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bit pilgrimage/궤도순례
R19/B6/카피본/36P
돌발...본이에여 릭벨. 제레벨같기도하고. 벨져가 제레온교 신자질하는내용.
둘다 정신상태가 그렇게 올바르지는 않은것같은...
모부도 좀 있습니다 주의.
표지는 기미님(@89880CP)
그리고 콜님이 축전을 주신다고...햇다...어예!
그의 기사를 향한 마음은 마치 종교와도 같다.
어떠한 논리나 이성조차 통하지 않는 굳은 신념과 그를 지침으로 한 일련의 행동.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절대적인 진리. 그 뿌리가 되는 무언가를 사람은 종교라 한다. 그렇다면 벨져는 그 누구보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벨져 홀든이 종교? 감상을 쓸데없는 것이라 치부하는 차가운 청년에게 이 어찌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으며 코웃음 치겠지. 그 녀석이 신을 믿는다고? 헛소리를, 자기가 신이라고 할 녀석이야. 하지만 릭 톰슨이 확신하건대 벨져 홀든은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신도였다. 눈앞의 살아있는 인간을 신으로 모시는.
의자에 앉은 장년의 기사는 말이 없다. 눈을 감고 미동도 않는 몸. 멀리서 보기엔 얕은 호흡과 함께 천천히 움직이는 어깨만이 그가 살아있다는 증표와도 같았다. 저 주름진 두 뺨에 가져다 댄 손은 온기를 느끼고 있을까. 자신의 신을 접하는 청년은 그 어떤 때보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신체를 모신다. 선혈이 묻은 제 검을 닦을 때보다 섬세하게 피부를 짚어나간다. 몸을 감싸는 검고 긴 코트. 순결한 베일같이 하얗게 떨어지는 머리카락. 그 모습이 마치 저의 신을 떠받드는 사제와도 같다.
릭 톰슨은 제레온 프리츠를 섬기지 않았으므로 따지자면 이교도라고 해야 할까. 릭은 어디까지나 단순히 지켜보는 입장이 되어 벽에 몸을 기댄다. 다른 신도 없이 신과 사제만으로 이루어지는 조용한 미사를 지켜본다. 두 사람의 이마가 맞닿는다. 기도를 읊조리는 달콤한 음성은 입구 근처의 이교도에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두 귀를 기울이고 어두운 방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손등, 볼, 이마. 순서대로 붉은 입술이 몇 번이나 닿았다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작게 내밀어 진 빨간 혀가 신의 마른 입술을 핥았다. 여운을 아쉬워하듯 몇 번이나 입맞춤을 반복한다.
어둠이 내린 방에 보슬거리는 빗소리가 울린다. 하얀 손을 가리는 검은 장갑이 주름진 손을 감싸 쥐었다. 잘 되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제레온 경. 릭은 간신히 귀에 닿은 목소리의 파편을 주워 담으려 신경을 곤두세운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을 달콤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를 쿡쿡 찌른다. 그대의 성대가 그런 음성을 만들 수 있었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청년은 그 뒤로도 기사에게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지켜보는 이의 심리는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벨져, 그러다가 제레온 경의 입술이 닳겠소? 아니 아니지. 휴~ 거기 도련님, 기사분이 그렇게 사랑스러운가봐? 그랬다가는 칼끝이 제 얼굴을 향할 거다. 장난은 그만둬, 그럴 심정이 아니라는 건 네가 잘 알 텐데. 그런 말과 함께. 물론 그 짜증스러운 표정도 좋지만…. 아니. 지금 자신의 불편한 심기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어떤 말도 벨져의 제레온을 향한 충의를 누를 수 없다는 것을, 릭 톰슨은 안다. 자신이 아닌 그의 신에게 입을 맞추는 그가 이 세상 것이 아닌 마냥 아름답다는 것도. 어쩌면 자신과 사랑을 나누는 순간보다 더욱.
신을 향한 기도가 끝나고. 사제는 몸을 돌려 이교도를 향한다.
릭 톰슨이 잠에서 깨는 순간이다. 푸른 빛이 릭을 향한다. 반사적으로 박수라도 치려 들린 손을 멋쩍게 내리고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는다.
“끝났소?”
“기다리게 했군.”
다가온 그에게 답하듯 등 뒤로 손을 뻗어 문을 연다. 벨져를 먼저 내보내고 뒤이어 문을 나섰다. 축축한 습기. 복도와 방은 별다름 없을 터인데 호흡이 탁 트인다.
