는 없었다. 그를 향한 고뇌는 릭이 벨져 홀든을 가지기를 원했기에 고통받고 괴로워 하는 거였으니까. 그를 탓할 순 없다. 벨져는 언제나 릭의 구세주였고 구원자였다. 다른 누구도 벨져를 대신할 수 없다. 벨져만이 오직 유일한.
다음 날도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정신이 깨어나자마자 열린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요란하다. 비몽사몽간에 창 너머를 먼저 보았다. 빗줄기는 어제보다 더욱 세진 모양이었다. 세상이 떨어지는 빗줄기로 새하얗다.
평소보다 늦은 시각이다. 푹 잤는데도 몸이 무겁다.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이런 적은 처음이다. 원인은 역시 뻔하다. 미숙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소파를 노려보고, 텅텅 빈 소파에 잠이 완전히 달아난다.
릭. 이라고 혀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등 뒤로부터 뻗어온 차가운 무언가가 뺨에 닿아 반사적으로 팔을 휘두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손에 닿는 인간의 감촉. 팔뚝을 세게 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상대를 확인한다. 벨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 라고 하면 지는 것 같아 다시 입을 닫는다.
세게 얻어맞은 릭이 고통으로 덜덜 떨고 있었다. 함께 몸 쪽으로 쪼그라든 다른쪽 팔. 그 손에 들린 젖은 꽃송이가 부들부들 흔들린다. 릭이 덜덜 떨며 중얼거린다.
“일…어났군.”
다행이라면 다행인지. 장미를 들고 있는 손은 얻어맞지 않은 쪽이다. 이거 받으시오…. 고통을 간신히 참으며 중얼거리는 릭에게서 꽃을 건네받았다.
빗물에 젖은 새빨간 장미꽃 한 송이. 투명한 빗방울이 촉촉하게 떨어져 침대시트에 스며든다. 장미? 정원에 널린 게 장미기야 하지만. 의아한 눈으로 릭을 바라보니, 대답이 돌아온다.
“창문을 여니 정원 장미들이 탐스럽길래. 그대가 좋아할까 싶어 하나 따봤소.”
“따러 나갔다 왔다고?”
“다루기 힘든 천방지축 아가씨긴 해도 그 정도 거리야 식은 죽 먹기지. 순식간에 다녀왔으니 걱정 마시오. 들키지 않게 조심하니까. 여긴 사람이 별로 없더군?”
간이 큰 남자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라 했는데. 벨져가 함께라면야 확실하게 사람이 없는 곳이나 시간대를 파악해서 갈 수 있다. 허나 그렇게 이 저택에 발을 들인 게 고작 어젯밤이고. 아무리 인기척이 얼마 없는 저택이기는 하지만. 이 남자에게는 미지의 공간이 아니던가. 무엇을 믿고 당당하게 돌아다녔는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능력. 그 제어가 힘들다던 그걸 믿고?
정말 알 수 없는 남자군. 젖은 꽃을 보며 그저 혀를 찼다.
장미. 정원에 잔뜩 피어있으니 익숙하기야 하다. 싫지는 않다. 딱히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게 그렇게 좋을까. 벨져는 릭이 장미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장미와 눈앞의 남자. 달콤한 말을 뱉고 다정하게 손을 뻗는 부드러운 녹색. 그럭저럭 잘 맞는 한 쌍일지도 모른다.
꽃은 꽃병에 꽂아두고, 식사를 가져왔다. 어머, 작은 도련님. 여기 준비해두었어요, 막내 도련님이 방금 밖에서 드신다고 하시던데 작은 도련님도…아, 오늘은 방에서 드시려구요? 하긴, 비가 말이 아니네요, 이런 날은 나가지 않는 게 좋죠. 딱히 대꾸를 하지 않아도 몇 없는 하녀들은 조잘조잘 붙임성이 좋다. 어차피 다른 가족들도 알아서 식사를 하고 있을 시간이다. 부엌을 나와서부터는 다시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방에 도착했다.
창 밖으로는 여전히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온다. 이런 날씨에 밖에 나가서 먹는다니. 벨져는 하녀들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워낙에 괴짜 같은 막내다. 이글은 이렇게 비가 오니까 밖에 나가서 먹겠다고 한 거겠지. 첫째 다이무스는 창가에서 궁상맞게 하늘이나 보며 차를 마시고 있을 거고.
비가 이렇게까지 내리면 일정이 전부 바뀔 수밖에 없다.
매일같이 하던 검 훈련이 금지되어버리니까. 검술이 빠지면 순식간에 할 일이 사라진다. 벨져가 아직 장난감 칼조차 쥐지 못했던 시절에는 비가 심하게 와도 하고 싶으면 나가서 휘둘렀다던가. 그것도 그 어린 시절 집에 있던 일 탓에 몰아치는 날에 밖에서 하는 검술 연습은 금지하는 걸로 바뀌었기에 다 의미 없는 일이다.
방에서 책을 뒤적이는 벨져를 릭이 가만 바라본다. 뭐가 그리도 재미난지. 벨져도 간간이 흘끗흘끗 저를 보는 시선을 받아치다가, 뒤로 돌아 입을 열었다.
“고용인들에겐 들어오지 말라고 했으니까 편하게 있어.”
남자는 충분히 편하게 있다. 그러니까, 자꾸 쳐다 보지 말고 적당히 방을 둘러보든 뒹굴든 책을 읽든 하라는 뜻이다. 대답이야 바로바로 나왔다. 음. 알겠소. 워낙 표정도 음성도 건성이라 듣기는 한 걸까 했는데. 역시나 하는 짓은 같다.
남의 시선 따위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다만 저 남자는 예외였다. 묘하게 계속 신경이 쓰이도록 행동한다. 릭이 가진 무언가가 벨져를 그렇게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참다못해 책을 덮었다. 큰 소리는 내지 못하는 게 벨져의 몸에 밴 품위라는 무언가다. 몸을 완전히 돌려 릭 쪽을 향해 앉았다. 릭은 여전히 멀뚱멀뚱 벨져를 본다.
“왜.”
“뭘 하나 싶어서.”
“숙제. 내일 가정교사가 와.”
“아직 아침인데? 이런 시간부터? 기특하군.”
딱히 손에 잡히는 게 없으니 미리 처리할 뿐이다. 릭이 자신을 단순히 아이처럼 칭찬하는 것같아서 괜히 기분이 나쁘다.
조금 토라져있으니 릭이 곁으로 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옆에 놓인 작은 의자에 허리를 내린다. 머리에 닿는 감촉이 편안하다. 그러면서도 역시 아이취급하는 것같아 불쾌했다. 몸을 다시 돌려 책상과 마주한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어깨로 올라왔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 벨져에게 릭이 묻는다.
“오늘은 검술 연습은 하지 않는 거요?”
벨져가 손으로 창가를 가리킨다. 쏟아지는 폭우에 밖이 하얗다.
“이 날씨에 야외 검술 연습은 금지다. 집안 규칙이야.”
“조금 내릴 땐 하고?”
“당연하지. 비가 온다고 검을 휘두를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전에는 이런 날에도 원하면 나가서 휘둘렀다던데…지금은 못 하게 되어있어.”
“그대는 하고 싶은가 보군.”
“하고 싶고 싫고가 아니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어떻소, 좋은 생각인거지.”
릭이 싱글싱글 웃는 모습이 보지 않아도 훤하다. 고개를 홱 돌려 웃는 얼굴을 노려본다.
“쓸데없는 말 그만 해. 애취급은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애 취급이라니, 말이 심하잖아. 그런 적 없소.”
“지금 나를 조롱하는 건가?”
얼굴을 찡그리는 벨져에게 릭이 어깨를 으쓱한다. 한숨을 푹 쉬고, 머리를 긁었다.
“내가 당신을 그래…젖비린내 나는 어린애로 보고있지는 않아, 하지만 그런 거에 집착하는 건 당신답지 못한 것 같군. 그러니까,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뜻이지.”
대꾸할 말이 없다. ‘어른스럽지’ 못한 반응인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은 벨져를 이런 식으로 대하지 않는다. 릭 톰슨만이 자신을 이렇게 대했고, 릭 톰슨이기에 과하게 반응하게 된다.
입을 다물어버린 벨져에 비해 릭은 여전히 여유롭다. 커다란 손이 정수리에서 뒷통수까지를 걸쳐 쓰다듬는다. 그만해. 거절하려던 순간, 릭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바싹 치켜들어야 했다.
“그렇게 어른이 되고 싶으면, 되면 되잖소.”
“누가 그런 말을…….”
“그대가 계속 그러고 있잖아? 빨리 자라고 싶다고.”
릭이 몸을 숙인다. 얼굴이 바로 앞으로 다가온다. 그에 맞춰 억지로 치켜들었던 시선이 조금씩 내려왔다. 정면에서 멈추고, 잠시 그대로 있다가. 코끝이 닿았다. 맑은 녹색에 눈을 빼앗긴다.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안했어. 대꾸하려던 말이 목 너머로 사라졌다. 코끝이 살짝 엇갈린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동시에 입술에 숨결을 느낀다. 차마 밀쳐낼 새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입술 위로 입술이 겹쳐지고 뒤이어 젖은 혀가 그 위를 핥는다.
입술이 몇 번이나 닿았다 떨어졌다. 꾹 다물었던 입술도 혀끝이 사이를 비집는 순간 어이없이 열린다. 어느새 허리에 감긴 팔이 몸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숨을 쉴 수가 없다.
키스는 어느 순간 끝나고, 몸이 간단하게 남자의 손에 들렸다. 상자를 정면으로 안듯이 들린 채 소파에 놓인다. 벨져는 뒤를 팔로 짚어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제 것보다 큰 손이 이끄는대로 천천히 등부터 머리까지. 소파에 전부 놓인다. 그 위로 릭이 덮어씌우듯 올라탔다. 미성숙한 몸은 남자의 그림자에 쏙 담긴다.
의도는 일목요연하다. 순진한 아가씨처럼 무슨 짓이냐는 말은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아니. 담을 생각조차 없다고 이제는 인정해야 할까?
R19/.문고판/226P
표지 오타냈는데 애교로 넘어가주십셔
17000원
다무벨져 재록본(15년도에 냈던 4권+추가원고 12페이지)
15년도에 냈던 다무벨져 네권
유년기의 겨울 [SAMPLE]
겨울숲의 종언 [SAMPLE]
만찬의 순서 [SAMPLE]
그림자에 묻어둔 풍경 [SAMPLE] [R19_SAMPLE]
에
스칼렛 시네마(추가원고 12P)
가 더 들어가있습니다.
전부 성인향.
전부 빨간책이고...스칼렛시네마...는 짧아서 샘플까진 뭐하네여 일단 개그입니다
잠드는 숲
R19|B6|40P전후(카피본)
표지: 기미님(@89880CP)
릭벨. 원작기반.
홀든의 둘째 벨져는 성격이 고약하기로 이름이 자자하다.
가문에서도 조금 골을 썩던 도중. 축제를 앞둔 벨져의 앞에 가정교사라는 한 남자가 나타나는데....
첫부분 생략되어있습니다.
폭풍우가 시끄럽게 몰아치는 밤이다.
첫째 다이무스는 집안일로 멀리 나갔다. 막내 이글은 한창 꿈나라에 있을 것이다. 집에 남아 아직까지 깨어있던 둘째 벨져만이 아버지에게 불리고, 아버지의 부름에 답해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카만 새벽. 우르릉 쾅쾅 하늘이 부서질 듯 큰 소리가 울린다. 쩌렁쩌렁 이어지는 천둥 사이사이로 번뜩이는 번개가 매섭게 눈을 찔렀다. 순간 하얗게 바래고 검게 돌아오는 시야가 흐리멍덩하다.
걸음과 함께 손에 든 등불이 일렁인다. 벨져를 부른 시종은 어딜 그리 빠르게 사라졌는지, 복도의 끝과 끝으로 보이는 건 오직 가운데에 선 제 몸뚱이뿐이다.
무릎 아래로 흔들리는 잠옷 끝자락. 부드러운 옷감이 살갗을 한없이 스쳤다. 계단 아래쪽에서 하녀가 손짓한다. 도련님, 빨리요, 주인님께서 기다리셔요. 걸음을 재촉했다. 반 층 위에서 발을 멈춘다. 현관을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현관문은 아직 열려있다. 빗방울이 거센 바람에 문가로 들이쳤다. 천둥이 친다. 커다란 문밖이 한순간에 밝아지고, 문 앞에 선 새카만 윤곽이 보였다. 순간 동화나 소설에 나올법한 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자세히 보니 인간의 형상이었다. 정확하게는 인간과 옆에 놓인 커다란 여행 가방. 가방은 남자의 허리에 닿을 정도로 크다.
밝지는 않지만 어둡지도 않은 현관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어른이다. 어깨부터 아래는 푹 젖었는데 길지 않은 머리는 물기 하나 없이 보드랍게 마른, 아마도 말랐을 꼴이 이상하다. 물기 가득한 코트 아래로 물방울이 툭툭 떨어져 카펫을 적셨다. 발밑으로 검은 얼룩이 퍼진다.
남자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벨져는 계단 위에서 난간을 잡고 둘의 모습을 가만 바라본다. 기척을 내기 전에 남자의 두 눈이 먼저 벨져를 향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녹색. 묘한 안광을 느끼는 시선과는 대조적으로 부드러운 미소는 많은 사람이 좋은 느낌을 받을 법한 인상이다. 남자가 손을 흔든다. 아직 다 크지 않은 손이 난간을 꾹 쥐었다.
커다란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힌다. 두 고용인이 남자의 젖은 코트를 받아들고 뒷걸음질 쳐 사라졌다. 그제야 입구의 조명이 밝게 켜졌다. 무난한 갈색은 역시 젖은 기색 하나 없이 보드랍게만 보인다.
“전해 들은 것 보다 훨씬 굉장한 저택이군요.”
자잘자잘한 빗소리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맑게 닿는다. 젖은 공기에 숨이 약간 답답했다. 문이 닫혔다. 조용해진 현관에서 녹색 눈이 다시 계단 위를 향한다. 벨져는 눈을 깜빡였다.
“저 아이입니까?”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군요.”
별거 아닌 대답이 이어졌다. 남자가 손사래를 친다.
“아, 별거 아닙니다. 들은 것보다 훨씬 귀여워서요.”
그러는 동안에도 남자는 흘끗흘끗 시선을 옆, 위로 들어 벨져를 기웃거렸다. 인상 좋은 표정에 얼굴, 분위기. 누구도 이 남자에게 위험하다거나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었으나 벨져는 자신을 자꾸만 바라보는 저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아무리 아버지의 손님이라 하더라도 제대로 된 소개도 없이. 훔쳐보듯 향하는 시선. 뭐에 관심이 있길래. 외모에서 오는 호기심? 아니면.
아니면, 그런 건가?
다시금 집주인을 향하는 옆모습을 살핀다. ‘그런 눈빛’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허물없고 부드러운. 사람을 편안하게 할 줄 아는 눈빛. 속내까지는 알 수 없으나 저 남자는 아마 그런 쪽으로 재주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기에 벨져는 남자를 다른 사람을 대할 때보다 조금 더 경계했다. 적나라하게 제 욕망을 드러내는 편이 다루기 쉽다. 원하는 바를 숨길 줄 아는 사람은 위험하다.
계단 위에서 조금 큰 목소리로 아버지를 부른다. 나이든 눈이 벨져를 향하고, 그것을 신호로 말을 잇는다.
“그분은 누구시죠.”
고개는 곧게 든 채. 시선만 약간 내리고. 남자를 직시한다. 남자가 생긋 웃었다. 눈을 찌푸린다.
누구시죠라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벨져가 예상했던 것과는 약간 다른 것이었다. 아버지의 친구, 혹은 가문의 손님, 아니면 업무적인 문제로 방문한 사람. 이런 한밤중에 폭풍우를 뚫고 올 만한 건 그 정도라 예상했건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생님?”
저도 모르게 말꼬리가 올라갔다. 남자는 아버지의 옆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든다.
며칠 전 가정교사 하나가 일을 그만둔 참이다. 세 형제를 감당하지 못하겠다며 저택을 뛰쳐나가던 뒷모습은 아직 기억에 생생했다. 딱히 언행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가르쳐주는 것이 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을 뿐이다. 배울 건 없을 테니 가정교사는 이제 됐다고 했던 건 다름 아닌 아버지였을 텐데.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검술? 검술 교사를 외부인에게 맡길 리는 없다.
흐음. 내심 혀를 차며 멀리 있는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바깥에서 커다랗게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무가 쓰러진 모양이다.
낮은 목소리가 전하는 대답에 벨져는 눈을 찌푸린다.
“선생님, 이라구요?”
찌푸려진 눈 그대로 남자를 본다. 남자는 여전히 생글생글 미소를 거두지 않는다.
“그렇소. 같은 집,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숨 쉬면서, 그대의 일거수일투족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왔어. 가볍게 한 달 정도? 함께 할거고.”
남자가 계단을 오른다. 하나, 둘, 셋, 넷.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진다. 네다섯 개의 계단이 남은 시점에서 눈높이가 같아졌다.
“…당신이?”
“물론 같은 방까지 쓰게 해달라고는 하지 않아. 사생활은 중요하니까 말이오. 옆 방이면 충분해.”
“아버지.”
뻔뻔한 남자의 말에 벨져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계단 아래에 있는 아버지를 바라본다.
나이든 얼굴이 천천히 좌우로 움직인다. 난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입술을 깨문다.
시종들이 남자가 현관에 둔 커다란 짐을 들고 뒤를 따른다. 나무로 된 커다란 여행 가방이었다. 어린아이 하나 정도는 가뿐히 들어갈 만한 크기다. 부피가 꽤 있는 탓에 계단을 오르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그걸 들어야 했다. 계단에 부딪힐 때마다 달그락 소리가 났다. 뭐가 들었나 궁금하오? 남자의 말에 다시 고개를 홱 돌려 정면을 보았다.
층을 하나 더 올라 왼쪽 복도로. 덜컹거리는 창문이 요란하다.
하녀가 이쪽입니다, 라며 문을 연 건 벨져의 방에 도착하기 직전에 있는 바로 옆방이었다.
벨져는 몸을 반쯤 돌려 뒤를 보았다. 남자는 정말로 벨져의 방 바로 옆에 자리를 잡게 된 모양이다. 문을 잡은 하녀의 옆. 열린 문을 사이로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때, 남자가 얼굴을 옆으로 내밀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알게 된 지 고작 몇십분도 되지 않은 사이에 이렇게 아는 척이라니. 신경 거슬리는 족속이 아닐 수 없다. 본체만체. 무시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잠근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침대에 다가가 몸을 던졌다. 짜증 나기 그지없는 밤이다.
집에 손님이 온다던 말도 없었고 선생이 온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덕분에 슬슬 잠자리에 들까 하던 찰나 졸린 눈을 비벼가며 배불뚝이의 시중을 들지를 않나, 도중에 불러낸 거에 나가서 내키지도 않는 인사를 해야 하질 않나. 무엇하나 벨져의 의사가 포함된 건 없었다.
베개에 얼굴을 누인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귀를 기울인다. 방의 사면은 두껍지 않은 벽이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걸 봐선 남자도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바로 옆은 본래 중요한 손님이 하룻밤 머물고 가는 손님용 방이다.
집에 널린 빈방들 중에서도 제법 갖춰져 있다고 해야 할까. 나름대로 값이 나가는 침대와 옷장과 탁자가 구비된. 결코 가정교사가 쓸 방은 아니었다. 가정교사는……그러고 보니 숙식까지 하면서 머물던 가정교사가 있던가? 유모였던 한나는 방을 하나 받았었지만 그 이후로 숙식까지 저택에서 해결하던 가정교사는 없었으니 비교할 대상이 없다.
어쩐지. 그러고 보니 아까 방으로 찾아온 손님은 한참 먼 곳의 방을 받았다고 했다. 그 방이 뻔히 비어있는데도. 별거 아닌 노인이니 그런 방이나 받았겠지. 그리 생각했으나 원인은 다른 모양이었다.
이미 잔뜩 구겨져 발밑에 뭉쳐있던 이불을 잡아 뒤집어쓴다.
한여름인데도 비가 잔뜩 내리는 탓인지 밤이 쌀쌀하다. 몸은 피곤하지만 잠에 푹 빠지기엔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째깍 이는 시곗바늘, 창밖의 폭풍우. 모두가 거슬리게만 느껴질 즈음. 누군가 문을 작게 두드렸다.
똑똑.
잠든 척을 하며 무시한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그 사이에도 잠시 간격을 두고 노크가 이어졌다. 똑똑. 똑똑. 눈을 감는다. 누가 저 밖에서 문을 두드렸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다. 얼마 안 가 밖이 조용해졌다.
갔나? 눈을 뜨고 살며시 몸을 일으킨 찰나. 문고리가 달칵거렸다. 눈치채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눈을 꾹 감은 노력은 귓가로 들린 말에 물거품이 된다.
“일어나 있으면서 왜 대답이 없소?”
카펫이 짓이겨지는 미세한 소리마저 귓가에 닿는다. 몇 걸음 뗀 다음 멈췄다. 대신에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듯 달칵달칵한다. 흐음. 콧소리. 벨져는 싫은 내색을 감출 생각도 않고 몸을 일으킨다.
“정리는 잘 되어있군.”
“멋대로 들어와서 하는 말이 그건가? 문은 분명 잠갔는데 어떻게 들어왔지.”
뒷쪽. 닫힌 문 쪽으로 시선을 던진다. 확실하게 걸어 잠근 기억이 난다. 벨져가 가지는 의문에 남자가 웃으며 손가락 끝으로 익숙한 것을 뱅글뱅글 돌렸다.
“아, 열쇠라면 아까 받았소. 그대가 배워야 할 게 아주 많다고 들었어.”
몸을 돌려 침대 아래쪽으로 다리를 늘어트린다. 고개를 내렸다가, 들었다. 눈썹이 씰룩인다.
“내가?”
“보시오, 지금도.”
남자의 손이 천천히 들린다. 검지 끝이 벨져를 가리켰다. 삿대질이라니 무례하군. 불쾌함이 더욱 끓어오른다. 싱글싱글 웃는 낯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다른 손을 허리에 짚고, 고개를 저을 뿐이다.
“너무 드세잖아. 이래서야 귀여운 맛이 부족하지. 예쁘장한 얼굴이 아깝지 않소? 예의만 적당히 지키면 훨씬 귀여움받을 수 있어.”
무례한 발언과 함께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온다. 푸른 눈을 잔뜩 치켜떠 시선을 받아쳤다. 남자의 얼굴이 높다.
“뭘 가르쳐주러 온 지는 모르겠지만……. 네 교습 따윈 필요 없을 만큼 내 발밑에 엎드리는 사람은 널렸으니 신경 쓰지 마.”
“그럴 순 없어. 나를 고용한 건 당신 집안이거든. 예절과 인성을 잊지 않게 잘 알려줬으면 한다더군. 아, 아직 통성명을 안 했나. 릭 톰슨, 이오. 미국에서 왔고, 그대 이름은 알고 있어. 벨져 홀든이지?”
허리를 숙이는 남자를 있는 힘껏 밀어냈다. 남자가 뒤로 엉덩방아를 찐다. 그리고 멋쩍게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달래는 몸짓을 취했다.
“진정하시오. 지금 당장은 하지 않을 거요. 교양있는 아이라면 밤에는 얌전히 이불을 덮고 잠을 자야지. 이런, 벌써 세 시가 지났잖아. 이 시간까지 깨어있다니. 어서 자도록 해.”
헤실헤실 웃는 저 얼굴. 벨져는 가만히 얼굴을 본다. 남자는 벨져가 경계하는 걸 알고도 모른 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장난스레 말한다.
“예로부터 잠을 안 자는 못된 아이는 괴물이 꿀꺽 잡아먹는다지 않소. 단숨에 잡아먹히기 전에 잠자리에 들어야지. 그러면, 좋은 밤 되시오.”
릭 톰슨이 방을 나섰다. 벨져는 릭이 나선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괴물. 괴물따윈 검을 들고 베어버리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릭이야말로 괴물이라는 말을 어떻게 입을 담을 생각을 했을까. 그저 우습게만 느껴진다. 괴물로서 초대받은 사람의 입에서 괴물이라니.
하얀 경전
R19|100P|문고|소설
릭벨. 궤도순례에서 이단고해로 이어지는 합본. 각자 일단 따로 냈던거라 40P정도 추가분량이 있습니다.
폐허가 된 수도원에서 어깨를 꿰뚫렸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세상의 이면이었다. 어렴풋이 눈치채고도 모르는 체했던 업보인 걸까? 릭은 더이상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 어깨를 짓누르듯 붙잡으며 눈을 깜빡였다. 피를 흘린 탓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 뒤는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에 남은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고. 하얀 이불 위에 놓인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금속에 꿰뚫렸던 어깨에는 뻐근함이 남아있지만 큰 통증은 없었다. 손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움직인다. 이곳저곳에 스며든 약물 냄새. 철로 된 침대의 프레임. 병실 침대에 앉은 자신을 다시 확인하고 나서야 곁에 있는 사람을 알았다. 청년에게 눈을 돌린다.
무거운 빛을 등지고, 양팔을 교차한 채로. 녹색 눈이 깜빡이며 역광에 타들어가는 청년을 응시했다. 크지 않은 창틀은 십자가를 짊어진 마냥 그림자를 덧그린다. 하얀 이불 위로 그려지는 새카만 윤곽은 그야말로 하염없이 기다리던 구세주의 형상이 분명했다. 숨이 막힌다.
잠이 든 걸까. 릭이 기억하는 시린 눈은 눈꺼풀에 가려진 채 보일 줄을 모른다.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푸른 눈동자가 매섭게 번뜩였다. 지옥의 불꽃보다 뜨겁고 극지방의 얼음보다도 차가운. 그의 검 끝만큼이나 예리한. 티 없는 순백. 누구보다도 완벽할 존재. 숨이 막힐 정도로 견고한 그에서 릭은 눈을 떼지 못한다.
푸른 눈이 감기고 뜨이기를 반복한다. 눈이 마주쳤다.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린다.
“정신이 들었나?”
음성이 귓가로 울렸다. 나는 지금 무슨 말을 들었지? 릭 톰슨은 자신이 들은 얼마 되지 않은 단어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눈이 깜빡이지도 못한 채 그저 빛을 등진 그를 바라볼 뿐. 바라보는 벨져가 자신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조차 인지할 수 없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몸만이 아니라 눈도, 귀도, 머리도. 다 먹고 남겨진 통조림 캔마냥 텅 비어버렸다. 그야말로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제삼자처럼 자신을 바라본다. 정신 차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니지. 생각을 하고는 있나? 사고가 불가능하다. 그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받아들일 수밖에.
먼 옛날의 예언자가 이러했을까. 릭에게 조물주와 교감하는 능력 같은 것은 없었으나 지금 이 짧은 순간 릭은 그 기분을 알 수 있었다. 한눈에. 릭 톰슨이 아니었다면 알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오로지 릭이기에. 릭 톰슨이기에 벨져 홀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릭 톰슨, 듣고 있나?”
벨져의 음성이 릭을 부르고 그제야 릭은 그를 멀쩡한 정신으로 바라본다. 눈앞에 있는 청년. 푸른색의 맑은 빛.
목이 바싹 타들어 갔다.
길을 잃은 릭 톰슨이 애타게 기다려왔던 존재임이 분명했다. 릭이 찾던 사람. 아니 간절하게 원했던 사람. 자신이 저지를 죄악을 깨달은 순간부터. 죄를 사하고 낙원으로 데려가 줄 유일한.
이를테면. 신과 같을.
1.
그의 기사를 향한 마음은 마치 종교와도 같다.
어떠한 논리나 이성조차 통하지 않는 굳은 신념과 그를 지침으로 한 일련의 행동.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절대적인 진리. 그 뿌리가 되는 무언가를 사람은 종교라 한다. 그렇다면 벨져는 그 누구보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벨져 홀든이 종교? 감상을 쓸데없는 것이라 치부하는 차가운 청년에게 이 어찌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으며 코웃음 치겠지. 그 녀석이 신을 믿는다고? 헛소리를, 자기가 신이라고 할 녀석이야. 하지만 릭 톰슨이 확신하건대 벨져 홀든은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신도였다. 눈앞의 살아있는 인간을 신으로 모시는.
의자에 앉은 장년의 기사는 말이 없다. 눈을 감고 미동도 않는 몸. 멀리서 보기엔 얕은 호흡과 함께 천천히 움직이는 어깨만이 그가 살아있다는 증표와도 같았다.
저 주름진 두 뺨에 가져다 댄 손은 온기를 느끼고 있을까. 자신의 신을 접하는 청년은 그 어떤 때보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신체를 모신다. 선혈이 묻은 제 검을 닦을 때보다 섬세하게 피부를 짚어나간다. 몸을 감싸는 검고 긴 코트. 순결한 베일같이 하얗게 떨어지는 머리카락. 그 모습이 마치 저의 신을 떠받드는 사제와도 같다.
릭 톰슨은 제레온 프리츠를 섬기지 않았으므로 따지자면 이교도라고 해야 할까. 릭은 어디까지나 단순히 지켜보는 입장이 되어 벽에 몸을 기댄다. 다른 신도 없이 신과 사제만으로 이루어지는 조용한 미사를 지켜본다.
