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경전
R19|100P|문고|소설
릭벨. 궤도순례에서 이단고해로 이어지는 합본. 각자 일단 따로 냈던거라 40P정도 추가분량이 있습니다.
폐허가 된 수도원에서 어깨를 꿰뚫렸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세상의 이면이었다. 어렴풋이 눈치채고도 모르는 체했던 업보인 걸까? 릭은 더이상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 어깨를 짓누르듯 붙잡으며 눈을 깜빡였다. 피를 흘린 탓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 뒤는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에 남은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고. 하얀 이불 위에 놓인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금속에 꿰뚫렸던 어깨에는 뻐근함이 남아있지만 큰 통증은 없었다. 손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움직인다. 이곳저곳에 스며든 약물 냄새. 철로 된 침대의 프레임. 병실 침대에 앉은 자신을 다시 확인하고 나서야 곁에 있는 사람을 알았다. 청년에게 눈을 돌린다.
무거운 빛을 등지고, 양팔을 교차한 채로. 녹색 눈이 깜빡이며 역광에 타들어가는 청년을 응시했다. 크지 않은 창틀은 십자가를 짊어진 마냥 그림자를 덧그린다. 하얀 이불 위로 그려지는 새카만 윤곽은 그야말로 하염없이 기다리던 구세주의 형상이 분명했다. 숨이 막힌다.
잠이 든 걸까. 릭이 기억하는 시린 눈은 눈꺼풀에 가려진 채 보일 줄을 모른다.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푸른 눈동자가 매섭게 번뜩였다. 지옥의 불꽃보다 뜨겁고 극지방의 얼음보다도 차가운. 그의 검 끝만큼이나 예리한. 티 없는 순백. 누구보다도 완벽할 존재. 숨이 막힐 정도로 견고한 그에서 릭은 눈을 떼지 못한다.
푸른 눈이 감기고 뜨이기를 반복한다. 눈이 마주쳤다.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린다.
“정신이 들었나?”
음성이 귓가로 울렸다. 나는 지금 무슨 말을 들었지? 릭 톰슨은 자신이 들은 얼마 되지 않은 단어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눈이 깜빡이지도 못한 채 그저 빛을 등진 그를 바라볼 뿐. 바라보는 벨져가 자신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조차 인지할 수 없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몸만이 아니라 눈도, 귀도, 머리도. 다 먹고 남겨진 통조림 캔마냥 텅 비어버렸다. 그야말로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제삼자처럼 자신을 바라본다. 정신 차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니지. 생각을 하고는 있나? 사고가 불가능하다. 그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받아들일 수밖에.
먼 옛날의 예언자가 이러했을까. 릭에게 조물주와 교감하는 능력 같은 것은 없었으나 지금 이 짧은 순간 릭은 그 기분을 알 수 있었다. 한눈에. 릭 톰슨이 아니었다면 알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오로지 릭이기에. 릭 톰슨이기에 벨져 홀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릭 톰슨, 듣고 있나?”
벨져의 음성이 릭을 부르고 그제야 릭은 그를 멀쩡한 정신으로 바라본다. 눈앞에 있는 청년. 푸른색의 맑은 빛.
목이 바싹 타들어 갔다.
길을 잃은 릭 톰슨이 애타게 기다려왔던 존재임이 분명했다. 릭이 찾던 사람. 아니 간절하게 원했던 사람. 자신이 저지를 죄악을 깨달은 순간부터. 죄를 사하고 낙원으로 데려가 줄 유일한.
이를테면. 신과 같을.
1.
그의 기사를 향한 마음은 마치 종교와도 같다.
어떠한 논리나 이성조차 통하지 않는 굳은 신념과 그를 지침으로 한 일련의 행동.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절대적인 진리. 그 뿌리가 되는 무언가를 사람은 종교라 한다. 그렇다면 벨져는 그 누구보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벨져 홀든이 종교? 감상을 쓸데없는 것이라 치부하는 차가운 청년에게 이 어찌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으며 코웃음 치겠지. 그 녀석이 신을 믿는다고? 헛소리를, 자기가 신이라고 할 녀석이야. 하지만 릭 톰슨이 확신하건대 벨져 홀든은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신도였다. 눈앞의 살아있는 인간을 신으로 모시는.
