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판 한 천자정도 너무막혀서(....)
ㄲㅅ님이랑 둘이서 키워드돌려서 전력
토요일아침/하늘을바라보고/나는그냥보통여자-남자가돼
라는 키워드였는데 느 느낌적느낌으로
안사귀는 릭벨
눈을 떴을 때 다른 사람이 곁에있다는 감각. 혼자 쓸 때보다 가라앉은 침대나 바로 옆으로 느껴지는 타인의 체온. 이따금 들리는 코고는 소리같은. 혼자 지낸 시간이 길었기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느낌이 벨져를 잠에서 깨운다.
릭 톰슨이라는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한지 이제 몇 번이던가. 벨져는 가만 기억을 되새기며 손가락을 꼽아 세어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양손의 열 손가락이 모두 접히고 기억이 끝난다. 다음부터는 손가락으론 모자라겠군. 벨져는 그런 생각을 한다. 이번으로 꼬박 열 번 째였다. 열 번을 쏟아지는 피곤보다 심한 이질감에 눈을 떴다. 창밖으로 새카만 어둠 속에 하얀 눈이 흩날린다. 겨울이다.
옆에서 잠든 남자와 처음 잠자리를 가진 건 언제였더라. 깜빡깜빡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며 다시 떠올려본다. 비가 심하게 쏟아지던 여름. 더위와 습기에 나가떨어진 릭이 벨져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벨져, 당신은 덥지도 않소? 나는 숨이 다 막혀.
장소는. 집무실. 집무실이었다. 릭에게 공간이동을 부탁하고, 돌아온 직후. 창밖으로 천둥번개가 쳤다. 릭의 말대로 끈적하고 덥기까지한 끔찍한 날이었다.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릭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벨져는 서류 작성을 위해 다시 책상앞에 자리를 잡았다.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다시 업무를 마주하는 벨져에게 릭이 했던 말이었다. 버틸만 하다. 벨져가 답했다.
집무실은 어슴프레한 어둠에 잠겨있다. 오후 세 시. 아직 한창 밝을 시간이었으나 날씨가 날씨인 탓이겠지. 릭, 조명을. 벨져의 말에 릭이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딸깍소리와 함께 방이 밝아진다.
보고서 작성은 그다지 오래걸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서명을 끝마치고 벨져는 서류를 모아 흐트러지지않도록 눌러둔다. 릭. 작게 부르는 소리에 답은 없다. 몸을 일으켰다. 릭은 소파에 반쯤 눕다시피한 채 눈을 감고. 잠들어있다. 그 곁으로 다가간다.
릭, 릭 톰슨, 일어나라. 바로 곁에서 말을 걸어도 당사자는 여전히 꿈나라였다. 시계를 확인한다. 오후 세 시 사십 분. 고작 사십 분 사이에 여기까지 깊게 잠들다니. 벨져는 미간을 손으로 짚는다.
"릭,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허리를 숙여 어깨를 흔들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들릴 뿐 눈을 뜨지 않는다. 릭. 다시 한 번 부르고. 여전히 답이 없기에 이번엔 양쪽 어깨를 꽉 붙든다. 억지로 일으켜세우려 한 순간. 녹색 눈이 멀겋게 뜨였다. 이제야 일어났군. 그리 생각했는데. 갑작스레 뻗은 손이 뒷통수를 끌어당겼다.
"…캐서린, 조금만 더……."
갑작스런 무게를 어쩌지 못하고 중심이 앞으로 쏠린다. 벨져는 반쯤 강제로 릭의 품에 머리를 묻는 꼴이 되었다. 평소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나 어정쩡한 자세에서 방심한 상태였으니 어쩔 수 없다면 없는 상태였달까.
릭은 벨져의 머리를 붙든 채 여전히 옹알옹알 잠들어있다. 입에서 나오는 이름은 국적이 뒤죽박죽 섞인 갖은 여성의 것이었다. 어떤 관계였을지 벨져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조금 화가났다. 넉살좋기는. 억지로 그 품에서 벌떡 일어난다. 찰싹 붙어있던 팔에서 빠져나오면서 머리카락과 옷이 흐트러졌다. 하아. 한숨을 쉬고, 릭의 귀를 붙든다. 그리고 제대로 들리도록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소리를 냈다.