두 사람의 이마가 맞닿는다. 기도를 읊조리는 달콤한 음성은 입구 근처의 이교도에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두 귀를 기울이고 어두운 방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손등, 볼, 이마. 순서대로 붉은 입술이 몇 번이나 닿았다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작게 내밀어 진 빨간 혀가 신의 마른 입술을 핥았다. 여운을 아쉬워하듯 몇 번이나 입맞춤을 반복한다.
어둠이 내린 방에 보슬거리는 빗소리가 울린다. 하얀 손을 가리는 검은 장갑이 주름진 손을 감싸 쥐었다. 잘 되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제레온 경. 릭은 간신히 귀에 닿은 목소리의 파편을 주워 담으려 신경을 곤두세운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을 달콤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를 쿡쿡 찌른다. 그대의 성대가 그런 음성을 만들 수 있었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청년은 그 뒤로도 기사에게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지켜보는 이의 심리는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벨져, 그러다가 제레온 경의 입술이 닳겠소? 아니 아니지. 휴~ 거기 도련님, 기사분이 그렇게 사랑스러운가봐? 그랬다가는 칼끝이 제 얼굴을 향할 거다. 장난은 그만둬, 그럴 심정이 아니라는 건 네가 잘 알 텐데. 그런 말과 함께. 물론 그 짜증스러운 표정도 좋지만…. 아니. 지금 자신의 불편한 심기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어떤 말도 벨져의 제레온을 향한 충의를 누를 수 없다는 것을, 릭 톰슨은 안다. 자신이 아닌 그의 신에게 입을 맞추는 그가 이 세상 것이 아닌 마냥 아름답다는 것도. 어쩌면 자신과 사랑을 나누는 순간보다 더욱.
신을 향한 기도가 끝나고. 사제는 몸을 돌려 이교도를 향한다.
릭 톰슨이 잠에서 깨는 순간이다. 푸른 빛이 릭을 향한다. 반사적으로 박수라도 치려 들린 손을 멋쩍게 내리고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는다.
“끝났소?”
“기다리게 했군.”
다가온 그에게 답하듯 등 뒤로 손을 뻗어 문을 연다. 벨져를 먼저 내보내고 뒤이어 문을 나섰다. 축축한 습기. 복도와 방은 별다름 없을 터인데 호흡이 탁 트인다.
길게 늘어진 복도는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로 가득하다. 다른 이는 보이지 않았다. 고용인의 대부분을 잃은 저택에 남은 이는 두 손으로 꼽을 정도가 아닐까. 황량한 저택이 얼마 되지 않는 고용인과 제레온 프리츠의 유품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음을 릭은 안다. 눈앞의 벨져 홀든 또한 그 유품 중 하나라는 사실도.
미처 닦이지 못한 유리창이 빗물로 얼룩진다. 번개로 번뜩이는 창을 등지고 선 벨져는 마치 홀로 다른 공간의 사람인 것 같았다. 마주한 푸른 눈이 릭의 속을 꿰어본다. 릭이 원하는 대로. 검은 코트를 두른 두 팔이 들어 올려진다. 이리로, 네가 원하는 곳으로. 계시가 릭을 이끈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다가가 젖은 몸을 끌어안았다.
아직 비가 마르지 않은 그에게서는 아까와는 다른 향이 난다. 오래 방치된 폐허에서 날 법한 묘한 먼지나 곰팡이의 냄새 같은. 벨져 홀든이 이렇게 타인의 향에 무력하다는 것을 릭은 얼마 전에야 처음으로 알았다. 릭이 아는 벨져는 그 어디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의 모든 것은 굳건하게 유지될 것이었으므로. 지금 그의 몸에서 풍기는 오래된 골동품의 향이, 벨져의 것이 아닌 모든 흔적이 그저 어색하다. 은은하게 묻어나는 축축한 광기가 벨져가 그의 정신 나간 신에게서 옮은 것인지 아니면 벨져 자신의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 하얀 볼에 입을 맞추고, 입술에 키스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신을 받아들이던 연인의 입술에 제 것을 덧씌운다. 릭은 신의 흔적을 지울 필요가 있었다. 연인으로부터. 미사를 마친 연인을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되돌리기 위해…. 아니.
정말 그런 건가?
정말 그것만을 위해? 다시 한번 생각한다. 질투. 릭 톰슨은 지금 자신의 감정이 질투가 아닐까 추측한다. 몇 초전까지 확신이었던 추측은 순간적으로 품은 의문에 추측으로 바뀌었다. 메스꺼움을 동반하는 이 불쾌한 감정은 질투일 것이라 생각했다. 연인이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입을 맞추는 순간이 어찌 마음에 들겠는가. 마음을 주고받은 관계로서 마땅히 느낄 분노 섞인 울렁임. 벨져에게 입을 맞추는 릭 톰슨 자신의 바닥에는 분명 그러한 것들이 깔려있었으나,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다.
릭은 저 구석에서 조용히 고개를 드는 다른 속삭임을 가만히 듣는다. 눈을 감는다. 젖은 입술에 당장 키스하고 싶었던 충동의 원인. 작은 악마가 속삭였다.
2.
이미 자자하게 퍼진 소문이다. 젊고 아름다운 기사단장이 고귀한 제레온 프리츠에게 불경한 마음을 품고있다는 소문. 릭 톰슨이 그 소문을 믿은 적은 한 번도 없다. 벨져의 제레온을 향한 무엇보다 순결한 애정은 그가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믿음은 충격적인 순간을 목격한 직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저 놀랐을 뿐. 벨져 홀든이 제레온 프리츠에게 입맞춤하는 것을 처음 목격한 순간 릭 톰슨은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한 번, 두 번, 세 번을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을 빤히 바라보며 릭은 저가 마치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진다. 수줍게 내밀어 진 붉은 혀가 기사의 마른 입술을 적시던 순간조차 릭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한치의 부끄럼이나 수치 없이, 당당하게 이루어지는 입맞춤은 분명한 벨져 홀든의 의지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리고 벨져는 릭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벨져를 이 방으로 데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릭 톰슨이었으므로.
그러니까 한 마디로 벨져는 자신의 연인이 보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다른 이에게 입을 맞췄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이 어찌 연인 된 자로서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그가 벨져와 처음으로 살을 섞고 입맞춤을 나눈 지 며칠 되지 않은 시점에서.
“벨져, 그…제레온 경과는, 그, 그런 사이였소?”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제레온 프리츠가 벨져 홀든에게 얼마나 예민하고 민감한 사안인지 알기에 그래야 했다. 벨져의 역린을 건들지 않는 방식으로 심리를 알아내고 싶었다. 릭이 벨져의 단순한 동료이거나 지나가는 사람이었다면 그저 못 본 체 눈을 돌렸겠으나, 벨져 홀든은 릭 톰슨의 연인이기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아니던가.
벨져는 눈을 찌푸리고 릭을 돌아본다. 검은 장갑에 싸인 두 손은 여전히 제레온 프리츠의 얼굴을 감싼 채다. 야위었지만 듬직한 두 다리에 걸터앉은 청년은 의아하다는 듯 말꼬리를 올린다.
“그런 사이?”
“그러니까, 제레온 프리츠 경과 서로…아주 사적이고, 친밀하고, 육체적으로도 가까운 관계였냐고 묻고 있는 거지. 걱정 마시오, 그대를 추궁하는 게 아니야. 제레온 경이 그대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소. 다만…그대가 그런 마음으로 제레온 경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거요.”
이쯤 오면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중심이 모호해진다. 그럴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릭이 생각하기에 벨져의 제레온을 향한 감정은, 아주 특별하다고는 생각했으나 그런 방향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그리고 그 생각은 아직 변함이 없다.
파란 눈이 깜빡인다. 흐음. 몸을 의자에서 내려 릭을 향해 뒤돌아선다. 하얀 손가락이 입술을 몇 번 건들고, 팔짱을 꼈다. 그리고 입을 뗀다.
“제레온 경이 나와…너 같은. 비슷한 사이였냐고, 묻고 있는 건가? 연인이었냐고?”
“비슷하오. 정확하게는, 제레온 경에게 그대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냐고 묻고 있지.”
“아무래도 네가 잠이 덜 깬 모양이군. 피곤하다면 쉴 곳을 마련하겠다.”
벨져는 그렇게 단언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역시. 마른 웃음이 입가로 흐른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조금 더 불쾌해하거나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자각이 없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그런 의미는 없는 걸까. 릭은 아마도 후자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벨져의 행동과 말이 맞물리지 않는다.
제레온과 벨져를 번갈아 본다. 가장 확실한 건 아마 제레온 프리츠에게 사실을 듣는 것이겠으나, 산 채로 죽은 꼴과 같은 그가 릭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기에 릭은 다시 한번 벨져에게 말을 덧댄다.
“그렇지만 그대는…입맞춤을 했어. 방금도 그랬지 않소. 몇 번이나.”
무슨 불순한 소리냐며 이번에야말로 화를 낼까. 릭은 제법 긴장했다. 벼락같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벨져의 호통을 각오했다. 그러나 벨져는 눈을 가늘게 찌푸릴 뿐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파란 눈이 깜빡인다. 천천히 붉은 입술이 열린다. 릭. 목소리는 언제나 가장 정확한 모습으로 귀에 닿는다. 릭을 직시하는 푸른 눈은 누구보다 순수할 것이다. 저 입술이 항상 진실만을 담는 것을 안다.
“진심을 전하는데 육체적인 접촉이 말보다 확실하다고 한 건 너였다.”
맑고 깊은 눈동자에 숨을 멈춘다. 내가 그런 말을? 시치미를 떼기에 기억은 지독하리만치 선명하다.
키스를 했다. 눈을 감은 채. 심장이 벌렁거렸다.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는 고동이 귓가에 울린다. 먼지가 자욱하다. 피부에 엉키는 흙먼지에 손끝이 텁텁했다. 머리를 엉망진창으로 뒤섞는 흥분을 가라앉힐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폐허가 된 유적이었다. 벨져 홀든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름. 릭 톰슨은 인생에서 두 번째로 죽음의 문턱에서 발을 멈췄다. 아니, 그렇게 표현하면 조금 과장되었을까? 그저 스쳤을 뿐이다. 얼굴 바로 옆을. 그리고 한끝 잘못 닿았다면 목이 날아갔을 순간을 피하게 한 건 벨져의 날카로운 검이었다.
제아무리 죽음을 각오했다 해도 순간의 공포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자꾸만 주저앉으려는 다리를 간신히 일으킨다. 벨져는 릭을 부르지 않았다. 이따금 뒤를 돌아보는 푸른 눈이 그의 상태를 살필 뿐이다. 아침의 밝은 빛이 천장의 갈라진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릭은 멍하니 흔들리는 하얀 머리카락을 바라본다.
적은 저 앞에 있다. 멀뚱멀뚱 있을 여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알면서도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모른다. 그저 지켜볼 뿐이다. 햐얀 빛이 악을 베어 넘기는 순간을.
빛을 받아 더욱 희게 빛나는 존재. 마치 태어나기를 남들보다 고귀한 존재인 것처럼.
“정신이 들었나.”
다시끔 벨져의 그 말에 시야가 개였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던 뜨인 눈에 빛이 들어온다. 호흡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하얀 머리카락에 붉은 피가 검게 눌러붙어있었다. 그의 것인지 아닌지 모를 피다. 머리카락만이 아닌 이곳저곳에 튀어 묻고,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빨간 것이 몸에 얼룩진다.
그래도 깊은 상처는 없는 듯하다. 망토 아래 가려진 몸이 어떠할지는 모를 노릇이지만 벨져 홀든씩이나 되는 사람이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겠지.
멋쩍게 미소지으며 머리를 긁는다. 벨져의 손에 잘 닦인 검이 검집으로 들어 갔다. 아직 다리가 후들거렸다.
“미안, 하오. 잠시 한눈을 팔았군.”
“네가 나를 데려온 걸로 네 할 일은 끝났어. 그거면 됐다.”
뒤를 돌아 걸음을 옮기려는 그를, 반사적으로 팔목을 잡아 붙든다. 몸이 멀어지려던 찰나를 견딜 수 없었다. 잠시나마 푸른 눈이 크게 뜨인다. 벨져가 릭을 내려다보았다. 마른 입이 뻐끔거렸다. 심장이 타들어간다.
지쳐있었다. 머리가 아찔하다. 숨이 턱 막히고…. 목이 마르다. 목이…. 그러니, 벨져. 나를.
나를?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릭은 알지 못한다. 나를. 벅찬 감정으로만 남아 목젖 언저리에서 맴도는 몇 마디 글자는 전부 알 수 없는 형체로 깨져있다. 얄팍한 몇 마디 음성이나 글자는 이 마음을 전할 수 없을 것이다. 보이는 모든 것이 흔들린다.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치. 이건. 그래, 자신은 눈앞의 청년에게 욕정하고 있다. 평소의 청결한 인상과는 달리 피와 먼지로 범벅이 된 벨져 홀든에게. 시야가 흔들리고 숨이 벅찰 만큼이나.
벨져에게 기대어 몸을 일으켰다. 릭이 원하는 대로 벨져는 그를 부축한다. 벨져를 지지대 삼아 두 다리로 서고, 다시 기대듯, 아니 얽매듯 그를 끌어안았다. 두 팔을 벌려 세게. 벨져가 가볍게 쥐었던 검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입을 맞추면. 키스를 하면. 호흡을 나누고 살을 섞으면.
지극히 낭만적이면서 가장 확실한 대화가 아니겠는가.
“당신을 알고 싶어.”
“나를?”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릭은 분명 벨져 홀든을 알고 싶어 하였으나 그 이상으로 벨져 홀든이 자신에 대해 알아주기를 원했으므로.
릭 톰슨의 어떤 것을? 이를테면 생각이나 감정, 소망같은. 언어로 나타내기엔 불완전할 것들에 대해.
그리고 거기에 덧대어 입에 담지 않을 깊은 구석의 욕망까지.
양팔을 붙잡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팔을 잡은 손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간다. 시야가 가늘게 떨렸다. 호흡이 닿을 거리에서 잠시 멈추고, 눈을 감는다. 검붉은 피딱지가 달라붙은 입술에서 비릿한 맛이 난다.
몇 번을 머뭇거리듯 입을 맞췄다. 가장 원했고 원하고 있고 앞으로도 바라마지 않을 것. 오로지 벨져 홀든만이 릭 톰슨에게 줄 수 있는. 백 번을, 수천 번, 수만 번을 입에 담아도 벨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을 분명 벨져는 가지고 있다.
입을 맞춘 채.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흙먼지가 인다. 숨이 벅차다.
두 손을 등에 둘러 꽉 끌어안는다. 어깨에 코끝을 파묻고 숨을 들이켰다. 마른 입술로 흐트러진 크라바트를 당겨 벗겨냈다.
체중을 실어 몸을 뒤로 넘어트리려 했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뒤로 몸을 눕혀달라는 신호였다. 그제야 벨져는 릭에게 묻는다.
“너는 내가 네 성행위를 받아들이는 게 정당하다고 하는 건가?”
“서로의 진심을 나누는 데에 가장 정확한 방법이오.”
딱히 반론은 없다. 하지만 그 표정이 약간의 의아함과 불신에 찌푸려져 있을 것을 안다. 모르는 체 목덜미를 살짝 깨문다.
“입에 담는 그 어떤 말보다 순수하고 거짓 없이 생각을 나눌 수 있지.”
거짓은 없다. 모든 것이 릭의 진심이었다. 지금까지 벨져를 대했던 그저 친밀한 태도도, 지금 하고자 하는 행위도.
병상에 앉아 그를 본 그때부터 지금까지. 벨져 홀든을 품에 안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다.
딱히 죄책감을 느끼거나 한 건 아니다. 벨져는 분명 릭에게 있어 누구보다 고결한 존재였으나, 그렇기에 더욱 소망했다. 더러움을 모르는 완벽한 육체에 닿아 가진 죄를 씻고자 소망했다.
벨져는 그 이상 대답이 없었다. 허가도, 거절도 받지 못한 채 행위를 계속한다. 싫고 좋음이 확실한 사람이다. 거절의 의사가 있었다면 진작에 거절했겠지. 릭은 그렇게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다. 거절당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허락일 것이다.
이런 먼지 구덩이와는 참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폐허가 된 유적 구석에서 상대를 눕히고서야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를 깨달았지만 이제와서 장소를 이동할 생각은 없었다. 이런 때나 쓰라고 있는 편한 능력을 가지고서도. 능력을 쓸 몇 초가 그저 아깝게만 느껴질 뿐이다.
꿈꿔왔던 순간이었다.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행했던 파렴치한 망상 속에서. 무의식이 이루어낸 꿈에서. 눈앞의 벨져 홀든을 탐했다. 갖은 방법으로 그를 원했고 그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랬던 망상이, 꿈이, 이런 식으로 결국에는 실현되리라 어찌 알았을까.
현실은 꿈보다 훨씬 환상적이었다. 입을 맞추면 반응이 돌아오고 내미는 혀에 답하듯 혀가 얽혀온다. 태어나 서른이 훌쩍 넘는 세월을 지내는 동안 이만큼 행복에 찼던 순간은 없었을 것이다. 모든 죄가 씻겨 내려가고 그저 기쁨만이 가득한 시간. 마치 난생처음 저지르는 행위인 것처럼 가슴이 설레고 손이 떨린다.
입맞춤도, 만져본 피부도, 헤집고 들어간 속살도. 모두 꿈이나 상상을 훨씬 웃도는 황홀경이었다. 실망따위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으나 한 번 맛본 감촉은 릭을 벨져에게 더욱 심취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 때는 처음인지 아닌지 묻지 않았다. 그저 속에 찔러넣고 흔드는 허리에 맞추어 조금씩 찌푸리는 얼굴이나 허덕이는 호흡이 지독하게 선정적이었기에, 아마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법을 이미 배운 건 아닐까 생각했을 뿐이다. 한참 후에야 그게 처음이었다고 알게 되었지만. 이 때의 릭은 벨져가 이미 소문대로 경험이 제법 있을거라 착각하고 있었다. 다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을 뿐이다.
조금 버둥거리는 허리를 잡아 찔러넣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전부 집어 넣었다. 그제야 작게 경련하던 몸이 조금씩 안정을 찾는다. 잔뜩 젖은 하반신과는 달리 릭의 입술은 바싹 말라있었다. 숨을 고르는 벨져에게 정신없이 입을 맞췄다. 아 역시, 그대뿐이야. 잔뜩 목을 축였는데도 목이 마르다.
나를. 뒤에 이어지려던 문장. 적나라한 소망을 다시 삼킨다.
나를 사랑해주시오.
바라건대, 그대가 나를 사랑하기를. 나를 그대의 특별한 존재로 삼아 다른 것과는 선을 긋기를.
그렇게 나를 구원하기를.
벨져 홀든의 특별한 존재가 되는 릭 톰슨은 구원받는다. 벨져가 도달하는 결론이 곧 그의 낙원일 것이다. 그렇게 확신하기에 릭은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형태 없는 조물주보다 눈앞의 구원자를 숭배하리라.
기미님과 함께합네다
5코부터 들구가욥
5코:H18
6오락관:R01
TRIPLE HELIX 트리플 헬릭스
R19 | B6 | 114P | 소설
릭벨져. 원작기반 대디플하는책...인데 전체적으로 아무말대잔치. 벨져한테 구멍하나 더생기고 작아지고 난리납니다.
릭이 마음고생하고 벨져가 몸고생하는 내용. 피는 안튀기지만 뭐가 어케되어도 ㅇㅋ하는분께...
표지 : 기미(@89880CP)님
샘플은 이어지지 않슴다
이변을 눈치챈 건 숙소로 돌아와 몸을 씻은 뒤였다. 벨져가 먼저, 그 다음으로 릭이 욕실을 썼다. 욕실에 들어갈 때만 해도 평소와 큰 차이는 없었다. 그랬는데. 릭이 머리를 털며 나올 즈음에는 벨져의 표정이 제법 일그러져 있었다.
징조는 왼팔에서 나타났다. 대체 어떤 고통이 있는 걸까. 입술을 어찌나 꾹 깨물었는지 핏기가 없다. 벨져? 머리를 털던 손을 멈추고 불러도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 사이로 왼팔을 늘어트리고 어깨 아래를 오른손으로 잡은 채 미동도 않았다. 릭은 곁으로 다가가 얼굴을 살핀다.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뺨이 식은땀으로 축축하다.
“뭔가 잘못됐소?”
그제야 벨져는 눈을 들어 릭과 시선을 맞춘다. 그런 것 같군. 지금 당장에라도 사그러들듯 작은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또렷하게 들렸다.
얇은 가슴이 크게 움직인다. 숨을 몰아쉬는 허파의 움직임이 훤하다.
벨져가 오른손으로 쥔 아래쪽으로 날붙이에 그인 자죽이 벌겋게 남아있었다. 오늘 상대가 나이프를 무식하게 던져대기야 했지. 사방에서 정신없이 날아오던 칼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걸 그 커다란 두 자루의 칼로 하나하나 쳐내는 모습은 역시 검 능력자라고 해야 하겠지. 릭은 벨져가 시키는 대로 옆에 찰싹 붙어 보이는 것만 간신히 능력을 써서 날려버리는 게 고작이었는데 말이다.
이거 잘못하면 칼이 내 심장에 박히는 거 아니오!? 박히면 빼면 그만이다!
그리 농담스런 말까지 하면서도 혼자가 아니라 릭에게 날아오는 것까지 쳐내던 탓인지. 벨져의 평소 표현을 빌리자면 짐덩이가 하나 있다고 하는 것도 좋겠다. 여튼 교전이 끝나고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여기저기 옷이 찢긴 상처가 있었다. 깊게 남은 상처는 없지만 이런 잡졸들을 상대한 것 치고는 잔상처가 많은 편이기도 하다. 릭 톰슨이 생각하는 벨져 홀든을 기준으로 보면.
벨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순간 몸이 크게 기울며 균형을 잃는다. 쓰러지려던 벨져를 간발의 차로 부축했다. 몸이 지독하게 차갑다.
“벨져…?”
“릭. …짐을 챙겨. 지금 당장 떠난다.”
잠깐이라도 쉬는 편이 나을 텐데. 이런 식으로 자신의 상태가 썩 좋지 못할 때 바로 장소를 옮겨버리는 건 벨져의 버릇이다. 워낙 자기관리가 철저한 탓에 그런 일이 빈번하지는 않으나 일단 위험요소를 줄이는 거라나.
짐이라고는 해도 꺼내놓았던 옷가지 몇 벌을 가방에 쑤셔넣는 정도가 전부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벨져 대신 옷을 주워 담는다.
“좋소. 어디로 가야 하지?”
“네 집.”
“내 집?”
되묻고, 벨져를 빤히 바라본다. 1분은 커녕 초 단위로 상태가 악화되고 있었다.
“병원이 좋지 않겠어?”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파란 눈이 차갑게 감겼다.
첫째 날. 릭은 자신의 집 침대에 누운 벨져 옆에서 하루를 보냈다.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 꽤 괴로워보이지만 내일쯤이면 낫겠지 싶었다. 아주 가끔 그러했듯. 큰 외상이 아니면 벨져는 하루, 길면 사흘 정도로 전부 훌훌 털고 일어났으니까. 릭은 벨져의 안전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이틀 째. 어제와 같았다. 사흘 째.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저녁에 벨져가 정신이 들었다. 스프를 몇 숟가락 먹였다. 나흘 째. 둘째 날과 같다.
그런 식으로 꼬박 열흘이었다. 릭 톰슨은 언제나 전장에 서는 제 애인을 만나고 처음으로, 난생 처음 벨져 홀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 열흘을 보냈다. 열흘 내내 불안해 했던 건 아니지만 불안하지 않았던 처음 며칠간의 안일함이 벨져를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두게 한 원인이 아닌가 싶어 릭은 더욱 머리를 싸맸다. 계속해서 밀려오는 자책을 어쩔 수가 없다.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싶어 이따금 간신히 눈을 뜬 벨져와 원인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했다. 벨져의 예상으로는 독이었다. 대체 어디서 독에 당했나 여러 번 생각해보았는데 피부를 스친 날붙이에 발라져 있었겠지 싶다. 대체 무슨 독이 묻어있었는지. 릭 톰슨이라는 인간은 워낙에 무난한 삶을 살아왔기에 성장하면서 독과 밀접해야 할 이유도 없었고 알 리도 없다. 그런고로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해가 뜨고 지기를 아홉 번 반복하는 동안 릭 톰슨은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벨져 홀든의 곁을 지켰다. 신체에 산처럼 누적되었을 피로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벨져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크고 무거운 두 칼을 휘두르고 던지며 전장을 누비던 청년이라고 누가 믿을까. 그렇게 넓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비좁지도 않은 침대에 누인 몸이 당장에라도 죽을 듯 괴로워 보인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는 벨져의 옆에 붙어 물을 주고 식사를 먹이고 몸을 닦아주며 간병에 매진하다보니 마지막 나흘은 정말 한숨도 잠들지 보냈다. 결국 열흘째 되던 날. 한계에 다다른 릭이 피곤에 지쳐 쓰러지다시피 잠에 빠지고. 눈을 떴을 때에는 반나절 조금 안되는 시간이 지나있었다.
조명으로 방이 환하다. 릭에게는 불을 켠 기억이 없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해가 저문 직후. 이제 잔뜩 어두울 무렵인데 방이 밝다. 내가 불을 켜고 잤던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이젠 기억마저 끊겼나. 깜빡깜빡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는 시야에 익숙한 천장이 가득 찬다. 언제 침대에 누웠더라. 워낙 피로가 쌓였던 탓에 몸은 찌부둥하다. 무거운 몸을 일으키자니 몸이 침대에 빠져드는 것만 같다. 다시 눈을 감는다. 머리 위, 옆에서 목소리가 떨어졌다. 릭, 정신이 들었나?
벨져? 인가. 벨져일 텐데. 벨져라고 생각했는데 순간 어라, 싶은 의문이 머리를 스친다. 벨져의 목소리가 이랬던가? 약간 다른 것도 같고. 눈을 감은 채 고민했다. 릭 톰슨은 잠결에 방금 전까지 벨져 홀든이 환자였다는 사실을 잊고 농담을 입에 담는다. 아침인사로는 달콤한 입맞춤이라는 달콤한 언어를 써보는게 어떻겠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른 손가락이 볼을 쭉 꼬집어 당겼다.
“아주 푹 잔 모양이군?”
“아악! 내가 잘못했소! 벨져! 농담 하나에 무슨…….”
순간적으로 뺨에 몰리는 고통에 눈을 번쩍 떴다. 눈앞으로 보이는 모습은 역시 벨져다. 그러나…. 무언가 달라진 부분에 저도 모르게 입가가 풀어졌다.
학창 시절 능력이 발현한 그 순간부터. 릭 톰슨은 흔한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그야말로 어디에나 굴러다니는 돌덩이처럼. 크게 튀어나온 부분 없이 주면에 묻혀 평범하게, 자신의 능력을 비밀스런 즐거움에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의 인생 목표였으나. 세상이 릭을 그리 두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런 능력을 준 세상이 릭을 가만 둘 리 없었던걸까. 결국 전장에 몸을 던지게 되었고, 지금 이 순간, 릭 톰슨의 평범하지 않은 특이한 경험에 다시 한 줄이 추가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다지 나쁜 경험이 아니다. 그야말로 피로가 싹 날아간 기분이라는게 이런 걸까. 열흘간의 불안도 고통도 전부 한 순간에 잊고, 그저 경이만이 가득하다. 몸은 아직 뻐근할 텐데도 전혀 그런 감각이 없었다.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이건…굉장하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한마디에 벨져가 눈을 찌푸린다. 그런 반응따윈 아무래도 좋다. 미소가 입가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대로 미끄러지듯 침대 옆 의자로 이동해 벨져에게 묻는다.
“정말 굉장해. 무슨 독이었는지 짐작가는 건 있소?”
“그게 중요한가?”
팔짱을 끼고 있던 벨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모르는군. 자신을 노려보는 벨져에게 멋쩍은 웃음을 흘린다. 푸른빛이 도는 눈이 가늘어지고, 고개를 숙였다.
“물--론…. 그래. 독의 종류라……. 중요하지 않은 사안은 아니겠군. 하지만 독의 종류 따윈 천천히 찾아봐도 괜찮을 문제다.”
“그러다가 또 같은 독에 당하면 어쩔 거요?”
“다음에 같은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독은커녕 옷깃 하나 스치는 상처조차 없을 거라 장담하지.”
성질 한 번. 지기 싫어하는 꼴은 사실 벨져나 릭이나 비슷비슷하였으나 벨져 쪽이 더 강박적이다.