의자에 앉은 장년의 기사는 말이 없다. 눈을 감고 미동도 않는 몸. 멀리서 보기엔 얕은 호흡과 함께 천천히 움직이는 어깨만이 그가 살아있다는 증표와도 같았다.
저 주름진 두 뺨에 가져다 댄 손은 온기를 느끼고 있을까. 자신의 신을 접하는 청년은 그 어떤 때보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신체를 모신다. 선혈이 묻은 제 검을 닦을 때보다 섬세하게 피부를 짚어나간다. 몸을 감싸는 검고 긴 코트. 순결한 베일같이 하얗게 떨어지는 머리카락. 그 모습이 마치 저의 신을 떠받드는 사제와도 같다.
릭 톰슨은 제레온 프리츠를 섬기지 않았으므로 따지자면 이교도라고 해야 할까. 릭은 어디까지나 단순히 지켜보는 입장이 되어 벽에 몸을 기댄다. 다른 신도 없이 신과 사제만으로 이루어지는 조용한 미사를 지켜본다.
두 사람의 이마가 맞닿는다. 기도를 읊조리는 달콤한 음성은 입구 근처의 이교도에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두 귀를 기울이고 어두운 방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손등, 볼, 이마. 순서대로 붉은 입술이 몇 번이나 닿았다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작게 내밀어 진 빨간 혀가 신의 마른 입술을 핥았다. 여운을 아쉬워하듯 몇 번이나 입맞춤을 반복한다.
어둠이 내린 방에 보슬거리는 빗소리가 울린다. 하얀 손을 가리는 검은 장갑이 주름진 손을 감싸 쥐었다. 잘 되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제레온 경. 릭은 간신히 귀에 닿은 목소리의 파편을 주워 담으려 신경을 곤두세운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을 달콤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를 쿡쿡 찌른다. 그대의 성대가 그런 음성을 만들 수 있었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청년은 그 뒤로도 기사에게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지켜보는 이의 심리는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벨져, 그러다가 제레온 경의 입술이 닳겠소? 아니 아니지. 휴~ 거기 도련님, 기사분이 그렇게 사랑스러운가봐? 그랬다가는 칼끝이 제 얼굴을 향할 거다. 장난은 그만둬, 그럴 심정이 아니라는 건 네가 잘 알 텐데. 그런 말과 함께. 물론 그 짜증스러운 표정도 좋지만…. 아니. 지금 자신의 불편한 심기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어떤 말도 벨져의 제레온을 향한 충의를 누를 수 없다는 것을, 릭 톰슨은 안다. 자신이 아닌 그의 신에게 입을 맞추는 그가 이 세상 것이 아닌 마냥 아름답다는 것도. 어쩌면 자신과 사랑을 나누는 순간보다 더욱.
신을 향한 기도가 끝나고. 사제는 몸을 돌려 이교도를 향한다.
릭 톰슨이 잠에서 깨는 순간이다. 푸른 빛이 릭을 향한다. 반사적으로 박수라도 치려 들린 손을 멋쩍게 내리고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는다.
“끝났소?”
“기다리게 했군.”
다가온 그에게 답하듯 등 뒤로 손을 뻗어 문을 연다. 벨져를 먼저 내보내고 뒤이어 문을 나섰다. 축축한 습기. 복도와 방은 별다름 없을 터인데 호흡이 탁 트인다.
길게 늘어진 복도는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로 가득하다. 다른 이는 보이지 않았다. 고용인의 대부분을 잃은 저택에 남은 이는 두 손으로 꼽을 정도가 아닐까. 황량한 저택이 얼마 되지 않는 고용인과 제레온 프리츠의 유품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음을 릭은 안다. 눈앞의 벨져 홀든 또한 그 유품 중 하나라는 사실도.
미처 닦이지 못한 유리창이 빗물로 얼룩진다. 번개로 번뜩이는 창을 등지고 선 벨져는 마치 홀로 다른 공간의 사람인 것 같았다. 마주한 푸른 눈이 릭의 속을 꿰어본다. 릭이 원하는 대로. 검은 코트를 두른 두 팔이 들어 올려진다. 이리로, 네가 원하는 곳으로. 계시가 릭을 이끈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다가가 젖은 몸을 끌어안았다.
