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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에 묻어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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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벨. 20다무x17벨져. 다무 임무에 따라가는 벨져.
좀 건실...??한 다무와 빗ㅊ같은 벨져...사이안좋은이야기.
그런느낌
표지는 칵님(@holden_is_mine) 이에여!!
다이무스는 제 아버지가 하는 말에 고개를 젓지 못하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제 효심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던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아버지의 판단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그 판단이 너무나 탐탁지 않다. 도저히 좋은 판단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그 녀석에게 그런 역할이라뇨 저는 반대입니다. 수많은 반박이 혀에서 맴돌았지만 어쩌겠는가 하늘 같은 아버지의 명령인데. 다이무스는 아버지의 명령에 고개를 저을 줄을 모른다. 아니 저을 수 없게 길러졌다. 차마 한숨조차 쉬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아버지 제발. 그런 바람도 부질없이 아버지의 말이 이어진다.
역시 네 동행으로는 그 아이가 좋겠군.
회사에서 들어온 요청에 다이무스가 나서게 되었다. 열차를 타고 꼬박 사흘. 나름대로 장거리를 가야 하는 일정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아직 크게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필요했고― 그 적임자로 이제 막 가문의 규칙에 따라 회사 일을 돕기 시작한 다이무스가 호명되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젊은 청년이 홀로 비싼 호텔에 숙박하기에는 의심의 시선이 달라붙으리라. 누군가 함께하여 위장하는 편이 좋겠지. 돈 많은 젊은 귀족 부부의 사치. 고급 호텔에서라면 드문 일도 아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러면 그 아내 역할은 누가 할 것이냐. 다이무스는 딱히 누군가를 떠올리지도 않았고 아버지나 회사가 그 누구를 지정해도 묵묵히 따를 예정이었으나 이번에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아내 역할로 지정된 사람이 다름 아닌 첫째 남동생 벨져 홀든이기에.
뭔가 문제라도 있느냐? 그 이상 적절할 사람이 있다면 말해 보거라 다이무스. 가족이니 이미 서로를 잘 알고 있고 아직 벨져 정도면 어린 부인으로 변장시킬만하지 않겠느냐. 어설프게 아예 모르는 사람과 장단을 맞추느니 벨져가 편할게다.
일리는 있다. 맞는 말이다. 정말 부부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부부 행세를 하는 것뿐인데, 뭐가 문제겠는가. 다만 다이무스는 아버지가 모를 벨져의 사생활까지도 아주 잘 알고 있기에 문제였다.
올여름, 벨져는 훈련을 끝마쳤다. 홀든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홀든의 훈련이라는 게밖에 떠벌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집안에서만 알려진 이야기였지만 그만큼 가문의 기대도 크겠지. 아버지로서는 슬슬 벨져를 회사에 내보이고 싶은 욕망이 강할 것이다.
분명 벨져가 적임자다. 하지만. 그래도. 벨져와 단둘이? 끔찍한 농담이다.
저녁이다. 열차는 밤이 다 되어 출발하게 되어있었다. 새카만 어둠이 앉은 플랫폼을 밝히는 가스등이 몇 개. 다이무스는 그 가스등 중 하나의 아래에 있었다.
플랫폼에 쌓아둔 짐 옆에서 한숨을 내쉰다. 기차에서 며칠. 현지에서 또 며칠. 현지에서야 호텔에 내버려두고 혼자 다니면 될 노릇이지만 엎어지면 코 닿을 기차에서 어떻게 닷새나 함께 있어야 하나.
작게 혀를 차는 다이무스 곁으로 구둣발소리가 다가온다. 또각또각. 높은 굽이 닿는 소리. 크지는 않지만 분명 일부러 내는 소리였다. 지옥의 개막이다. 어떻게든 애써 무시하려 하였으나 어깨를 톡톡 치는 손길에 결국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춘다.
저녁의 어둠 속에 불빛을 받아 더욱 눈에 띄는 화사한 흰 드레스. 맞춘 듯한 하얀 챙 모자, 푸른 수가 놓인 부채. 부채를 활짝 펴 제 입을 가리는 모습에서 흐르는 품격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야말로 지나가는 누구나가 한 번쯤은 뒤돌아볼 법한 용모였다. 딱히 아름답거나 그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흘러넘치는 묘한 색기라고 해야 하나.