무슨 고민인지 두 눈은 릭이 아닌 다른 곳을 본다. 시트 위의 두 손. 예전의 벨져를 생각해보면 지금의 저 손은 고민이 될 법도 했다. 벨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안색은 당장에라도 죽을 듯 골골대던 아까보다 훨씬 개운해보이지만 표정은 살벌하기 짝이 없다. 열흘 전이었다면 제법 긴장하고 또 시작이라며 기분을 맞춰줄 생각이 들었겠지. 그런 것이 다만 지금은 이런 신경질마저도 귀엽게 느껴지니 사람의 마음이 어찌 이토록 간사할까. 아니, 절대로 벨져가 이런 꼴이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내심 변명한다. 죽다 살아난 사람이 조금 신경질을 낸다고 미워보이기야 하겠는가. 그런 이유다. 절대로, 결단코 지금의 벨져 홀든의 모습이라는게 릭 톰슨이 보기에 조금 만만해보인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다. 뭐 외형이 제법, 아주 많이. 귀여워지기는 했지만.
아, 이거 정말. 정말이지. 굉장하군.
입을 가리고 작게 중얼거리며 감탄했다. 딱히 별 말이 없는 걸 보면 벨져에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입밖으로 꺼내지 않는 편이 가장 좋았을 감탄이긴 하지만 그래도 꼭 작게라도 말하고 싶었으니 그렇게 했다. 들었다면 화냈겠지 생각하니 더 두근거린다. 굉장해. 이번엔 마음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독인지 재주도 좋을 따름이다. 누구나 감탄하겠지. 릭은 확신한다. 저런 효과를 가진 독이라면 돈을 주고라도 먹겠다고 장사진을 이루기도 할 거고. 다들 젊어지는 건 아주 좋아하지 않던가. 아니, 젊어진다라고 하기에는 효과가 과한가? 이전과 확실히 달라진 벨져의 모습을 훑어보며 생각한다. 벨져는 불만이 가득해보이지만 릭은 제법 만족스럽다. 좋게 말해 젊어진, 대놓고 말하자면 쪼그라든 벨져 홀든이라. 신선하지 않은가. 익숙한 모습이 아니니 신선하고. 어리니 신선하고.
작다기보다 어리다. 그럭저럭 릭보다 한 스무 해는 적을까. 많아야 십대 중반쯤? 벨져의 유년시절을 본 적이 없으니 비교나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아마도 그쯤. 저 미간을 잔뜩 좁힌 얼굴도, 쥐었다 폈다 하는 손도 그저 귀엽게만 느껴진다.
“입을 옷과 식사나 좀 사오겠소. 쉬고있는게 좋겠어.”
하하 웃으며 방을 나선다. 완전히 나가려던 찰나. 미처 하지 못한 말이 떠올라 잠시 뒷걸음질쳤다. 방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눈을 마주한다.
“그대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작게 웃었다. 벨져는 눈을 가늘게 감고, 고개를 돌릴 뿐이다.
릭 톰슨에게는 자질구레한 행운이 잘 따르곤 한다. 행운의 사나이라고 하기에는 모든 운이 좋은 건 아니지만. 지금도 결과적으로는 운이 좋다면 아주 좋은 편이다. 몇 시간만 더 늦게 일어났더라면 상점들이 전부 문을 닫았을 테니까. 옷가지야 그렇다 쳐도 냉장고가 분명 텅텅 비어있던 걸 생각하면 텅텅 비어서 아픈 위장을 끌어안고 밤을 지새워야 했겠지. 그런 작은 행운에 감사하며 분주하게 저녁 거리를 활보한다.
옷은 외출하지 않는다면야 적당히 집에 널린 흰 티만 입혀도 문제없겠지. 우선할 쪽은 식량이다. 무언가 있긴 하던가. 직후에 그야말로 바닥만 보이는 냉장고를 떠올리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뭘 사야 할까. 하도 식사를 소홀히한 탓인지 당장 먹고 싶은 게 생각나지 않는다. 카트를 앞에 두고 잠시 멈춘다. 일단 맥주 몇 캔에 와인 한 병. 치즈 소세지 감자칩. 벨져의 건강이 좋아진 대신 다른 악재가 겹쳤지만 아무렴 좋지 않은가. 일단 축배는 들고 볼 일이다. 그리 생각하며 술과 안주를 잔뜩 챙기고 나서야 식사라는 단어가 제대로 머리에 떠오른다. 식사가 될 만한 것. 제 배를 채우는거야 그렇다 쳐도. 열흘을 사경에서 헤매던 환자에게 뭘 먹여야 할지. 물론 상대는 벨져 홀든이기에 며칠이나 빈 속에 갑자기 기름진 고기를 썰어넣어도 괜찮겠지만. 아니지. 쪼그라들었으니 그것도 아닌가? 뭐 그래도 벨져의 믿기지 않는 내구력을 생각하면 뭔들 못먹겠냐마는. 병자를 병자 취급해서 나쁠 건 없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며 항상 신경을 날카롭게 유지하라는 건 벨져가 하던 말 아니었나. 대강하지 말고 매사에 신중하게. 항상 잔소리라고만 생각했던 그 말에 이토록 충실하고싶던 적도 지금이 처음이다.
그러면 스프라도 만들까. 스프 재료에 릭 자신이 먹을 것들을 대강 쓸어담으니 금세 카트가 두둑해졌다.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 산 것들을 공간에 던져넣고 손목에 잔뜩 감아둔 시계 중에서 손에 가장 가까운 것을 확인한다. 아직 의류점 마감시간까지는 여유가 있다.
문을 여니 방울 소리가 울린다. 어서오세요. 점원들의 인사가 구석구석에서 들려온다.
릭이 이런 곳에 올 일이 있었을 리가 없다. 사람이 거진 다 빠지고 고객이라고는 저를 포함해 셋. 나이가 조금 있어보이는 여성이 둘, 노년의 남성이 하나. 자제분 옷을 고르러 오셨나봐요? 매장으로 들어선 릭에게 점원이 말을 걸었다.
“아….”
자제라는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벌써 여기 옷을 입을 만한 애가 딸렸을 것처럼 보이나? 물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이이긴 하지만 조금 충격적이다.
“앗, 죄송해요. 조카분 선물이신가요? 어떤 옷을 찾으시는지 말씀주시면….”
“괜찮소. 내가 편하게 고를테니, 저기 신사분께 가보는게 어떻겠소?”
릭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백발의 노신사가 손짓하고 있다. 앗, 잠시만요! 손님 지금 갑니다~!
점원이 저쪽으로 떠나고 남겨진 릭은 옷걸이를 빠르게 뒤적이며 머리를 굴린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알 리가 없었으니 미리 생각해둔 복장은 따로 없었다. 썩 익숙하지 않은 벨져의 미성숙한 얼굴을 떠올리며 어떤 게 괜찮을지 상상해본다. 먼저 본인의 희망은 무엇일까를 추측해보기도 했다. 벨져야 뭐, 머릿속은 여전히 스물여섯의 벨져 홀든 그대로이니 성인 남성의 복장에 가까운 복장을 생각하고 있겠지만. 기왕 저만치 작아졌는데 평소와 비슷한 옷은 아깝지 않은가. 릭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바라는 대로 지금의 벨져에게 입히고 싶은 옷을 고르기로 했다.
흰 블라우스에 무난하게 반바지. 스타킹. 흰양말. 멜빵. 코트. 이것저것. 사실대로 말하자면 팔랑팔랑 예쁜 옷들에 눈이 가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나. 그것들까지는 벨져가 입어줄 리가 없었으므로 그만두는 대신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하나 집었다. 이것도 치마나 마찬가지로 벨져가 화를 내기야 하겠지. 아니 분명 치마보다 더 화를 낼 것이다. 그래도 이정도면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니 잘 설득하면 다리 정도는 넣어주지 않을까.
옷가지를 한가득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식탁 위에 두었던 식재료를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은 뒤 옷을 들고 침실 문을 연다. 문이 열리는 기척에 일어난걸까. 벨져가 몸을 일으켜 릭을 바라보았다. 다녀왔소. 한 발 늦게 인사를 건넨다.
“아까 소리를 들으니 한가득 던져놓던데. 뭘 그리 많이 샀나?”
“음식이오. 열흘이나 나가지를 못했으니 냉장고가 텅텅 비었거든. 식사 전에 일단 씻겠어? 제대로 된 목욕은 며칠이나 못했을 텐데. 씻고 개운하게 먹는 편이 그대도 상쾌하겠지.”
“그렇군.”
“욕조에 물을 받아둘 테니 조금 더 쉬다가 들어가면 될 것 같소.”
벨져가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옆으로 몸을 내린다. 조금 쉬라고 했는데. 다시 침대에 편히 있으라고 권하려 했으나 눈앞으로 펼쳐진 작태에 그만 눈을 뺏기고 만다. 쓰러진 사람을 굴리고 굴려 간신히 입혀놨던 잠옷 상의는 거의 걸친 수준으로 헐렁해져 있었다. 허리에 걸쳐있지도 못하는지 바지가 바닥으로 주르륵 떨어지고, 발밑으로 흘러내린 바지에서 발을 뺀 뒤 들어올리더니 침대 위에 놓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릭은 등을 돌려 부엌으로 향했다.
그야말로 소년의 신체다. 신기하고. 놀랍고. 경이롭고. 정말 굉장하고…. 갖은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런저런 감상을 삼키며 요리를 계속했다. 스프 불을 끄고 오븐에 고깃덩이를 넣는다. 빵도 몇 점에 이파리도 대강 접시에 두었다. 생각나는 대로 준비하다보니 메뉴에는 영 조화라는게 없다.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릭은 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타올을 뒤집어쓰고 아직 젖은 채 나온 벨져와 마주친다. 귀찮게 굴지 말라며 뿌리치려는 손길을 피해 수건을 덥썩 잡는다. 잘 닦아줄 테니 가만 있으시오. 릭, 적당히 해! 그런 말을 들어도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몸을 수건 위로 이곳저곳 꾹꾹 누르고 더듬어 물기를 잘 닦아낸다. 그리고 전신을 다시 타올로 돌돌 말아 침실로 데려갔다. 벨져가 앞장섰으니 데려간 건 아닌가. 정확하게는 타올로 몸을 대강 말아두니 말린 타올이 제발로 침실에 들어갔다. 문자 그대로 타올덩어리 아래로 빼꼼히 나온 발이 움직이는 모습은 정말이지. 우습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에 들어간 벨져는 침대에 걸터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옷이야 당연히 입지 않았다. 없었으니까. 홀딱 벗은 애인을 보고서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옷 봉투에 눈이 간다.
“아, 그래. 사온 옷이 잘 맞나 확인해야겠군. 한 벌 정도 양말까지 전부 입어보겠어? 제대로 샀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오. 혹여나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내일 옷을 다시 구해와야 할 테니.”
종이 봉투를 들고 침대 쪽으로 다가간다. 푸른 눈이 고개를 들어 릭을 보았다. 어디 보자…. 여러 벌 산 만큼 이것저것 있는 봉투를 뒤적이다가, 시선을 맞춘다.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고개를 제법 숙여야 했다. 자제분 선물이신가요? 점원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손이 멈춘다.
분명 스물여섯 살인 애인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새삼 몇 번이나 떠올렸던 감상이 다시 떠오른다. 작군. 정말 작아. 어디 엄마젖이나 물고있을 아기마냥…아니 물론 갓 태어난 신생아나 이제 두세 살 된 아기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훨씬 큰 아이지. 느낌이 그렇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이 몸은 스물여섯의 청년이 아니었던가. 어제? 어제도 아니고 당장 몇 시간 전이다. 몇날 며칠을 밤을 지새우며 간병에 매진하다가 깜빡 잠이 든 사이. 길어야 여섯에서 여덟 시간. 300분에서 480분. 고작 그 정도 시간으로 스물여섯 해를 들여 릭과 같은 눈높이까지 쌓아온 이 청년의 시야가 아래로 푹 꺼져버리다니. 순식간에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어리지는 않은데도 릭의 눈에는 그러한 탓에 갓난아기와 다름없게 보인다.
벨져에게는 달갑지 않을 변화다. 검을 들고 싸워야 하는데 육체적 능력이 저렇게 실추되는 걸 바랄 리가 있을까. 그리고 릭 톰슨은….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싫지만은 않다. 물론 솔직하게 지금의 그대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가는 벨져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겠지. 딱 저런 느낌으로.
어깨로 걸친 커다란 타올 아래는 그야말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살이다. 티 하나 없이 하얀 피부. 유독 시선을 끄는 분홍빛 돌기에서 억지로 눈을 떼려 하니, 마찬가지로 상처하나 없이 깨끗한 다리로 눈이 갔다. 다리를 꼬아 침대 끝에 걸터앉은 탓에 그 사이는 단단히 가려져있다. 아니 저걸 보려던 건 아니고. 내려가 있던 시선을 황급히 들어 벨져와 눈을 마주했다. 시선이 썩 곱지 않다. 흐음. 벨져는 제 볼을 감싼 손가락으로 뺨을 툭툭 친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벨져?”
“즐거워 보이는군.”
약간 녹색이 도는 푸른 눈이 릭의 속내를 뻔히 들여다본다. 내 이 꼴이 좋은가봐? 음성은 없었으나 릭은 이어질 말을 똑똑히 들었다. 들은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소! 큰일이군! 정말 큰일이야. 억지로 소리내어 호들갑을 떨어봤자 입이 이미 헤실헤실 웃고 있으니 설득력은 없겠지. 못미덥다는 벨져의 얼굴을 어떻게든 못 본 체 하려 고개를 돌린다.
젖은 타올을 걷어내고 한참 좁아진 어깨에 흰 블라우스를 걸쳐주었다. 도와줄 심산으로 블라우스에 손을 대려 하니 벨져가 옷깃을 낚아챈다. 평소라면 단추를 잠그거나 소매에 팔을 넣는 정도는 거들어도 뭐라하지 않는데. 워낙 감이 좋은 사람이다. 벨져는 지금 릭이 자신을 아주, 좋게 말해 귀엽게 보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리라.
아무리 몸이 쪼그라들었다 해도 알맹이가 달라진 건 아니다. 아이의 손으로 능숙하고 우아하게 단추를 착착 채워가는 동작은 여전히 어디의 그런 기계인가 싶기까지 할 지경이다.
잘 엇갈려있던 다리는 다시끔 평행으로 놓여있다. 릭은 그 앞으로 몸을 내려 무릎을 바닥에 대었다. 제 무릎 앞으로 놓이는 갈색 머리카락에 벨져가 잠시 손길을 멈추고 릭을 흘끗거렸지만 시선은 다시 옷매무새를 다듬는 부분으로 움직인다.
그 틈을 타 군살 하나 없이 말랑말랑한 발을 이리저리 주물러본다. 살결은 그저 보드랍고 살이 그다지 붙지 않았음에도 만지기가 좋다, 이 작은 발가락 하나하나가 벨져 홀든의 일부라는 사실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발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위로 올려 발목을 잡아도 보고, 종아리를 쓸어만지기도 한다. 매끈하게 늘어진 다리는 릭이 알던 것보다 길이는 짧을지언정 훨씬 부드럽고 가늘다.
릭은 벨져의 유년시절은 고사하고 당장 작년의 모습조차 알지 못한다. 사진으로조차 본 적이 없다. 홀든 본가에 가면 혹시나 기록이 남아있을까. 아마도 있겠지만 벨져는 자신의 유년시절 기록따위는 가지고 나오지 않은 듯 했다. 집에서 나올 때 맨몸으로 나왔다나. 보여 줄 생각도 없겠지. 워낙에 앞만 보고 사는 사람이다. 릭이 그대의 어린 시절이 궁금하다고 할 때마다 이야기는 드문드문 풀어주어도 사진이 보고 싶다는 요청에는 고개를 까딱할 뿐이었다.
왜 그런 걸 굳이 보려 하지? 내가 모르는 시절이 궁금한 건 인간이라면 당연한 거 아니오?. 정 그렇다면…언젠가 기회가 되면 보여주도록 하지.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 말인즉슨 알아서 찾아봐야 한다는 뜻이다. 딱히 정말로 보여주지 않을 생각은 아니지만 열심히 기억해두지도 않겠다는. 주로 홀든 본가와 관련된 호기심일때 저런 반응이곤 했고, 아무리 설득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도 릭 톰슨은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거기서 그 화제는 일단락났다.
계기와 과정이 유쾌하지는 않았으나 지금 눈앞에 보이는 상황은 썩 나쁘지 않다. 뭐가 어찌되었건, 어떤 모습이건 간에 건강하고 멀쩡한 모습으로 앉아있지 않은가.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간 또 화를 내겠지만.
정말 벨져의 어린 시절이 이러했을지는 사실 그와 그의 가족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조차도 기억이 퇴색해 모호해졌을지도 모를 노릇이지. 정말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육체를 보고 있으면 그 시절을 재현했다기보다 그냥 신체나이가 어려진 정도일 거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어차피 사진조차도 렌즈를 통해 본 모습이다. 무엇으로 보아도 원본과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을 텐데. 심지어 티 하나 없이 아주 깨끗하게 복원한 모습이라니. 열흘 간 심신 양면으로 죽도록 고생한 보답이라도 받는 듯 하다.
하얀 종아리를 만지던 손이 다시 발로 내려왔다. 며칠 전까지의 벨져도 피부가 굉장히 좋은 편이었으나 아무래도 지금에는 비할 바가 아닌 것 같다. 제대로 밖을 걸은 적이 없으니 발바닥마저 말랑말랑하고 한 꼴이 입에 물어보고 싶기까지 하다. 지금이라면 발만이 아니라 벨져가 한 손에 잡히지 않을까. 그런 착각마저 드는군. 그리 솔직하게 말하면 벨져는 말이 되는 소리냐고 눈을 찌푸리겠지. 눈앞으로 표정이 그려지고 귓가로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두 손으로 발을 감싸고 만지작거리다가. 끌리는 대로 하얀 발등에 입을 맞췄다. 목욕을 마친 몸에서는 거진 다 써가던 샴푸 냄새가 났다. 솔직히 벨져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향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걸 사다 놓았을 텐데. 캬라멜이나 초콜릿 같은. 물론 릭 본인은 쓰지 않았겠지만.
그런 잡상에 정신이 팔려있으니. 한참 작아진 발이 릭의 턱을 걷어찼다.
“컥.”
“언제까지 내 다리를 주물거리고 있을 셈이지?”
한창 만져대고 있던 발이다. 계속 끌어안고 조물거리고있던 부분인 만큼 차마 방어할 겨를이 없었다. 이빨이 서로 부딪혀 제법 찡하니 얼얼하다. 혀를 깨물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불만스러운 벨져에게 릭이 얼얼한 턱을 어루만지며 투덜거렸다.
“뭐. 닳는 것도 아니잖소. 조금 신기해서 만져봤을 뿐이야.”
“네 표정은 별로 그렇지 않던데?”
“내 얼굴이 뭐가 어쨌다고 그러는 거요?”
당당하게 되물으니 벨져는 순간 답을 하지 못한다. 시선이 얽힌 채 몇 초의 시간이 흘렀다. 당장에라도 한 번 더 찰 것처럼 들려있던 발이 아래로 떨어진다. 벨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할 말이 없군.”
“거 보시오.”
훗. 입가를 끌어올려 웃으니. 이번엔 두 발이 릭의 양 볼을 끼고 꾹꾹 좌우로 누르기 시작한다. 어이가, 없다는, 뜻이다. 마디마디 강조할 때마다 얼굴을 꾸욱 눌렸다. 옆에서 보면 제법 바보같은 모습이겠지. 그래도 아까보다야.
“오. 아프지 않군.”
“세게 차주길 원하나?”
“아니, 됐소, 괜찮아. 사양하겠어. 잠깐 벨져, 악!”
장난이겠지만 벨져에게 이런 식으로 가격당하는 건 난생 처음 있는 일이다. 어떤 형태로든 벨져는 릭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단어를 빌리자면 품위가 없는 행동인 탓이겠지. 육체적 성능이 달라도 너무 다른 상대에게 힘을 쓴다는 것은 벨져 홀든의 정의에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그랬던 그가 반은 장난이겠으나 릭의 뺨을 누르고 턱을 발로 찬 건 본인이 느끼기에 지금의 자신이 전혀 위협적이지 못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리라.
“이렇게 기운이 넘치는 걸 보니 앓던 건 정말 다 나은 모양이군. 어디 양말부터 신어보겠소? 내가 돕게 해줬으면 하는데.”
양손 끝에 집은 흰 양말을 팔랑거리니 벨져가 눈을 가느다랗게 뜬다. 흐음. 생각하는 것도 잠시, 상대가 원하는 대로 발끝을 뻗어 릭 앞에 내밀었다. 아까 그렇게 쥐었던 것처럼 한 손으로 발을 감싸쥐고 끄트머리에 흰 양말을 건다.
끝까지 잘 집어넣고 흰 끝자락을 위로 잡아 올린다. 발꿈치에 걸리는 부분을 두 손으로 능숙하게 넘기며 종아리, 무릎 바로 아래까지 쭉 끌었다. 잡아 올리는 손가락으로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이 생생하다. 얇고 흰 천 너머로 이따금 작은 발가락이 꼼질거렸다.
무릎까지 오는 하얀 양말을 손수 신기고. 다음은 하반신을 잘 가려줄 속옷이다. 릭에게는 이것도 지금처럼 직접 입혀줄까 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벨져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밍기적거리지 말고 속옷과 바지를 내놔. 혼자 할 수 있다.”
릭은 마지못해 벨져의 손에 속옷을 들려주었다. 일단은 이 속옷이다. 다른 것도 있지만. 혹시나. 뻔뻔하게 내밀면서 훌쩍거리는 시늉을 했다. 때리다니 정말 너무하오. 차오르는 웃음을 고개를 돌려 가리고 있으니, 역시나 호통이 떨어진다.
“조롱은 적당히 해라 릭!”
아무리 그래도 여자 속옷을 얼굴에 집어던질 것 까지는 없지 않나.
그 뒤로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간 벨져는 뭘 할 수도 없는 몸으로, 뭘 할 수가 없는 탓에 더욱 바쁜 날을 보냈다. 릭에게 자신의 사명이나 책임 같은 것을 구구절절 말하는 타입이 아니었으므로 벨져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처리하고 있는지 릭이 알 방법은 없었으나, 칼만 없을 뿐 무언가 계속 하고있다는 사실 정도는 육안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해가 떠도 저물어도 끊임없이 어딘가로 연락을 하거나 무언가를 쓰거나 읽거나 찾거나. 외출이다. 라며 릭을 데리고 밖에 나와서는 쉬지도 않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쉬어가며 하는 편이 좋지 않겠소?
항상 마시던 진한 홍차 대신 내민 밀크티에서는 단내가 풀풀 풍긴다. 처음에는 항상 마시던 차는 어디 가고 이걸 마시라는 거냐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는데. 이제는 달다는 혹평으로 매번 각설탕을 하나씩 빼게 만드는 정도다. 여덟 개에서 세 개까지 줄였으면 많이 줄인 거지 여기서 뭘 얼마나 더 빼라는 걸까. 물론 릭은 저 밀크티를 마실 생각이 조금도 없지만.
바쁜 일과야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고. 그 이외에 무언가 특별한 변화가 있는가 하면…. 억지로 밀크티나 주고는 있지만 선호하는 음식도 같고 행동이나 반응의 버릇도 여전하다. 필적은 처음 몇 시간 정도는 좀 당황했던가. 글씨를 휘갈기더니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빈 종이에 다른 글씨를 마구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시간쯤 보내고 나서 개운한 표정으로 하던 일을 계속 했었지. 손이 갑자기 작아지고 악력이 바뀌니 적응이 안되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 말고는…. 수면시간 정도는 조금 변한 것도 같다. 평소에는 릭보다 한참이나 늦게 잠들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자정이 되기 전에 칼같이 눕고 릭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난다. 한 두세 시간 정도 더 수면을 취하게 되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무려 수면시간이 길어지기까지 하다니 아주 벨져 홀든답지 않은 변화다. 행동거지나 생각하는 점에서 애같은 면은 전무하건만 몸은 아주 솔직하게 자신의 신체나이를 말한다고 해야할까.
잘 자고, 먹고, 움직이고. 그렇게 건강하고. 성장기 아이는 그거면 충분하다고들 하지만 그건 그것이 정말 미성숙하고 순진한 아이일 때의 이야기이지 벨져 홀든은 릭 톰슨에게 있어 그가 보호하고 키워야 할 아이는 절대 아니었다. 건강하기를 바라기야 하겠으나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가 아니지 않던가. 릭 톰슨은 벨져 홀든에게 따로 바라는 바가 명확했고 고로 현 상황에 대해 릭은 불만이 아주 많다.
씻었으니 다음은 누울 것을 알고 있다. 알고는 있었다. 이럴 줄 알고는 있어도. 그렇다고 실망하지 않는다와 동의어는 아니었다.
벨져가 씻고 그 다음이 릭이다. 항상 그래왔던 대로 역시나 벨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릭은 문가에 몸을 기대고 팔장을 낀 채 게슴츠레한 시선을 침대로 흘린다. 딱히 기대도 안 했지만 칼같이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대가 이렇게 착한 아이던가?
며칠 전. 지금처럼 칼같이 누워버린 벨져에게 물었던 한 마디였다. 그 말에 감춰둔 뜻을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알 수 있을 것이라 릭은 생각하고 있으나, 동시에 벨져는 별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안다. 이제와서 릭은 자신의 질문을 조금 후회했다. 그런 식으로 돌려 묻지 말고 대놓고 물어봐야 했는데. 예를 들자면 이런 식으로 말이다. 잠들지 말고 놀아주시오. 그랬다면 대답이 조금은 달랐을까? 어쨌거나 기회는 한 번뿐이었으므로 이제와서 과거의 선택지가 현재를 바꿨을 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그 당시 벨져는 눈도 뜨지 않고 짧게 답할 뿐이었다. 필요한 수면을 취할 뿐이다. 수면욕구라고는 1g도 느껴지지 않던 대답으로부터 완전히 잠들기까지 3분.
아무리 몸이 애라고는 해도 알맹이는 스물여섯된 청년이다. 어느 정도의 졸음 정도는 정신력으로 버틸 수도 있지 않은가? 하물며 벨져라는 사람이. 이건 해도해도 너무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벌써 자려고?”
문가에 기대어 선 채 말끝을 올렸다. 누워있지만 아직은 잠들지 않았을 것을 안다. 명확한 질문에 등 돌린 어깨가 꿈틀거렸다. 벨져, 정말로, 지금, 잘, 생각이오? 음절마다 악센트를 주며 끊어 묻는다.
누운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어깨까지 올라가있던 이불이 아래로 흘렀다. 벨져는 제 형마냥 미간을 잔뜩 좁히고 짜증스레 되묻는다.
“너는 밤에 수면을 취하는 게 이상하다고 하는 건가?”
이게 육체적 관계를 맺고 감정 교류를 하는 사이에 할 대답인지 뭔지. 사람의 감정에 이해가 없는 건 아니니만큼 벨져의 대답은 한마디로 툴툴대지 말고 잠이나 자라 이 뜻인 건 확실하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냥 물러설 릭도 아니다.
“너무 이르잖소. 그대가 평소 자던 시각보다 세 시간은 빨라.”
들으라는 듯 평소를 강조한다. 릭의 대답에 벨져가 릭을 흘겨보고는 입을 다문다. 딱히 뭐라 할 말은 없을 것이다. 벨져의 성격상 순순히 지금은 몸이 착한 어린이라서, 라고는 절대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 그 세 시간동안 내가 해야 할 게 남았나?”
“아주 많지! 예를 들자면….”
예를 들자면. 뒤에 이어질 말을 어디까지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상 순간이 오니 말문이 막힌다. 원래 예정으로는 「와인이나 한 잔 하면서 침대에서 뒹구는 건 어떻겠소.」 같은 거였지만 벨져와 눈을 마주한 순간 그 말은 쏙 들어가버린 게 아닌가. 그도 그럴 것이 저렇게 귀여워진 애인의 아래 구멍에 제 것이 들어가기는 할까 하는 의문이 머리를 스친 탓이다.
벨져를 빤히 보는 녹색 눈이 가늘어진다. 고민과 함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아……. 열린 입 사이로 멍청한 소리가 샌다. 작아졌다고 좋아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작아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불에 몸의 반을 담그고 있으니 제대로 보이지를 않아 더 가늠이 되지 않는다.
벌써 일주일이나 되었는데 어찌 파악한 게 없느냐. 여러모로 겨를이 없기야 했다. 열흘은 상대가 사경을 헤맸고 일주일은 이 믿을 수 없는 사태에 적응하는 데만도 벅찼으니까.
정말 쥐똥만 해졌다고만 생각했지. 구체적으로 뭐가 얼마나 어디까지 가능한 정도로 작아졌다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머릿속까지 저 나이 또래로 회귀했다면 좀 심각한 문제였겠지만. 칼이 자기 키만 해진 탓에(정확하게는 반대겠으나) 휘청이는 것을 빼면 쓰던 칼도 잘 휘두르고. 하는 짓이나 말도 여전히 스물여섯의 벨져 홀든 그대로였으므로.
성적인 요소는 잠시 배제하도록 하고. 남는 건 문 뒤에 슬쩍 감춰둔 와인뿐이다.
“예를 들어…나와 함께 와인을 즐긴다거나?”
생글생글 띄우는 미소는 작위적이기까지 하다. 흐음. 짧은 콧소리. 이것만으로도 이어질 대답은 뻔하다.
“그렇군. 그건 다음에 즐길 여흥으로 남겨두도록 하지.”
