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숲의 종언
R19/B6/88P/8,000원
3월에 냈던 돌발본의 다른버전...인데 내용을 깡그리 새로썼으니 다른물건이라 보시면 될것같습니다.
현대물. 다무(20)벨져(17)이글(15)정도. 모브주의. 전생물같기도하고 좀 뒤죽박죽.
표지는 페오님( @jiyaka )
샘플. 문장기호나 편집이 인쇄물과 쫌 다릅니다
홀든 가 둘째의 생일에는 항상 눈이 내린다. 이제 하루 앞으로 다가온 첫째 동생의 열한 번째 생일을 생각하며 다이무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른 오후, 메마른 나뭇가지로 뒤덮인 푸른 하늘에서 하얀 눈이 떨어진다. 내일까지 계속 내리겠군. 이대로 눈이 쌓이면 막내가 기뻐하겠지. 둘째는 그 옆에서 아무래도 좋다는 듯 눈을 반만 뜨고 있지 않을까. 그런 잡스러운 감상이 머리를 스친다.
한겨울, 해가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은 날, 홀든 가의 사유지. 평소보다는 날이 좀 푸근한가 싶어 밖으로 나와 가볍게 시작했던 숨바꼭질은 벌써 몇 시간 째 이어지고 있다. 늘상 있는 일이다. 다이무스도 벨져도 이글도, 이런 사소한 놀이에조차 언제나 전력으로 임했다. 그러다 보니 숨바꼭질 같은 별거 아닌 놀이에도 몇 시간씩 걸리는 건 부지기수다. 누가 술래고 누가 숨는 입장이 되어 누가 이겨도 절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다만 끝은 항상 정해져 있다. 몇 번이고 술래가 바뀌다가 다이무스가 술래가 되어 죽어라 숨은 동생들을 찾아내면, 그게 길고 긴 놀이의 끝이다.
아까는 그래,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있던 이글을 잡아 끌어내렸다. 이번엔 좀 어렵게 숨었나.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보이지 않던 차에 고개를 드니 바로 보였지. 여기까지 올라오냐며 치사하다고 버둥거리던 막내. 도망갈 곳이 없는 곳에 숨은 너의 실수다. 못 찾을 줄 알았지! 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막내를 감기라도 걸릴세라 목도리를 둘둘 감아 집으로 보내놓고 다시 남은 동생을 찾아다녔다.
첫째 동생은 어디에 있을까.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걸어 꽤 먼 곳까지 왔다. 동생들은 항상 다이무스의 발이 멈추는 곳에 있다. 직감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 다이무스지만 그만큼은 확실했다. 목표로 하는 곳 없이 발을 계속 움직이다가, 어느 곳에서 발이 멈춘다. 근거는 없지만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역시 여기 있지 않은가. 커다란 바위 아래로 작게 주먹을 쥔 하얀 손이 보인다.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인다.
"여기 있었군."
손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얼음처럼 하얗게 질린 손은 아직 다이무스의 손에 비해 한참이나 작았다. 다이무스의 손에 폭 담기는 작은 손을 만지니 이렇게나 작았던가 싶다. 갑자기 몸이 작아질 리는 없는데. 그리고 자신이 훌쩍 커버렸음을 인지한다. 나날이 더 높아만 가는 눈높이에 둘째도 셋째도 볼을 잔뜩 부풀렸더라지. 다이무스 요즘 키가 많이 컸구나. 아버지의 그 한마디에 방방 뛰던 막내와 옆에서 군말 없이 우유만 들이키던 둘째의 모습이 떠오른다.
작은 손을 쥐고 잡아당기니, 벨져가 순순히 그 움직임을 따라 밖으로 기어 나온다. 창백한 얼굴에 코언저리만이 유독 붉다. 보아하니 한참이나 이 아래에 숨어있었을 게 뻔했다. 꽤나 추웠을 텐데 지지 않으려고 별 곳에 다 숨는 꼴이 과연 홀든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슬슬 양지로 기어 나온 둘째는 항상 어른을 가장하던 모습답지 않게 코를 훌쩍거린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벨져에게 건넸다. 이글이었다면 직접 코를 풀어줬겠지만 이 자존심 센 첫째 동생이 그런 취급을 견딜 리가 없었다. 차가운 손이 다이무스의 손 위에 놓인 하얀 손수건을 건네받아 코를 훔친다. 추위에 젖은 눈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다이무스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제대로 숨은 줄 알았는데. 형에게서 완전히 숨으려면 한참 멀었군."
"네 생각이야 뻔하지 않나."