다이무스 또한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한 번쯤은 돌아보며 멀어져가는 모습을 눈에 새겼을 법했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저게 같은 피가 흐르는…첫째 남동생 벨져 홀든만 아니었다면.
“내가 늦었나?”
작게 웃는 목소리는 확실하게 변성기를 거친 남성이다. 입가로 옅은 미소를 띠며 즐거워 보이는 동생을 앞에 두고 다이무스는 그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얄미운 녀석. 눈을 찌푸린다. 하지만 이제 정말 도망갈 구석도 없다.
“그래서, 나랑 결혼한 기분은 어때?”
벨져는 그런 다이무스의 속을 훤히 알고 있다는 듯 제 형을 송곳으로 쿡쿡 찔렀다. 최악이군. 네 글자가 머리에서 맴돌았지만 말로 해봤자 벨져만 웃고 즐거워할 뿐이겠지. 더이상 벨져의 즐거운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아 다이무스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두 사람의 사회적 관계는 지금부터 며칠간, 형제와는 전혀 다른 형태를 띠게 된다. 평소라면 첫째와 둘째라 소개되었어야 했을 관계는 다이무스 홀든 경과 그 부인. 닮은 외모는 적당히 사촌지간에 결혼했다고 둘러대게 되어있다.
아내를 향한 불쾌감을 숨길 생각도 않는 남편과 생글생글 즐거워 보이는 아내. 타인이 보는 두 사람은 그렇겠지.
“너 같은 놈을 아내로 둘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벨져.”
쌀쌀맞은 목소리였으나 벨져는 흐음. 하고 작은 소리를 흘릴 뿐이다.
“너무 쌀쌀맞은 거 아냐? 친동생한테.”
“네가 내 앞에서 무슨 추태를 부렸는지 기억한다면 그런 말은 못 할 텐데.”
다이무스의 말에 벨져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무슨 뜻이지?”
정말로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걸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이무스의 입에서는 한숨이 흘렀다. 땅이 꺼져라 푹 내쉬고, 고개를 젓는다.
“그런 몸으론 정숙한 부인은 이미 글렀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걸레라고?”
순간 손이 먼저 나갔다.
“벨져.”
붉은 화장품을 바른 입을 엄지와 검지를 벌려, 틀어막는다. 손가락 사이로 붉은 자국이 남는다. 다이무스는 그제야 주변을 눈짓으로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플랫폼에는 두 사람 이외에 아직 아무도 없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동생을 직시한다.
“입, 다물어라.”
목소리는 강압적이다. 벨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불만스레 시선을 돌렸다. 그 입에서 손이 떨어진다. 다이무스가 제 손에 묻은 붉은 화장품을 지우는 동안 벨져는 고개를 돌리고 약간 흐트러진 화장을 고친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입을 열었다.
“아차. 그랬지. 이제 ‘우리 둘’만 남기 전에는 말을 하면 안 되겠군. 형아야?”
눈을 가늘게 뜨며 깃털과 보석이 치렁치렁한 부채로 제 입가를 가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귀부인이다. 그러면서도 말끝에 형을 꼬박꼬박 붙이는 모양새는 다이무스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겠지. 벨져가 입을 다물고, 거기서 대화가 끊긴다.
겉치레로 잔뜩 챙긴 의미 없는 여행 가방들. 그 짐들을 사이에 두고 다이무스와 벨져는 거리를 둔 채 섰다. 지나가는 여행객들이 두 사람을 흘끗흘끗 보는 시선이 다이무스를 불편하게 한다. 팔락팔락 덥지도 않을 가을날에 부채를 흔드는 벨져는 그저 덤덤하기만 했다. 아니 뻔뻔하다고 해야 할까. 둘째의 썩 좋지는 못한 성격을 생각하면 후자겠지.
