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으로 지나가던 동료들이 히히덕거리며 릭을 보고 웃었다. 비웃음과는 약간 다르다. 그리 치적 거리지 않는 순수한 부러움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우스운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릭만 보면 갑자기 까르르 입을 돌리고 웃으니 릭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혹시 누가 등에 이상한 장난을 쳐놨나 했으나 어디에도 이상은 없다. 무슨 일일까. 혹시 삼십 분 남짓한 짧은 순간에 세상의 진리가 릭 톰슨을 보면 웃음이 나오도록 바뀌었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남녀 몇 명이 파티션을 에워쌌다. 조잘조잘 정신없이 수다가 터진다.
뭐야 톰슨, 숨겨둔 애가 있다며? 결혼엔 관심 없다고 하더니 벌써 애가 있었구만~. 아니야 설마 그 애가 이 심심한 톰슨 애겠어? 조카일 거라고. 하여튼 엄청 귀엽더라구요. 그래서 그 아이는 여자예요 남자예요? 톰슨 씨?
아이의 성별을 가지고 무슨 커피 내기까지 했다며 왁자지껄 분수가 쏟아진다. 숨겨둔 애? 귀여워? 무슨 소리인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는다. 서른셋 신대륙의 회사원인 릭 톰슨은 분명한 독신이다. 애인이 있기는 하지만 그 애인이라는 사람의 성별 상 아이는 생길 리가 없기에 숨겨둔 애 같은 말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 아닌가. 아니면 조카라니 조카가 회사에 왜.
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릭은 자신을 압박해오는 동료들에게 곤란한 듯 멋쩍게 웃으며 손을 젓는다.
“잠깐 진정해…애라니 무슨 말이오? 난 깨끗한 독시….”
“여 톰슨 주니어~, 아니 레이디인가? 아버지는 저쪽이란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들려온 말에 릭은 말을 멈춘다. 입구. 시선이 쏠린다. 톰슨 주니어? 약간 나긋하면서도 날 선 목소리. 그 목소리에 놀라 릭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입구 앞에 선 얼굴을 확인한다. 나이는 열둘이나 셋쯤 될까. 어깨 언저리에서 찰랑이는 하얀 머리카락. 나이 탓인지 약간은 성별이 헷갈리는 외모. 상대는 아직 릭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릭을 가리켰던 남자를 반쯤 노려보고 있다. 릭은 헐레벌떡 가방을 들고 파티션을 뛰쳐나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그 앞으로 도착한다.
“릭이 내 아버지라고?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군. 세상 어느 아버지가 아들을…읍.”
황급히 입을 틀어막는다. 몸이 작아진 탓인지 손은 과하다 싶을 만큼 얼굴을 가렸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릭에게 집중된다. 릭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다가, 헛기침했다.
“벨져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자 어서 나갑시다!”
그리고 냅다 달렸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 게이트를 열어 집으로 돌아가, 버럭 소리를 쳤다.
“왜 회사까지 온 거요!”
벨져는 말이 없다. 머리까지 애가 되었나. 자고 있었기에 말없이 출근하기는 했지만 회사에 가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텐데. 야근이 잦다는 사실도.
회사가 어디라고 말도 안 했는데 잘도 찾아왔군.
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한 번 소리를 쳤더니 기분이 조금은 풀어졌다. 릭은 한숨을 쉰다.
“여튼…아까 같은 발언은 참아주시오. 쓸데없는 오해를 살 테니 말이지.”
“쓸데없는 오해라고? 네가 내 아버지라고 오해받는 것보다 쓸데없단 말인가?”
이번엔 벨져가 날카롭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소아성애자로 오인받겠소.”
“나와 잔다는 사실이 어째서 너를 소아성애자로 만드는지 모르겠군. 릭 톰슨. 내가 ‘소아’다 이건가?”
까딱까딱 옆구리에 손을 대며 짜증스레 눈을 찌푸리는 벨져. 릭은 고개를 푹 숙인다.
“벨져, 그대가 현 상황에 불만이 많은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이런다고 그대의 몸이 순식간에 쑥쑥 자라는 건 아니지 않소!”
“지극히도! 옳은 말이군. 릭 톰슨. 그런데, 이러지 않는다고 해서 쑥쑥 자라나?!”
벨져어어. 한 발도 물러서지 않으려하는 벨져에게 릭은 슬슬 울며 매달리고 싶을 지경이었으나 그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기에 그저 한숨만 쉬었다.
어제저녁, 벨져 홀든이 작아졌다.
원인불명. 아니 굳이 따지자면 릭의 탓일까? 언제나처럼 공간을 잇고 게이트로 몸을 던졌는데, 게이트를 빠져나온 순간 릭은 혼자였다. 폐허다. 약간 멀리 떨어졌나? 릭은 주변을 걷는다. 여기저기 둘러보아도 벨져는 온데간데 없었다. 벨져―― 벨져! 어디 있소! 두리번거리던 릭의 바짓자락을 무언가가 잡았다. 기껏해야 열둘 셋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다. 어깨에서 찰랑이는 하얀 머리카락에 옥빛이 도는 눈. 벨져와 닮은 것도 같은데. 벨져 홀든은 릭보다 일곱 살 연하이긴 하였으나 이렇게 쥐똥만 하지는 않다. 이런 황무지에 아이가 왜 있는 건지. 그러면서도 무시하고, 벨져. 벨져~? 벨져 어디 갔소. 그리 찾고 있으니 아이가 말하는 것이었다.