"릭 톰슨. 잘 들어. 애석하게도 나는 캐서린이 아니다. 로자린느도, 헬렌도 아니고 말이지."
그제야 릭은 다시 눈을 뜬다. 가늘게. 눈을 잔뜩 찌푸리고 벨져를 깜빡깜빡 바라본다.
"아, 벨라?"
능청스레 장난을 거는 릭에게 벨져의 표정이 굳었다.
"릭 톰슨? 더위에 정신이 나갔군? 지금 당장 네 피를 빼서 서늘하게 해주마."
"장난이오 장난. 벨져. 벨져, 벨져 홀든! 아니 그런 얼굴로 보지 말고. 칼도 넣고! 농담도 모르오?"
"네 농담이 지나치자는 생각은 하지 않나?"
허리춤에 찬 칼을 빼려하는 벨져를 막으려 릭이 그 팔을 붙든다. 땀에 끈적해진 손바닥이 걷어올린 셔츠 아래의 맨살로 닿았다. 덥다덥다 하더니 닿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녹아내릴 마냥 뜨겁다. 그 온도에 놀라 벨져가 찌푸린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뜬다. 릭도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오. 릭의 바람빠진 소리에 벨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제라도 있나."
"차갑군 놀라울 정도로. 조금 더 만져봐도 괜찮을까? 벨져."
뭐라할 새도 없이 손이 다짜고짜 다른쪽 팔을 잡았다. 뜨거운 열이 차가운 피부에 스며든다. 미적지근하게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열기에 벨져는 눈을 가늘게떴다. 썩 좋은 감촉은 아니다. 그럼에도 뿌리치지 않은 건 정면에서 저를 직시하는 녹색 눈동자에 의식을 붙들린 탓이다.
손이 벨져를 끌어당긴다. 녹색에 빨려들어갈 것같은 착각과 함께 입술이 닿았다. 그 와중에도 심록을 담은 눈은 벨져를 놓아주지 않는다. 질척한 혀가 마른 입술을 핥고, 떨어졌다.
"신사된 자로서, 키스할 때 눈을 감는 매너는 모르는거요? 벨져 경."
"흐응. 그걸 키스라고 한 건가? 결투라도 신청한 줄 알았다만."
릭은 마치 못말리는 아이라도 보는 듯 곤란한 눈초리로 벨져를 보고 웃는다.
"내가 무슨 목숨이 아까워 그대에게 결투를 신청하겠어?"
릭의 타액으로 젖은 입술이 어색하다. 벨져는 자신의 팔을 여전히 만지작거리는 손의 감촉에 집중하며 그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것을 속삭인다. 부드러운 저 녹색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은은하게 넘실거리는 욕망이나 애정같은. 네가 나를 이렇게 바라보는 줄은 몰랐는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벨져는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 다만 그저 생각할 뿐이다. 네가 원하는 걸 내가 줘도 괜찮은 걸까?
벨져는 자신에게있어 릭 톰슨이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한다. 공간 능력을 가진 능력자. 가장 가지고 싶은 능력을 지닌. 그리고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다르게. 릭은 벨져를 다른 사람들과 같은,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멸시나 거부감이나 불편한 감정이 일절 시선이 편안하다 생각했다.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지만, 언제부터 네가 나를 이런 식으로 원하게 되었지? 벨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난 변화가 의아할 뿐이다. 제아무리 벨져의 외모가 뛰어나다해도 자신도 릭도 분명한 남성인것을. 릭이 남자에게 정욕을 품을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저 눈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 자신은 그렇게 놀랍지 않은 것 같다. 원한다면 다리를 벌려서 나쁠 건 없다. 릭은 충분히 벨져를 돕고 있으니까. 육체가 소모품이라고는 하나 고작 성행위에 쓰인다고 크게 무리가 가는 것도 아니다. 다만. 걱정이 된다 하면 그것으로 인해 이 관계가 바뀌는 정도일까.
살을 섞고. 벨져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벨져 본인은 그리 확신한다. 다만 릭도 그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릭."
"벨져, 그러니까…."