짐을 사이에 두고 서먹한 시간이 이어진다. 서먹하다기보다 아무 말도 없다고 해야 할까. 생각해보면 언제나의 다이무스와 벨져 그대로다.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그러면서도 다이무스는 벨져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옆에서 보기에는 제법 재미난 광경인 걸까. 슬슬 플랫폼으로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시선이 쿡쿡 박힌다. 어리게 보이는 부부가 짐을 잔뜩 두고 서먹하게 있으니 부부싸움 도중인 것 같기도 할 테고 퍽이나 재밌어 보이겠지. 주변에서 쏟아지는 호기심 어린 시선에 다이무스의 미간으로 주름이 깊어져 간다.
답답한 공기가 무겁게 깔린 채 출발시각이 가까워 온다. 아직인가. 다이무스가 손목시계를 들여보던 찰나, 한 청년이 두 사람 곁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홀든 경과 부인…되시나요?”
모자를 벗어 인사하는 청년은 집안에서 고용한 짐꾼이다. 서글서글하니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다이무스 쪽으로 고개를 두면서도 흘끗흘끗 벨져쪽을 흘기는 시선에는 짙은 호기심이 어려있다.
그다지 늦은 건 아니다. 다이무스의 인상이 퍽이나 어렵게 느껴지는 거겠지. 땀을 뻘뻘 흘리는 청년의 위아래를 가볍게 훑어보고, 그 시선이 제 동생, 이 아니라 아내에게서 떨어지지 못하는 것도 확인한다. 그 끝에서 벨져가 다이무스를 보고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입가는 부채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뻔하다면 뻔하다.
“…그렇다. 늦었군.”
부인이냐 묻는 말에 답하는 데에도 제법 시간이 걸려버렸다. 그 모습을 본 벨져가 또 웃는 기색이 느껴진다. 청년은 고개를 몇 번이고 숙이더니, 벨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허리를 깊게 굽힌다. 다이무스에게 하던 인사보다 정도가 심한 꼴에 묘하게 붉어진 얼굴. 재밌다는 듯 벨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다이무스와 시선이 마주친다.
“짧은 기간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부인.”
청년의 인사에 벨져가 잠시 눈을 깜빡이나 싶더니,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인사에 영 답이 없는 벨져에게 청년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부인? “
“지병 탓에 말을 하지 못한다.”
“앗, 제가 실례되는 짓을 하고 말았군요.”
청년이 고개 숙여 사죄했다. 다이무스는 제가 둘러댄 핑계임에도 그저 웃음만이 나왔다. 지병 탓에 말을 못한다고? 말이나 못하면 귀엽기라도 할 텐데.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억지로 삼킨다. 옆에서 먼 곳을 바라보는 벨져가 또 웃은 것 같았다.
다이무스에게는 두 명의 동생이 있다. 다섯 살 어린 이글 홀든, 그리고 세 살 어린 벨져 홀든. 이 중 첫째 동생인 벨져 홀든에게는 좋지 못한 버릇이 있다. 몇 명이나 그 버릇을 알고 있을지는 불확실하나, 적어도 아버지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겠지. 알고 있었더라면 벨져를 이런 자리에 내보낼 리가 없다. 제아무리 아버지가 벨져를 싸고돈다 하더라도. 아니 싸고돌기 때문에 더더욱.
다이무스 홀든은 제 첫째 동생인 벨져 홀든의 사적인 비밀을 알고 있다. 누구에게도 감히 말하기 힘든 비밀을.
치익거리는 시끄러운 증기와 함께 열차가 플랫폼으로 진입한다. 바람이 크게 일고, 옷자락이 펄럭였다. 다이무스는 눈앞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가만 바라본다. 어깨 살짝 아래로 흔들리는 하얀 머리카락은 다이무스와 같은 색깔이다. 다이무스와는 다른 푸른 눈은 다이무스를 보지 않는다.
출발 준비가 끝나고 승차신호가 울렸다. 평소였다면 몇 개쯤 들고 탔을 법도 한 짐도 지금은 모두 놓고 열차에 오른다. 다이무스가 먼저 계단을 올라 아래에 있는 제 동생에게 손을 내밀었다. 별로 높지도 않은 계단이다. 혼자서 다 잘만 하는 놈을 데리고 이런 같지도 않은 놀이라니. 눈이 절로 찌푸려졌으나 별수 없는 일이었다. 벨져의 하얀 장갑을 낀 손이 다이무스의 손에 얹혀졌다. 그 손을 끌어올린다. 벨져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 손길을 따랐다. 이 순간부터 눈앞의 동생은 더이상 동생이 아니어야 한다.