“어디 있긴, 여기 있지 않나.”
약간 높은가 싶긴 해도 분명 벨져의 목소리다. 생긴 것도 벨져같긴 한데. 너무 어리지 않은가? 릭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당사자인 벨져는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얼굴을 찡그리고 팔짱을 낀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입을 연다. 흠? 어째 네 키가 많이 커 보이는군. 그리 말하는 벨져의 복장은 사실 아주 묘하다. 옷은 쪼그라들지 않은 건지. 어깨 갑주는 보이지 않고 그를 제외한 윗옷만 어떻게든 입고는 있는 꼴이었다. 설마 자각이 없는 건가.
어쩌지도 저쩌지도 못하고 굳어있다가, 급한 대로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되는 벨져를 들쳐업고 신대륙의 제 아파트로 몸을 날렸다.
벨져는 거울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제 전신을 몇 번이나 툭툭 치더니, 결국 수긍했다. 돌아갈 방법을 생각해봐야겠군. 크게 화를 내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목소리. 생각보다 적응력이 좋은 청년이라고 릭은 감탄했다.
열둘 셋. 릭에게는 벌써 이십 년도 전이다. 옷이 남아있을 리 없으니 결국 새로살 수밖에 없었다. 그대의 집에는 남아있지 않소? 그리 물으니 절대로 이 꼴을 하고 집에 가고 싶지는 않다고 결사반대다. 사긴 사야겠군. 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돈이야 벨져가 내겠다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일 당장 원래 몸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는데 많이 사두는 것도 의미는 없지 않을까. 결국 외출복과 속옷 정도만 두세 벌 장만하고, 집에서 입는 옷은 적당히 남는 릭의 윗옷을 쓰기로 했다.
그게 어제의 일이었다.
몸이 저 꼴이라 잠이 많아진 건지. 아침에도 영 일어나지 못하는 벨져를 냅두고 바로 후다닥 출근했었지. 출근이라고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 야근이 잦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을 텐데. 평소보다 불안정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벨져도 꽤 당혹스러워하는 듯하다.
식료품 가게와 마트에서 적당히 늦은 저녁거리를 사서 릭의 아파트로 돌아간다.
그 와중에도 벨져는 계속해서 릭의 아들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그새 회사에서 누가 여기까지 소문을 퍼트렸나? 아니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러면 대체 어딜 봐서. 대체 어딜 봐서 나와 벨져가 부자지간으로 보이는지. 릭은 허탈한 웃음을 흘린다. 벨져의 현재 외관상 나이는 10대 극 초반. 열둘이나 열셋쯤일까. 릭이 20대 초반에 사고를 쳤다면야 가능할 나이긴 하지만…. 얼굴 자체가 다르게 생긴 벨져와 자신이 어딜 봐서. 어딜 봐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영 답이 나오지 않는다.
방법은 얻어지는 이득에 비해 간단하다. 손상되지 않은 …의 원액을 이틀간 상온에 꺼내둔다… 도수가 높은 술에 갖은 꽃잎을 잔뜩 담아 향이 배이게 한다. 술에 꽃향이 배면 벌꿀을 넣어 달콤한 맛이 풍기게 한다. 그대로 주재료를 넣고 삼일 밤낮을 잘 숙성시킨다. 이 때 밀봉은 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마지막으로 갖은 향이 밴 재료를 안팎으로 잘 씻어서….
어린 눈과 입이 잔뜩 꼬부라진 글씨를 읽어내려간다. 거기까지 눈이 닿았을 때, 커다란 손이 앞에 놓여있던 책을 덮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종이가 노랗게 바랜 책이었다. 새빨간 가죽표지가 무거웠다. 아직 작은 손으로는 표지를 힘겹게 넘기고 종이를 한 장 한 장 팔을 전부 써가며 넘겨 읽을 수 밖에 없던 책이다. 그 무거운 책을 간단하게 다시 덮어버리던 거친 손이 기억에 남았다. 다이무스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위로 올린다. 어른의 손이 하얀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이무스, 검술 시간이란다. 네 아버지. 군살이 잔뜩 박힌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다이무스는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이는 그저 자신이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책을 펴들었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가장 화려했던 책이다. 가장 크고, 아마도 가장 무거웠을 것이다. 그 책이 어떤 책이었는지, 아직 여섯 살 된 아이에 불과했던 다이무스 홀든은 그 책에 쓰여있던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어린 기억은 쉽게 풍화된다. 그 때에는 강렬했던 기억이 옅어질만큼의 시간은 9년. 전후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게되고, 15세의 생일이 목전으로 다가온 밤. 다이무스는 아버지의 부름을 받았다.
제 방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밤의 발걸음이 들리고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종적을 감춘 시각. 무거운 노크소리가 다이무스의 귀를 떨었다. 똑똑. 누구세요. 대답을 대신하듯 문이 열리는 소리. 고개를 돌린다. 엄격한 아버지의 얼굴과 눈이 맞는다.
홀든의 장남은 반사적으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요즈음 부쩍 키가 컸는지 한참을 올려다보았던 아버지와도 이젠 눈높이가 비슷하다. 아니 오히려 약간 높을까. 그 사실이 버거워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숙이는 건 다이무스의 버릇이다. 아버지는 잠시 방 안을 둘러보고는 다이무스와 눈을 맞췄다.