그런 말이나 하며 다시 돌아누우려는 벨져에게, 벨져가 완전히 돌아눕기 전에 소리친다.
“벨져 지금 너무 매정한 거 아닌가!? 열흘이나 성심성의껏 그대 뒷바라지를 하고 지금도 일주일이나 애아빠가 되어있는 내 생각은 하지 않는군! 무리한 부탁도 아니고 고작 와인이나 같이 홀짝이자는 거 아니오. 그것마저 매몰차게 거절하다니!”
쪼잔한 서러움이 폭발했다. 당사자가 아니면 딱히 받아줄 사람도 없기에 더욱 폭발하는 감정이다. 지 냉혈한 같은 검사와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야 툴툴거리며 털어놓기라도 할 텐데. 애석하게도 관계를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의 혈육마저도 벨져가 릭과 함께 있으면서 무엇을 하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는 사실과 전혀 다른 예상을 하고있겠지. 작은형이, 혹은 동생놈이 그럴리 없다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간에 애인이라는 작자가 오밤의 오붓한 데이트를 거절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벨져의 저 선선한 반응이 처음인 것도 아니고. 자주 있던 일이건만 왜 이렇게 미묘한 기분일까. 물론 평소라고해서 저런 반응을 좋아한 건 아니다. 하물며 이런 때는.
자제분 선물이신가봐요. 아버지랑 밥먹으러 왔니? 어머, 아이가 참 곱네요. 사모님이 미인이시겠어요.
눈이 절로 찌푸려진다. 분명 애인이 맞는데…. 며칠간 들었던 말들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쿡쿡 찌른다. 사실과는 백만광년 떨어진 말들이긴 하지만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이해한다.
‘이거 애인이라기 보다 부모자식이군.’
그런 생각을 간간히 하기는 했다. 저만한 나이의 애가--그래 있을 수도 있지. 불가능하지는 않다. 물론 벨져는 절대로 자신의 씨로 태어난 친자식은 아니지만, 닮지도 않았지만. 제아무리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낭만적인 장소에서 데이트를 한다 헌들 연인으로 볼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좋게 봐줘야 조카삼촌으로 보일까. 그리 생각하니 더 서운해졌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그대 혼자 나갈 수 없으니 따라다녀야 하기까지 하지. 이래서야 연인은 커녕 친구도 아니고 내가 무슨 그대 아버지쯤 되는 것 같군. 뭐 이래봬도 나도 슬슬 그대만한 애가 있을 수도 있는 나…….”
나이, 라고 단어를 끝마치기도 전에 벨져가 콧소리를 흘렸다. 호오. 말을 가로채는 반응에 릭은 조금 짜증이 났다. 꽤나 한참 아주많이 작아진 연인이 못미더운 얼굴로 릭의 눈을 흘긴다.
“네 나이에 이만한 애가 있다는 건 어른이 되자마자 사고를 쳤거나, 어른이 되기 전에 사고를 쳤다는 뜻인데. 꽤나 방탕한 젊은 생활을 보낸 모양이야?”
“예시요 예시. 그런 느낌이라는 거지. 거참 까다롭군.”
툴툴거리는 몸짓이 그야말로 아동수준이다. 누가 애인지. 벨져는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으나, 릭이 자신을 위해 애를 써준 것도 사실이다. 와인 정도야 나쁘지 않겠지.
“알겠다. 정 원한다면 한 잔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까지 내보이고 싶어하는 와인이라…기대해도 되겠군?”
그렇게 두 사람은 거실에 앉아 잔을 기울였다. 값비싼 와인은 아니어도 분위기만 괜찮다면야 제법 맛이 좋다. 거기에 함께 잔을 드는 사람이 현시점에서 누구보다 마음이 가는 인물인데 오죽할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술맛 자체가 그렇게까지 좋다고는 하기 힘들었으나 이 정도면 마실만 하고, 결론은 아무래도 좋다. 벨져도 같은 생각일까, 하는 불안은 뭐 본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잘 마시니 괜찮은 거겠지.
맛은 그럭저럭인 주제에 도수는 높은 모양이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알코올에는 강한 편이라고 자부하는 편인데. 고작 이 정도에? 싶으면서도 눈앞이 흔들흔들 일렁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머리가 흔들리는 것도 같고.
얼마나 마셨더라. 탁자 위로 놓인 빈 병을 세어본다. 하나, 둘, 셋……. 몇 잔이 아니었군. 설마 취기 탓에 병을 잘못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싶어 손으로 하나하나 확인까지 해본다.
두 병째의 절반 정도까지는 정신이 말똥했던 기억이 난다. 평소처럼 실없는 소리도 주절주절 늘어놓아 보고. 벨져는 듣는둥 마는둥 잔을 비우고.
릭이 벨져와 그럭저럭 좋은 관계가 된 이래 술잔을 함께 기울인 것도 슬슬 셀 수 없을 정도는 된다. 처음에야 어딘가 금욕적일 것같은 이 청년이 술을 즐길 줄은 알까? 하는 걱정이 있었으나. 의외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역시 귀족이라고 해야 할까. 릭이 술을 권할 때면 벨져는 크게 거절하는 법이 없었고 오히려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취하지 않는 선에서 잔을 멈춰 버리는 건 그가 자신을 얼마나 파악하고 있고 자제력을 갖추고 있는 지에 대한 척도라고 해도 괜찮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철통 같아서야 같이 술을 마시는 재미가 없다.
취해서 어디 가로수를 끌어안고 울거나 하기를 기대하지는 않았어도. 좀 휘청거리거나 몸을 기대오는 정도의 가벼운 술주정 정도야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제 아무리 철통 같은 벨져 홀든이라 해도 인간이다. 계속 마시다 보면 언젠가는 취할 텐데. 문제는 어떻게 해야 계속 잔에 입을 댈까라는 점이겠지.
릭 톰슨은 이 문제에 대해 아주 많은 고민을 했다. 술을 계속 마시게 해야 하는데. 무릎 꿇고 빌면서 그대가 술독에 빠져서 헤롱대는 모습을 보고 싶으니 제발 계속 마셔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기절시켜놓고 목에 들이부을 수도 없다. 아니 물론 릭에게 벨져를 술자리에서 기절시킬 방법이 있느냐 하면 당연히 없지만서도. 그렇다고 벨져에게 혀가 없는 것도 아닌데 물이나 음료를 술로 바꿔두는 것도 불가능한 수단이고.
쉬운 길은 아니지만 한 번쯤은 보고 싶다. 작은 욕망이 인간을 움직인다.
릭 톰슨은 계속 노력했다. 그렇게 짧지만은 않은 기간 동안. 결과적으로 릭은 스스로 알아낸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수단을 알아냈다.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아주 많이.
한 밤중에 벨져로부터 호출이 있었다. 이런 밤중에 무슨 일인가 싶어 한걸음에 달려가니, 평소보다 나른해보이는 벨져가 평소보다 입을 일자로 꾹 다문 채 골목에서 팔짱을 끼고있는게 아닌가. 눈을 반쯤 감은 꼴이 졸고 있는 것도 같았다.
“무슨 일이오?”
얼굴을 살피려 반 발짝 앞까지 다가간다. 동시에, 릭은 벨져의 이 기묘한 태도가 무엇에 기인하는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지독한 술냄새.
많이도 마셨군. 허허헛 허탈하게 웃고나서야 이 사람이 이렇게 마시던가 하는 의문이 머리를 스친다. 누구랑 마셨길래? 내 앞에서는 그렇게 마시지 않는데. 그런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벨져의 입이 스스로 밝혔다.
“릭, 들어봐. 제레온 경과 오랜만에 긴 이야기를 나눴지.”
제레온 프리츠. 저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때마다 입가가 실룩거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벨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작은 웃음을 흘려댄다. 후후. 아니 그게 뭐가 즐겁소? 따지듯 묻고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벨져를 들쳐 업었다.
그 뒤로 지독하게 연습했다. 취한 벨져가 입에 담았던 단어나 문장을 바탕으로 어떤 식으로 마셨을지를 추론하는 식이었다. 처음 방법을 찾고, 한 서너 번쯤 반복하다 보니 제법 요령이 붙었다. 부추기는 타이밍이나 칭찬하는 방향 등. 어떤 때 술을 더 부어주고 어떤 때 같이 홀짝이고, 어떤 점을 칭찬하면 되는지. 벨져는 그 성질이 릭이 평소 대하는 보통 사람들과 많이 달랐으나 변칙이라는 게 별로 없는 사람이므로. 한 번 법칙을 머리에 익혀두고 거기에 충실하게 대응하면 될 노릇이었다. 게다가 더 먹이는 것에 치중한 나머지 릭 자신은 덜 마시게 되고, 결과적으로 점점 술에 잠기는 애인을 아주 말똥한 정신으로 볼 수 있게 되니 어찌 바라던 바가 아닐 수 있겠는가.
다만 오늘은 딱히 그렇게 먹일 생각은 아니었다. 그랬는데도 버릇처럼 몸에 밴 대로 부추겨버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이미 하염없이 병을 비운 뒤였다. 게다가 그럴 셈이 아니었으니 그만 덩달아 자신까지 계속 마셔댄게 아닌가. 그 결과가 이 헤롱거리는 머리다.
날숨에서 풍기는 술냄새가 지독하다. 머리가 울린다. 벨져는 벌써 한 병쯤 전에 뻗어 눈을 감은 채다. 먼저 나가떨어졌다고는 해도 릭보다 두 병은 더 마신 것 같긴 하다. 아무리 독한 술이라는 걸 감안한다 하더라도 평소의 그보다 일찍 방전되긴 했는데…뭐 몸이 반토막난 탓이겠지.
소파 팔걸이에 엎드린 몸을 일으켜 제 허벅지 위로 머리를 얹었다. 완전히 감긴 눈은 도통 뜨일 줄을 모른다.
“벨져, 이런 데서 자지 말고 침대에 가서 자는게 좋겠소.”
뺨을 톡톡 쳐봐도 반응이 없다. 벨져~, 벨져 일어나시오~. 흔들어도 묵묵부답. 볼을 다시 세게 쳐봐도 움직이지 않고. 어디 왕자님마냥 키스라도 해볼까 허리를 숙였지만 훅 풍기는 알코올향에 그럴 생각이 사라진다.
등받이에 몸을 푹 파묻고 힘을 뺀다. 나른한 눈으로 바라본 하얀 머리통은 역시 작고 몸도 마찬가지다. 정신이 멀쩡할 때야 워낙 태도가 위압적인 탓인지 그가 크게 달라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잠든 꼴은 영락없는 어린애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누가 보면 이런 어린애한테 술을 얼마나 먹인 거냐고 화를 내겠군.
하얀 머리를 쓸어만지며 감상에 젖는다. 정말 작다.
‘이렇게….’
완전히 남 일처럼 그런 생각도 든다. 애가 아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좋게 봐줘야 조카뻘인 어린애겠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쪼그라들다니…….’
눈물이 핑 돌고 물기가 눈앞을 가리고. 인생아. 그런 세 글자도 떠오른다. 릭 자신보다야 벨져의 인생이 더 큰일이겠지만 그런 벨져를 연인으로 둔 제 인생도 슬프다면 슬프지 않겠는가. 아직 어디 가서 애인이라고 말도 못 해봤는데 그 길은 더 요원해질 뿐이니. 벨져라면 어떻게든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내겠지만 일단 그때까지는 그럴 것이다.
물기 어린 눈을 손등으로 훔쳤다. 제 무릎을 베고 가로누운 몸을 스윽 훑어본다.
작아진 걸 누가 모르겠냐마는, 이렇게 보니 더 작다. 허벅지가 널널하게 남는 머리크기하며 오밀조밀하게 자리잡은 눈코입.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하얀 손. 조물조물해서 기분 좋아지는 보드라운 피부야 마음에 들지만 이건 작아도 너무 작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이래서야 들어갈 것 같지가 않군.’
역시나 원래보다 훨씬 작아진 골반 언저리를 보며 한숨을 쉰다. 설마 일어날까. 몸을 당겨 안으로 끌어안고, 옆으로 굴린 등을 어루만지다가. 슬쩍 손을 내렸다.
벨져 홀든의 골반이라니. 전세계 통틀어 만져본 사람이 몇 없을 곳이다. 릭이라고 해서 항상 주무른 건 아니고 기껏해야 침대에서나 슬슬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가 전부였다. 벨져의 성격을 생각해볼때 만져서 그렇게 환영받을 곳은 아니긴 하다. 일단 잡아 벌려야 뭘 갖다 넣든 말든 하지 않겠는가. 만지작거리다보니 누운 몸이 움찔거려 호흡이 멎을 뻔 했지만 역시 눈을 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엉덩이도 작고. 골반도 좁겠고. 당연히 넣을 구석도 좁겠지. 눈대중으로 계산을 해본다.
성욕 해소만을 위해 유지하는 관계는 절대 아니다. 정 안 되겠다면야 금욕생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래도 시도도 해보지 않고 뒤로 물러서지는 않을 거지만.
가만히 고민해본다. 손대중으로는 영 들어갈 것 같지가 않은데. 처음 벨져와 잤을 때도 그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벨져의 신체 사이즈가 전부 훨씬 작다. 역시 무리일까? 저 정도 되는 애랑 어떻게 성행위를…. 아니, 아니지…. 애가 아닌데.
‘못 할 건 없나?’
물론 평범한 애라면 될 리가 없다. 하지만 평범한 아이가 아니니까. 본인의 그 무거운 칼도 평소보다 느리지만 잘 휘두른다. 칼이 자기 키만 한게 문제일뿐. 껍데기는 멀쩡했을 때의 반타작 이하일지언정 벨져는 역시 벨져 홀든. 생각해보니 딱히 가여워하거나 봐줄 것도 없지 않은가. 작아져도 벨져는 벨져고 평범한 아이와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제로 딱히 평범한 어린아이처럼 보고 있지 않기도 하고. 어차피 벨져도 이전과 같이 대하지 않으면 화를 낼 테니까. 모든 면에서 예전과 똑같이 대해야겠지.
그래. 벗겨서 한 번 박아봤다가 정말로 정 무리겠다 싶으면--…. 생각해보니 굳이 아래에 넣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즐기는 방법이야 많다. 이미 서로 볼 거 다 본 사이에 그 정도야 부탁하면 들어줄 테니.
왼손으로는 하얀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오른손은 골반에서 엉덩이 근처를 슬슬 쓰다듬는다. 이렇게 머리만 굴려봐도 명확한 해답이 결정나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 탁상공론일 뿐이다. 직접 해보지 않고 해답을 얻을 수는 없다.
이전 같았더라면 이런 헤롱헤롱한 상태로 얼싸안고 침대에 굴러들어갔을 텐데. 그랬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오늘은 벨져가 먼저 곯아떨어졌으니 어찌 해야 할지.
벨져 일어나시오 그렇게 꿈 속이 좋소? 나보다? 벨져~ 그대의 제레온 경이 부르시던데. 벨져~ 그대 형 되는 사람이 쫓아오고 있어! 벨져!
갖은 소리를 다 해도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들린다. 아니, 쌕쌕거린다니, 이런 데서만 아이같이 굴고 너무하지 않은가. 뺨도 찰싹찰싹 쳐보고 흔들어도 보았다. 은근슬쩍 방금 쳤던 뺨을 조물락거리다가 잡아당기고 귀도 좀 만져보고 가슴에 손도 넣어 장난질도 해봤는데 웅얼거리지도 않는다.
이쯤이면 당혹스럽다. 설마 벨져쯤 되는 사람이 아무리 몸이 이 꼴이라고는 해도 고작 술 탓에 정신을 완전히 잃어 못 일어나는 건 아닐 테고. 깊게 곯아떨어진 모양인데, 이거 정말 집어넣기 전에는 안 일어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니, 오히려 기회가 찾아왔나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기회. 기회일지도 모른다. 기회인 것 같기도 하다. 기회라면 기회겠군. 그것이 도대체 무슨 기회냐 하면, 제아무리 침대에서 우위를 선점한다 해도 쉽게 할 수 없는, 한마디로 이 애인을 마음대로 주물러볼 기회쯤 되겠다.
병이라도 나지 않는 이상은 릭보다 늦게 잠들고 일찍 일어나던 사람이다. 이따금 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해도 워낙 신경이 예민해 조금만 움직이거나 기척이나면 금세 눈을 번쩍 뜨곤 했다. 릭은 으레 벨져를 놀래키거나 하는 장난을 치고 싶어 했지만 저런 철벽같은 요새를 어떻게 공략할 수가 있었겠는가.
오후부터 갑작스레 장대비가 쏟아졌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니 바래다 주기라도 할까. 그런 생각은 약간의 배려와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사심의 결론이다. 커다란 장우산은 하나만 잡고. 여름에는 약간 덥지 않을까 싶은 긴 코트를 둘렀다. 이어진 공간은 릭을 조용한 복도로 안내한다. 얇은 우주를 경계로 공기가 사뭇 달랐다. 물냄새가 독하다. 푹신한 융단 위로 구둣발이 떨어진다.
오래된 건물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난다. 제아무리 닦고 쓸어도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흔적은 지금 이 건물에서 가장 지위가 높을 이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무거운 문은 나무로 되어있다. 노크를 했다. 네 번. 똑, 똑, 똑, 똑. 약간의 시간을 두고 대답이 돌아온다. 들어와.
힘을 주어 문을 열고 인사를 했다. 좋은 저녁이군, 일은 끝났소? 창가에 서있던 하얀 사람이 뒤를 돌았다.
“무슨 일이지?”
“아, 우산을 가져왔소. 비가 워낙에 갑작스러웠으니 아무리 벨져 당신이라고 해도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멋쩍게 웃으며 우산을 들어보인다. 흐음. 벨져는 릭과 우산을 잠시 번갈아보더니, 검지로 책장 한 쪽을 가리켰다.
“있다.”
“음?”
“우산 말이다. 집무실에 하나쯤은 예비용으로 두고 있지.”
저기에. 벨져의 손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확실히 검은 우산이 하나. 릭이 들고온 것보다야 작지만 그렇다고 아주 작은 것도 아니다. 아마 비싸기는 저게 더 비싸겠지.
정말 치밀한 사람이군. 릭은 내심 혀를 찼다. 사람이 좀 틈이 있어야 거길 잘 만져볼텐데. 벨져 홀든이라는 사람은 영 그 틈이라는게 보이지를 않는다. 칼이라도 들고 틈을 내줘야 할까.
그렇다고해서 포기할 릭은 아니다. 한 번 더 끈질기게 붙어보기로 했다.
“뭐, 내 우산이 더 크니 이거 하나면 충분하지 않겠소? 훨씬 합리적이고.”
합리적. 이라는 단어가 들리자마자 벨져가 소리내어 웃었다. 뭐가 그리 재밌소? 퉁명스레 물으니.
“제일 합리적인 방법은 네가 손 한 번 까딱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 비는 구경할 필요도 없지.”
라고 답하는게 아닌가. 맞는 말이다. 이럴 때 자신의 능력은 정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굳이 능력을 쓰지 않는 것에도 이점이 있다는 것을 릭 톰슨은 아주 잘 안다. 그러한 것이 자신의 신조이기도 하고.
“거참 재미없는 사람이야. 그래서야 낭만이 없잖소.”
“이상한 녀석. 그래. 우산은 네 것을 쓰도록 하지.”
벨져가 쿡쿡 웃으며 코트를 걸친다. 책상 위에 서류는 없고, 준비는 끝난 거겠지. 우산을 한번 탈탈 털어 본다.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장갑을 낀 기사가 릭의 곁으로 다가왔다.
“근처에 좋은 식당이 있던데, 생각이 있으면 잠시 들러도 좋겠고. 어떻게 생각하오?”
싱글싱글 웃는 릭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딘가 그의 평소 모습보다 유해보였다. 부드럽다기 보다는 무언가 어리숙한. 속을 떠보려는 것처럼 녹색 눈을 빤히 들여다본다. 호기심 넘치는 어린아이 같기도 하다.
왜, 왜 그러시오. 그렇게 묻기도 전에. 벨져의 입이 열린다.
“릭.”
부름은 언제나처럼. 다만 조금 더, 처음 보는 표정, 반응.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로의 거리는 얼추 세 걸음 정도. 멀지도 가깝지도 않다. 벨져의 질문은 릭을 새빨갛게 만든다.
“나를 좋아하나?”
빗소리가 요란한 날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벨져는 언제나 릭의 예상을 넘어선 행동을 하곤 했는데. 그 때가 가장 그랬었다고 릭은 회상한다. 항상 그렇게 되기를 원했지만 지금은 그저 자신의 공상에 불과하다고 릭은 언제나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자신에게 보이는 호의는 분명 타인에게 향하는 호의보다 더욱 향기롭고 진했지만. 그렇지 않은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허락하는 행위라니. 벨져 홀든에게는 끔찍하게 어울리지 않는다.
언제나 고결하고 티 없는 그이기에 갈망했으나 그렇기에 인내심이 필요했다. 상처주지 않고 곱게 쓰다듬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때로는 호기심이 저 밑바닥에서 고개를 들곤 한다. 그대가 어디까지 나를 허락해주는지에 대해.
ㄷㄲㅅ님 영화AU합작에 낸 ㅇr가씌AU입니다 릭벨.
영화설정 다뜯어고쳐서 이걸 AU라고해야할지도 참...orz
합작주소는 여기 http://rlaalswl8421.wixsite.com/rickbelzer-cinema
작고 딱딱한 기계 상자를 어루만지며 생각한다. 순간을 가두려 한다면. 응어리지는 물감 덩어리보다는 역시 이쪽이 아니겠는가. 자 그러면 찍겠소. 떨리는 목소리는 바람에 가려져 닿지 않을 것을 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손끝에 힘을 주었다. 손 끄트머리로 눌리는 감촉에 가슴이 뛴다. 찰칵. 짧은소리와 함께 흑백으로 새겨지는 눈앞의 피사체. 재색으로 남겨질 푸른 두 눈이 렌즈 너머의 릭 톰슨을 똑바로 응시했다. 입가로 미소가 퍼진다. 자연스레 고개가 올라간다.
“이제 됐소.”
허가와 함께 벨져의 눈이 깜빡였다. 긴장이 풀린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릭은 능숙한 솜씨로 렌즈에 다시 뚜껑을 씌운 뒤 그 곁으로 다가갔다.
늦여름의 눅눅한 바람이 살갗을 스쳤다. 짧은 소매 아래로 뻗은 팔에 드리운 그림자가 일렁거린다. 청년에 가까워져 가는 몸을 가리는 단정한 하얀 블라우스. 어깨에 걸친 검은 멜빵끈을 다듬어주고 머리 위로 떨어진 나뭇잎을 치운다. 잠시 다른 방향을 향했던 시선이 다시금 릭을 흘겼다. 어깨로 손을 얹어 가볍게 주물러준다.
“현상을 해봐야 알겠지만. 분명 잘 나왔을 거요.”
벨져가 작게 코웃음 쳤다. 릭도 받아치듯 입꼬리를 올린다. 한 발 옆으로 서서 철로 된 의자를 끌어 곁에 놓았다. 단정한 도련님은 자연스레 그 위로 몸을 내린다.
실제로도 그러하지만, 실로 고귀해 보이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귀족도 귀족이고 어디 유명한 배우의 외동아들이라 해도 믿지 않을까. 벨져 홀든이라는 사람을 만난 이래 처음 보는 부류의 복장. 늘상 몸에 걸쳐야 했던 화사한 프릴도 레이스도 치맛단도 없는 딱 그 나잇대 남자아이의 모습. 벨져가 가졌어야 할 본연의 모습일 것이나 릭이 그의 곁에 있는 목적과는 상반되는 형태임이 분명하다. 그리 생각하니 어째 입꼬리가 자꾸만 들썩이며 웃음이 나왔다.
릭은 한 발 뒤로 물러나 제 모습을 살피는 벨져를 위아래로 훑는다. 싱글싱글 입가에서 미소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쿡쿡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 즐거워 보이는 소리에 릭을 벨져가 눈을 흘기며 노려본다. 실례했군. 입가를 가렸다.
“그리 입으니 어디 귀하신 도련님 같아?”
“나를 향한 조롱인가?”
“어울린다는 뜻이오.”
미소 짓는 변명에도 서늘한 눈매는 그저 릭을 쏘아볼 뿐이다.
“치렁치렁한 것들뿐인 이 집에서 용케 이런 옷들을 찾은 건 칭찬하겠어.”
“찾다니, 다 몰래 들여온 것들이야. 저번에 외출했을 때 슬쩍 사 왔소.”
호오. 벨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한 번쯤은 이런 모습도 보고 싶었을 뿐이오. 그대를 아리따운 숙녀분으로 만드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지만….”
“직무 태만이군.”
“말을 그렇게 해도 마음에 드는 모양인데.”
“치렁치렁한 드레스보다야 훨씬 나은 정도다.”
당신이 그리 싫어하는 그것들도 당신에겐 잘 어울리는데 말이오. 릭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어떻게든 다시 밀어 넣는다. 입 밖으로 내뱉어봤자 저 기분 좋아 보이는 예쁜 얼굴이 험악해질 뿐 아니겠는가. 간만에 들떠있는 사람을 굳이 긁어댈 필요는 없다.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겨울이 끝나가던 무렵. 한 대의 차가 릭 앞에 멈춰 서던 순간을 기억한다. 척 보기에도 누군가는 인생을 바쳐도 타지 못할만한 고급 차. 평범한 시장골목이다. 순식간에 차와 자신에게 집중되는 이목에 피부가 따갑다.
드르륵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와 함께 차창이 내려오고 시선이 맞았다. 반쯤 감긴 꺼림칙한 눈. 희끗희끗한 머리가 섞인 나이가 제법 있는 남성이다. 깜빡깜빡. 어두운 눈이 릭을 비춘다. 다물려있던 입술이 느릿하게 열린다.
릭 톰슨?
남자는 정확하게 릭의 이름을 읊었다. 대답을 해야 하나? 잠시 턱을 긁적이고, 넉살 좋은 미소를 띄운다.
“그렇소. 이런 곳까지 찾아오다니. 나도 꽤 유명인인가 보군.”
“사교계에서는 알음알음 알 사람은 다 알지. 어디든 홀연히 나타나 파티장을 휘저으며 십년지기처럼 어울리고 스윽 사라지는 유랑남작. 풍류에 능해 시는 물론이요 악기도 그림도 높은 수준으로 해낸다더군?”
창밖으로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이 작은 종이를 건넨다. 릭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명함이다. 화가. 몇 번인가, 아니 제법 자주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귀족들 입에서 종종 오르내리던. 릭도 몇 번인가 살롱에서 그의 그림들을 본 적이 있다.
주로 아름다운 여성의 인물화를 그리는 나이든 화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적당히 걸어둘 만한 인물화를 그린다고만 알려져 있던 그의 존재는 어떤 모델을 그리게 된 것을 기점으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거물이 되었다. 뮤즈라고 해야 할까? 간간히 받던 초상화의 의뢰를 전부 거절하고 저택에 틀어박혀 거진 나오지 않게 된 시기. 그를 돈방석과 명예의 산에 올려준 그림의 주인공. 만난 사람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하는, 실존 여부조차 불분명한 누군가. 언젠가 본 그림을 떠올린다. 하얀 머리카락, 푸른 눈.
릭은 명함에 시선을 떨어트린 척하며 흘끗 눈을 치켜떴다. 시선을 들었다 내렸다 남자의 안색을 살핀다.
“그래서 용건은 뭐요?”
별것 아닐세. 갖은 것에 능한 자네의 재능을 높이 사서, 가정교사를 부탁하고 싶은데…….
낮고 질척한 음성은 귀를 통해 들린다기보다 머릿속으로 직접 울리는 형태에 가깝다. 머리에서 시작된 오한이 등줄기를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몸이 부르르 떨린다. 숨을 참는다.
여기까지 습하고 음험한 것이 진정 사람의 목소리라는 사실에 릭은 적잖게 놀랐다. 지금껏 많은 사람을 만나고 대해보았지만 이렇게 기색이 음습한 사람이 있던가. 깜빡이는 녹색 눈으로 몇 번인가 보아온 그의 작품들이 스르륵 스쳐 지나간다. 액자 속에 담겨있던 화사한 모습의 숙녀들. 고결하고 귀품있는 모습은 보는 이를 밑도 끝도 없는 황홀경에 이르게 했다. 그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장본인이 이 탐욕스러워 보이는 노인이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보수는 두둑하게 주겠네. 따라오겠나?”
“정확하게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따라오라는 거요?”
자네에게 절대 해가 될 일은 아닐세. 자네가 가진 재주를 가르쳐주기만 하면 충분해. 물론 지켜줘야 할 비밀은 있다네. 이건 자네가 입을 다물기만 하면 될 노릇이지. 아주 간단해.
남자의 말과 겹치듯. 이틀 전, 술집에서 술을 내밀던 사내의 목소리가 귓가에 떠오른다. 잠깐 시간 괜찮나? 20대 후반. 많아야 30대 초반? 아직 그다지 나이가 들지 않은 남자였다. 많아야 릭보다 다섯 정도 위일까. 차려입은 옷에서 그가 가졌을 명예 혹은 부가 엿보인다.