예약해둔 객실은 열차의 머리 쪽에 있다. 4인용 개실. 끝에서 올라타, 반대편 끝으로 향한다.
가장 뒤로 따라오는 고용인이 짐을 들고. 맨 앞은 다이무스가, 그 뒤를 벨져가 따른다. 지정된 객실로 향하는 동안 많은 사람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칸을 거듭할수록 사람이 적어진다. 사람들의 복장도 마지막에서 두 번째 칸쯤 들어섰을 무렵엔 제법 귀족이다 싶은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몇 칸을 걸쳐 오는 동안 지독하리만치 많은 시선을 받았다. 그 시선의 태반은 다이무스보다 그 뒤의 벨져를 향한 것이었으나, 벨져를 본 다음에는 꼭 다이무스를 훑어보았기에 다이무스가 대상이 아니라 할 수도 없다. 귀족인가? 두 사람을 본 누군가가 숙덕였다. 많은 소리가 귓가를 오간다. 어머 예뻐라. 부부인가 봐요. 어디 출신이지? 분명 악의없는 칭찬들임에도 말은 가시가 되어 다이무스의 귀에 박혔다. 슬쩍 돌아본 동생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싱글 웃고 있다. 왜? 벨져의 소리 없는 질문이 귓가에 닿는다.
누구도 눈앞에서 아내행세를 하는 이 여자가 다이무스의 남동생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 누가 보아도 정숙하고 품위있는 귀족 집 부인으로 여기겠지. 이게 남자라는 사실은, 하물며 친동생이고 한술 더 떠서 그런 짓이나 하고 다니는 녀석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무도. 단 한 명도. 드레스 자락을 끌어올리며 살포시 허리를 숙이는 이 숙녀가 피가 이어진 남동생이라고는.
변장이 완벽하다고는 하지만 벨져의 모습은 가능한 한 외부에 보이지 않는 편이 좋다. 다이무스는 개실에 들어서자마자 벨져를 내버려두고 객실을 나와 주변을 잠시 돌아다녔다. 괜히 기밀을 유지한답시고 신비주의를 고수하다가 쓸데없는 호기심을 사는 것보다야 먼저 가면을 내보이는 편이 낫지 않겠나. 그런 회사 측의 조언을 따른 행동이었다. 기웃거리게 만들 바에는 적당히 호기심을 죽이라는 뜻이겠지.
아까 같이 계시던 분은 부인이신가 봐요? 아 네, 사촌입니다. 그렇군요 아름다운 분이시던데, 부럽네요. …말씀 감사합니다.
잠시 돌아다니기만 했는데도 이런 대화를 몇 번을 했던가. 저 속 알맹이를 알면 할 수 없을 말들이었다. 부러우면 얼마든지 가져가시죠, 드리겠습니다. 그런 말도 목 언저리에서 아른거렸으나 차마 내뱉을 수는 없을 노릇이다.
간단한 인사를 건네는데에도 상당한 정신력이 소모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시 객실 앞에 서서, 다이무스는 눈을 찌푸리고 살며시 감는다. 문을 열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망설이는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봤자 눈에 띄기만 할 뿐이겠지. 어차피 도망갈 수 없다면 부딪힐 수밖에. 결심을 굳히고 문을 연다.
이질적이라면 이질적인 풍경이다. 검붉은 벨벳 시트로 덮인 좌석. 그 위에 앉은. 새하얀 모자, 머리카락, 풍성한 드레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얗게 치장한 저 숙녀 아닌 숙녀, 가 제―부인이라니. 물론 알맹이는 얄밉기 그지없는 첫째 동생이지만 그래도 다이무스는 임무에 집중하려 애써 회사가 정해준 설정을 떠올렸다. 얼마 전 배우자가 된 사촌 동생. 사촌 동생. 물론 식조차 올린 적이 없는 몸으로 배우자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저 형식적인 인사만으로도 제법 정신력이 소모된 듯했다. 가만히 앉아있는 동생 겸 아내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이렇게 현기증이 나다니. 다이무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등 뒤로 객실 문을 닫는다.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닫혔다.