"너도 이제 곧 열다섯이구나, 다이무스."
붉은 융단 위로 구두소리가 먹힌다. 네, 아버지. 다이무스는 조용히 답했다. 같은 눈높이. 같은 색깔. 거친 손이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자신에게는 항상 엄격한 아버지의 손길이 묘하게 상냥했다. 부드러운 미소. 다이무스는 약간 당황한다.
아버지는 다이무스, 벨져, 이글 세 형제를 경쟁속에 기른다--고 다이무스는 생각한다. 동등하게 세 개를 부여하는 건 드문 일이었고 대개는 하나를 두고 셋이 경쟁하도록 했다. 그러는 도중에도 가장 애정을 쏟는 둘째 벨져나, 막내인 이글에게는 제법 상냥하곤 했으나 장남인 다이무스에게 그 손길이 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선물이 있단다. 오늘은 일찍 잠들지 말고 기다리거라. 데리러 오마."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아버지는 등을 돌렸다. 열다섯 살 생일을 앞둔 다이무스는 살짝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해가 저물고 한참이나 흘렀다.
밖으로 뛰는 소리가 들린다. 막내도련님 이제 주무실 시간이에요! 뒤따르듯 높은 여성의 목소리. 이글이 오늘도 고용인과 한바탕 하는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아직 막내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가. 내일 입을 옷이다 뭐다 방에 붙들린 채 거의 모든 것을 해결했었지. 다이무스는 문을 열고 막내의 뒷꽁무늬라도 잡아 얼굴을 볼까 고민했으나 금세 멀어지는 소리에 그만두기로 한다. 책상 앞에 앉아 깃펜을 쥔다.
펜을 움직이는 사이에 자정이 되었다. 뎅그렁 뎅그렁 이방 저방에서 시계가 울었다. 다이무스는 펜을 내려놓고 일기장을 덮는다. 빨간 표지가 완전히 덮히며 작은 소리를 냈다. 문이 열린다. 몇 시간만에 보는 아버지의 얼굴. 복도의 어둠에 반쯤 잠겨 그 표정이 모호하다.
따라오너라.
조용한 목소리가 다이무스에게 명령한다. 갑작스레 일어난 탓에 의자가 뒤로 크게 기울었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다이무스는 옷걸이에 걸쳐두었던 검은 코트를 몸에 걸치고 그 뒤를 따랐다.
커다란 등을 따라 도착한 곳은 지하로 가는 나선계단의 입구였다.
지하실. 저택 지하의 가장 깊은 층에 있는 방은 미지의 영역이다. 열쇠를 가진 사람은 가주와 집사 단 둘뿐이라 했던가. 막내는 항상 저 안을 궁금히 여겼지만 다이무스는 그렇지 않았다. 언젠가 때가 되면 알게 되리라 생각했기에.
넓은 등을 따라 나선계단을 한없이 내려간다. 발을 딛을 수록 공기는 습해지고 피부가 서늘해진다. 여름을 넘기고 가을이 한껏 물든 계절이 체온을 빼앗아간다. 얇은 옷감 너머로 냉기가 스며든다.
앞을 걷는 손에 들린 불빛이 좌우로 흔들린다. 커다란 문 앞에 발이 멈추고 뒤따르던 다이무스도 걸음을 멈추었다.
하얀 면장갑을 낀 손이 문을 밀어젖힌다. 귀를 찢는 소리와 함께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화사한 향이 풍겨나왔다. 금방이라도 취할 것 같은 달콤한 향기. 알코올과 단내음, 꽃향이 뒤섞인 지독한 냄새. 현기증이 일어 숨을 참았다. 순간 눈앞이 일렁인다. 문앞에 멀뚱멀뚱 코를 막고 서있으니 그 사이에 아버지는 저 먼발치까지 가있었다.
등 뒤로 제 무게에 문이 닫히고 지하는 조금 더 어두워졌다. 자세히 보니 천장으로 샹들리에인가싶은 유리의 윤곽이 보였으나 제구실은 하지 못한 채 잔뜩 낀 거미줄이 빛을 옅게 반사할 뿐이다. 아버지가 든 작은 빛, 벽면으로 따라붙은 등불. 어둠을 밝히는 도구는 많았으나 공간을 전부 메우기에는 미약하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공간이다. 고문도구인가 싶은 살벌한 칼이나 철퇴가 있는가 하면 한쪽 구석에는 지푸라기인지 무엇인지 모를 풀자락이 쌓여있다. 찬장을 가득 메운 다기도 있었다. 잡동사니를 모아뒀을 뿐인가? 그렇다고 평범한 창고라고 생각하기에는 이 의미모를 엄중함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창고라면 저택 본체 밖에 있지 않았던가. 심지어 이런 곳에서 생일선물이라니. 다이무스는 고개를 살짝 까딱이며 어둠 속을 둘러본다. 커다란 항아리가 보인다. 아버지가 그 앞에서 손짓한다. 불빛이 흔들렸다.
"이쪽이다."