릭 톰슨, 맞지?
그래. 차에 탔던 남성이 했던 말과 아주 비슷하게, 이틀 전에 만났던 남자는 릭에게 아는 체를 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남자는 한 손에 술병을 흔들며 더욱 살갑게 말을 건네왔다는 정도일까. 한 삼 년 정도 알고 지낸 사람처럼.
남자는 자연스레 의자를 당겨 릭의 옆자리에 몸을 앉혔다. 이거라도 받게. 그리 말하며 능숙한 손길로 들고 온 와인의 코르크를 딴다. 향기만으로도 취할 수 있으리만치 농후한 와인의 향이 폐로 들어찬다. 흘끗 엿본 라벨에 적힌 게 사실이라면 제법, 아주 값비싼 것임이 분명했다. 싸구려 술집의 술잔에 따라지기에는 영 어색한 향을 맡으며 잔에 입을 댄다.
마음에 드나? 싱글싱글 웃는 남자는 도통 속을 알 수가 없다. 릭은 듣는 둥 마는 둥 와인을 한잔 홀짝였다.
“뭔가 용건이라도 있소? 질질 끄는 건 질색이니 빨리 말해주면 좋겠군.”
“성질이 급하군? 여튼. 머지않아 어떤 남자의 시종이 당신을 찾아올걸세. 당신의 재주를 높게 사서 말이지.”
술집의 시끄러운 분위기 탓인지 남자의 말은 어딘가 멀게 들렸다.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닌 것처럼.
그 남자가 데리고 있는 걸 빼돌릴 수 있겠나? 보수는 두둑이 주겠어. 평생을 먹고 놀아도 남을 만큼. 그 이상이라 약속해도 좋아. 자세한 건 당신이 그곳에 가게 되면, 내가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잘 생각해 봐.
와인의 향이 아직도 코끝에서 맴도는 것만 같다. 가다듬어지지 않은 도로 위에서 차가 흔들렸다. 머리가 울릴 정도로. 쉴 새 없이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릭은 밖을 내다보며 며칠 전의 만남을 되새겼다.
남자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무언가의 의뢰를 가지고 온 것은 사실이었으나 찾아온 건 시종이 아닌 본인이었다. 시종에게 맡기지 않고 그 화백이 스스로 나올만한 무언가. 생각보다 비밀스런 문제인 걸까?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 손발이 차갑게 식어가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일상에서 약간의 스릴을 즐기는 자신의 성질 탓이겠지.
그래. 위험하다 싶으면 도망치면 될 노릇이다.
교외로 나오고 한참이나 더 시간이 걸린 뒤에야 저택의 입구가 보였다. 주변으로 시선을 돌린다. 담장이 워낙 높아 지붕 끄트머리 이외에는 보이질 않는다. 집을 모두 가리는 담장의 꼭대기에 뾰족하게 솟은 창살들 눈길을 끈다. 무슨 감옥도 아니고. 릭이 눈을 가늘게 뜨니, 그런 반응을 알고서인지 아닌지 노인이 말을 툭 던졌다. 도둑 대비를 단단히 해두었지, 값진 게 많으니 말이야. 그렇습니까. 대화가 끊긴다.
차에서 내려 저택으로 들어선다. 담장이 넝쿨이 얽히고설킨 저택 오후의 태양을 등지고 있었다. 하녀 서너 명이 주인과 손님을 맞이하는 것도 잠시. 주인의 코트를 받아들자마자 고용인들은 어디론가 스르륵 사라지고 릭만이 남자의 뒤를 따랐다.
해가 들지 않는 복도. 군데군데 걸린 온갖 여성의 초상화와 꽃의 정물. 간간히 한줄기씩 스며드는 햇빛에 뽀얀 먼지가 빛을 받아 반짝인다. 구둣발 소리가 귓가로 울렸다. 지팡이가 이따금 바닥을 세게 친다.
문을 두 개 지나고, 야외 복도를 건넌 뒤, 다시 문을 하나 열었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 별채의 가장 깊숙한 곳. 더는 앞이 없어진 뒤에야 발이 멈춘다. 남자가 문을 연다. 손잡이를 돌리고 슬쩍 밀고는 지팡이로 툭 쳐서 속을 까집어 낸다.
새빨간 커튼이 창을 틈새 없이 가린 방이다. 오후의 밝은 빛에 방이 온통 붉게 범벅이 되어있다. 이리저리 내던져지듯 걸리고 널린 화사한 드레스들이 눈길을 끈다.
구석구석 놓인 귀여운 인형들과 화장품이 가득한 탁자. 꾸민 모양새로 보건대 성인의 방은 아닌 듯했다. 여자아이의 방인가? 칸막이 너머로 침대에 드리운 검은 천이 엿보인다. 그 아래 빨간 융단 위에 벗어놓은 하얀 구두도.
가정교사를 부탁한다고 했던가. 릭은 남자의 말을 떠올리고 의문을 품었다. 뭘 가르치게 하려고? 대개 애지중지하는 자식이면 남자 선생보다는 여자를 붙이려 할 텐데. 이렇게 품에 쥐고 밖에 내보이지 않는 여자아이라면 더욱. 하물며 이리저리 떠도는 젊은 남자를 선생으로 쓴다고?
“아까 재워두었으니 아직 자고 있을 걸세. 날이 선 아이거든. 입만 열면 영 귀염성이 없지. 갈 길이 멀어. 이리 오게.”
남자가 성큼성큼 칸막이 쪽으로 다가가 손짓했다. 릭은 그제야 방에 홀린 듯 입구에 멈춰있던 걸음을 옮긴다. 복도보다 훨씬 푹신하게 깔린 융단에 구둣발 소리가 스며든다. 하얀 드레스가 풍성하게 걸린 칸막이 너머, 검은 천 아래의 침대. 침대에 누워 잠든 인물을 릭 톰슨은 본 적이 있다. 하얀 눈꺼풀 아래에 있을 푸른색을 안다. 엄밀히 말해 실물은 아니고 초상화였지만.
저도 모르게 손이 입을 막는다. 이런, 혹은 맙소사 따위의 진부한 감탄조차 잊었다. 침대 위로 길게 드리운 검은 천. 그 사이에서 그야말로 하얗게 잠든 ‘소녀’는….
‘인형 같군.’
아니 인형보다 더하지. 그렇게 생각을 고친다. 입고 있는 드레스만큼이나 하얀 머리카락과 피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십 대 중반 언저리의 아이는 어디 비싼 인형보다도 아름답고 만지기에도 즐거울 것이다. 이러니 밖에 내보이지를 않았군. 소문으로 들려오던 남자의 행적이 단번에 이해가 된다.
모델이 바뀐 이후의 그림은 이전보다 보이는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더욱 비싼 값에 불리게 되었으니 작품이 더 돌아다닐 법도 한데. 대개 걸린 그림은 아직 모델을 바꾸기 전들의 그림이 허다하고, 그렇게 좋은 모델을 그리더라라는 말만 무수했던가. 이따금 화려한 모임에 가면 반드시 몇 점씩 걸려있곤 했지만, 이전의 그 여기저기 걸려있던 화가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그림이 희귀해졌다. 게다가 그 몇 점 조차도 풍문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별거 아니고 진짜배기는 손에 넣고도 내보이지 않은 채 고이 모셔둔다더니. 이정도 모델이라면야 숨겨둘 그림이 있을 법도 하다.
릭은 그동안 그림을 적게 푸는 원인을 희소성을 위해서라고 추측했다. 허나 지금 짧은 순간 동안. 남자의 모든 것을 이해한 듯한 확신이 머리를 스쳤다. 희소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 노인은 단순히 이것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거라고.
도저히 눈을 뗄 줄을 모르는 릭을 부르듯. 남자가 두 번 헛기침했다. 릭은 표정을 바로잡고 남자에게 고개를 돌린다.
“아…그림으로 뵙던 분이군요.”
“호오. 내 그림을 아나?”
“화백의 그림이야 유명하잖습니까.”
“그렇군. 그렇게 그림을 팔지는 않았는데…하긴. 사교계에 자주 얼굴을 내민다고 했었지?”
만족스레 미소 짓는 얼굴로 주름이 진다. 조금 더 띄워볼까. 남자의 명성은 사실이니 굳이 물을 탈 필요도 없다. 적당히 입을 놀렸다.
“이 아가씨를 그리게 되신 이후로 다른 숙녀분들께는 눈도 주지 않으셨으니. 아리따운 숙녀분들의 한숨 소리가 어련하겠습니까.”
“가장 아름답게 그릴 수 있는 걸 그릴 뿐이네.”
늙은 남자의 말은 릭의 귀에 닿지 않는다. 고개는 남자를 향해있지만서도, 시선은 도통 침대 위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런저런 추측이 머리를 스친다.
털끝만큼도 안 닮았고. 결혼했다는 소문도 없고. 모델로 쓰려고 어디서 입양했나? 거참 뉘 집 자식인지 좋은 걸 골랐군.
저도 모르게 그만 고개까지 돌려 쳐다보던 틈에 남자는 늙은 몸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수염이 덜깎인 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릭 톰슨. 호명에 다시 정신이 퍼뜩 돌아온다.
“그래서 따, 따님이십니까?”
“아내일세.”
주름 잡힌 얼굴이 싱글싱글 웃는다. 단어가 들리기 무섭게 표정이 변하는 걸 어찌할 방법이 없다. 하기야. 생판 남인데 저런 걸 자식으로 두기에야 아깝겠지. 그렇다고 자기 나이의 반 토막보다도 한참 어릴 아이를 아내로 두겠다는 더러운 욕망은 이해하고 싶지도, 할 수도 없지만. 귀족이나 부자들 사이에서는 가끔 있는 일이다.
“어디.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여기까지 따라온 건 내 제안을 받아들일 의사가 있다는 뜻이겠지?”
히죽히죽 웃는 남자에게 릭이 고개를 끄덕인다. 마른 손이 손짓한다.
“그러면 비밀을 먼저 말해야겠군? 이리 오게.”
릭이 반대편에 걸터앉는다. 남자가 조금 더 침대 머리 쪽으로 몸을 옮겼다. 좀 더 안쪽으로 오게, 좀 더. 그런 식으로 슬금슬금 움직이다가 정말 잠든 사람을 사이에 두고서야 재촉이 끝났다.
붉은 커튼에 가려지고, 침대에 드리운 검은 장막까지 더하니 오후의 빛이 영 제구실을 못 한다. 어슴푸레한 공간에서 릭은 남자와 아이를 번갈아 본다. 곱게 잠든 아이는 배에 하얀 장갑을 낀 손을 얹은 채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입술이 무언가를 바른 듯 붉다.
남자의 반쯤 감긴 눈이 릭을 흘끗 치켜보았다. 꼼질꼼질 움직이는 손이 곱게 놓인 치맛자락을 잡는다. 뭘 하려는 거지? 기묘한 긴장감에 침이 꿀꺽 넘어간다. 조금씩, 조금씩 위로. 무릎을 가리던 풍성한 레이스가 걷어져 올라가면서 가장 먼저 맨다리가 눈앞으로 드러났다. 그다음은 허벅지와 은밀한 곳을 가리는 드로워즈. 마지막으로 코르셋을 끼지 않은 복부. 치마를 반쯤 뒤집듯 속을 까발리고 손이 떨어진다.
누구에게도 누설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이 드로워즈 끝에 걸린다. 녹색 눈이 숨죽이고 그 광경을 응시했다. 알겠나? 다짐을 묻는 목소리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제대로 알지도 못 한다. 그리고 나뭇가지가 속옷과 함께 옷자락을 전부 끌어내린 순간. 묘한 기대는 순수한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이봐 이건 ‘달렸’잖아?
입이 쩍 벌어지고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경악을 어찌 감출 수가 있겠는가.
“잠깐. 아가씨가 아니잖소?! 이게 어떻게 된.”
“그러니 비밀이라 하지 않았나!”
버럭 소리치는 입을 마른 손이 틀어막는다. 조용히 하게! 꾹 누른 소리에 릭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남자가 말을 계속했다.
“이 집의 그 누구도 이 사실은 알지 못해. 이것은 자네와 나, 이 아이만의 비밀일세. 이제 알겠나. 위험하게 여자를 붙일 순 없어. 정처 없이 떠도는 입이라면 진실도 그저 바람의 재잘거림처럼 들릴 뿐이겠지. 물론, 그런 재잘거림조차 생각나지 않을 정도의 보수를 주겠네. 이 아이를 아름다운 귀족 숙녀로 만들면 그걸로 자네 일은 끝이야.”
남자를 아가씨로 만들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릭에겐 별 좋은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설마.
“설마 나에게 의학적 재주를 원하는 거요?”
“그럴 리가 있나! 정신 차리게! 내가 원하는 건 가정교사일세. 아름다운 겉모습과 조신한 행실이면 충분해!”
침대를 몇 번 탕탕 치고는, 남자가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지팡이로 융단을 툭툭 두드리며 자는 사람에게 시선을 흘겼다. 게슴츠레한 눈이 하얀 것에 질척하게 들러붙는다.
누가 봐도 아름답고, 처연하고…….
말꼬리를 흐리는 손이 지팡이를 들어 걷어 올렸던 치맛자락을 다시 끌어내린다. 그래 봤자 속옷까지 벗겨놓은 꼴은 여전하다.
“우아하고, 고귀하고. 청순하고. 그러면서도 요염한. 지나가며 흘리는 눈빛에 저도 모르게 남자들이 다리 사이를 세울. 그런 귀한 아가씨로 보이게만 하면 되네.”
이건 숙녀를 기르라는 건지, 창녀를 기르라는 건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읊는 입가가 기분 나쁘게 웃는다. 추잡한 제 욕망을 감출 생각도 없는지, 전신을 훑는 시선이 끈적거렸다.
“바라는 게 과하시군. 나에게 그런 재간은 없소. 어디 잘나가는 창녀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편이 어떻겠소?”
“그랬다간 추잡한 소문이 돌 걸세. 적당히 그림이나 가르치고, 몸가짐에 주의만 주면 충분하네. 우수한 아이니 알아서 깨우치겠지.”
작은 웃음소리. 그림자가 진 눈이 릭을 흘겼다. 귓가에 자르르 울리며 전신을 싸늘하게 만드는 음성에 담긴 추잡한 정욕에 릭은 그만 혀를 찼다. 남자에게도 분명 들렸을 것이나, 남자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시선을 릭에게서 침대 위로 돌린다.
어차피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을 아이지만. 내 품에만 묻어둘 수는 없지 않겠나. 집에서 치맛자락만 흘끗흘끗 내보이지 말고, 밖에도 자랑을 할 때가 되었어. 그때를 위한 준비라네.
그 뒤로도 무언가 중얼거리더니 남자는 일어나면 통성명이나 하라 하고는 방을 나섰다. 어디 신주단지 모시듯 숨겨둔 것 치고는 경비가 허술하다 해야 할까. 아니, 여자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설마 남자를 상대로 한입 베어먹는 짓은 하지 않을 거라 예상하거나. 혹은 자신의 권력을 생각했을 때, 상대가 함부로 건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거나.
남자로부터 받은 메모를 펼친다. 벨져 홀든. 남자와 성이 다른 건 아직 식을 올리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뜻일까. 나이는 그럭저럭 예상한 대로 릭보다 일곱이 어리다.
이름과 나이 말고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이게 다인가? 눈을 찌푸리는데, 신음이 들렸다. 침대 위로 눈을 돌린다.
“……미친 노친네…약을 타다니.”
확실히 소녀라기보다 소년이군. 눈을 뜬 벨져에 대한 첫 감상은 그러했다.
소리를 듣자 하니 이미 변성기는 끝마쳤을 것이다. 곱기는 하지만 여자로 착각하는 건 무리겠고, 입을 다물면 되려나. 그렇게 ‘맡은 일’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벨져가 릭을 보고 눈을 잔뜩 찌푸렸다. 그림으로 본 것보다 훨씬 푸른 빛이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이름을 말해.”
“릭 톰슨. 오늘부터 내가 당신 가정교사요.”
“가정교사? 네가? 나에게 뭘 가르칠 수 있다고?”
그렇게 말을 끝맺는 저 입은 확실히 열리는 순간 숙녀와 멀어지겠지. 릭의 입에서 한숨이 푹 새어 나온다. 갈 길이 멀다. 정말 남자의 말대로였다.
상체를 일으킨 벨져를 가만 훑어보았다.
키는 더 크겠군. 그건 어쩔 수 없겠지만…일단 저 입은 다물고. 거만한 태도도 얌전하게 만들면. 외견도 지금 이대로만 성장한다면야 문제없겠어.
일단 부탁받은 일에 관한 견적을 생각해본다. 벨져를 빼돌리라던 남자와 기분 나쁜 화가. 어느 쪽의 거래에 응한다 해도 한동안 해야 할 일에 충실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봐.”
“아, 그대가 아름다워서 잠시 정신을 놓았군. 당신을 정숙한 아가씨로 만들어달라는 주인 어르신의 부탁이지. 난 부탁받은 일을 할 뿐이오.”
“그 노망난 노친네가 내 성기를 잡아 떼 라고 했나?”
역시 저 입이 가장 문제겠군. 이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속옷이 다 벗겨져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벨져의 표정이 지독하게 변했다. 앞으로의 고난을 생각하고 릭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부터 벌써 계절이 바뀌고 바뀌어. 어느덧 여름이 끝자락에 가까워졌다. 벨져는 처음 마주했을 때보다 키가 훨씬 컸고, 릭의 어깨선 언저리에서 머물던 정수리는 이제 코끝까지 올라왔다. 조금만 더 있으면 눈높이마저 같아지지 않을까. 지금도 숙녀 노릇 시키기엔 조금 큰데 몸을 숙일 수는 없소? 그리 우스갯소리를 던지니 벨져가 싸늘하게 표정을 구기던 기억이 선명하다.
릭은 벨져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각종 잡기를 적당한 정도로 가르쳤다. 문학, 그림, 음악이나 간단한 사교댄스 같은. 그러한 것들을, 정확하게는 이미 능숙하게 해내는 모든 걸 적당한 정도로 남에게 선보이도록 가르쳐야 했다. 벨져 홀든은 신사라는 족속들이 원할 정숙한 숙녀로 보이기에는 너무나 완벽했으니까. 그 예를 들자면 그림에 하는 교육은 이러하다.
―적당히 붓질이나 서너 번 하시오. 숙녀가 너무 잘 그려서는 안되는 법이니. 아, 거기는 일부러 서투르게 그리는 편이 좋겠어.
벨져가 그릴 수 있는 대로 그리게 내버려 뒀다가는 ‘오…아가씨, 정말, 잘 그리시는군요.’ 이상의 말을 꺼낼 수 있을 남자가 없지 않겠는가. 적당히 일부러 틈을 만들고 수줍게 미소 짓도록 만드는 게 릭이 벨져에게 해야 할 교육이었다.
―그렇지, 그렇게 대강 찍찍 그어두면 신사분이 하하 여기는 이렇게 하는 게 좋겠소, 라고 쓸데없이 몸을 밀착하고 그대는 아~무런 말도 않고 수줍게 웃기만 하면 되는 거요. 명심하시오, 말은, 하지, 말고.
물론 잘 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못하는 체하고, 심지어 자기 앞에서 자랑질하는 꼴에 얼굴 붉히고 웃고만 있으라 하니 벨져의 표정이 좋을 리는 없다.
몇 달동안 릭은 벨져 홀든이라는 자가 얼마나 드세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지 아주 잘 알게 되었다. 이 성질을 가지고 어떻게 모양새로나마 릭의 교육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하긴. 처음에야 정신이 나갔냐며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소리를 지르곤 했던가. 그걸 어르고 달래고…그렇게 간신히 흉내라도 내게 하다가. 남자가 벨져를 불러 모델을 선 이후에. 사람이 바뀐 듯 네 교육이라는 걸 받아주겠다고 하던 게 기억난다.
카메라놀음이 끝나고 벨져는 남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자신이 벨져를 그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시간 동안 방 밖에서 가만히 기다리다가, 잔뜩 예민해진 채 방을 나온 벨져의 성질을 받아주는 게 릭의 일이었다.
“모델이 그렇게 힘드오?”
그리 말해도 벨져는 언제나의 치렁치렁한 잠옷을 억지로 입고 침대 위에 앉아 화를 삭히느라 정신이 없을 뿐이다. 그 곁으로 다가가 푹 숙인 고개를 가만 끌어안아 주었다. 그러면 제 분을 못 이기고 부들부들 떨던 손은 이내 릭의 옷을 부여잡는다. 떨리는 등을 쓸어내렸다. 두 팔이 릭을 끌어안는다.
며칠 전. 릭에게 와인을 주었던 남자가 저택에 찾아왔다.
어디의 부자라고 했던가. 아직은 눈을 마주쳤을 뿐이다. 옳은 선택을 했군,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어. 남겨진 작은 메모는 확인하자마자 불에 태웠다.
아직 어느 편에 설지 정하지 못했다. 아직 청년이 되지 못한 이 아이를 납치하라던 사내와 자기 입맛에 맞춰 교육하라던 노인. 적당히 둘 사이에서 줄을 타다가. 보수를 더 후하게 주는 쪽에 붙으면 될 일이다. 아니면 양쪽에게서 다 보수를 받아내거나? 그것도 아니면…….
‘전부 버리고 벨져와 도망가는 선택지도 있지.’
이제야 간신히 안정을 찾은 몸을 토닥인다. 글쎄. 어느 쪽이 될까. 아직은 모르는 일이다.
이단고해異端告解
R19/B6/20P/1,000원
한자 네글자 진짜좋아하는것같다 여튼...릭벨입니다. 제레온 빠질하던 벨져랑 보기만했던 릭 2탄같은.
http://manbounikki.tistory.com/134 <-궤도순례랑 설정공유. 후일담?같은건데 일단은 안읽었어도 별로 문제는 없게...하려고 노력은 했습니다
19금파트는 별로 없지만 기본설정이 좀 그런게있고 전편비끄무리한게 19금이고 씬도 쪼꼼 있어서 19금.
아마 조만간 뒤까지 써서 합본을 쓰지않을까싶은...게있어서 출력비정도만 받아 천원입니다...
냈을때 이거 가지구계신분은 뭔가 좀 특전같은걸 드릴 예정.
조금만 더. 작게 웅얼거리며 더듬더듬 머리맡의 시계를 다시 재운다. 귀를 때리던 시끄러운 소리가 멎었다. 혹시나싶어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린다. 겨우날의 새벽은 아직 어두컴컴하다. 옅은 등잔을 켜고 게슴츠레 뜬 눈에 비친 시각은 5시 정각. 너무 이르군. 한숨이 푸욱 새어나온다. 왜 이런 시간에? 벨져가 시계를 만졌던 것도 같다. 대체 이 시간에 일어나서 뭘 하려던 건지. 머리를 다시 푹신한 베개에 묻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인의 하얀 뒷통수는 미동도 없다. 그렇게 시계가 시끄럽게 울어댔건만. 막상 당사자는 시계가 시끄럽게 짖어대건 말건 여전히 잠든 채였다.
이불에 넣은 팔을 뻗어 깊게 잠든 사람을 가볍게 끌어안는다. 그 움직임에 살짝 이불을 벗어난 어깨로 초겨울의 쌀쌀한 공기가 닿았다. 릭은 한 번 부르르 떨고 몸을 다시 이불 속으로 밀어넣는다. 하얀 등에 찰싹 붙으니 온기가 퍼진다. 그 성격만큼이나마 쉽사리 따듯해질 줄을 모르는 신체였으나 열심히 덮혀둔 덕인지 적당히 따스하다.
눈을 감고 코끝을 하얀 목선으로 가져다 댄다. 못해도 두 시간은 더 잘 수 있겠지. 깊게 숨을 들이켰다. 무취에 가까운 그에게서 미약하게나마 풍기는 정사 후의 체취를 릭은 사랑했다.
당신은 이런 소소한 시간이 행복이라는 걸 알고있소?
이런 질문을 하면 벨져는 그 푸른 눈을 가늘게 뜨면서,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겠지. 무슨 쓸데없는 말이냐. 그리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활에 자신이 이전보다 훨씬 풀어져있다는 사실은 알까? 흐리멍텅해졌다고 생각하고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한계까지 다그치지 않는 건 자각하고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팽팽하게 잡아당긴 현같이 기민하고 예리했던 벨져 홀든은 아마 더이상 볼 수 없을 거라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가진 것을 지불해야 할 때가 있다.
가볍게는 사탕을 사기 위해 내는 동전들부터 전쟁에 희생되는 인명까지. 능력자들 간의 전쟁에도 지불해야 하는 것은 있는 법이라, 지금껏 온갖 이들이 자신이 연명하기 위해 혹은 무언가를 죽이거나 지키기 위해 이런 저런 것들을 지불하거나 사용해 왔다. 그와 마찬가지다. 벨져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무언가를 지불했다. 정확하게 그 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의 연인이 어떤 식으로 문을 닫았는지 릭은 알지 못한다. 그저 벨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털어넣은 지금의 결과만을 확인했을 뿐.
일촉즉발. 약간의 망설임이라도 있었다면 폭발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그런 때 이미 쓸만큼 쓴 능력을 쥐어짜 공간을 이동한 건 생존을 향한 본능이었을까. 하얗에 일어나던 폭발 속에서 릭은 먼 곳으로 도망갔고, 다시 문이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있던 곳으로 돌아오는데에 실수를 범한 적은 없으므로 그곳은 릭이 서있던 곳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기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너무나 달라져있었다.
새하얀 빛이었다. 하얗게 뒤덮이던 시야. 본능적으로 검은 공간을 열어 먼 곳으로 달아났다. 그 먼 곳에서조차 폭풍처럼 몰아치던 바람을 기억한다. 눈앞이 뿌옇게 흐렸다. 하얀 모래가 흩날렸다.
기묘한 안개 속에서 릭은 다시 벨져를 기다리던 곳으로 돌아왔다. 피를 흩뿌린 듯한 빨간 안개가 자욱한 기괴한 공간. 모든 것이 평등하게 하얀 모래로 변해버린 사막에서 빨간 안개를 들이켠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녹색 눈이 주변을 훑었다. 시선이 멈춘다.
모래에 파묻힌 하얀 손이 누구의 것인지 안다.
아침이 왔다. 시계소리에 잠이 깨었던지 두 시간 뒤, 밍기적밍기적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씻고 차려입고 대략적인 하루의 식사를 준비해둔 뒤에야 아침의 모든 준비가 끝난다. 주욱 자고있던 벨져가 눈을 뜬 채 릭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릭이 집을 나서려 현관문을 잡았을 즈음이었다.
눈을 뜨기는 했는데. 아직 비몽사몽인지 얼굴이 썩 유쾌해 보이지는 않는다. 항상 릭보다 늦게 잠자리에 들고 한참을 일찍 일어나던 과거의 그로부터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 모습을 누가 벨져 홀든이라고 믿을까.
“출근인가?”
짧은 질문마저 피곤에 젖어 깊게 잠겨있다. 다만 척 보기에도 지쳐보이는 모양새와는 달리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자세는 이러나 저러나 여전히 벨져는 벨져라는 뜻이리라.
“오늘은 일찍 돌아올 것 같아. 먹을 건 식탁 위에 올려놓았소. 토스트는 직접 구워야 겠고…고기도 적당히 데펴 먹으시오. 점심에 들를 수 있으면 들러서 같이 식사를 하고 싶지만 오늘은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아.”
듣는둥 마는둥. 벨져는 신발을 고쳐신는 릭을 빤히 쳐다볼 뿐이다. 릭이 몸을 일으켜 곤란한 듯 눈썹을 내렸다.
“……벨져. 듣고있소?”
“듣고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정장이군? 무슨 약속이라도 있나.”
의아한 듯 릭의 차림을 훑는 시선에 식은땀이 흐른다. 아차.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어 일부러 옷을 차려입기는 했지만 설마 눈치를 챌 줄이야. 벨져가 의외로 자신의 옷차림에 신경을 쓰고있었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하고, 평소에는 잘만 자다가 이런 때만 칼같이 깨어서 물어보는 날카로움이이 야속하기도 하다.
약속상대는 벨져도 아주 잘 알고있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릭이 벨져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은 벨져가 그와 릭이 만나는 것을 그다지 반기지 않을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별로 말하고 싶지도 않고.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이럴 때도 있어야지. 여튼. 피곤해보이는군. 지금은 좀 더 자두는 게 좋겠어. 다녀오겠소.”
도망이라도 치듯 종종걸음으로 문을 빠져나왔다. 벨져가 부르는 소리는 딱히 들리지 않는다.
문을 닫은 뒤. 벨져는 한동안 하루에 대여섯시간조차 깨어있지 못했다.
능력을 모두 잃은 탓이다. 검을 다루는 능력의 특성상 능력 자체가 신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었던 것이 문제라고 할까. 능력을 모두 잃으면서 급격하게 바닥을 친 체력에 신체 적응하지 못하고있는 듯 했다. 딱히 병이 생겼다거나, 건강에 심각한 지장이 있는 건 아니니 다행이긴 하지만. 처음엔 평생 이렇게 지내야 하려나 했던 걱정이 날이 지날 수록 조금은 사라지고 있으니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기는 한다.