릭이 벨져의 말을 가로막는다. 팔을 잡아당겨 벨져를 제쪽으로 끌었다. 싫다면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을 힘이었으나 벨져는 순순히 원하는대로 그 품에 안겨준다.
커다란 손이 하얀 뒷통수를 쓸었다. 여름의 얇은 의복을 사이에두고 피부가 밀착한다. 열기가 스며든다.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는 없소. 싫다면. 그대라면 얼마든 빠져나갈 수 있겠지. 나를 한대 치기라도 하면 충분해."
말을 원하지 않았기에 벨져는 입을 다물기로 한다. 뜨거운 손이 셔츠 밑으로 들어와 등을 쓸었다. 자신조차 만질 일이 거의 없는 부분을 침범하는 열기에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릭. 작게 부르니 아이를 어르듯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괜찮아 그대라면 문제 없을거요. 속삭임과 함께 목덜미로 숨결이 닿는다. 아니 무서운게 아니다, 그저 불러본거야. 그리 생각하면서도 부드러운 손길이 제법 나쁘지 않아 그저 눈을 감았다.
변화는 없었다. 릭은 그 이상의 감정적인 관계를 요구하는 일 없이 벨져의 곁에 머물렀다. 그렇게 이따금 부드러운 두 눈이 저를 바라볼 때마다 허가의 의미로 키스를 하고. 그 횟수가 이번으로 아홉 번이다. 산뜻한 외견이나 평소 행실과는 달리 침대에서 릭 톰슨이 보이는 꽤 끈질긴 성향은 벨져에겐 신기한 모습이기도 했다.
행위가 끝나면 릭은 벨져를 항상 제 집으로 데려간다. 혹은 자신의 집에서 행위를 시작하거나. 그리고 아침이 오기 전에는 돌려보내주지 않는다. 릭, 게이트를 열어. 아무리 말해도 릭은 조금만 더 쉬고 가도 괜찮지 않냐 할 뿐이다. 침대로 다시 들어오라 이끄는 팔에는 어쩔 수가 없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릭의 능력이 꼭 필요한 곳이므로.
그것을 알면서도 벨져가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게이트를 잇는 릭에게 핀잔을 주거나, 화를 내지 않는 것은 그 공간이 벨져에게도 편안한 탓이다. 처음 두 세번 정도는 조금 어색했을까. 다만 그것이 자신이 릭에게 긴장하고있다는 자신답지 않은 감정때문이라 깨닫자마자 그 어색함이 모두 사라졌다. 그 뒤로는 아무 말 없이 릭이 만족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릭이 주는 편안함을 누릴 뿐이다.
벨져가 잘 알지 못하는 땅에서 아침이 오고, 자신을 데려온 남자는 아직 잠들어있다. 이곳에서 벨져가 가진 모든 것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귀족이라는 태생이나 기사단장이라는 직책, 검을 다루는 능력같은, 흔히 벨져 홀든을 이룬다 생각하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혼자 힘으로는 있던곳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존재. 가만히 등뒤의 남자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그가 기꺼이 공간을 이어주기를 기다리는. 그리고 릭은 늘상 벨져를 이곳으로 데려오고싶어했다.
릭 톰슨에게 벨져 홀든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벨져는 요즈음 그것을 생각한다. 딱히 자신의 몸인 것 같지도 금전인 것 같지도, 그렇다고 명성을 원하는 것 같지도 않다. 뭘 원하지 릭? 그리 언어로 물어도 릭은 그저 웃을 뿐이다. 아직은 지금으로 만족하오. 아직은, 이군. 그래 아직은, 그렇기에 지금은 말할 수 없어. 벨져는 릭이 고집이 센 남자인 것을 알기에 더이상 묻지 않는다. 뜨거운 팔이 등 뒤로 돌았다. 거부할 수 있을 손을 내치지 않는다.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오.
느껴지는 고동은 착각일까. 아니면 진실된 릭 톰슨의 심장일까. 해답은 보일듯 말듯 벨져의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사실은. 모르는 게 아니다. 분명 알고있을 텐데. 릭이 원하는 것도, 벨져 자신이 바라는 것도. 다만 그 윤곽이 어렴풋하게 보일 때마다 벨져는 그리 생각하는 것이다. 아 그렇군,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렇게 사고를 멈추고 품에서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