이유모를 불안감에 머뭇하다가 결국 발을 뗀다. 팔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질척한 습기가 엉겨붙었다. 익숙해지지 않는 향이 코를 찌른다. 숨이 답답하다. 무슨 냄새일까. 향에 이름을 붙일 수는 없었으나 그 진원이 저 커다란 독이라는 사실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커다란 항아리. 주둥이가 어깨에 닿는 정도의 높이다. 밤을 녹여 발랐나 싶을 정도로 새카만 바탕에 파란 알갱이가 별마냥 박혀있었다. 그 바로 앞까지 두 발짝정도 남은 곳에서 다이무스는 걸음을 멈춘다. 하얀 장갑을 낀 커다란 손이 들고있던 램프를 안으로 드리웠다. 들여다 보거라 다이무스. 아버지의 말에 다이무스는 걸음을 옮긴다. 한 발, 두 발, 그리고 반 발자국 더. 차가운 주둥이에 손을 댄다. 기울인 램프의 빛이 수면을 비춘다. 염료라도 개워넣은 듯 새파란 물이 작게 흔들린다. 고개를 숙여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바닥으로 하얀 윤곽. 얕게 흔들리는 표면에 함께 흔들린다. 그 끝부터 안쪽으로. 몸을 따라 시선이 움직인다. 푹 파여들어간 벽면으로 기댄 동체.
--요 며칠 영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제부터였나 아니 사흘쯤 되었다. 식사시간에도 대련장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도 몰라. 행방을 묻는 첫째의 질문에 막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그아이가 잠시 그 집에 갔다 했다. 막내는 자기만 빼놓고 놀러갔냐며 볼을 부풀렸다. 지금껏 혼자 그 집에 간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나 그아이가 그 집의 주인을 따르던 것을 생각하면 올게 왔거니 생각했다.
하얀 다리가 새파란 물 속에 일렁인다. 헐렁한 흰 옷감 사이로 보이는 어깨가 가늘게 떨었다.
아버지.
다이무스는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든다. 옅게 미소짓는 눈과 시선이 얽힌다. 지독하게 닮은 얼굴. 누구나가 네가 크면 저리 될 것이라 했다. 누구나가 어린 시절의 당신이라 했다. 그 사실이 이리도 끔찍하게 여겨졌던 순간이 있던가.
소매를 걷어올린 어른의 손이 독에 잠긴 것을 끄집어낸다. 젖은 몸에서 물이 튀어 바닥을 적셨다. 작은 숨소리. 눈을 떼지 못한다. 어린 몸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새파란 물이 돌바닥을 검게 적셨다. 그 순간을 잊지 못하고 기억한다.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열다섯 살 생일을 축하한다, 다이무스 홀든.
귓가로 상냥한 목소리가 맴돌았다.
밤이 깊었다.
자정을 알리는 종이 크게 울렸다. 방음이 허술한 건물 가득 소리가 퍼진다. 허름한 여관이다. 오늘 손님이 셋은 된다 했던가. 남은 손님 하나도 몇 시간 전 여관을 뜬 모양이니 지금 이 여관에 있는 손님이라고는 릭과 벨져가 전부일 것이다. 종소리를 들으며 릭은 수첩을 덮는다. 열한시쯤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음날 예정을 전해준다 했었다. 시간 약속을 1초라도 어길 벨져가 아닌데. 혹여나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릭은 조용히 방을 나왔다. 벨져의 방은 바로 옆. 몇 발짝 떼지 않는데도 복도 가득 나무가 삐걱거린다.
똑똑. 노크를 두 번, 그리고 헛기침. 대답은 없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세 번 더 문을 두드렸지만 여전히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벨져? 다시 노크. 복도는 조용하다. 들어가겠소. 문을 밀어 열었다.
"벨져, 내일에 대해 상의를……."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저도 모르게 코를 틀어막았다. 무거운 나무문이 조금 열린 순간. 순간 눈앞으로 불꽃이 튈만큼 짙은 향이 몰려왔다. 현기증이 난다.
지독한 향이었다. 아무리 릭이 코가 좋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알파도 아닌 베타를 이정도로 자극하는 향이라니. 이따금 약을 먹을 시기가 오면 달달한 향을 두르고 다니곤 하였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코를 적당히 즐겁게 할 정도였지 본능을 자극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조차도 릭 자신이 코가 좋은 사람이기에 알 수 있던 향이다. 보통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누군가 문을 조금이라도 열어본다면 순식간에 풍기는 이 향취에 화들짝 놀라겠지. 벨져와 알게된 지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이정도로 끔찍한 단내는 처음이다.
오메가의 체향이 이정도던가. 정도가 심한 오메가는 대개 처신에 신중을 기하기에 이렇게 ‘무르익은’ 오메가를 근거리에서 접할 일은 많지 않다. 심한 부류는 베타마저 유혹한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릭은 향을 조금이라도 덜 맡기 위해 얕은 숨을 반복하며 등뒤로 문을 닫는다. 환기를 위해 문을 열고싶은 게 본심이었으나 지금 이 향이 밖으로 새어나가 좋을 게 없다. 혹시나 누군가 2층으로 올라오지는 않겠지. 그런 걱정을 하며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을 끝까지 밀어넣었다. 벨져는 침대에 어깨 위를 놓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있다. 어깨가 크게 흔들린다. 하얀 손이 하얀 시트를 세게 쥐어잡고있었다. 하얀 손등위로 선 핏줄이 시퍼렇다. 베타인 릭은 모를 괴로움과 싸우는 이 청년을 보는 게 벌써 몇 번째던가. 청년이 고귀한 벨져 홀든이지 못하고 그저 저 바닥의 오메가가 되는 순간.
인간의 성별이 여성과 남성으로 갈리고, 남성은 또다시 세 종류로 나뉜다.