아직 비가 마르지 않은 그에게서는 아까와는 다른 향이 난다. 오래 방치된 폐허에서 날 법한 묘한 먼지나 곰팡이의 냄새 같은. 벨져 홀든이 이렇게 타인의 향에 무력하다는 것을 릭은 얼마 전에야 처음으로 알았다. 릭이 아는 벨져는 그 어디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의 모든 것은 굳건하게 유지될 것이었으므로. 지금 그의 몸에서 풍기는 오래된 골동품의 향이, 벨져의 것이 아닌 모든 흔적이 그저 어색하다. 은은하게 묻어나는 축축한 광기가 벨져가 그의 정신 나간 신에게서 옮은 것인지 아니면 벨져 자신의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 하얀 볼에 입을 맞추고, 입술에 키스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신을 받아들이던 연인의 입술에 제 것을 덧씌운다. 릭은 신의 흔적을 지울 필요가 있었다. 연인으로부터. 미사를 마친 연인을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되돌리기 위해…. 아니.
정말 그런 건가?
정말 그것만을 위해? 다시 한번 생각한다. 질투. 릭 톰슨은 지금 자신의 감정이 질투가 아닐까 추측한다. 몇 초전까지 확신이었던 추측은 순간적으로 품은 의문에 추측으로 바뀌었다. 메스꺼움을 동반하는 이 불쾌한 감정은 질투일 것이라 생각했다. 연인이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입을 맞추는 순간이 어찌 마음에 들겠는가. 마음을 주고받은 관계로서 마땅히 느낄 분노 섞인 울렁임. 벨져에게 입을 맞추는 릭 톰슨 자신의 바닥에는 분명 그러한 것들이 깔려있었으나,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다.
릭은 저 구석에서 조용히 고개를 드는 다른 속삭임을 가만히 듣는다. 눈을 감는다. 젖은 입술에 당장 키스하고 싶었던 충동의 원인. 작은 악마가 속삭였다.
2.
이미 자자하게 퍼진 소문이다. 젊고 아름다운 기사단장이 고귀한 제레온 프리츠에게 불경한 마음을 품고있다는 소문. 릭 톰슨이 그 소문을 믿은 적은 한 번도 없다. 벨져의 제레온을 향한 무엇보다 순결한 애정은 그가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믿음은 충격적인 순간을 목격한 직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저 놀랐을 뿐. 벨져 홀든이 제레온 프리츠에게 입맞춤하는 것을 처음 목격한 순간 릭 톰슨은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한 번, 두 번, 세 번을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을 빤히 바라보며 릭은 저가 마치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진다. 수줍게 내밀어 진 붉은 혀가 기사의 마른 입술을 적시던 순간조차 릭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한치의 부끄럼이나 수치 없이, 당당하게 이루어지는 입맞춤은 분명한 벨져 홀든의 의지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리고 벨져는 릭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벨져를 이 방으로 데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릭 톰슨이었으므로.
그러니까 한 마디로 벨져는 자신의 연인이 보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다른 이에게 입을 맞췄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이 어찌 연인 된 자로서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그가 벨져와 처음으로 살을 섞고 입맞춤을 나눈 지 며칠 되지 않은 시점에서.
“벨져, 그…제레온 경과는, 그, 그런 사이였소?”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제레온 프리츠가 벨져 홀든에게 얼마나 예민하고 민감한 사안인지 알기에 그래야 했다. 벨져의 역린을 건들지 않는 방식으로 심리를 알아내고 싶었다. 릭이 벨져의 단순한 동료이거나 지나가는 사람이었다면 그저 못 본 체 눈을 돌렸겠으나, 벨져 홀든은 릭 톰슨의 연인이기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아니던가.
벨져는 눈을 찌푸리고 릭을 돌아본다. 검은 장갑에 싸인 두 손은 여전히 제레온 프리츠의 얼굴을 감싼 채다. 야위었지만 듬직한 두 다리에 걸터앉은 청년은 의아하다는 듯 말꼬리를 올린다.