진 게 분한 건지 토라져서는 고개를 홱 돌려버린다. 항상 당당하던 동생은 사시나무 떨듯 가늘게 떨고 있다. 무리하기는. 다이무스는 그런 벨져가 약간은 가엾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사실 벨져의 생각을 알고 찾으러 다닌 건 아니었지만―― 말을 해도 벨져는 믿지 않으리라. 직감이라니, 형이 직감을 믿는다고? 그럴 리가 거짓말이지. 귓가에 들리는 듯한 벨져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퍽이나 추워 보이는 동생에게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어깨 위로 덮어씌운다. 녹색 섞인 푸른 눈을 슬쩍 치켜뜨면서도 싫다는 소리가 없는 걸 보면 춥긴 추웠던 모양이었다.
"내가 못 찾으면 어쩔 생각이었나."
"적당히 때를 봐서 나갔어. 형이 못 찾겠다고 눈물을 흘리고 있을 즈음?"
"벌써 세 시간이나 지났는데, 네가 알아서 나온다고?"
정곡을 찌르는 말에 벨져는 볼을 슬쩍 부풀린다. 다이무스의 손이 하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드러나는 이마에 입술을 한번 짓눌렀다.
그저 발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면 그곳에 동생들이 있었다. 동생들은 항상 불만이었다. 어떻게 찾는 거야. 치사해. 우리 몰래 무슨 이상한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 아냐? 옳소 옳소.
귀엽다면 귀여울 투정을 부리던 동생들. 언제까지고 그러리라 믿었다.
――그런 무렵의 꿈을 꾸었다. 먼 옛날의 꿈. 검을 들고 거리에 나서기가 꺼려지지 않았던 시절의. 증기가 하늘을 메꾸고 어딜 가나 석탄 내음이 가득하던 시대.
어두운 밤이다. 적막이 유독 무겁게 다이무스를 짓눌렀다. 째깍째깍. 시계침 움직이는 소리만이 요란하다. 새벽 세시. 식탁 맞은편으로 어린 막내가 팔을 베개 삼아 잠들어있다. 소식을 기다리고 있건만 남겨진 소식은 없다.
오늘 좀 늦는다던 메시지가 전부였다. 전화를 해도 답이 없다. 있을 만한 곳은 전부 연락을 해보았지만 역시나 좋은 대답은 듣지 못했다.
고작 하루, 아니 아침부터였으니 아직 24시간이 채 되지 않은 몇 시간. 몇 시간 동안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건만 왜 이리도 불안한 걸까. 끝도 없는 불안이 다이무스의 심정을 초조함으로 짓누른다. 아니 괜찮을 거다, 그 아이니까. 얄미우리만치 영특하고 흔들림이 없는 첫째 동생이기에. 분명 어쩌다 보니 늦었다며 문을 열고 그 얼굴은 뭐냐며 오만하게 웃지 않을까. 해가 뜨기 전에는 분명. 아니 해가 뜨고 난 후라도.
세상 물정 모르고 자고 있는 막내의 어깨를 흔든다. 올해 겨우 열다섯. 오늘 꿈에서 마주한 동생보다 세 살 더 많던가. 다만 막내의 눈가에는 벌써 기다란 흉이 져 있다. 이글, 이글. 몇 번을 흔들어 깨우자 그제야 깜빡깜빡 새파란 눈을 뜬다. 이글은 잠에 젖은 눈으로 다이무스의 시선을 받아친다.
"이글, 방에 들어가서 자라."
"작은형은?"
역시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이글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나온다. 다이무스 또한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별수 있는가, 아까 잠시나마 걸려왔던 전화에서도 그저 좀 늦는다는 말 뿐이었는 것을. 아니 그 전화를 믿을 수는 있을까? 그런 식으로 어리숙하게 답하던 둘째는 처음이었다.
시간만이 멈추지 않고 흐른다. 다이무스는 이글을 방에 들여보내고 다시 식탁에 앉아 눈을 감았다.
벨져가 돌아오지 않는다.
(중략)
홀든의 첫째, 다이무스 홀든이 회사에 있어 얼마나 유능하고 중요한 인재인지 굳이 설명해야 할 필요는 없으리라. 올해 스물넷. 아무리 대대로 회사를 도와온 홀든의 장자라지만 그 유례없는 좋은 대우는 분명 다이무스 자신의 능력에 따른 결과였다.
형이 또 갑갑하게 구는군. 벨져는 작게 혀를 찬다. 분명 타인에 비해 다이무스의 생각을 더 잘 알고 있다고는 생각하나 그래도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게 있다. 눈치로 보아 썩 좋은 말은 아닐 것 같지만.
벨져가 집무실로 발을 들이고 그 뒤에서 다이무스가 문을 닫는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건지 문을 가로막았다.