알파, 베타, 오메가. 제2의 성별이라고도 불리우는 세 가지 형질은 비록 외견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하나 그 특성을 생각하면 남성, 여성으로 나뉘는 1차적 성별보다도 악독하다.
평상시라면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성질이다. 딱히 특성이 없는 것이 특성인 베타나 ‘먹이사슬’에서 가장 우위를 차지하는 알파에게는 크게 상관이 없는 형질일 수도 있다. 아니, 오히려 특정계층을 자연이 부여한 본능으로 지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알파에게는 축복일까. 문제는 오메가였다.
다만 어떤 주기가 올때, 오메가는 자신의 형질을 만천하에 드러내게 되어있다. 히트 사이클이라고도 불리우는 번식기가 오면 몸이 달아오르고 성감이 증가하며 유혹이라도 하듯 달콤한 향을 풍기게 된다. 개인마다 그 주기가 다르다는 점이나 목적은 여성의 생리, 배란과도 비슷했으나 훨씬 강압적이고 흉폭하다. 알파는 이 시기의 오메가를 알아채고 욕정한다. 오메가는 알파를 거절하지 못한다. 제 목을 조르고 찍어누르려하는 포식자에게 다리를 벌리려 하는 것이 본능이었다.
의학의 발전에 따라 갖은 약물로 제 형질의 발현을 억누를 수는 있다. 그러나 결국 제 몸 자체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기에 그것이 만능은 아니었다. 어떤 사고로 약을 제때 섭취하지 못할 수도 있고 약이 듣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주기를 제어하지 못했을 때 먹기좋은 먹이를 물지 않을 알파는 없다. 이는 분명 강간에 가까운 형태였으나 누구나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코웃음칠 뿐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사람의 능력이 이 세 가지 성질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오메가는 알파나 베타에 비해 하등한 존재이다. 자연이 그리 결정했으며 사람은 본능으로 그것을 느꼈다. 아무리 현명하고 신체적으로 우월한 오메가라 할지언정 알파의 앞에 서는 순간 얼굴을 붉히며 다리사이를 적시는데 어찌 그리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령 이성이 본능보다 우월하다 생각되는 시대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본능에 새겨진 먹이사슬은 여전히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이 정당하다고.
알파도 오메가도 베타에 비해 수가 많은 존재는 아니다. 숫적으로는 비슷한 존재임에도 알파는 자신이 알파라는 사실을 사방에 과시하며 살아가는데에 비해 오메가들은 제 형질을 사실을 필사적으로 감추거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뒷골목에서 제 몸을 열며 살아간다. 그러다보니 알파나 베타는 물론 여성들 조차 오메가를 하대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리나 벌리는 창부들, 더러운 구멍으로 새끼를 낳는 가축. 알파나 베타에게는 인간 이하의 취급이오, 그 어떤 여성도 제 남편이 오메가이길 바라지 않았다.
벨져 홀든이 오메가라는 사실은 비밀에 부쳐져있다. 아니, 설령 누군가 그 비밀을 까발린다해도 눈앞의 청년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누가 믿을 사람은 몇 없으리라. 오메가가 태어나면 몰래 버리거나 소리소문없이 죽인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알파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귀족출신. 오만하고 당당한 태도. 전신으로 흐르는 고결함과 품위. 어디를 보아도 알파로밖에 보이지않는 벨져 홀든이 알파앞에 벌벌 떨며 번식기가 오면 제 구멍을 적시는 오메가라고, 그 누가 생각하겠는가?
귀족들은 아이가 오메가라면 죽인다고 하던데.
릭이 벨져에게 그리 물었던 적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대는 어떻게 살아남았소? 죽지는 않았지만 죽은 거나 다름없이 살아남았지.
벨져 홀든이라는 존재 자체가 가문 내에서 쉬쉬되고있다고 했던가. 릭은 오스트리아 사람은 커녕 유럽인도 아니오, 귀족또한 아니기에 그 사회를 알 수 없었으나 벨져 본인이 그리 말했다. 홀든의 둘째를 알 사람은 모두 알고 있지만 공적인 장소에 잘 내보내지는 않았다고. 거기에 덧붙여 그냥 살려둔것은 아니라는 말까지. 그 뒤는 함구하였으나 제 아들이니만큼 자비를 베풀어 살려두었나, 그래도 알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오메가라는 사실이 수치스러웠겠거니. 릭은 생각했다.
벨져의 등을 쓸어준다. 벨져는 릭이 알지 못하는 괴로움에 허덕이며 숨을 몰아쉴 뿐이다. 하얀 목이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저걸 핥으면 단 맛이 날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주변은 이성을 흐리게하는 향이 진동을 한다. 무르익은 오메가를 앞에 둔 알파의 심정이라는게 평생 모를 것도 아니군. 웃을 수 없는 농담이 머리를 스쳤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거칠던 호흡이 조금은 안정되었나 싶을 무렵, 릭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주기’가 왔소?"
그제야 벨져는 시선을 릭에게 두었다. 얼굴을 살짝 돌린 정도였다. 날카로워야 할 두 눈이 정욕에 젖어 다 풀린 채 물기를 머금고 있다. 벨져 홀든은 바라지 않을 것을 그 육신은 바라고있음이 분명하다. 릭은 애써 제 눈에서 불이 붙으려던 정욕을 지운다. 어차피 자신의 태생이 베타인 한 저 열기는 가라앉힐 수 없다.