좁지는 않지만 넓다고도 할 수 없는 공간. 중요한 짐은 선반 위에, 두 사람의 검은 꽁꽁 싸매어 채 의자 옆 작은 틈에 기대어두었다. 모자를 벗은 벨져가 창가로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다. 동생이 입은 하얀 드레스는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다이무스가 반대편 자리에 몸을 내린다. 창밖을 바라보던 푸른 눈이 흘긋 제 형 쪽을 흘기고, 다시 밖으로 향했다. 유리창 너머는 새카만 밤이 내려앉아 불빛 하나 없이 그저 어두울 뿐이다. 창 위로 벨져의 얼굴이 비친다. 아까의 기분 나쁘게 생글거리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표정 하나 없다.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 이따금 들리는 경적.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 걸친다. 시간이라도 죽일까 싶어 가져왔던 책을 무릎 위에 펼쳤다. 다시 슬쩍 동생을 살피니 벨져는 어느새 고개를 숙이고 잠들어있다. 의자가 그리 비좁은 것도 아니다. 옆으로 누워서 자도 괜찮을 텐데. 그러면서도 하얀 드레스에 살짝 찌푸린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눈을 감은 모습이 지극히도 벨져 홀든답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린다. 가져온 책은 소설이었는데, 어째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가 나오고…그리고. 안경이 흘러내리는 감촉에 안경을 다시 고쳐 쓴다. 열차가 크게 흔들렸다.
자세가 흐트러진다. 다이무스는 익숙하게 균형을 잡았다. 때가 아닌가 싶어 한숨을 쉬고 책을 덮었다. 자정을 넘긴 시각이다. 안경을 안경집에 넣고 답답하게 채웠던 단추를 몇 개 끌러냈다. 아까의 흔들림 탓인지 벨져의 두 팔이 검붉은 시트 위로 툭 떨어져 있다. 잠에서 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객실을 밝히던 등을 끄고 손걸이에 머리를 댔다. 덜컹거리는 작은 소리를 귓가에 담으며 눈을 감는다. 작게 쌕쌕이는 벨져의 숨소리가 귀에 닿았다.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한창 겨울이었다. 일주일 전에 내린 첫눈을 잊기도 전에 정원으로 다시 눈이 쌓였다. 이제 열두 살이 된 막내는 신이 나서 정원으로 뛰쳐나갔다. 다이무스는 중무장을 한 막내의 모습을 유리창 너머로 내려다보며 한숨을 쉰다.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
“뭐가 그리 재밌어?”
열네 살 먹은 첫째 동생이 뒤에서 키득거리며 웃고 있다. 더 골치 아픈 동생의 등장에 다이무스는 눈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 말해도 벨져는 웃음을 멈출 생각을 않는다.
벨져는 요즈음 부쩍 키가 컸다. 하루가 다르게 길어지는 팔다리에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지 가뜩이나 듬직하다고는 하기 힘들었던 몸이 더욱 말라 보인다. 막내는 멀어지는 작은형의 눈높이가 못마땅했는지 볼을 부풀리고 툴툴거렸더랬지. 다이무스의 성장에 맞춰 한참을 벌어졌던 신장 차도 완전히 줄어든 건 아니지만, 한창때보다는 가까워졌다.
옆으로 다가온 벨져가 창밖을 내다본다. 가슴 언저리로 하얀 정수리가 내려다보인다. 정원에서 꺅꺅거리며 뛰어노는 막내의 모습이 푸른 눈에 비친다. 유리창으로 첫째와 둘째의 모습이 반사된다. 벨져의 손이 붉은 커튼을 잡아당겨 창을 가렸다. 하얀빛이 커튼을 지나 붉게 변한다. 첫째 동생이 붉은 그림자에 가려지는 순간을 보았다.
하얀 옆모습이 붉게 물든다. 두 손은 아직 커튼을 쥐어 잡고 있다. 빤히 붉은색을 바라보던 푸른 눈이 조용히 옆으로 돌아 다이무스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