길게 늘어진 복도는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로 가득하다. 다른 이는 보이지 않았다. 고용인의 대부분을 잃은 저택에 남은 이는 두 손으로 꼽을 정도가 아닐까. 황량한 저택이 얼마 되지 않는 고용인과 제레온 프리츠의 유품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음을 릭은 안다. 눈앞의 벨져 홀든 또한 그 유품 중 하나라는 사실도.
미처 닦이지 못한 유리창이 빗물로 얼룩진다. 번개로 번뜩이는 창을 등지고 선 벨져는 마치 홀로 다른 공간의 사람인 것 같았다. 마주한 푸른 눈이 릭의 속을 꿰어본다. 릭이 원하는 대로. 검은 코트를 두른 두 팔이 들어 올려진다. 이리로, 네가 원하는 곳으로. 계시가 릭을 이끈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다가가 젖은 몸을 끌어안았다.
아직 비가 마르지 않은 그에게서는 아까와는 다른 향이 난다. 오래 방치된 폐허에서 날 법한 묘한 먼지나 곰팡이의 냄새 같은. 벨져 홀든이 이렇게 타인의 향에 무력하다는 것을 릭은 얼마 전에야 처음으로 알았다. 릭이 아는 벨져는 그 어디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의 모든 것은 굳건하게 유지될 것이었으므로. 지금 그의 몸에서 풍기는 오래된 골동품의 향이, 벨져의 것이 아닌 모든 흔적이 그저 어색하다. 은은하게 묻어나는 축축한 광기가 벨져가 그의 미친 신에게서 옮은 것인지 아니면 벨져 자신의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 하얀 볼에 입을 맞추고, 입술에 키스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신을 받아들이던 연인의 입술에 제 것을 덧씌운다. 릭은 신의 흔적을 지울 필요가 있었다. 연인으로부터.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되돌리기 위해…. 아니.
정말 그런 건가?
벨져 홀든이 제레온 프리츠에게 입맞춤하는 것을 처음 목격한 순간, 릭 톰슨은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한 번, 두 번, 세 번을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을 빤히 바라보며 릭은 저가 마치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진다. 수줍게 내밀어 진 붉은 혀가 기사의 마른 입술을 적시던 순간조차 릭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한치의 부끄럼이나 수치 없이, 당당하게 이루어지는 입맞춤은 분명한 벨져 홀든의 의지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리고 벨져는 릭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벨져를 이 방으로 데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릭 톰슨이었으므로. 그러니까 한마디로 벨져는 자신의 연인이 보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다른 이에게 입을 맞췄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이 어찌 연인 된 자로서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그가 벨져와 처음으로 살을 섞고 입맞춤을 나눈 지 며칠 되지 않은 시점에서.
“벨져, 그…제레온 경과는, 그, 그런 사이였소?”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제레온 프리츠가 벨져 홀든에게 얼마나 예민하고 민감한 사안인지 알기에 그래야 했다. 벨져의 역린을 건들지 않는 방식으로 심리를 알아내고 싶었다. 릭이 벨져의 단순한 동료이거나 지나가는 사람이었다면 그저 못 본 체 눈을 돌렸겠으나, 벨져 홀든은 릭 톰슨의 연인이기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아니던가.
벨져는 눈을 찌푸리고 릭을 돌아본다. 검은 장갑에 싸인 두 손은 여전히 제레온 프리츠의 얼굴을 감싼 채다. 야위었지만 듬직한 두 다리에 걸터앉은 청년은 의아하다는 듯 말꼬리를 올린다.
“그런 사이?”
“그러니까, 제레온 프리츠 경과 서로…아주 사적이고, 친밀하고, 육체적으로도 가까운 관계였냐고 묻고 있는 거지. 걱정 마시오, 그대를 추궁하는 게 아니야. 제레온 경이 그대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소. 다만…그대가 그런 마음으로 제레온 경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거요.”
이쯤 오면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중심이 모호해진다. 그럴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릭이 생각하기에 벨져의 제레온을 향한 감정은, 아주 특별하다고는 생각했으나 그런 방향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그리고 그 생각은 아직 변함이 없다.
파란 눈이 깜빡인다. 흐음. 몸을 의자에서 내려 릭을 향해 뒤돌아선다. 하얀 손가락이 입술을 몇 번 건들고, 팔짱을 꼈다. 그리고 입을 뗀다.