벨져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려 등을 침대로 댄다. 주기 탓인지 입술이 더욱 빨갛게 보였다. 붉은 입술 사이로 뜨거운 한숨이 터져나왔다. 이마에 달라붙는 하얀 머리카락을 옆으로 걷어내어준다. 벨져가 눈을 찌푸리며 심호흡한다. 푸른 눈이 감긴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꾹 다문다. 입술을 한번 달싹이고, 소리를 낸다.
"약은 먹었소?"
"먹었다. …곧 나아지겠지."
릭은 흘끔 시선을 올린다. 평소 들고다니던 작은 약통이 침대위로 뒹굴었다. 릭은 눈을 감은 벨져 몰래 그 약통을 집어 털어본다. 한 알, 두 알…다섯 알. 바로 전날 벨져가 손에 두고 만지작거렸을 때는 한참 더 있던 것 같았는데. 약을 꺼내 세는 모습까지 보았으니 잘못봤을 리도 없고.
벨져 홀든의 성격을 생각해보건데 중요한 약을 흘리고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사라진 약은 전부 벨져의 뱃속에 있겠지. 거진 즉효성 약이라고 들었는데 여기까지 털어넣고도 이렇게 괴로워 한다는 건――.
약이 듣지 않는 모양이군.
릭은 조용히 병을 닫는다. 그렇게 생각하니 맡아본 적 없는 강렬한 향도 이해가 된다. 벨져 홀든이라는 자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자신의 주기정도는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었을테니. 사실상 릭이 지금껏 보아온 주기는 맛보기에 지나지 않았던 거겠지. 오메가들의 주기는 어느정도라 했던가. 아무래도 본인들의 가장 무방비하고 위험한 시기인만큼 외부에 알리지 않으려 하니 알려진 것이 적다. 어쨌거나 도저히 아침까지 벨져의 상태가 좋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아침이 아니라 저녁도 지금은 장담할 수 없지 않을까. 평범한 여행도 아니고 위험을 수반하는 임무이니만큼 이대로 일을 이행하는 건 불가능하리라.
"이래서야 내일 출발하는 건 무리겠군."
릭의 혼잣말에 벨져가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킨다. 벨져. 제지하려는 릭의 손을 검은 장갑이 뿌리쳤다. 붉은 입술이 다물렸다 열린다.
"아니, 출발한다."
침대 위로 젖혀져있던 고개를 들어올리는, 일련의 크지 않은 동작만으로도 잠시 잠잠해졌나 싶던 향이 확 강해진다. 본능을 자극하는 감각에 순간 몸이 굳는다. 저도모르게 주춤하는 릭의 모습에 벨져는 눈을 약간 찌푸렸다. 미, 미안하오. 파란 눈이 잠시 시선을 빗겨놓았다가 바닥을 훑는다. 후들거리는 손이 침대를 짚고 몸을 그 위로 올렸다. 위태로운 동작에 릭이 벨져를 부축하려했으나 떨리는 손이 그를 거절했다.
"벨져."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릭."
조용하면서도 날선 목소리에 닿으려던 손끝을 뒤로 물린다. 입을 다문다. 확실히 그의 과거를 잘 알지 못하는 자신이 간섭할 영역은 아닌것도 같다. 하물며 베타인 릭이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는가. 저 달아오른 몸을 어찌 할 수 있는건 알파뿐이다. 릭은 벨져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벨져는 침대에 걸터앉아 손을 맞잡고 숨을 고른다. 잔뜩 열에 젖은 호흡이 터질 때마다 방을 메우는 향은 더욱 진득해졌다.
"괜찮겠소?"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도착했어야 하는데…또 늦는 모양이군."
작게 혀를 차는 소리. 젖은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질 것 처럼 흔들렸다.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린다. 도와줄 사람이라. 벨져가 그의 기사단에게 이런 상황을 보일 만큼의 신뢰를 주고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릭은 잠시 생각하다가 와야 할 사람은 그의 동생 이글 홀든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지금까지도 벨져의 부름을 받고 몇 번 얼굴을 보였으니 정확하겠지.
오늘 밤은 여기 있어야겠군. 릭이 그리 생각하며 벨져 옆으로 걸터앉으려는데, 벨져의 목소리가 릭을 뿌리친다.
"이제 방으로 돌아가도 좋다."
그 말에 릭은 가만히 벨져와 시선을 마주했다가 잠시 눈을 피한다. 이런 모습을 별로 보이고 싶지는 않다는 뜻인가. 아니면――그럴리는 없지만, 두려운 건가. 벨져가 지금 자신이 약해져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텐데. 릭의 눈에는 그저 오기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그 사실을 입에 담는다고해서 벨져의 결정이 바뀌지 않을 것도 알고있다.
"그대만 괜찮다면 여기 있고싶소."
"아니, 이제 곧 약효가 나타날 거다. 네 방으로 돌아가."
말에는 가시가 돋아있다. 날선 어조가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젖은 눈이 흔들린다. 릭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대의 말에 따르도록 하지."
릭은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벨져는 침대 위로 몸을 누이고 눈을 감는다.
이틀 전. 어떤 정보를 입수하고 바로 이 마을에 잠입했다. 안타리우스의 연구소가 있다는 정보. 조사서에는 곧 철수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내용도 있었기에 서둘러야 했다. 제대로 절차를 밟아 인원을 꾸릴 시간은 없었다. 그렇기에 벨져는 누구에게 크게 알리지 않고 공간능력자 릭 톰슨 한 명만을 데리고 조사에 나섰다. 마을에서 연관된 듯한 사람을 찾아 뒤를 밟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조사여야 했다. 아직 며칠 남았다고 예상되었던 주기가 이리도 빨리 닥쳤다는 사실만 없었더라면.