“그런 사이?”
“그러니까, 제레온 프리츠 경과 서로…아주 사적이고, 친밀하고, 육체적으로도 가까운 관계였냐고 묻고 있는 거지. 걱정 마시오, 그대를 추궁하는 게 아니야. 제레온 경이 그대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소. 다만…그대가 그런 마음으로 제레온 경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거요.”
이쯤 오면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중심이 모호해진다. 그럴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릭이 생각하기에 벨져의 제레온을 향한 감정은, 아주 특별하다고는 생각했으나 그런 방향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그리고 그 생각은 아직 변함이 없다.
파란 눈이 깜빡인다. 흐음. 몸을 의자에서 내려 릭을 향해 뒤돌아선다. 하얀 손가락이 입술을 몇 번 건들고, 팔짱을 꼈다. 그리고 입을 뗀다.
“제레온 경이 나와…너 같은. 비슷한 사이였냐고, 묻고 있는 건가? 연인이었냐고?”
“비슷하오. 정확하게는, 제레온 경에게 그대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냐고 묻고 있지.”
“아무래도 네가 잠이 덜 깬 모양이군. 피곤하다면 쉴 곳을 마련하겠다.”
벨져는 그렇게 단언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역시. 마른 웃음이 입가로 흐른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조금 더 불쾌해하거나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자각이 없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그런 의미는 없는 걸까. 릭은 아마도 후자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벨져의 행동과 말이 맞물리지 않는다.
제레온과 벨져를 번갈아 본다. 가장 확실한 건 아마 제레온 프리츠에게 사실을 듣는 것이겠으나, 산 채로 죽은 꼴과 같은 그가 릭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기에 릭은 다시 한번 벨져에게 말을 덧댄다.
“그렇지만 그대는…입맞춤을 했어. 방금도 그랬지 않소. 몇 번이나.”
무슨 불순한 소리냐며 이번에야말로 화를 낼까. 릭은 제법 긴장했다. 벼락같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벨져의 호통을 각오했다. 그러나 벨져는 눈을 가늘게 찌푸릴 뿐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파란 눈이 깜빡인다. 천천히 붉은 입술이 열린다. 릭. 목소리는 언제나 가장 정확한 모습으로 귀에 닿는다. 릭을 직시하는 푸른 눈은 누구보다 순수할 것이다. 저 입술이 항상 진실만을 담는 것을 안다.
“진심을 전하는데 육체적인 접촉이 말보다 확실하다고 한 건 너였다.”
맑고 깊은 눈동자에 숨을 멈춘다. 내가 그런 말을? 시치미를 떼기에 기억은 지독하리만치 선명하다.
키스를 했다. 눈을 감은 채. 심장이 벌렁거렸다.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는 고동이 귓가에 울린다. 먼지가 자욱하다. 피부에 엉키는 흙먼지에 손끝이 텁텁했다. 머리를 엉망진창으로 뒤섞는 흥분을 가라앉힐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폐허가 된 유적이었다. 벨져 홀든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름. 릭 톰슨은 인생에서 두 번째로 죽음의 문턱에서 발을 멈췄다. 아니, 그렇게 표현하면 조금 과장되었을까? 그저 스쳤을 뿐이다. 얼굴 바로 옆을. 그리고 한끝 잘못 닿았다면 목이 날아갔을 순간을 피하게 한 건 벨져의 날카로운 검이었다.
제아무리 죽음을 각오했다 해도 순간의 공포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자꾸만 주저앉으려는 다리를 간신히 일으킨다. 벨져는 릭을 부르지 않았다. 이따금 뒤를 돌아보는 푸른 눈이 그의 상태를 살필 뿐이다. 아침의 밝은 빛이 천장의 갈라진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릭은 멍하니 흔들리는 하얀 머리카락을 바라본다.
적은 저 앞에 있다. 멀뚱멀뚱 있을 여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알면서도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모른다. 그저 지켜볼 뿐이다. 햐얀 빛이 악을 베어 넘기는 순간을.
빛을 받아 더욱 희게 빛나는 존재. 마치 태어나기를 남들보다 고귀한 존재인 것처럼.
“정신이 들었나.”