다이무스의 집무실은 그야말로 다이무스 홀든 그 자체였다. 깔끔하게 정리정돈된 책상, 여러 종류의 책이 빽빽하게 늘어선 책장. 군데군데 보이는 영 본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시집들.
"벨져, …사실인가?"
"뭐가."
"소문 말이다."
소문. 그래 소문. 벨져가 눈을 찌푸린다. 최근 들어 지독하리만치 벨져의 발목을 붙잡는 그 저열한 단어의 나열. 회사에 들어오고 벨져가 슬슬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아니 그전부터. 홀든의 둘째이자 다이무스 홀든의 동생으로 입사한 그 시점에서 시작되었던.
저게 그 다이무스 홀든 동생이라고? 생긴 건 완전 딴판이구려. 저 면상 뒷구멍으로 잘 물게 생겼지 않습니까. 높으신 분들께서 재미 좀 보고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맞아 몸 좀 판다는 말 들어봤냐. 나도 들어봤다 나한테도 좀 팔았으면 좋겠군.
반은 다이무스의 회사 내 입지를 시기 질투한 화풀이였고 반은 벨져를 아니꼽게 보는 무리의 비아냥이기도 했다. 다이무스는 이미 그런 식으로 뒷담을 풀기엔 너무나 입지가 견고했으며 그 성격이 도저히 뒷담이 성립될 틈을 주지 않았기에 아직 신입이고 흠이 많은 벨져를 타겟으로 삼은 것이리라. 치졸한 놈들. 벨져는 그 추잡한 소문이 불쾌하기는 했으나 내버려 두기로 했다. 반박할 가치도 없는 말에 시간을 들일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소문은 소문에 불과한 것을. 그런 그 소문이. 이제야.
'이제야 형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군.'
귀찮게 되었다고 벨져는 생각한다. 하지만 굳이 변명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이무스가 믿고 있다면, 혹은 믿고 있지 않다면, 벨져의 말 한마디로 그 결정이 흔들릴 리 없으니까. 굳이 설득하고 싶지도 않고 신뢰받고 있다고 가슴을 쓸어내릴 만큼 비참한 신세도 아니다.
들은 둥 만 둥 아무 말도 않는 벨져에게 다이무스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마 이런 벨져의 반응을 짐작은 하고 있었을 텐데. 이마에 손을 짚고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다. 벨져는 형의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언을 지속한다. 다이무스의 어두운 눈동자가 가만히 벨져를 응시했다. 입술이 떨어진다. 벨져. 저를 부르는 소리에 문득―― 충동이 일었다.
왜 굳이 그런 행동을 했던가. 벨져는 후에 자신이 한 행동의 의미를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보았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키스를 했다. 기습적으로 얼굴을 들이대고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제 형의 몸이 뒷걸음질 치기 전에 팔을 그 목에 감아 매달리듯 밀착했다. 그저 입술을 이어붙이기만 한 행위임에도 다이무스는 평소의 침착함은 온데간데없이 화들짝 놀랐다. 키스가 길어질수록 제 형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해진다. 손이 허리 언저리에서 붙지도 떨어지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목을 더욱 가까이 당긴다. 가슴팍이 서로 맞닿는다.
눈빛이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유, 글쎄. 벨져는 이유를 찾는다. 하지만 딱히 이유는 필요 없지 않은가. 이토록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을. 서로의 타액으로 젖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말은 다이무스가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다.
"이런 걸 원하는 거, 아니었나?"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딱히 비꼰 것도 떠본 것도 아니다.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으리라 다이무스 또한 알고 있을 터인데. 굳이 물어본 건 그런 거 아니냐는 반문이었다.
가슴팍을 붙잡혔다. 그리고 있는 힘껏 소파 위로 내쳐진다. 신장 차는 그렇게 심하지 않으나 체격 차가 꽤 나는 몸이 거진 전력으로 강제하니 당할 도리가 없었다. 손 하나 까딱 못하고 몸이 소파에 부딪히고,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다이무스의 몸에 두 다리가 소파 위로 올려진다. 이제 저도 성인이 되었건만 제 형의 그림자에 여백 없이 잠기는 몸은 평생 다이무스 홀든을 따라가지 못하리라는 증거였다.
어두운 눈동자가 싸늘한 시선으로 벨져를 내려다본다. 지독하리만치 뜨거운 몸과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의 대조가 자극적이다.
지금보다 훨씬 컸던 자신. 긴 팔과 다리. 소파의 가죽냄새와 함께 한가득 들이차는 혈육의 체취. 형이 믿어줄까 모르겠지만 그게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