이변을 깨달은 건 아침이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려는데 불현듯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컵 하나 제대로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그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랜 세월의 경험으로 알고있었기에 벨져는 자신이 알고있는 단 하나의 해결책을 서둘러 실행했다.
약은 먹을 만큼 먹었다. 몇 알이나 입에 넣었던가. 네 알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통에 약이 얼마 남지 않은 걸 확인하고서야 손을 멈췄다.
약효가 미미하다는 건 저번 주기때 이미 어느정도 눈치를 챘다.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관계했던 게 두 달 전이던가. 상당히 강한 억제제를 먹고는 있으나 슬슬 약만으로는 효과가 없을 시기가 되긴 했다. 그렇기에 이글을 불렀건만. 막내는 언제나 지각이다. 그렇게 당부했는데도 또 늦다니. 아니 증세가 이렇게 심해서야 막내로 가라앉힐 수 있을 지 의문이지만――.
어떤 이유로. 벨져는 일반적인 오메가와는 약간 다른 특성을 가지고있다. 그 특성 덕에 어지간한 알파는 두려움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지만, 동시에 그 어지간한 알파로는 발정이 가라앉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었다.
약을 씹으며 억누르다가 한계가 오면 상대를 찾고. 이런 생활을 얼마나 계속했던가. 집을 나와서부터였으니. 그리 떠올리고서야 벌써 5년이 흘렀다는 걸 깨닫는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벨져는 열이 오르는 눈을 손등으로 가리며 숨을 내뱉었다. 반 십년이니 오래 버틴 것도 같다. 더 버틸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하필 이럴 때 한계가 오다니.
어쩔 수 없는 태생적 한계에 진저리가 난다. 강제로 몸을 뜯어고쳐졌던 그날이 떠오른다.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누군가에게 종속된다는 건 분노보다 공포가 앞서는 일이었다. 의식은 멀쩡한 채로 몸이 조금씩 변해간다. 도망칠 수 없게 사지를 결박당한 상태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수면으로 떨어지는 물소리. 머리가 아프다.
째깍째깍. 조용한 방. 시계소리가 유난히 귓가에 울린다.
싸구려 침대에 몸을 누인 채 눈을 감는다. 체력을 생각하면 잠이 드는 편이 나을 것이나 경계를 늦추지 못하는 몸은 그저 정신을 곤두세울 뿐이다. 수면이라 하기도 힘든 얕은 물에 몸을 담갔다가 눈을 뜬다.
큰 소리. 폭발음은 아니다. 무언가가 문에 부딪힌 듯한. 아마도 옆 건물이거나, 이 여관의 현관이거나.
새벽 세 시. 새카만 어둠뿐인 시간이다. 서둘러 몸을 일으킨다. 갑작스런 동작에 현기증이 날까 했지만 다행히도 멀쩡했다. 뒤늦게나마 약이 조금 돌았는지 몸은 한결 가볍다. 옆에 기대어두었던 칼을 쥔다. 바깥으로 느껴지는 인기척이 하나, 둘, 셋, 넷…. 창밖으로 슬쩍 내려다 본 아래로 또 둘.
‘…포위당했나?’
혀를 찬다. 상태만 좋았더라면 좀 더 일찍 알아챌 수도 있었는데 여기까지 기척이 가까워진 지금에야 알아채다니. 생각보다 훨씬 불완전한 자신의 상태를 직시하고 벨져는 검을 다시 잡는다.
문 밖으로 하나. 재빨리 문을 열어 모습을 확인하지도 않고 단칼에 베어넘겼다. 피가 튄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거대한 몸을 재빨리 지탱해 소리가 나지 않게 바닥으로 눕혔다. 지금 큰 소리가 나면 누군가 달려올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바닥에 사체를 눕히고야 벨져는 그 모습을 확인한다. 멀쩡한 인간의 형태조차 갖추지 못한 이상한 괴물. 살점이 이리저리 부푼 모습이 흉측했다. 살갗이나 부분부분 보이는 인간의 형상으로야 이 괴물이 인간임을 확신한다. 인체실험을 자행하고 있다더니 사실이었군. 벨져는 붉은 선혈이 뚝뚝 흐르는 칼날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눈을 찌푸렸다.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아래층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난다. 느껴지는 인기척은 아직 다수. 창 밖에도 무언가 있었으니 적은 아직 한참 남아있음이 분명하다.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는 편이 현명하리라.
릭이 곁에 있다면 훨씬 수월했을 것을. 쯧. 작게 혀를 찼으나 그를 밖으로 물린 건 다른 이도 아닌 벨져 자신이었다. 그의 도움이 필요한게 확실하건만 순간의 굴욕에 판단을 흐리고야 말았다. 이 시기면 모든 능력이 널을 뛰는 탓인지 이성이 흐려진다. 어쩔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 또한 인정해야할 것이었으나 그 탓에 위기에 몰렸으니 약간의 후회는 별 수 없다.
잘 교육받은 몸은 이런 때조차 익숙한 동작으로 부드럽게 노크를 한다. 대답은 없다. 두 번은 없이 그대로 문을 열어젖혔다.