다시끔 벨져의 그 말에 시야가 개였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던 뜨인 눈에 빛이 들어온다. 호흡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하얀 머리카락에 붉은 피가 검게 눌러붙어있었다. 그의 것인지 아닌지 모를 피다. 머리카락만이 아닌 이곳저곳에 튀어 묻고,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빨간 것이 몸에 얼룩진다.
그래도 깊은 상처는 없는 듯하다. 망토 아래 가려진 몸이 어떠할지는 모를 노릇이지만 벨져 홀든씩이나 되는 사람이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겠지.
멋쩍게 미소지으며 머리를 긁는다. 벨져의 손에 잘 닦인 검이 검집으로 들어 갔다. 아직 다리가 후들거렸다.
“미안, 하오. 잠시 한눈을 팔았군.”
“네가 나를 데려온 걸로 네 할 일은 끝났어. 그거면 됐다.”
뒤를 돌아 걸음을 옮기려는 그를, 반사적으로 팔목을 잡아 붙든다. 몸이 멀어지려던 찰나를 견딜 수 없었다. 잠시나마 푸른 눈이 크게 뜨인다. 벨져가 릭을 내려다보았다. 마른 입이 뻐끔거렸다. 심장이 타들어간다.
지쳐있었다. 머리가 아찔하다. 숨이 턱 막히고…. 목이 마르다. 목이…. 그러니, 벨져. 나를.
나를?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릭은 알지 못한다. 나를. 벅찬 감정으로만 남아 목젖 언저리에서 맴도는 몇 마디 글자는 전부 알 수 없는 형체로 깨져있다. 얄팍한 몇 마디 음성이나 글자는 이 마음을 전할 수 없을 것이다. 보이는 모든 것이 흔들린다.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치. 이건. 그래, 자신은 눈앞의 청년에게 욕정하고 있다. 평소의 청결한 인상과는 달리 피와 먼지로 범벅이 된 벨져 홀든에게. 시야가 흔들리고 숨이 벅찰 만큼이나.
벨져에게 기대어 몸을 일으켰다. 릭이 원하는 대로 벨져는 그를 부축한다. 벨져를 지지대 삼아 두 다리로 서고, 다시 기대듯, 아니 얽매듯 그를 끌어안았다. 두 팔을 벌려 세게. 벨져가 가볍게 쥐었던 검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입을 맞추면. 키스를 하면. 호흡을 나누고 살을 섞으면.
지극히 낭만적이면서 가장 확실한 대화가 아니겠는가.
“당신을 알고 싶어.”
“나를?”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릭은 분명 벨져 홀든을 알고 싶어 하였으나 그 이상으로 벨져 홀든이 자신에 대해 알아주기를 원했으므로.
릭 톰슨의 어떤 것을? 이를테면 생각이나 감정, 소망같은. 언어로 나타내기엔 불완전할 것들에 대해.
그리고 거기에 덧대어 입에 담지 않을 깊은 구석의 욕망까지.
양팔을 붙잡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팔을 잡은 손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간다. 시야가 가늘게 떨렸다. 호흡이 닿을 거리에서 잠시 멈추고, 눈을 감는다. 검붉은 피딱지가 달라붙은 입술에서 비릿한 맛이 난다.
몇 번을 머뭇거리듯 입을 맞췄다. 가장 원했고 원하고 있고 앞으로도 바라마지 않을 것. 오로지 벨져 홀든만이 릭 톰슨에게 줄 수 있는. 백 번을, 수천 번, 수만 번을 입에 담아도 벨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을 분명 벨져는 가지고 있다.
입을 맞춘 채.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흙먼지가 인다. 숨이 벅차다.
두 손을 등에 둘러 꽉 끌어안는다. 어깨에 코끝을 파묻고 숨을 들이켰다. 마른 입술로 흐트러진 크라바트를 당겨 벗겨냈다.
체중을 실어 몸을 뒤로 넘어트리려 했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뒤로 몸을 눕혀달라는 신호였다. 그제야 벨져는 릭에게 묻는다.
“너는 내가 네 성행위를 받아들이는 게 정당하다고 하는 건가?”