그렇게 몸도 가누지 못하던 연인이 일어나자마자 홀든 저택을 다시 떠날거라 했을 때는 심장이 철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성격에 몸이 약해졌으니 더더욱 집에 있지 않을거라 예상하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거 잠깐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고 바로 집을 떠날 채비를 하다니. 릭은 들려온 소식에 쉴 틈도 없이 바로 홀든 저택으로 달려왔다.
벨져는 얼마만에 돌아왔는지 모를 자신의 방에서 여행짐을 꾸리고 있었다. 집에서 떠난지도 한참이라더니, 이런 짐들은 다 어디서 났소? 그리 물으니 형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은신처를 죄다 처분하고 짐을 옮겨놨다며 눈을 찌푸린다.
그렇게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로. 벨져는 릭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몇가지를 작은 가방에 던져넣는다. 릭의 침실을 한 다섯 개쯤 붙여둔 넓이의 방을 돌아다니며 무언가 집어서 가져다 넣고, 잠시 쉬고. 가져다 넣고, 잠시 쉬고. 그러고 있는 벨져를 보고있으니 처연한 마음도 들면서 제법 웃기기도 하다.
“벨져. ……저기, 듣고있소?”
느리지만 분주하게 움직이는 연인은 릭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고 제 할일을 계속한다. 이런, 어떻게 해야 할까. 시선으로 벨져의 움직임을 따라다니다가. 침대 위에 놓여있던 열린 여행가방을 확 닫고 그 위에 앉아버렸다. 덜컥 가방이 닫히며 벨져가 릭을 홱 돌아본다.
“릭. 비켜.”
“잠깐 진정하고. 앉으시오. 벌써 지친 것 같은데 쉬엄쉬엄 해도 괜찮지 않겠어?”
슬그머니 가방 옆으로 내려 앉으며 침대 옆을 툭툭 친다. 벨져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로 한숨을 쉬나 싶더니. 릭이 원하는 대로 그 곁에 앉았다. 이제야 대화가 되겠군. 릭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고, 입을 연다.
“정말 지금 떠나는 건가?”
“꼬리가 길어봐야 뒤를 잡힐 뿐이지. 연락은 종종 할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어디로?”
“어디든.”
목적지도 없이? 그대답지 않게 성급하군…같은 말을 하기엔 릭은 벨져를 너무 잘 알고있다. 지금당장 벨져가 떠나려는 이유는 분명했다. 첫째가 제레온 프리츠이고, 두번째가 신변상의 문제겠지. 아마 후자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있겠지만. 릭 또한 지금 벨져가 처한 상황을 볼때, 그가 신변을 감추려 하는 것에 이의는 없다.
제레온 프리츠의 제정신이 돌아왔다. 기적이라면 기적일까. 한동안은 의자에 앉은 채 석상마냥 굳어있던 장년의 기사. 벨져의 신앙과도 같던 그가 이전과 같은 맑은 눈으로 돌아와 자신의 하나뿐인 딸을 안아주었다고 한다. 아직은 침대에 누워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체력이 떨어졌을 뿐이라 하니 기력을 되찾으면 다시 일선으로 나설 수 있으리라. 그리고 벨져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제레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듯 했다.
고작 방 안을 돌아다닐 뿐인데도 제몸하나 가누기 힘든 기색이 역력하다. 워낙에 정신력이 받쳐주는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면 실제 체력은 저것보다도 더 바닥이겠지. 한평생을 신체와 관련된 능력이 함께했으니 적응이 쉽지 않을 게 뻔하다.
“네 능력이면 언제든 원할 때 만날 수 있지 않나. 무슨 걱정이지.”
“별로…그런 건 아니야.”
“그러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확실히 해.”
그러면? 막상 그런 질문을 받으니 순간 말문이 막혔다. 원하는 바는 이미 알고있다. 다만 이것을 어떻게 전해야할지. 언어를 고르고 있을 뿐.
단순명료하게. 직설적으로 전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결국 벨져가 한 마디로 줄이건 아니건간에 릭에게 그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심정은 간절하게 짝이없고 부디 이루어졌으면하는 바램이다. 그렇다고 구차하게 비는 모습을 벨져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다. 릭 톰슨, 어서 말해. 파란 눈이 깜빡깜빡 릭의 대답을 기다린다. 예상컨대 그의 대답은 긍정적이겠지. 릭이 아는 벨져 홀든이라면 고개를 끄덕여 줄 것이라 믿는다. 그럼에도 지금 릭이 망설이는 건 오랫동안 묵히며 숙성시킨 염원이 부풀만큼 부풀었기 때문일까.
“벨져……. 정 이곳을 떠날생각이라면?”
이건 또 너무 둘러둘러 묻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냥 직설적으로 말할 걸 그랬나? 내뱉고서야 떠오르는 후회를 억지로 밀어낸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인 것을 어쩌겠는가.
시선만 맞물린 채로 의미없는 시간이 흐른다. 불만스런 시선으로 저를 빤히 쳐다보는 벨져의 눈초리가 영 따갑다. 흠흠. 괜시리 헛기침을 두 번.
“그대가 나와 함께 갔으면 해.”
일몰 너머의 저녁으로 달린다.
순식간에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하늘은 마치 자신이 시간조차 뛰어넘는 전능함을 손에 넣은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한다. 차가운 저녁이 내려앉은 대도시를 걸었다. 유럽의 그곳과는 달리 누구도 릭 톰슨과 벨져 홀든의 관계에 관심이 없고 벨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저 이웃만이 이따금 사소한 안부를 물어올 뿐이다. 예를 들자면 릭이 들고 다니는 음식이 늘어난 걸 눈치 챈 가게 점원 정도? 안부라고 해봤자 청년, 요즘 누가 같이 있는 모양이던데, 좋은 사람이라도 생겼나봐? 기껏해야 이런 소리랄까. 그럴 때면 릭은 그저 싱긋 웃으며 글쎄요, 라고 답하면 되는 사소한 질문이다.
메마른 화초마냥 시들시들한 애인에게 체력이 붙으려면 뭘 먹여야 할까. 스테이크 용 고기와 곁들일 야채, 감자, 갓구운 하얀 빵. 남은 손에는 프랑스에서 급하게 골라온 한 병의 레드와인.
식재료를 들자마자 능력을 쓰는 방법도 있으면서 굳이 도보를 택하는 건 어디까지나 릭의 낭만이나 신념과 관련된 선택이다.
너는 네 능력을 얕잡아 보고 있다고 벨져가 핀잔을 줬던가. 벨져 홀든을 알게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너에겐 그만한 힘이 있을텐데. 고압적인 말투로 풀어내던 칭찬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묘한 말을 기억한다. 다만 릭은 그런 벨져의 말에도 자신의 힘을 최대한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런 짓을 저질렀다가는 릭 톰슨이라는 자신을 버려야 할 것이라 직감하고 있었으므로.
겨울 밤을 걸으며 릭은 벨져에게 전해야할 소식들을 정리한다. 편지라도 써서 보내라더군. 이 말은 적당히 마지막에 꼬리처럼 붙이는 걸로 충분하겠지. 다이무스가 돈봉투를 쥐어줬다는 건 숨기고. 제레온 경은 잘 지내신다…. 벨져에게 가장 중요할 소식에서 생각이 막힌다.
장년의 기사가 벨져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아주 잘 알고있다. 릭에게 있어서의 벨져. 아니 그 이상일까. 벨져가 제레온에게 바치는 헌신만큼 릭이 벨져에게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고개를 바로 끄덕일 자신이 없었으니까.
광신도의 신앙. 아니. 그 이상 이리라. 세상 어떠한 신자도 신에게 그토록 열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릭은 벨져의 제레온을 향한 마음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벨져이기에 좋아했다. 벨져가 릭이 자신에게 했던 대로 제레온에게 행하는 키스를 신성하다 여겼다. 저열한 이들에게 기꺼이 몸을 내주는 것 조차 지켜볼 수 있었다. 릭 톰슨은 벨져 홀든의 비뚤어진 신앙과 헌신마저도 사랑했다. 허나 동시에 릭은 연인이 숭배하는 제레온 프리츠가 달갑지 않다. 제레온 프리츠는 벨져 홀든의 신이지, 릭 톰슨의 신은 아니었으므로. 자신의 신이 숭배하는 신이라 해서 그 자가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대에게 이런 말을 하면 화를 낼까.
결론을 내리기 전에 두 다리는 집에 도착했다.
“다녀왔소.”
등 뒤로 문을 닫는다. 해가 저문 지 몇 시간. 집 안은 어두컴컴하다. 자주 그러하듯 아마 깜빡 잠이 들었겠지. 설마 식사도 않고 하루 종일? 그런 걱정도 했으나 차려두었던 식사가 전부 잘 정돈되어있는 걸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침실까지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은 모습이 보였으니까. 등받이에 푹 몸을 묻은 채 잠든 벨져의 옆에는 읽고있던 책이 펼쳐진 채 놓여있다. 다 읽은 건지 읽으려고 했던 건지 싶은 대여섯 권의 책 무더기도.
릭은 조용히 소파 아래로 무릎을 꿇는다.
소파 위로 툭 떨어진 하얀 손을 건져 올렸다. 무겁고 큰 검을 두개나 휘두르던 팔은 이제 제 분신같던 그것들을 더이상 들 수조차 없게 되었다. 아직 자잘하게 남은 이 군살들도 얼마 안가 보드랍게 변하겠지. 몇 번이고 릭의 앞에 서서 그를 구원하던 벨져 홀든은 이제 그와 같을 수 없다. 벨져는 긍지높은 기사였으나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이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무대를 떠났다. 벨져 홀든을 이루던 긍지가 변색되기 전에.
마르고 하얀 손으로 릭의 체온이 스며든다. 차가운 피부를 따스하게 어루만지며 릭은 그의 현이 팽팽하게 긴장하고, 칼날이 예리하게 빛났던 때를 생각한다.
갖은 책과 서류가 가득하던 작은 공간. 구석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두 자루의 검. 그곳에 젊은 단장의 사유물은 거의 없고 태반이 제레온 프리츠의 것이라 했다. 장년의 기사가 가졌던 긍지와 기억으로 숨이 막히던 밀실에서. 제레온 프리츠가 사용하던 나이들고 무능한 검들로서 자신의 충의를 되새긴 청년은 얕은 잠을 청하곤 했다.
행사리스트 업뎃했어용
부산온 A1입니다 갈까말까하다가 양도받아서 나가여 얇게 뭔가 하나 낼예정
머 릭벨이에여
이상한 이야기
R19/문고/78P/소설
표지는 기미(@89880CP)님. 저 허연부분은 무광은박입니다
릭벨. 패러랠은아닌데 좀 패러랠같기도하고... 원작기반.
산란비끄무리한거/약한 카니발리즘/임신비끄무리한거 주의 정말 비끄무리한느낌이에요
1. 파란 금
모든것이 일단락된 후. 슬슬 괜찮지않을까?하는 마음에 벨져에게 청혼하는 릭이었지만 벨져는 어렸을 적 정해진 정혼자가 있으니 그걸 거절하고 와서 받아들이겠다...며 확답을 미룬다. 그리고 행방이 묘연해진 벨져를 찾아서 릭은....
2. 네 번째 밤의 식사
벨져가 아직 축제를 치르기 전이었던 시기. 제레온의 생일을 맞이해 프리츠 저택으로 향하는 홀든이었으나 둘째 벨져는 다이무스의 계략에 빠져 홀로 집에 남겨진다. 어떻게 해서든 프리츠 저택에 가고싶었던 벨져가 그정도에 굴할 리 없고, 홀로 숲을 걸어 프리츠저택으로 향하던 도중 한 남자를 만나는데...
같은 내용으로 두개들어갑니다.
콜님이 축전주셨어여! 어예!
좋은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선선한 바람, 덥지도 춥지도 않은 기온. 개운하게 눈을 떴고 아침식사로 구운 토스트도 노르스름하니 맛이 좋았다. 릭 톰슨은 옷장에서 가장 하얘 보이는 셔츠를 골라 입은 뒤 집을 나섰다.
상대를 생각하면 약속 장소에는 10분 전에 도착하도록 맞추는 게 좋다. 시간 약속에 엄격한 그가 늦을 때마다 저를 빤히 쳐다보던 모습을 떠올리면 소름이 끼치기도 하고 신경이 긁히기도 한다. 어쨌거나 릭은 벨져의 그런 눈을 보지 않기 위해 십오 분 전에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만나기로 한 가게 앞에서 벽에 기대어 선다. 한 손에는 빨간 장미다발, 다른 손에 찬 손목시계--중에서도 장소에 맞는 시간을 가리키는 것에 눈을 주어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올 시간인데. 설마 늦는 걸까.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하고 작게 떠오르는 미소와 동시에 멀리서부터 시선을 끄는 인물이 등장했다. 눈이 마주친다.
호오.
벨져는 릭의 모습을 보자마자 감탄사를 입에 담았다. 멀리서 작게 입 모양으로 추론할 뿐이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하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야 별거 아닌 반응이겠지. 하지만 연인의 반응에 익숙한 릭의 눈에는 당장에 박수라도 칠 기세처럼 보인다. 누가 보면 항상 늦는 줄 알겠군. 씰룩이는 입가를 억지로 둥글게 만들고, 화사하게 미소 짓는다. 하지만 연인의 반응은 싸늘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싱글벙글대고 있군. 또 무슨 장난질이라도 준비했나?”
“기분 나쁘다니. 말이 심한데, 벨져.”
“네가 이렇게 웃을 때면 이상한 걸 가져올 때가 많으니 하는 소리다.”
아. 벨져의 말에 릭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짐작가는 게 한두 개 있다. 아니, 하나, 둘….
‘몇 개랄지, 한두 개가 아니군.’
그제야 떠오르는 자신의 업보는 생각보다 많았다. 처음에는 그저. 어지간한 일에는 흐음, 음? 그래서? 끝인가? 품위 없군. 이런 식으로 별 반응도 없는 벨져가 조금 더 놀라거나 조금 더 얼굴을 찌푸리는 게 재미있어서, 그래서 이따금 짓궂은 장난을 치는 정도였는데.
장난이라고는 해도 거한 건 아니고 소소하게 놀래키는 정도, 였다고 릭은 생각한다.
물론 아마도 벨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제법 화를 냈을 만한 것도 몇 개는 있었지만. 상대가 저 벨져 홀든인데 어쩌겠는가. 일반인이 가볍게 놀랄 정도의 사소함은 저 귀엽지 않은 연인에게는 손등에 한 방울 튀긴 물보다 별거 아닌 일이다. 릭은 그저 연인에 맞춘 장난을 쳤을 뿐이었다. 실제로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도 5초면 평정심을 되찾기도 했고.
일단 이거부터 받으시오. 일단 벨져에게 장미 다발을 건네 입을 막았다.
릭은 벨져와 가게의 테라스 끄트머리 자리에 앉았다. 아직 시간이 이른 탓인지 가게 안에만 사람이 몇 있지 바깥자리는 텅텅 비어 릭과 그 연인뿐이다. 이걸 노리고 이 시간에 약속을 정하기는 했지만. 어째 생각보다도 더 모든 것이 술술 풀리는 것 같아 이쯤이면 조금 불길하기도 하다.
주문은 파스타와 샐러드. 벨져가 슬슬 메뉴판을 보는 타이밍에 릭이 주문을 끝내는 건 이미 예전부터 정해진 수순이다. 이것도 교제 시작 즈음에는 각자 고르기도 했고 벨져가 고르기도 했으나…릭의 입맛이라고 해야 할까. 릭의 상식. 아니 보편적인 감성으로는 도대체가 왜 그런 걸 시키는 지 알 수 없는 메뉴를 고를 때가 아주 많았다. 그것이 벨져의 입맛에 맞으면 모를까. 맛이 있냐고 물으면 그저 그렇다고 하지 않던가. 벨져 홀든이라는 자는 입맛이 까다로울 것 같으면서도, 아니 실제로 맛있다고 생각하는 선은 까다롭지만. 입에 들어가는건 그럭저럭 다 먹을 수 있는, 귀족의 이미지와는 묘하게 먼 식성을 가지고 있었다. 저러니 집에서 오래 나와 살았겠지. 그렇게 벨져가 주문한 정체불명의 음식을 보며 내심 한숨을 쉰 게 몇 번이던가. 참다못한 릭이 벨져가 고른 음식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시키기를 또 몇 번. 약간의 언쟁이 오가기도 했다. 왜 네 멋대로 시키는 거지? 그거야 그대가 이상한 걸 고르니까 그렇잖소, 내가 고르는게 더 맛있다는 건 그대도 동의할 텐데. 그 뒤로는 벨져도 릭이 자기 멋대로 고르는 메뉴에 대해 무어라 하지 않는다.
메뉴판을 회수해가는 종업원에게 들고 있던 판을 건네고, 벨져가 릭 쪽으로 시선을 들었다. 눈빛이 조금 불만스러워 보이는 것도 같고.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동그란 테이블 위로 얹힌다. 톡톡. 철로 된 바닥을 작게 두드리는 손을 잡아 손에서 장갑을 벗겨내었다. 두 장갑을 옆에 가지런히 두고, 웃으며 말을 건넨다.
“기분이 좋지 않아보이는데, 별일이군. 따로 먹고 싶은 게 있었소?”
“딱히 없다.”
괜히 돌려 말하거나 제 속을 숨기지는 않는, 아주 많이 굉장히 과할 정도로 솔직한 연인이니 저 말에 거짓은 없으리라. 릭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벨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크흠. 헛기침을 한 번 뱉는다. 벨져가 릭에게 주목한다.
“오늘은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아주 중요하지.”
그렇게 운을 띄우니. 저 일곱 살 어린 연인은 인상을 팍 찌푸리는게 아닌가. 이번엔 또 뭐요. 같은 소리는 목 안으로 밀어 넣어두기로 한다.
“릭, 본론을 말해. 넌 쓸데없는 전제가 너무 많아.”
“아니지 벨져. 이런 건 원래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 이런 거라는게 대체 뭔지 당장 설명하도록.”
성질 한 번 급하기는. 장미에 물을 줄 줄만 알지 도저히 낭만이라는 걸 모르는 기계 같은 연인은 늘상 이런식이다. 하지만 별 수 없다. 그런 면이 좋다고 사귀고 있으니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막상 결심하자니 벨져 홀든이라는 사람과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저 바닥에 내팽개쳐진 심정으로 터덜터덜 향했던 메트로폴리스. 얼굴은 예쁘지만 사람을 무슨 이동수단 취급하던 재수 없는 도련님. 별거 아닌 일에도 한심한 놈 취급하던 표정. 그를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얼굴 빼고는 귀여운 구석이 없었다. 그랬는데 대체 어느 시점에서 눈앞의 청년에게 빠져 고백을 하고 자연스럽게 그를 안을 생각을 했을까. 분명 몇 년전, 아니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연인의 가슴은 큰 편이 좋겠다고 웃었거늘. 적당히 10년 전 쯤의 자신에게 이봐 릭 톰슨, 너는 10년 후에 예쁘고 어린 애인을 가지게 된다고, 다만 그 애인한테는 너와 같은 게 달려있지, 구멍도 하나뿐이야. 그렇게 말하면 믿을까? 가슴도 없는 남자랑 자기가 왜 사귀냐고 얼굴을 찌푸리지나 않을까 싶다. 물론 벨져의 얼굴을 보여주면야 어린 시절의 자신도 이거 끝내준다며 박수를 치겠지만.
고백하던 순간도 가슴깨나 졸였던 기억이 난다. 칼로 베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싶던 고백이었다. 벨져도 이 정도면 나를 꽤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은데. 그 정도의 애매한 확신을 가지고 마음을 전했고 벨져는 이삼 초 정도 입을 살짝 벌린 채 가만히 있다가 릭의 고백을 승낙했다. 즉답에 가깝게 떨어진 승낙에 놀란 건 릭이었다.
그 뒤로 키스도 했고. 같은 침대에서 잠도 잤고. 살도 섞었다. 연애 진도는 좀 더 더디게 흘러가지 않을까 싶었으나 릭의 예상보다는 일사천리였다. 적당히 이쯤이면? 싶을 때 하지 않겠소 하고 권유하면 벨져는 적당한 릭의 생각에 맞추어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침대에서도 알아서 다리를 벌리고 제 그것 위로 올라타 허리를 흔들어 주셨으니 황송하기까지 할 따름이지.
여튼. 이제 안타리우스는 없다. 연애를 하면서도 마음에 걸렸던 모든 큰일들에 종지부가 찍히지 않았나. 서른 셋과 스물 여섯. 세상도 안정되었고. 슬슬 이 연애도 안정적인 결말을 맺을 때라고 릭 톰슨은 생각한다.
곱게 감춰둔 작은 상자를 테이블 위로 꺼낸다. 파란 공단 리본이 매인 검은 상자다. 그것을 손끝으로 살짝 밀어 벨져의 앞에 놓았다. 옆에 있는 빨간 장미 다발이 썩 잘 어울린다. 상자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든다. 파란 시선이 따라 올라와 정면에서 마주했다. 벨져. 푸른 눈이 릭을 또렷하게 바라본다.
“나와 결혼해 주시오.”
무슨 영화처럼 바람이 불었다. 벨져는 릭을 빤히 바라본다. 눈을 쳐다보다가, 내밀어진 상자를 보고, 다시 눈으로 시선을 든다. 결혼? 되묻는 말에 릭이 고개를 끄덕인다.
“릭 톰슨. 보기보다 제멋대로인데. 성질도 급하군?”
“급하다니 그런 섭섭한 말을. 우리가 연인 관계가 된 뒤로 얼마나 지났다고 생각하는 거요? 아니, 아니야. 시간은 중요하지 않지. 하지만 그대도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대를 사랑해. 게다가 이제 세상은 평화로울 뿐이니 그대도 쉴 때가 되지 않았을까. 벨져, 당신이 내 곁에서 쉬었으면 좋겠소. 그대 생각은 어떻지?”
벨져는 릭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사선으로 돌리고 얼굴 앞에서 깍지를 낀다. 흐음…. 릭은 벨져가 가만히 고민할 때 가끔 흘리는 저 별거 아닌 소리를 제법 귀엽다고 생각했다. 버릇이오? 당신답지 않은 귀여운 버릇이군. 이라고 했더니. 자기는 그런 소리를 낸 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던가. 몰래 녹음해서 들려준 순간 또 으음하고 묘하게 앓는 소리를 흘리던 것까지. 저 차가운 검사는 이상한 곳에서 얼이 빠진 구석이 있다.
푸른 눈이 릭을 흘끗 쳐다본다.
“지금 꼭 답해야 하나?”
애매한 대답에 릭이 눈을 크게 뜬다. 벨져 홀든이 이런 애매한 대답이라니? 성질도 급해서 항상 싫다 아니면 좋다로 확실하고 빠르게 답하곤 했는데. 설마 이제와서 연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우회적인 표현을 쓰고 있는 걸까.
저도 모르게 몸을 테이블 위로 내민다.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뭔가 걸리는게 있소? 가문? 내가 미국인이라? 그대보다 돈이 없어서?”
릭의 격정적인 반응에 벨져가 퍼뜩 정면을 향한다. 약간 당황한 기색이 보인다.
“그럴 리가.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 착각하지 말도록. 금전적인 문제도 아니다. 그러니까…아니, 내 설명이 부족했군. 지금은 불가능하다. 답할 수 없어. 지금은. 지금은 이다. 일주일을 줘. 일주일이면 충분해. 지금은 받아들일 수 없다.”
“어차피 받아들일 거라면 대체 뭐가 문제요?”
연인의 이런 어정쩡한 반응을 릭은 처음 보았다. 매사에 칼 같고 모 아니면 도로 답하는 벨져 홀든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모호한 답변이라니. 뭔가 있군.
그리고 돌아온 벨져의 답변에 릭의 표정이 얼어붙기까지 딱 3초가 걸렸다.
“정혼자가 있다.”
정혼자? 상상도 못한 단어다. 정혼자. 혼약자. 벨져 홀든이 귀족이라는 걸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법한 존재다. 다만 지금까지 벨져가 그 사실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안 했었다는 게 이상할 뿐.
좋은 면으로도 좋지 못한 면으로도 지나치게 솔직한 사람이다. 지나치게 진지하기도 하다. 벨져가 결혼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연애를 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네 청혼을 받아들이려면 그걸 먼저 파기해야……릭. 왜 그런 눈으로 보는지 모르겠군.”
아무도 없다고는 하지 않았으니 거짓말은 아니겠지. 단. 그 혼약자인지 하는 사람과 아무 일도 없었다면.
벨져가 저 성격에 집에서 정해주는 사람과 순순히 결혼을 약속했을 리는 없다. 분명 뭔가 있을 텐데. 머릿속을 스치는 여러가지 기억이 릭을 혼란스럽게 한다.
“지금까지 나와 나눈 사랑은 모두 거짓이었소? 키스도 잠자리도. 이런 감정도 전부 내가 처음이라고 했으면서!”
릭이 버럭 소리질렀다. 벨져가 대꾸한다.
“워낙 어린 시절에 했던 약속이라 완전히 잊고 있었을 뿐이야. 정혼자와 성행위를 왜 같이 취급하는지 모르겠군.”
“그러면…설마 제레온 프리츠의 후처로 들어간다는 건 아닐 거라 믿겠소.”
이번에는 벨져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저 릭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그럴듯한 예상을 말했을 뿐인데 저 표정은 대체 뭔지. 이상하게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슬쩍 설명을 덧붙인다. 그런 거 있잖소, 저 커서 제레온 아저씨랑 결혼할 거에요~같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벨져가 철로 된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농담은 적당히 해라 릭 톰슨! 제레온 경이 그런 걸로 혼약을 해주실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상대는 내가 고작 한 번! 본! 이름도 모르는 남자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랑 왜 혼약을…? 정략결혼이오? 그대가 집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고? 그거야말로 믿을 수 없군.”
“아니. 제레온 경께 데려가줄 테니 커서 자기를 도와달라는 말에 넘어갔었다. 적당히 서류를 읽지도 않고 서명한 내가 어리석었지.”
벨져가 고개를 홱 돌렸다. 릭은 도저히 할 말이 없다. 무슨 납치유괴범의 수법도 아니고. 아마도 어린 시절이었겠지만 벨져가 그런 거에 넘어간다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무 말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대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가. 간신히 입이 떨어진다.
“벨져 홀든이 그랬다니 믿을 수 없군.”
“난 그때 고작 여섯 살 이었다. 이십 년 전의 약속이야. 결혼의 의미도 몰랐다는 건 변명이지만, 그렇다.”
“상대는 어떤 사람이오?”
“북쪽 성의 성주라고 했던가. 어린 시절의 내가 봤을 때도 까마득한 어른이었으니 너보다 스무 해는 더 살지 않았을까 싶군.”
여섯 살의 벨져 홀든. 릭은 사진으로 딱 한 번 본 적 있는 벨져의 유년기 모습을 떠올린다. 사진으로 봐도 억 소리가 나게 예쁘장한 얼굴이었으니 실물은 더 굉장했겠지. 적당히 미래를 보고 침을 발라놓는 심정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두 달 전, 집으로 약속한 때가 되었다는 통첩이 날아왔다. 숨길 생각은 없었다. 혼약은 파기하고 올 셈이고. 그리고….”
그리고…. 벨져답지 않게 같은 단어를 두 번 반복하며 말을 흐린다.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린 하얀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굳이 지금 말할 필요는 없겠군.”
“벨져?”
“네 청혼을 받아들일 때. 말하도록 하지.”
일주일 안에 돌아오겠다. 벨져는 분명 그리 릭에게 약속했다. 벨져 홀든이라는 자는 시간 약속에 까다로운 사람이다. 약속을 어기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그렇기에 릭은 가만히 일주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벨져와 만난지, 그 뒤로 일주일이 지났다.
벨져는 하염없이 숲을 걷는다. 서둘러야 한다. 남은 시간은 앞으로 일주일.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까? 얼마나 먼 곳인지는 안다. 벨져 홀든은 워낙에 명석한 아이였기에 제 걸음으로는 사실 이미 늦었다는 사실도 아주 잘 깨닫고 있었다. 그래도 출발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길을 몰랐지만 출발을 망설일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저 기억하는 방향으로, 벨져는 혀를 한 번 차고, 고용인들 모르게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다.
제레온 프리츠의 생일이 일주일 뒤로 다가왔다.
벨져 홀든에게 있어 제레온 프리츠의 생일은 그 어떤 성인의 축일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신일보다도 더 가치 있는 날이다. 석 달 전부터 잊지 않으려 날짜를 세어온 제 첫째 동생이 그렇게 아니꼬웠던 걸까? 묘하게 들뜬 제 모습을 보던 다이무스 홀든의 그 불쾌한 얼굴이 벨져의 뇌리를 스친다.
이틀 전, 다른 가족들과 함께 프리츠 가로 떠날 예정이었다. 출발 시각은 저녁. 준비는 되었겠지 다이무스, 벨져, 이글?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건 아침 식사 직후였다. 잠시 훈련을 하다가, 점심을 먹고. 갑자기 잠이 쏟아져서……. 눈을 뜨니 해가 뜨고 지기를 두 번이나 반복하지 않았나. 점심 식사에 무언가 들어있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범인은 멀리 생각할 필요도 없이, 벨져의 세 살 많은 형, 다이무스 홀든이리라. 벨져는 그렇게 확신한다. 자신이 제레온 프리츠와 있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니 슬쩍 재워놓고 잠든 모양인데 저희끼리 출발하죠, 같은 말이라도 했을 것이다. 쓸데없는 짓을.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제 형의 그림자에 벨져는 이를 악문다.