“제레온 경이 나와…너 같은. 비슷한 사이였냐고 묻고 있는 건가? 연인이었냐고?”
“비슷하오. 정확하게는, 제레온 경에게 그대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냐고 묻고 있지.”
“아무래도 네가 잠이 덜 깬 모양이군. 피곤하다면 쉴 곳을 마련하겠다.”
벨져는 그렇게 단언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역시. 마른 웃음이 입가로 흐른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조금 더 불쾌해하거나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자각이 없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그런 의미는 없는 걸까. 릭은 아마도 후자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벨져의 행동과 말이 맞물리지 않는다.
제레온과 벨져를 번갈아 본다. 가장 확실한 건 아마 제레온 프리츠에게 사실을 듣는 것이겠으나, 산 채로 죽은 꼴과 같은 그가 릭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기에 릭은 다시 한 번 벨져에게 말을 덧댄다.
“그렇지만 그대는…입맞춤을 했어. 방금도 그랬지 않소. 몇 번이나.”
무슨 불순한 소리냐며 이번에야말로 화를 낼까. 릭은 제법 긴장했다. 벼락같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벨져의 호통을 각오했다. 그러나 벨져는 눈을 가늘게 찌푸릴 뿐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파란 눈이 깜빡인다. 천천히, 붉은 입술이 열린다. 릭. 벨져가 말을 시작한다.
“진심을 전하는데, 육체적인 접촉이 말보다 확실하다고 한 건 너였다.”
그 말이 릭의 복잡한 심경을 더욱 배배 꼬이게 만들었다.
알고 있다. 벨져 홀든이라는 자는 자신을, 릭 톰슨을 사랑한다. 제레온 프리츠를 향한 경애나 애정과는 별개로, 완벽하게 다른 이야기로. 그리고 그렇기에 벨져는 자신이 제레온에게 입을 맞췄다고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릭을 사랑하기에 그의 말에 따라 제레온 프리츠에게 입을 맞췄다고.
머리로는 이해한다. 공과 사가 확실한 벨져다. 제레온을 향한 감정과 릭을 향한 애정에는 완벽하게 선을 긋고 있으리라. 하지만 릭에게는 그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벨져 홀든의 제레온 프리츠를 향한 마음이 플라토닉이냐 에로스냐, 혹은 아가페냐. 그런 문제를 떠나 어찌 되었건 그 충의는 일종의 애정이요 연모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연인의 둘도 없는, 가장 우선시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게 과연 과한 욕심일까?
다만 릭을 고뇌하게 하는 것은 이런 욕심만이 아니다.
맑은 눈이 릭을 꿰뚫어본다. 올곧은 소리로 묻는다.
“내가 틀렸나?”
아니, 그대가 옳소. 라고. 릭은 답했다. 즉답했다.
릭 톰슨은 벨져 홀든을 안다. 그가 무슨 근거와 심리로 어떤 행동을 취할 지 다른 벨져 홀든을 아는 사람보다 더욱 정확하게 추론해 낼 수 있었다. 그런 자신이 있었다. 지금도 그 자신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결과 또한 릭 톰슨의 예상 범주에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릭은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정말로 원하지 않는다면 벨져를 말릴 수 있지 않았나. 그대가 제레온 경과 키스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벨져. 그런 말따위로. 정말로 연인이 다른 이에게 애정을 보내는 것에 질투했을 뿐이라면. 연인으로서 당연한 독점욕이라면. 하지만 릭은 벨져를 말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 결과였다.
사적인 관계가 되고 난 이래로. 릭은 종종 예고한 것보다 빠른 시각에, 혹은 예고 없이 벨져를 찾아오곤 했다. 불쑥 찾아오는 연인을 벨져는 귀찮아하지 않았고 릭은 그것을 허가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원할 때 찾아가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릭이 가진 능력의 특권이었다.
공간이 이어지는 끝은 집무실 옆의 그가 이따금 휴식을 취하는 작은 방이다.
벨져 홀든의 공간치고는 비교적 난잡한 공간에서, 쓸데없이 노크를 하고 고개를 내미는 것이 릭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세 번 문을 두드리면 벨져가 그에 응답한다. 아주 사소한 약속 같은 행위였다. 릭은 이때도 문을 두드리려 했다. 숨을 들이쉬고. 헛기침을 작게 뱉었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려다가,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