“서로의 진심을 나누는 데에 가장 정확한 방법이오.”
딱히 반론은 없다. 하지만 그 표정이 약간의 의아함과 불신에 찌푸려져 있을 것을 안다. 모르는 체 목덜미를 살짝 깨문다.
“입에 담는 그 어떤 말보다 순수하고 거짓 없이 생각을 나눌 수 있지.”
거짓은 없다. 모든 것이 릭의 진심이었다. 지금까지 벨져를 대했던 그저 친밀한 태도도, 지금 하고자 하는 행위도.
병상에 앉아 그를 본 그때부터 지금까지. 벨져 홀든을 품에 안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다.
딱히 죄책감을 느끼거나 한 건 아니다. 벨져는 분명 릭에게 있어 누구보다 고결한 존재였으나, 그렇기에 더욱 소망했다. 더러움을 모르는 완벽한 육체에 닿아 가진 죄를 씻고자 소망했다.
벨져는 그 이상 대답이 없었다. 허가도, 거절도 받지 못한 채 행위를 계속한다. 싫고 좋음이 확실한 사람이다. 거절의 의사가 있었다면 진작에 거절했겠지. 릭은 그렇게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다. 거절당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허락일 것이다.
이런 먼지 구덩이와는 참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폐허가 된 유적 구석에서 상대를 눕히고서야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를 깨달았지만 이제와서 장소를 이동할 생각은 없었다. 이런 때나 쓰라고 있는 편한 능력을 가지고서도. 능력을 쓸 몇 초가 그저 아깝게만 느껴질 뿐이다.
꿈꿔왔던 순간이었다.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행했던 파렴치한 망상 속에서. 무의식이 이루어낸 꿈에서. 눈앞의 벨져 홀든을 탐했다. 갖은 방법으로 그를 원했고 그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랬던 망상이, 꿈이, 이런 식으로 결국에는 실현되리라 어찌 알았을까.
현실은 꿈보다 훨씬 환상적이었다. 입을 맞추면 반응이 돌아오고 내미는 혀에 답하듯 혀가 얽혀온다. 태어나 서른이 훌쩍 넘는 세월을 지내는 동안 이만큼 행복에 찼던 순간은 없었을 것이다. 모든 죄가 씻겨 내려가고 그저 기쁨만이 가득한 시간. 마치 난생처음 저지르는 행위인 것처럼 가슴이 설레고 손이 떨린다.
입맞춤도, 만져본 피부도, 헤집고 들어간 속살도. 모두 꿈이나 상상을 훨씬 웃도는 황홀경이었다. 실망따위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으나 한 번 맛본 감촉은 릭을 벨져에게 더욱 심취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 때는 처음인지 아닌지 묻지 않았다. 그저 속에 찔러넣고 흔드는 허리에 맞추어 조금씩 찌푸리는 얼굴이나 허덕이는 호흡이 지독하게 선정적이었기에, 아마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법을 이미 배운 건 아닐까 생각했을 뿐이다. 한참 후에야 그게 처음이었다고 알게 되었지만. 이 때의 릭은 벨져가 이미 소문대로 경험이 제법 있을거라 착각하고 있었다. 다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을 뿐이다.
조금 버둥거리는 허리를 잡아 찔러넣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전부 집어 넣었다. 그제야 작게 경련하던 몸이 조금씩 안정을 찾는다. 잔뜩 젖은 하반신과는 달리 릭의 입술은 바싹 말라있었다. 숨을 고르는 벨져에게 정신없이 입을 맞췄다. 아 역시, 그대뿐이야. 잔뜩 목을 축였는데도 목이 마르다.
나를. 뒤에 이어지려던 문장. 적나라한 소망을 다시 삼킨다.
나를 사랑해주시오.
바라건대, 그대가 나를 사랑하기를. 나를 그대의 특별한 존재로 삼아 다른 것과는 선을 긋기를.
그렇게 나를 구원하기를.
벨져 홀든의 특별한 존재가 되는 릭 톰슨은 구원받는다. 벨져가 도달하는 결론이 곧 그의 낙원일 것이다. 그렇게 확신하기에 릭은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형태 없는 조물주보다 눈앞의 구원자를 숭배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