돌아오면 결투라도 신청할까? 저도 모르게 허리춤에 찬 칼을 만지작거린다. 아직 굳은살이 박이지 않은 어린 손은 검은 장갑에 곱게 담겨 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반복한 대련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썩 좋은 결과는 도출해 낼 수 없다. 대략 반년 전, 축제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다이무스 홀든은 그전보다 훨씬 강해졌으니까. 이미 반년 사이 몇 번인가 칼을 맞대며 차이를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차이. 지금의 다이무스는 그야말로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힘의 차이도 모르고 분노에 타오르는 불나방처럼 덤빌 만큼 둘째는 어리석지 않다. 결투는 좋은 방법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형이 원하는 대로 얌전히 집에 있을 만큼 고분고분하지도 않다. 프리츠 저택에서 저를 발견할 첫째의 좁아질 미간을 생각하며 벨져는 제 기분을 달래기로 했다.
저택을 나온 뒤로 반나절을 계속 걸었다. 강을 하나 건넜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높은 나무가 빼곡한 숲으로 들어섰다. 이어지는 숲은 끝날 줄을 모른다. 그렇게 해가 저물고도 하염없이 걸었다. 걷고 걷고 또 걷고. 새카만 밤이 나무 사이로 내려앉을 무렵, 시선 끝으로 불빛이 보였다.
‘민가인가?’
이런 숲 깊은 곳에 사람이 산다고?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도 벨져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빛 쪽으로 다가갔다. 작은 오두막이다. 잘 되었다면 잘된 일이다. 숲에 사는 사람이라면 길도 알고 있겠지. 비록 1초가 아까운 시간이지만 불확실한 길을 계속해서 걷는 것보다 길을 확인하고 가는 것이 더 시간을 절약하는 길일 것이라고 벨져는 생각했다.
똑똑. 노크를 했으나 대답은 없다.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주먹을 쥐고 문을 세게 두드렸다. 쾅 하고 치는 소리가 세 번. 나무로 된 두꺼운 입구 너머로 작은 발소리가 울린다. 이어서 남자의 목소리. 잠깐 기다리시오! 문이 열린다.
“거 참, 문이 부서지겠어. 옆에 초인종은 보이지도 않나?”
짜증스런 음성과 함께 실내의 조명이 문밖으로 길게 드리웠다. 집주인인가 싶은 남자가 고개를 내려 벨져와 시선을 마주한다. 머리가 하나하고 반 정도 더 높이 있는 남자다. 아마도 어른. 빛을 등진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갈색 머리카락, 맑은 녹색 눈, 부드러운 얼굴은 인상이 좋다.
남자는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변을 두리번거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다시 벨져를 바라본다.
“누구시오?”
“길을 찾고 있어. 프리츠 저택은 어느 쪽이지?”
지극히 고압적인 어조다. 까마득하게 어려 보이는 아이의 건방진 태도는 아무래도 좋은지 남자의 표정이 굳지는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 질문에 답하지도 않고. 그저 놀란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어 음, 그러니까. 입가를 긁적이며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간신히 입이 열렸다.
“당신 혼자요? 부모님은?”
나 말고 누가 더 있다는 거지? 잠시 대화가 오가고 곤란한 듯 눈을 찌푸리더니, 남자는 몸을 옆으로 비켜선다.
“밤이 늦었으니 일단 들어오시오.”
“시간이 없다. 대답이나 해. 바로 떠나야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더 대답할 수가 없겠군. 이 근방엔 맹수가 나오거든. 어른으로서 아이를 혼자 숲에 내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게다가 밤에 숲을 걷다간 길을 잃을걸. 해가 뜨면 보내줄 테니 머물다 가는 게 현명한 판단일 텐데.”
남자의 주장에 호응하듯 멀리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무의식중에 허리춤의 칼로 손이 닿는다. 아무리 축제조차 거치지 않은 반쪽짜리 검사라고는 하지만 나면서부터 검을 쥐도록 훈련받은 몸이다. 짐승 한두 마리 정도야 충분히 베어 넘길 수 있으리라. 허나 새카만 밤의 숲이라는 험한 환경에서, 위험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을 노출할 필요가 있을까. 이성이 그리 말한다.
“알겠다. 실례하지.”
반나절 이상 비슷한 풍경을 계속 걸은 탓에 쌓인 피로도 있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휴식을 취하는 편이 좋다는 건 아주 잘 안다.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무거운 문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문득 떠올렸다.
눈앞의 남자가 과연 안전한 사람일까?
벨져는 그제 와서야 오늘 처음 보는 남자의 신변에 대해 생각한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문을 두드렸고, 집으로 들어오라 하는 지금도 남자가 위험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렇게 이 남자를 상대로 위험감을 갖지 않는 근거가 있나? 남자가 선량하게 보여서? 고작 가죽에 불과한 외견이 안전할 것 같은 느낌의 근본이라면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그뿐이 아닐 텐데. 뭘까. 생각하다가, 생각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내린 결론이다. 번복은 무의미했다.
넓지는 않은 오두막이다. 들어서자마자 식탁이 보이고 약간 구석에 침실이 있다. 남자는 식탁의 의자를 당겨 벨져를 손짓한다. 벨져는 남자가 손짓하는 대로 의자에 앉으려 했으나 의자가 높아 땅에 발이 닿지 않았다. 남자가 부엌 구석으로 향한다. 푸른 눈으로 그 움직임을 좇았다. 냉장고를 열어 무언가를 들고 남자는 다시 식탁으로 다가온다.
릭 톰슨이오. 당신은?
“벨져 홀든.”
벨져보다 훨씬 큰 손이 벨져 앞으로 컵을 내밀었다. 하얀 우유로 반쯤 채워진 파란 머그컵이다. 맥주는 몇 년 더 있어야 마실 수 있겠군? 맥주캔을 따며 너스레를 피워 웃는 얼굴에 벨져가 미간을 좁혔다. 아이 취급은 썩 달갑지 않다.
릭은 저 바다 너머에서 왔다고 한다. 장기 휴가를 내어 일을 쉬고, 휴양 겸 숲 속의 오두막을 하나 빌려 머물고 있다고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휴식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나. 이런 구석진 숲이라면 사람이 오지 않으니 마음대로 쉬기에는 더할 나위 없다는 것이 릭의 주장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벨져가 여기까지 와버렸지만. 확실히 홀든 저택을 제외하면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사흘은 걸어야 하니 일리는 있다.
한손으로는 맥주를 들이켜며 다른 손은 옆에 말려 세워져 있던 지도를 식탁 위로 도르르 편다.
“프리츠라고 했나?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런 먼 곳에 가는건지 모르겠지만, 긴 여정이 될 텐데 괜찮겠소?”
다시 말리려하 는 지도의 끝자락에 릭이 컵을 얹는다. 다시 맥주를 한 모금 입에 대면서 녹색 눈이 벨져를 곁눈질했다. 그 손끝이 지도 위의 한 지점을 톡톡 친다. 그 손끝을 가만 보았다. 여기는 이쯤이고. 릭이 설명을 시작한다. 손끝이 지도 위를 미끄러져 멀리에서 멈춘다. 프리츠 저택은 이쯤이지. 음성과 함께 시선이 얽힌다.
“보시오. 산을 네 개 넘고, 강을 두 개 가로질러야 하오. 걸어서라면… 당신 걸음으로는 못해도 열흘은 족히 걸릴 거야.”
지도 위를 손끝으로 두드리는 소리. 녹색 눈이 벨져를 위아래로 훑는다. 릭의 확신에 찬 어조에 벨져는 눈을 찌푸렸다. 열흘? 묘하게 깔보는 듯한 말투가 신경을 긁었으나 벨져 자신도 그 정도는 걸리리라 각오하고 있었기에 무어라 반론을 할 수가 없다.
시간이 없다. 식탁 위로 얹어놓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는 또 제레온 경을 찾는 건가. 머리 한 통 위에서 내려다보던 얄미운 형제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거지 같은 다이무스 홀든.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집으로 돌아온 다이무스는 담담하게 그리 말하겠지. 네가 가봤자 제레온 경께 폐만 끼치지 않겠나. 생각만 해도 화가 치민다. 폐를 끼친다고? 형은 그냥 내가 제레온 경을 따르는 게 싫은 거잖아. 내뱉어봤자 듣지도 않을 말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짧은 인생을 통해 알고 있다.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도착해야 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러나온 음성은 벨져 홀든답지 않다. 한탄과 절망, 패배감이 묘하게 섞인. 아직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묘안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대책 없이 그저 밀어붙여서 해결될 것은 없다고 어린 홀든은 교육받았지만 물리적인 거리는 어쩔 도리가 없다.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릭은 고개를 숙인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이를 가만 바라보았다. 턱을 받치고, 견과류를 집어 입에 넣는다.
“프리츠 저택에는 무슨 볼일이?”
“제레온 경의 생신이다.”
제레온 경? 릭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멀리서 왔다더니 제레온 프리츠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모양이었다. 프리츠 저택의 위치는 알면서. 라고 하기에는 워낙 큰 저택이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벨져는 고개를 한 번 좌우로 젓는다. 캔이 식탁 위로 소리내어 놓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다른 캔이 소리내어 따인다. 식탁 위에 놓인 캔은 어느새 세 개째다.
잘도 마시는군.
꼴깍꼴깍 삼키면서 움직이는 목젖의 움직임이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벨져 주변에 저렇게 술을 벌컥벌컥 마시는 사람은 없기에 조금 신기하기도 하다. 마시는 모습을 흉내라도 내듯 우유를 한 모금 입에 넣는다. 컵을 내려놓고 입가에 묻은 우유를 닦으려 했지만 닦을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벨져를 잠시 보다가, 릭이 말을 시작했다.
“하긴…그 제레온 경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군. 어쨌건, 길은 알려줄 수 있는데…걸어갔다간 제때 도착하는 건 무리일 거요. 나흘이라니 택도 없지.”
전부 사실이고 맞는 말이다. 날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나흘 안에 프리츠 가에 도착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치고 벨져는 자신을 감싸는 처절함과 비참한 감각에 이를 악문다.
패배를 확신하면서도 가야만 한다. 열심히 가면 엿새 안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라도 제레온 경의 생신을 직접 축하할 수만 있다면…. 아니 그래서는 의미가 없다. 어떻게 해서든 제때 맞춰 도착해야만 한다. 늦는다고 문전박대할 제레온이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욱.
절박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릭은 태연한 어조로 말문을 연다.
“원한다면 내가 데려다줄 수도 있소. 눈 깜짝할 새에.”
“방법이 있나!?”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의자 위에 무릎으로 선 채로 두 손을 식탁 위로 내리 짚는다. 몸을 앞으로 내밀었지만 묘하게 식탁이 넓은 탓에 릭까지는 아직 거리가 꽤 있다.
그리고 깨닫는다. 릭의 말이 벨져의 상식으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평소의 벨져라면 나를 조롱하는 건가, 혹은 허무맹랑한 소리는 집어치라 했을 것이나,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함이 판단을 흐리게 한다. 속았나? 이제 와서 의심을 품으면서도 기대를 버릴 수가 없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억지로 타액을 삼키며 릭의 녹색 눈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녹색 눈이 깜빡깜빡 벨져를 비춘다. 잠시 시선을 돌리기도 했다가, 검지 끝으로 제 뺨을 긁적였다. 음…. 한심한 소리. 묘하게 잡고 늘어지는 간격이 벨져의 혀를 바싹 말린다. 탁탁. 작은 손끝이 식탁을 두드린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릭. 참지 못하고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 릭이 오른손을 어깨 위로 들었다.
무언가의 신호 같기도 하다. 반사적으로 손을 따라 벨져의 시선이 올라간다. 릭은 손을 허공에서 몇 번 휘젓고, 헛기침했다. 그러자 손이 갑자기 생겨난 새카만 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고개를 갸웃할 새도 없었다. 손의 행방을 찾으려 하기도 전에, 바로 얼굴 앞으로 손이 나타났다. 벨져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다. 놀라는 벨져의 입가를 커다란 손이 손등으로 닦아준다. 그리고 작은 코를 살짝 쥐었다. 푸른 눈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깜빡일 뿐이다. 릭이 싱글싱글 웃었다.
“이런 뜻이오. 난 공간능력자거든. 사람도 옮길 수 있어. 어디라도 몇 초 안에 도착할 수 있지.”
손은 다시 검은 구멍으로 사라져 제자리로 돌아갔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벨져 앞에서 릭은 보란 듯 아까의 그 손끝으로 작은 동전을 튕기기 시작한다. 위로 날려지고, 다른 방향으로 떨어지나 싶다가도 검은 구멍에 쏘옥 빠져서는 릭의 손 위로 정확하게 떨어진다. 그런가 하면 허공에서 검게 삼켜지더니 주먹을 쥔 손 안에 고이 담겨있기도 하다.
눈이 떨어지지 않는다. 푸른 눈을 가늘게 뜨고 제 손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벨져에게 릭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다.
“신기하지?”
“그…렇군.”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공간능력자라니. 물론 이 세상 모든 능력자를 벨져가 알던 것도 아니지만. 저 정도 능력이면 풍문으로나마 흘러들어올 법한데. 아니, 저 능력을 써서 자신의 능력을 감춘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두 눈은 릭의 손끝에서 희롱당하는 작은 동전의 움직임을 따라 바쁘게 움직인다.
여기까지요. 손장난은 릭이 동전을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끝이 났다. 그제야 벨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릭과 눈을 맞춘다. 싱글싱글 웃는 릭 톰슨의 여유로운 표정이 어딘가 얄밉다. 하지만 이거면 분명 충분하다. 아니, 오히려 과한 능력일 것이다.
나를 데려가.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 릭이 몸을 내밀어 벨져의 입가에 제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쯧쯧. 혀를 차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푸른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감한다. 그리고 그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내 능력을 맨입으로 이용하겠다는 거요?”
장난스레 웃는 릭에게서 악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의자 깊이 묻고, 벨져는 숨을 들이킨다. 과열되어 있었다. 침착해야 한다. 릭이 말을 잇는다.
“아홉밤을 눈 깜짝할 새로 줄이는 황금 같은 수단이 아니겠어? 그에 걸맞는 무언가를 줘야지.”
정론이다. 오늘 처음 본 남자가 거기까지 도와줘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아무런 대가 없이 친절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벨져가 원하는 바도 아니다.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게 뭐지?”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대 같은 어린 아이에게 거금을 가져오라거나 하지는 않아. 음……도착해야 하는 날까지 일주일이 남았다고 했지? 닷새간 내 뒤치다꺼리를 도와주는 정도면 괜찮을까? 그러니까. 설거지나 식사준비 같은? 전날 저녁에는 도착하게 해주겠소.”
“좋다.”
그렇게 벨져 홀든과 릭 톰슨의 소소한 계약이 성립되었다.
그 날은 밤이 깊어 일단 수면을 취하기로 했다. 잠옷은 릭이 흰 티가 많다며 적당한 것을 빌려주었다. 정말 맨몸으로 집을 뛰쳐나왔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이렇게 아무 대책없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을. 한숨을 쉬는 벨져의 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세안을 마친 릭이 웃으며 말을 건네온다. 침대가 넓은데 괜찮으면 같이 어떻소? 저렇게 넓은 걸 두고 그대를 소파에서 재우자니 내 마음이 아프군. 난 상관 없다. 아마도 이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으리라.
케스자리는 믹스존이라 좀...묘한데
토욜 일반:M26/레드:M07 일욜일반M25/레드M08
일케에여
나머지는 > http://blog.naver.com/cottonsmilk/220715669913 요기 요거들구가여어
orbit pilgrimage/궤도순례
R19/B6/카피본/36P
돌발...본이에여 릭벨. 제레벨같기도하고. 벨져가 제레온교 신자질하는내용.
둘다 정신상태가 그렇게 올바르지는 않은것같은...
모부도 좀 있습니다 주의.
표지는 기미님(@89880CP)
그리고 콜님이 축전을 주신다고...햇다...어예!
그의 기사를 향한 마음은 마치 종교와도 같다.
어떠한 논리나 이성조차 통하지 않는 굳은 신념과 그를 지침으로 한 일련의 행동.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절대적인 진리. 그 뿌리가 되는 무언가를 사람은 종교라 한다. 그렇다면 벨져는 그 누구보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벨져 홀든이 종교? 감상을 쓸데없는 것이라 치부하는 차가운 청년에게 이 어찌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으며 코웃음 치겠지. 그 녀석이 신을 믿는다고? 헛소리를, 자기가 신이라고 할 녀석이야. 하지만 릭 톰슨이 확신하건대 벨져 홀든은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신도였다. 눈앞의 살아있는 인간을 신으로 모시는.
의자에 앉은 장년의 기사는 말이 없다. 눈을 감고 미동도 않는 몸. 멀리서 보기엔 얕은 호흡과 함께 천천히 움직이는 어깨만이 그가 살아있다는 증표와도 같았다. 저 주름진 두 뺨에 가져다 댄 손은 온기를 느끼고 있을까. 자신의 신을 접하는 청년은 그 어떤 때보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신체를 모신다. 선혈이 묻은 제 검을 닦을 때보다 섬세하게 피부를 짚어나간다. 몸을 감싸는 검고 긴 코트. 순결한 베일같이 하얗게 떨어지는 머리카락. 그 모습이 마치 저의 신을 떠받드는 사제와도 같다.
릭 톰슨은 제레온 프리츠를 섬기지 않았으므로 따지자면 이교도라고 해야 할까. 릭은 어디까지나 단순히 지켜보는 입장이 되어 벽에 몸을 기댄다. 다른 신도 없이 신과 사제만으로 이루어지는 조용한 미사를 지켜본다. 두 사람의 이마가 맞닿는다. 기도를 읊조리는 달콤한 음성은 입구 근처의 이교도에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두 귀를 기울이고 어두운 방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손등, 볼, 이마. 순서대로 붉은 입술이 몇 번이나 닿았다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작게 내밀어 진 빨간 혀가 신의 마른 입술을 핥았다. 여운을 아쉬워하듯 몇 번이나 입맞춤을 반복한다.
어둠이 내린 방에 보슬거리는 빗소리가 울린다. 하얀 손을 가리는 검은 장갑이 주름진 손을 감싸 쥐었다. 잘 되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제레온 경. 릭은 간신히 귀에 닿은 목소리의 파편을 주워 담으려 신경을 곤두세운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을 달콤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를 쿡쿡 찌른다. 그대의 성대가 그런 음성을 만들 수 있었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청년은 그 뒤로도 기사에게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지켜보는 이의 심리는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벨져, 그러다가 제레온 경의 입술이 닳겠소? 아니 아니지. 휴~ 거기 도련님, 기사분이 그렇게 사랑스러운가봐? 그랬다가는 칼끝이 제 얼굴을 향할 거다. 장난은 그만둬, 그럴 심정이 아니라는 건 네가 잘 알 텐데. 그런 말과 함께. 물론 그 짜증스러운 표정도 좋지만…. 아니. 지금 자신의 불편한 심기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어떤 말도 벨져의 제레온을 향한 충의를 누를 수 없다는 것을, 릭 톰슨은 안다. 자신이 아닌 그의 신에게 입을 맞추는 그가 이 세상 것이 아닌 마냥 아름답다는 것도. 어쩌면 자신과 사랑을 나누는 순간보다 더욱.
신을 향한 기도가 끝나고. 사제는 몸을 돌려 이교도를 향한다.
릭 톰슨이 잠에서 깨는 순간이다. 푸른 빛이 릭을 향한다. 반사적으로 박수라도 치려 들린 손을 멋쩍게 내리고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는다.
“끝났소?”
“기다리게 했군.”
다가온 그에게 답하듯 등 뒤로 손을 뻗어 문을 연다. 벨져를 먼저 내보내고 뒤이어 문을 나섰다. 축축한 습기. 복도와 방은 별다름 없을 터인데 호흡이 탁 트인다.
길게 늘어진 복도는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로 가득하다. 다른 이는 보이지 않았다. 고용인의 대부분을 잃은 저택에 남은 이는 두 손으로 꼽을 정도가 아닐까. 황량한 저택이 얼마 되지 않는 고용인과 제레온 프리츠의 유품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음을 릭은 안다. 눈앞의 벨져 홀든 또한 그 유품 중 하나라는 사실도.
미처 닦이지 못한 유리창이 빗물로 얼룩진다. 번개로 번뜩이는 창을 등지고 선 벨져는 마치 홀로 다른 공간의 사람인 것 같았다. 마주한 푸른 눈이 릭의 속을 꿰어본다. 릭이 원하는 대로. 검은 코트를 두른 두 팔이 들어 올려진다. 이리로, 네가 원하는 곳으로. 계시가 릭을 이끈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다가가 젖은 몸을 끌어안았다.
아직 비가 마르지 않은 그에게서는 아까와는 다른 향이 난다. 오래 방치된 폐허에서 날 법한 묘한 먼지나 곰팡이의 냄새 같은. 벨져 홀든이 이렇게 타인의 향에 무력하다는 것을 릭은 얼마 전에야 처음으로 알았다. 릭이 아는 벨져는 그 어디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의 모든 것은 굳건하게 유지될 것이었으므로. 지금 그의 몸에서 풍기는 오래된 골동품의 향이, 벨져의 것이 아닌 모든 흔적이 그저 어색하다. 은은하게 묻어나는 축축한 광기가 벨져가 그의 미친 신에게서 옮은 것인지 아니면 벨져 자신의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 하얀 볼에 입을 맞추고, 입술에 키스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신을 받아들이던 연인의 입술에 제 것을 덧씌운다. 릭은 신의 흔적을 지울 필요가 있었다. 연인으로부터.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되돌리기 위해…. 아니.
정말 그런 건가?
벨져 홀든이 제레온 프리츠에게 입맞춤하는 것을 처음 목격한 순간, 릭 톰슨은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한 번, 두 번, 세 번을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을 빤히 바라보며 릭은 저가 마치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진다. 수줍게 내밀어 진 붉은 혀가 기사의 마른 입술을 적시던 순간조차 릭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한치의 부끄럼이나 수치 없이, 당당하게 이루어지는 입맞춤은 분명한 벨져 홀든의 의지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리고 벨져는 릭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벨져를 이 방으로 데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릭 톰슨이었으므로. 그러니까 한마디로 벨져는 자신의 연인이 보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다른 이에게 입을 맞췄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이 어찌 연인 된 자로서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그가 벨져와 처음으로 살을 섞고 입맞춤을 나눈 지 며칠 되지 않은 시점에서.
“벨져, 그…제레온 경과는, 그, 그런 사이였소?”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제레온 프리츠가 벨져 홀든에게 얼마나 예민하고 민감한 사안인지 알기에 그래야 했다. 벨져의 역린을 건들지 않는 방식으로 심리를 알아내고 싶었다. 릭이 벨져의 단순한 동료이거나 지나가는 사람이었다면 그저 못 본 체 눈을 돌렸겠으나, 벨져 홀든은 릭 톰슨의 연인이기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아니던가.
벨져는 눈을 찌푸리고 릭을 돌아본다. 검은 장갑에 싸인 두 손은 여전히 제레온 프리츠의 얼굴을 감싼 채다. 야위었지만 듬직한 두 다리에 걸터앉은 청년은 의아하다는 듯 말꼬리를 올린다.
“그런 사이?”
“그러니까, 제레온 프리츠 경과 서로…아주 사적이고, 친밀하고, 육체적으로도 가까운 관계였냐고 묻고 있는 거지. 걱정 마시오, 그대를 추궁하는 게 아니야. 제레온 경이 그대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소. 다만…그대가 그런 마음으로 제레온 경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거요.”
이쯤 오면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중심이 모호해진다. 그럴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릭이 생각하기에 벨져의 제레온을 향한 감정은, 아주 특별하다고는 생각했으나 그런 방향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그리고 그 생각은 아직 변함이 없다.
파란 눈이 깜빡인다. 흐음. 몸을 의자에서 내려 릭을 향해 뒤돌아선다. 하얀 손가락이 입술을 몇 번 건들고, 팔짱을 꼈다. 그리고 입을 뗀다.
“제레온 경이 나와…너 같은. 비슷한 사이였냐고 묻고 있는 건가? 연인이었냐고?”
“비슷하오. 정확하게는, 제레온 경에게 그대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냐고 묻고 있지.”
“아무래도 네가 잠이 덜 깬 모양이군. 피곤하다면 쉴 곳을 마련하겠다.”
벨져는 그렇게 단언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역시. 마른 웃음이 입가로 흐른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조금 더 불쾌해하거나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자각이 없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그런 의미는 없는 걸까. 릭은 아마도 후자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벨져의 행동과 말이 맞물리지 않는다.
제레온과 벨져를 번갈아 본다. 가장 확실한 건 아마 제레온 프리츠에게 사실을 듣는 것이겠으나, 산 채로 죽은 꼴과 같은 그가 릭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기에 릭은 다시 한 번 벨져에게 말을 덧댄다.
“그렇지만 그대는…입맞춤을 했어. 방금도 그랬지 않소. 몇 번이나.”
무슨 불순한 소리냐며 이번에야말로 화를 낼까. 릭은 제법 긴장했다. 벼락같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벨져의 호통을 각오했다. 그러나 벨져는 눈을 가늘게 찌푸릴 뿐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파란 눈이 깜빡인다. 천천히, 붉은 입술이 열린다. 릭. 벨져가 말을 시작한다.
“진심을 전하는데, 육체적인 접촉이 말보다 확실하다고 한 건 너였다.”
그 말이 릭의 복잡한 심경을 더욱 배배 꼬이게 만들었다.
알고 있다. 벨져 홀든이라는 자는 자신을, 릭 톰슨을 사랑한다. 제레온 프리츠를 향한 경애나 애정과는 별개로, 완벽하게 다른 이야기로. 그리고 그렇기에 벨져는 자신이 제레온에게 입을 맞췄다고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릭을 사랑하기에 그의 말에 따라 제레온 프리츠에게 입을 맞췄다고.
머리로는 이해한다. 공과 사가 확실한 벨져다. 제레온을 향한 감정과 릭을 향한 애정에는 완벽하게 선을 긋고 있으리라. 하지만 릭에게는 그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벨져 홀든의 제레온 프리츠를 향한 마음이 플라토닉이냐 에로스냐, 혹은 아가페냐. 그런 문제를 떠나 어찌 되었건 그 충의는 일종의 애정이요 연모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연인의 둘도 없는, 가장 우선시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게 과연 과한 욕심일까?
다만 릭을 고뇌하게 하는 것은 이런 욕심만이 아니다.
맑은 눈이 릭을 꿰뚫어본다. 올곧은 소리로 묻는다.
“내가 틀렸나?”
아니, 그대가 옳소. 라고. 릭은 답했다. 즉답했다.
릭 톰슨은 벨져 홀든을 안다. 그가 무슨 근거와 심리로 어떤 행동을 취할 지 다른 벨져 홀든을 아는 사람보다 더욱 정확하게 추론해 낼 수 있었다. 그런 자신이 있었다. 지금도 그 자신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결과 또한 릭 톰슨의 예상 범주에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릭은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정말로 원하지 않는다면 벨져를 말릴 수 있지 않았나. 그대가 제레온 경과 키스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벨져. 그런 말따위로. 정말로 연인이 다른 이에게 애정을 보내는 것에 질투했을 뿐이라면. 연인으로서 당연한 독점욕이라면. 하지만 릭은 벨져를 말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 결과였다.
사적인 관계가 되고 난 이래로. 릭은 종종 예고한 것보다 빠른 시각에, 혹은 예고 없이 벨져를 찾아오곤 했다. 불쑥 찾아오는 연인을 벨져는 귀찮아하지 않았고 릭은 그것을 허가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원할 때 찾아가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릭이 가진 능력의 특권이었다.
공간이 이어지는 끝은 집무실 옆의 그가 이따금 휴식을 취하는 작은 방이다.
벨져 홀든의 공간치고는 비교적 난잡한 공간에서, 쓸데없이 노크를 하고 고개를 내미는 것이 릭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세 번 문을 두드리면 벨져가 그에 응답한다. 아주 사소한 약속 같은 행위였다. 릭은 이때도 문을 두드리려 했다. 숨을 들이쉬고. 헛기침을 작게 뱉었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려다가, 멈췄다.
기미님과 트윈지. 빨간책이에여.
벨져가 고양이 귀꼬리를달고있는...릭벨. 냥벨책이에여. 아니 페도냥인가...여튼 그렇습니다
저는 쫌 수인같은 느낌입니다. 개그.
5코자리:B43/디페도 들구가여
R19/A5/46P/6000원
회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슬슬 날이 어두워지고 저녁 식사가 다가오는 시간. 평소라면 조용해야 할 거리가 소란스럽다.
야옹야옹 귀를 자극하는 고양이들의 울음소리. 한두 마리는 아닌 소리를 들으며 릭은 그리 생각했다. 다 큰 것들은 아닌 듯한데, 그러면 어린놈들이 무슨 일로 이리 울어대는지. 심지어 썩 즐거워 보이는 소리도 아니다. 어린아이들의 다툼인가? 아이들의 소란에 굳이 관심을 주지 않는 게 현명하다 판단하면서도 귀는 자연스럽게 그 소리에 열중한다. 그래도 릭은 관련되지 않으려 했다. 애석하게도 그 다툼이 릭이 피할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났을 뿐이지.
넓지 않은 골목이다. 그런 골목에 아무리 아이라고는 해도 한 무리가 들어차 있으니, 지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앙칼진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웅성거림까지 섞여 귀가 시끄럽다.
눈앞으로 빼곡한 아이들의 무리. 좋게 봐줘야 열다섯 여섯쯤 될까. 높아야 턱선 정도까지 오는 머리 위로 뾰족한 귀가 있다 없다 하는 것이 인간과 고양이가 섞여 있는 모습이었다. 그 너머에서 무리와 대립하고 있는 건 하얀 머리카락, 하얀 귀꼬리가 달린 고양이다. 이 근방에서는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역시 영역 다툼인가? 아이들 간의 소소하고 장난스러운 영역 다툼이야 이따금 있곤 하니 놀랄 일도 아니다. 다만 이렇게 크게 무리를 지어 하나를 상대하는 경우는, 심지어 이렇게 앙칼진 소리를 내는 거의 없을 텐데.
뒤편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눈치를 챘는지 뒤에 서 있던 아이 중 한 명이 릭에게 시선을 돌린다. 아, 인간 형아다. 얼룩덜룩한 귀를 가진 고양이의 말에 옆에 있던 인간의 아이와 붉은 고양이가 릭을 보았다. 괜한 일에 얼굴을 내밀고 싶지 않았지만. 내심 한숨이 터졌다.
“무슨 일이니?”
떨떠름한 미소로 말을 건넨 릭과 세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누구야? 저기 아파트 사는 형이잖아, 가끔 봤어. 아 그 아파트? 짧은 대화가 끝나고 아이들은 쪼르르 일러바치기라도 하듯 릭에게 제 할 말을 내뱉는다.
“뭐하는 놈이냐고 했는데 저게 무시하잖아.”
“여긴 우리 영역인데.”
“기분 나쁘게 깔보고.”
“그래서 대장이 한마디 하고 있어.”
저기 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앞쪽을 향한다. 릭도 그 시선을 따라 정면으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잘 보니 본 적 없는 하얀 고양이와 대치하기라도 하듯 가장 앞에 선 건 갈색과 흰색으로 얼룩진 귀와 꼬리를 가진 아이다. 이 일대에서 자주 보이는 무리의 골목대장 격 고양이였다.
어린아이들에게 영역은 제법 중요한 문제다. 아이들의 작은 왕국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고양이들은 자신의 체취를 남겨 영역을 표시하고 대개 그 놀이에 인간의 아이가 뒤섞여 놀면서 무리를 형성한다. 하지만 이 시대에 와서는 어디까지나 아이들의 작은 놀이규칙에 지나지 않는다. 야옹야옹거리거나 게임을 해서 영역을 넓히고 어쩌고 하긴 하지만. 영역을 침범했느니 어쨌느니 본격적으로 다투는 일은 지극히 드문 일인데.
야옹 소리와 웅성거림에 섞여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놈들 영역이라는 아무것도 아닌 사실과 내가, 무슨 상관이지?”
“어쭈 이게?!”
흥. 코웃음을 치는 하얀 놈에게 대장이 울컥 뛰어들려는 것을 뒤에 있던 아이가 붙잡아 막았다. 이런, 놔뒀다간 심해지겠는데. 릭은 아이들 사이를 지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너희도 그만 놀고 집에 가야지?”
“그치만!”
운이 좋은 걸까. 릭의 말에 편승이라도 하듯, 멀리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 엄마가 부른다, 나 갈게. 무리 중 한 아이의 이름이었는지 한 명이 쪼르르 그 방향으로 달려가 버렸다. 해는 이미 뉘엿뉘엿 저물고 옅은 어둠이 깔린 하늘로 별조각이 흩뿌려지기 시작한 때였다. 가로등이 깜빡거리며 켜진다.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대장 격인 아이는 볼을 잔뜩 부풀린다. 가엽게도 꼬리가 바들바들 떨며 부풀어있었다. 이어서 토라진 듯 릭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곧이어 하얀 놈에게 눈을 잔뜩 찌푸린다.
“다음에 또 여기서 알짱대기만 해봐!”
분에 찬 말을 남기고 아이는 쪼르르 집으로 달려갔다.
대장 격인 고양이가 멀리 사라지자 남은 무리는 금세 흩어진다. 가로등이 밝아진 저녁.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골목에 릭과 하얀 고양이만이 남는다.
하얀 것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 표정 그대로 코웃음 친다. 이 녀석도 잘한 건 없을 텐데. 마른 웃음을 삼키며 릭이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소?”
“네가 참견할 필요는 없었다.”
돌아온 것은 날카로운 푸른 시선과 릭을 쏘는 음성. 릭은 그 한마디로 아이들과 분쟁이 생긴 원인을 단번에 파악했다.
말꼬라지 하고는. 아무리 영역이 있다고는 해도 여기 사는 아이들이 다른 곳에서 온 아이에게 그렇게 날카롭게 대하는 성격은 아닐 텐데, 이런 고압적인 태도라면 누구에게나 살갑게 대하는 사람이라도 이 태도를 견디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으리라.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내가 당신을 그냥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니까.”
“흐응…….”
네 입장이야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 릭은 대체 뭐하는 고양이인가 싶어 전신을 훑어보았다.
하얀 머리카락 하얀 귀꼬리. 고급스런 차림새나 몸가짐으로 보건대 제법 있는 집의 아이겠지. 이 정도 용모면 스쳐 지나가더라도 얼핏하게나마 머릿속에 남지 않을 리 없으니 역시 처음 보는 고양이다. 이사라도 왔나 싶었지만 그렇다면 아이들이 그런 식으로 반응하지는 않았을 것 같고. 미아거나, 혹은 가출인가?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그 하얀 것은 릭의 옆을 지나치려 했다. 반사적으로 그 팔을 덥석 잡는다. 서늘한 푸른 눈이 흘끗 릭을 쏘아보고, 릭은 손을 놓으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아, 미안하오…나도 모르게 그만. 이제 집으로 가는 건가?”
“아니.”
“갈 곳은 있소?”
“없다.”
가출이군. 명확한 대답이었으나 동시에 이렇게 솔직한 대답이 나올 줄은, 아니 뻔뻔한 대답이라고 해야 할까? 하여튼 너무나 별거 아닌 것처럼 나온 대답이 릭을 놀라게 한다. 그런 릭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아이가 말을 계속한다.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야. 내 갈 길은 내가 알아서 해.”
여전히 콧대 높고 당당한 하얀 것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는 건지. 그 배에서 꼬르륵하고 소리가 났다. 풋. 릭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파란 눈이 릭을 쏘아본다.
“그대 뱃속은 그렇지만도 않다고 하는군. 간단한 식사라면 줄 수 있어. 집에 가라는 소리는 않겠다고 약속하지.”
저를 올려다보는 파란 눈을 가만 바라보았다.
워낙 날이 서 있기에 낯을 심하게 가리는가 했는데. 하얀 고양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무 말도 없이 릭의 뒤를 따랐다. 빈말로 내뱉은 건 아니었으나 그렇게 아이들과 투닥거리던 건 언제고 초면인 자신을 졸졸 따라오는 모습은 또 뭔지. 릭은 그 사실에 한마디를 하고 싶었지만 식사준비를 시작하고 하얀 것이 당연한 듯 식탁에 앉을 때까지 두 사람은 무언이었다.
식사는 달걀 후라이와 비엔나소시지가 몇 개. 간단한 샐러드. 그리고 토스트 두 조각씩. 조촐한 식사다. 저 어딘가 부티나는 고양이가 이런 걸 입에 댈까. 릭의 걱정은 다행스럽게도 빗나가서 하얀 것은 아무 말 없이 식기구를 들고 음식을 입에 대었다.
“이렇게 무작정 따라와도 괜찮은가 봐?”
릭이 샐러드를 한 입 넣으며 그리 물었다. 소시지를 포크로 집던 하얀 손이 멈춘다. 푸른 눈이 릭을 향했다.
“무슨 뜻이지.”
“모르는 사람 집에 이렇게 쫄래쫄래 따라와도 괜찮다고 배웠소?”
릭의 입술이 장난질이라도 하듯 곡선을 그린다. 머리 위로 솟은 귀가 작게 움찔했다. 하얀 것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눈을 찌푸렸다.
“네가 오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만약 내가 당신한테 나쁜 생각이 있었다면 어쩔 거였냐는 거지.”
그 말에 하얀 것이 파란 눈을 깜빡거리며 릭을 빤히 바라본다.
“그런 속셈이었나?”
놀라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서워하거나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덤덤하게 되묻는 말에 무어라 반응해야 하나. 릭은 입가에 띄웠던 미소를 굳히고 잠시 말을 잊었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두고.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정면의 하얀 것을 본다.
“내 말은…….”
“아니면 됐어.”
해명의 말조차 가로막는 두 마디로 대화가 일단락되었다. 아니 이걸 대화라고 해야 하나. 도통 대화가 되지를 않는다. 하얀 것이 다시 음식을 입에 가져가고, 릭도 식기를 들었다. 릭은 눈앞에 놓인 조촐한 식사를 입에 대며 하얀 것을 다시 바라본다.
번듯한 차림이나 식기구를 다루는 품새. 묘하게 고상한 얼굴까지. 그저 추측에 불과하지만 역시 그냥 일반 가정에서 뛰쳐나온 가출소년은 아닐 것이다. 어디의 귀족 도련님이 집을 뛰쳐나온 걸까? 그렇다면 자신이 그 도련님을 주운 것일 테고. 귀족집 고양이쯤 되면 금이야 옥이야 살펴 모시고 심하면 감시까지 붙인다던데. 바깥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어린 귀족 고양이라니. 하물며 이런 지극히 평범한 거리에서는 더욱 보기 힘든 존재다. 그리 생각하면 지금 눈앞의 하얀 것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올 법한 우연 같은 일이라고 해야 할까.
식사가 끝나고 얼마 없는 접시가 모두 치워졌다. 커피? 우유나 주스도 있소. 하얀 것은 홍차라 답한다. 저렇게 뻔뻔할 수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릭은 얼마 없던 티백을 찾아 홍차를 내놓았다. 번듯한 찻잔 대신 머그컵이었지만.
아이는 하얀 머그컵을 들고 가만 보다가 이내 아직 뜨거운 차를 입에 가져다 댄다. 릭이 입을 열었다.
“통성명이 늦었군. 난 릭 톰슨이오, 그대는?”
“벨져 홀든.”
벨져, 나쁘지 않은 이름이군. 짧은 시간 아이의 얼굴을 가만 보고. 다시 입을 연다.
집이라도 나왔소? 그런 셈이지. 부모님이 걱정하실 텐데. 상관없다.
짤막한 대화는 여전히 일방적이라면 일방적이다. 마른 웃음을 참으며 대화를 이어간다. 언제 집을 나왔소? 릭의 말에 벨져가 머그컵을 입에서 떼고 잠시 옆을 보며 생각에 빠졌다. 미간이 약간 좁아지며 눈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다시 릭에게 시선이 향한다.
“사흘 전에.”
“계속 거리에 있었소?”
하얀 머리가 끄덕끄덕 위아래로 움직였다.
사흘. 어딘가로 훌쩍 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는 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까. 아니, 아이가 홀로 집 밖을 떠돌기에는 충분히 긴 시간이 아닐 수 없으리라. 릭이 되묻는다.
“잘 곳을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어렵지 않았다.”
“설마 사흘이나 이렇게 아무나 쫓아가서 잠자리를 받았다고?”
저도 모르게 놀라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벨져는 머그컵을 내려놓으며 또 눈을 찌푸린다.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잠은 적당한 벤치면 충분해.”
배려라고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답변에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저런 속된 말로 비싸 보이는 모양새를 하고 노숙이면 충분하다니. 심지어 아무리 보아도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다. 위험하기 짝이없지 않은가. 그렇게 눈을 찌푸리면서도 릭은 약간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렇게 뻔뻔한 태도라는 건 아직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거겠지.
“그런 말을 들으니 다행이군. 당신 정도면 누가 해코지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어.”
벨져는 잠시 머그컵을 든 채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릭에게 시선을 맞추다가, 작게 코웃음 치고 다시 컵에 입을 댄다. 릭도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식사와 간단한 후식이 모두 끝나니 어느새 완전한 밤이 되어 있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수건에 손을 닦으며 몸을 돌린다. 하얀 귀를 쫑긋 세운 벨져가 어느새 멀뚱멀뚱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신세 많았군. 이제 가봐야겠다.”
고개는 숙이지 않는 채 벨져가 감사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건넸다. 하얀 꼬리가 뒤에서 살랑인다.
갈 곳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릭은 자신이 들었던 그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초면에 자신이 저 하얀 고양이를 재울 생각까지 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라고 하면, 놀랍게도 지금의 자신은 여전히 이 하얀 것을 곁에 두기를 원하고 있었다.
“또 길에 널린 벤치 같은 데서 잠을 청하겠다고?”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사납기는. 한쪽 입꼬리가 위로 올라간다. 하얀 귀가 솟은 머리의, 두 귀 사이에 손을 얹었다. 쓰다듬은 머리카락은 상상보다 부드럽다. 벨져는 잠시 움찔했으나 릭의 손을 쳐내지는 않는다.
“그럼 여기 머물다 가시오. 밖이 썩 안전하지 못하다는 건 그대도 알겠지. 식사도 함께한 사이에 그대가 봉변이라도 당하면 내 기분은 어떻겠소? 갈 곳이 있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그저 떠도는 중이라면 잠시 이곳에 있는 것도 괜찮은 제안 아닌가?”
푸른 눈은 저를 보는 릭을 빤히 바라본다. 그리고 고개가 밑으로 작게 숙여진다.
“…후에 사례하겠어.”
사선으로 숙인 얼굴을 가리듯 하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누군가 전후를 들었을 때 의아해하거나 혹은 실눈을 뜨고 볼 동거가 시작되었다.
어째서 출처도 불분명한 고양이를 집에 들였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릭 자신도 그저 웃을 수밖에 없으리라.
릭은 가출소년을 집으로 끌어들여 애먼 짓을 할 만큼 악한도 아니지만, 동시에 아무런 대가 없이 따듯한 밥을 먹이고 재워준다는 선행을 할 만큼 성자가 아니기도 하다. 그렇게 사고를 이어가다 보면 한가지 질문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첫눈에 끌렸나? 다시 웃을 말이지만 그랬을지도. 마음 한구석의 사심은 깨닫고 있다. 어떤 면에서건 처음 마주친 순간. 벨져 홀든이라는 존재가 릭 톰슨의 무언가를 자극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식구가 늘었다 해서 큰 변화가 생긴 건 아니다. 벨져는 잠도 소파에서 잤고, 평상시 딱히 릭에게 말을 걸거나 귀찮게 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서, 혹은 집에 돌아와 음식을 준비하는 양이 조금 늘고 치울 접시가 하나에서 둘 정도 늘었을 뿐. 오히려 변화를 눈치챈 건 주변 사람이 더 빨랐다.
벨져와 함께 지낸 날을 두 손가락을 전부 써서 세야 할 즈음이었다.
이봐 릭, 너 요즘 고양이 냄새가 진득하게 나는데, 좋은 사람이라도 생겼냐?
어깨를 툭 치며 하하 웃는 친구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다. 고양이. 짐작 가는 곳이 없을 리 없었다. 출처를 모르는 아이를 집에 들였으니 누구에게도 벨져의 존재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었는데. 릭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냄새가 나나? 웃으며 옷을 킁킁거려보아도 릭은 아리송할 뿐이다.
뭐, 인간은 모를 수도 있지. 같은 고양이니까 후각이 좋다고나 할까? 저기 매력적인 귀와 꼬리를 가진 고양이 친구들이 너에 대해 수군대길래. 어디하고 왔더니, 요 코는 못 속인다구? 지금쯤 네 사랑스런 짝도 인간 냄새가 난다고 주변이 까르르 웃고 있을 거다.
휴일에 본 기억이 맞는다면 지금쯤 벨져는 아마 자고 있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옷에 코를 대어 본다. 다시 몇 번 냄새를 맡아 보아도 릭으로서는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긴 자신의 체취를 기억할 수 있는 인간이, 혹은 고양이가 얼마나 있을까. 그래도 인간 친구는 지금까지 아무도 지적하지 않지 않았나. 아무래도 이 고양이 친구의 코는 생기긴 릭의 코와 똑같이 생겼는데 성능은 제법 다른 모양이었다.
바꿔봤는데 좀...더바꾸고싶은기모찌
이 스킨 넘...댓글이 별로라 닫았다 흑흑 혹시 머 있으심 방명록이나 웹박수쪽으로 부탁드려여 젤빠른건 트위터지만...
막판 한 천자정도 너무막혀서(....)
ㄲㅅ님이랑 둘이서 키워드돌려서 전력
토요일아침/하늘을바라보고/나는그냥보통여자-남자가돼
라는 키워드였는데 느 느낌적느낌으로
안사귀는 릭벨
눈을 떴을 때 다른 사람이 곁에있다는 감각. 혼자 쓸 때보다 가라앉은 침대나 바로 옆으로 느껴지는 타인의 체온. 이따금 들리는 코고는 소리같은. 혼자 지낸 시간이 길었기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느낌이 벨져를 잠에서 깨운다.
릭 톰슨이라는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한지 이제 몇 번이던가. 벨져는 가만 기억을 되새기며 손가락을 꼽아 세어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양손의 열 손가락이 모두 접히고 기억이 끝난다. 다음부터는 손가락으론 모자라겠군. 벨져는 그런 생각을 한다. 이번으로 꼬박 열 번 째였다. 열 번을 쏟아지는 피곤보다 심한 이질감에 눈을 떴다. 창밖으로 새카만 어둠 속에 하얀 눈이 흩날린다. 겨울이다.
옆에서 잠든 남자와 처음 잠자리를 가진 건 언제였더라. 깜빡깜빡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며 다시 떠올려본다. 비가 심하게 쏟아지던 여름. 더위와 습기에 나가떨어진 릭이 벨져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벨져, 당신은 덥지도 않소? 나는 숨이 다 막혀.
장소는. 집무실. 집무실이었다. 릭에게 공간이동을 부탁하고, 돌아온 직후. 창밖으로 천둥번개가 쳤다. 릭의 말대로 끈적하고 덥기까지한 끔찍한 날이었다.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릭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벨져는 서류 작성을 위해 다시 책상앞에 자리를 잡았다.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다시 업무를 마주하는 벨져에게 릭이 했던 말이었다. 버틸만 하다. 벨져가 답했다.
집무실은 어슴프레한 어둠에 잠겨있다. 오후 세 시. 아직 한창 밝을 시간이었으나 날씨가 날씨인 탓이겠지. 릭, 조명을. 벨져의 말에 릭이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딸깍소리와 함께 방이 밝아진다.
보고서 작성은 그다지 오래걸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서명을 끝마치고 벨져는 서류를 모아 흐트러지지않도록 눌러둔다. 릭. 작게 부르는 소리에 답은 없다. 몸을 일으켰다. 릭은 소파에 반쯤 눕다시피한 채 눈을 감고. 잠들어있다. 그 곁으로 다가간다.
릭, 릭 톰슨, 일어나라. 바로 곁에서 말을 걸어도 당사자는 여전히 꿈나라였다. 시계를 확인한다. 오후 세 시 사십 분. 고작 사십 분 사이에 여기까지 깊게 잠들다니. 벨져는 미간을 손으로 짚는다.
"릭,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허리를 숙여 어깨를 흔들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들릴 뿐 눈을 뜨지 않는다. 릭. 다시 한 번 부르고. 여전히 답이 없기에 이번엔 양쪽 어깨를 꽉 붙든다. 억지로 일으켜세우려 한 순간. 녹색 눈이 멀겋게 뜨였다. 이제야 일어났군. 그리 생각했는데. 갑작스레 뻗은 손이 뒷통수를 끌어당겼다.
"…캐서린, 조금만 더……."
갑작스런 무게를 어쩌지 못하고 중심이 앞으로 쏠린다. 벨져는 반쯤 강제로 릭의 품에 머리를 묻는 꼴이 되었다. 평소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나 어정쩡한 자세에서 방심한 상태였으니 어쩔 수 없다면 없는 상태였달까.
릭은 벨져의 머리를 붙든 채 여전히 옹알옹알 잠들어있다. 입에서 나오는 이름은 국적이 뒤죽박죽 섞인 갖은 여성의 것이었다. 어떤 관계였을지 벨져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조금 화가났다. 넉살좋기는. 억지로 그 품에서 벌떡 일어난다. 찰싹 붙어있던 팔에서 빠져나오면서 머리카락과 옷이 흐트러졌다. 하아. 한숨을 쉬고, 릭의 귀를 붙든다. 그리고 제대로 들리도록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소리를 냈다.
"릭 톰슨. 잘 들어. 애석하게도 나는 캐서린이 아니다. 로자린느도, 헬렌도 아니고 말이지."
그제야 릭은 다시 눈을 뜬다. 가늘게. 눈을 잔뜩 찌푸리고 벨져를 깜빡깜빡 바라본다.
"아, 벨라?"
능청스레 장난을 거는 릭에게 벨져의 표정이 굳었다.
"릭 톰슨? 더위에 정신이 나갔군? 지금 당장 네 피를 빼서 서늘하게 해주마."
"장난이오 장난. 벨져. 벨져, 벨져 홀든! 아니 그런 얼굴로 보지 말고. 칼도 넣고! 농담도 모르오?"
"네 농담이 지나치자는 생각은 하지 않나?"
허리춤에 찬 칼을 빼려하는 벨져를 막으려 릭이 그 팔을 붙든다. 땀에 끈적해진 손바닥이 걷어올린 셔츠 아래의 맨살로 닿았다. 덥다덥다 하더니 닿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녹아내릴 마냥 뜨겁다. 그 온도에 놀라 벨져가 찌푸린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뜬다. 릭도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오. 릭의 바람빠진 소리에 벨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제라도 있나."
"차갑군 놀라울 정도로. 조금 더 만져봐도 괜찮을까? 벨져."
뭐라할 새도 없이 손이 다짜고짜 다른쪽 팔을 잡았다. 뜨거운 열이 차가운 피부에 스며든다. 미적지근하게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열기에 벨져는 눈을 가늘게떴다. 썩 좋은 감촉은 아니다. 그럼에도 뿌리치지 않은 건 정면에서 저를 직시하는 녹색 눈동자에 의식을 붙들린 탓이다.
손이 벨져를 끌어당긴다. 녹색에 빨려들어갈 것같은 착각과 함께 입술이 닿았다. 그 와중에도 심록을 담은 눈은 벨져를 놓아주지 않는다. 질척한 혀가 마른 입술을 핥고, 떨어졌다.
"신사된 자로서, 키스할 때 눈을 감는 매너는 모르는거요? 벨져 경."
"흐응. 그걸 키스라고 한 건가? 결투라도 신청한 줄 알았다만."
릭은 마치 못말리는 아이라도 보는 듯 곤란한 눈초리로 벨져를 보고 웃는다.
"내가 무슨 목숨이 아까워 그대에게 결투를 신청하겠어?"
릭의 타액으로 젖은 입술이 어색하다. 벨져는 자신의 팔을 여전히 만지작거리는 손의 감촉에 집중하며 그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것을 속삭인다. 부드러운 저 녹색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은은하게 넘실거리는 욕망이나 애정같은. 네가 나를 이렇게 바라보는 줄은 몰랐는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벨져는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 다만 그저 생각할 뿐이다. 네가 원하는 걸 내가 줘도 괜찮은 걸까?
벨져는 자신에게있어 릭 톰슨이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한다. 공간 능력을 가진 능력자. 가장 가지고 싶은 능력을 지닌. 그리고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다르게. 릭은 벨져를 다른 사람들과 같은,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멸시나 거부감이나 불편한 감정이 일절 시선이 편안하다 생각했다.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지만, 언제부터 네가 나를 이런 식으로 원하게 되었지? 벨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난 변화가 의아할 뿐이다. 제아무리 벨져의 외모가 뛰어나다해도 자신도 릭도 분명한 남성인것을. 릭이 남자에게 정욕을 품을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저 눈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 자신은 그렇게 놀랍지 않은 것 같다. 원한다면 다리를 벌려서 나쁠 건 없다. 릭은 충분히 벨져를 돕고 있으니까. 육체가 소모품이라고는 하나 고작 성행위에 쓰인다고 크게 무리가 가는 것도 아니다. 다만. 걱정이 된다 하면 그것으로 인해 이 관계가 바뀌는 정도일까.
살을 섞고. 벨져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벨져 본인은 그리 확신한다. 다만 릭도 그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릭."
"벨져, 그러니까…."
릭이 벨져의 말을 가로막는다. 팔을 잡아당겨 벨져를 제쪽으로 끌었다. 싫다면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을 힘이었으나 벨져는 순순히 원하는대로 그 품에 안겨준다.
커다란 손이 하얀 뒷통수를 쓸었다. 여름의 얇은 의복을 사이에두고 피부가 밀착한다. 열기가 스며든다.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는 없소. 싫다면. 그대라면 얼마든 빠져나갈 수 있겠지. 나를 한대 치기라도 하면 충분해."
말을 원하지 않았기에 벨져는 입을 다물기로 한다. 뜨거운 손이 셔츠 밑으로 들어와 등을 쓸었다. 자신조차 만질 일이 거의 없는 부분을 침범하는 열기에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릭. 작게 부르니 아이를 어르듯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괜찮아 그대라면 문제 없을거요. 속삭임과 함께 목덜미로 숨결이 닿는다. 아니 무서운게 아니다, 그저 불러본거야. 그리 생각하면서도 부드러운 손길이 제법 나쁘지 않아 그저 눈을 감았다.
변화는 없었다. 릭은 그 이상의 감정적인 관계를 요구하는 일 없이 벨져의 곁에 머물렀다. 그렇게 이따금 부드러운 두 눈이 저를 바라볼 때마다 허가의 의미로 키스를 하고. 그 횟수가 이번으로 아홉 번이다. 산뜻한 외견이나 평소 행실과는 달리 침대에서 릭 톰슨이 보이는 꽤 끈질긴 성향은 벨져에겐 신기한 모습이기도 했다.
행위가 끝나면 릭은 벨져를 항상 제 집으로 데려간다. 혹은 자신의 집에서 행위를 시작하거나. 그리고 아침이 오기 전에는 돌려보내주지 않는다. 릭, 게이트를 열어. 아무리 말해도 릭은 조금만 더 쉬고 가도 괜찮지 않냐 할 뿐이다. 침대로 다시 들어오라 이끄는 팔에는 어쩔 수가 없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릭의 능력이 꼭 필요한 곳이므로.
그것을 알면서도 벨져가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게이트를 잇는 릭에게 핀잔을 주거나, 화를 내지 않는 것은 그 공간이 벨져에게도 편안한 탓이다. 처음 두 세번 정도는 조금 어색했을까. 다만 그것이 자신이 릭에게 긴장하고있다는 자신답지 않은 감정때문이라 깨닫자마자 그 어색함이 모두 사라졌다. 그 뒤로는 아무 말 없이 릭이 만족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릭이 주는 편안함을 누릴 뿐이다.
벨져가 잘 알지 못하는 땅에서 아침이 오고, 자신을 데려온 남자는 아직 잠들어있다. 이곳에서 벨져가 가진 모든 것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귀족이라는 태생이나 기사단장이라는 직책, 검을 다루는 능력같은, 흔히 벨져 홀든을 이룬다 생각하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혼자 힘으로는 있던곳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존재. 가만히 등뒤의 남자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그가 기꺼이 공간을 이어주기를 기다리는. 그리고 릭은 늘상 벨져를 이곳으로 데려오고싶어했다.
릭 톰슨에게 벨져 홀든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벨져는 요즈음 그것을 생각한다. 딱히 자신의 몸인 것 같지도 금전인 것 같지도, 그렇다고 명성을 원하는 것 같지도 않다. 뭘 원하지 릭? 그리 언어로 물어도 릭은 그저 웃을 뿐이다. 아직은 지금으로 만족하오. 아직은, 이군. 그래 아직은, 그렇기에 지금은 말할 수 없어. 벨져는 릭이 고집이 센 남자인 것을 알기에 더이상 묻지 않는다. 뜨거운 팔이 등 뒤로 돌았다. 거부할 수 있을 손을 내치지 않는다.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오.
느껴지는 고동은 착각일까. 아니면 진실된 릭 톰슨의 심장일까. 해답은 보일듯 말듯 벨져의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사실은. 모르는 게 아니다. 분명 알고있을 텐데. 릭이 원하는 것도, 벨져 자신이 바라는 것도. 다만 그 윤곽이 어렴풋하게 보일 때마다 벨져는 그리 생각하는 것이다. 아 그렇군,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렇게 사고를 멈추고 품에서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