문을 열자마자 좌우를 살펴보았으나 있어야 할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설마 외출한 사이에 기습당했나. 이 상황에서 릭마저 없다는 건 치명적이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데, 침대 그림자에서 사람이 불쑥 튀어나왔다. 릭 톰슨. 검을 쥔 손에서 약간 힘이 풀린다.
"릭, 여기서 빠져나가…."
"뒤를 조심하시오! 벨져!"
동시에 벨져는 뒤에서 자신을 덮쳐온 인물과 바닥에 뒹군다. 뒷목을 후려쳐진 탓에 순간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눈을 찌푸려 억지로 시야를 붙든다. 검으로 쳐올리려는 손을 두꺼운 팔이 붙잡아 패대기쳤다. 무거운 쇳소리가 바닥을 울린다. 커다란 손이 목을 한손에 쥐었다. 칼을 주울 새도 없이 목을 졸린다. 릭이 다급한 목소리로 벨져를 불렀다. 그가 어쩔 새도 없이 릭 또한 바닥으로 쓰러졌다.
커다란 손이 다시끔 힘을주어 얇은 목을 짓누른다. 턱 세게 누르는 힘에 숨이 막혔다. 강화된 근육으로 흉측한 손목을 떼어내려해도 적은 꿈쩍도 않는다. 눈앞이 흐려져간다. 얼굴의 형태가 변화한다. 누구, 누구지? 벨져는 이를 악물고 그 눈을 노려본다. ――형? 아니, 아니야. 아니다. 다이무스가 아니다. 벨져는 눈을 찌푸리며 그 얼굴을 직시한다. 그래야만 했다. 형과 닮은. 아니 형이 저 사람을 닮았다고 해야하나. 그런 사람. 아버지.
목을 한 손에 붙잡는 손이 몸을 들어올린다. 숨이 턱 막히고 발끝이 들렸다. 등 뒤로 차가운 물체가 닿는다. 둥그렇게 척추를 누르는 이 물체가 무엇인지 벨져는 잘 알고있다. 몸이 뒤로 기운다. 머리 끝부터 잠기는 차가운 감촉.
말을 마친 릭은 만족스레 입을 닫았다. 릭의 말에 벨져의 두 눈이 가늘게 찌푸려진다. 담아서 묵혀두기만 했던 말은 그저 입밖으로 내뱉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해방감이 말을 못할 정도였다. 소파에 앉은 벨져와 그 앞에 무릎을 내린 릭. 마치 무언가를 서약하는 장면 같기도 하다. 아직 한참 작은 두 손을 감싼다. 2년을 기다렸다. 무더운 햇빛이 내리쬐던 여름날로부터 2년. 꼬박 2년을 그저 바라만 보며 인내했다. 좋은 친구로 지냈다고 생각한다. 까마득하게 아래인 눈높이를 항상 고개를 숙여 맞추었다. 그 높이로 느껴지던 7년이라는 차이가 어찌나 크던지. 이미 성장을 마친 상태에서 만났던 옛날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가슴언저리에 닿기나 할까 싶던 작은 몸.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와는 같은듯 다르다. 이래선 아직 말을 꺼낼 수도 없겠군. 그리 생각하며 릭은 차오르는 감정을 잠시 접어 넣어두었다. 2년이라고는 해도 재회는 여름이었기에 365일을 두 번 빈틈없이 꽉 채운 건 아니다. 눈 앞에 있는 벨져 홀든은 이제 올해로 열네 살. 고작 며칠 전에 중학교에 들어갔던가. 그런 이른 봄이었다. 형이 성장을 고려한답시고 제멋대로 몇 치수 크게 샀다고 했었지. 헐렁한 교복을 몸에 걸친 모습이 아직 어색하다. 그 흘러내린 소매를 걷고 손등에 제 손을 포갰다. 아직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이 기분 좋다. 아이다운 피부를 재차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고개를 든다. 재회를 이루었던 여름날 릭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열 아홉의 소년이었다.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나 이제 스물 한 살이 된 릭은 벨져 홀든에게 고한다. 태어나기 전부터 간직해왔던 감정을. 나를 기억하고 있소? 물었던 질문에 벨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이내 저었다. 너를 기억하고 있다 릭, 하지만 불완전하군. 벨져의 말은 릭에게 그다지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 아예 잊은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릭은 그리 생각하며 손을 내민다. 다시 만나서 반갑소 벨져. 미소에 거짓은 없었다. 예전과는 확실히 다르다. 말투나 식성에 큰 변화는 없다 해도 한참 어린 외견이나, 눈높이같은. 어딘가 동행하게 될 때면 릭이 두 걸음 걸릴 거리를 벨져는 세 번을 걸었다. 항상 릭이 벨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걸 생각하면 정말 큰 차이였다. 이 작은 아이가 언젠가 릭보다 한참 앞을 걸으며 한숨을 내뱉던 청년이라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사랑스럽다고 릭은 생각한다. 다만 일반적으로 작은 동물이나 아이를 볼 때 느낄-- 대개의 사람이 저 나잇또래를 대상으로 느껴야한다고 여길, 그런 보호욕구와는 거리가 멀다. 예전에 그러했듯. 그 애정은 달콤하고 부드럽기보다는 진득하고 끈질기다. 정복욕과 독점욕이 얼기설기 얽힌 응어리에 가까웠다. 서른 셋의 릭 톰슨이 스물 여섯의 벨져 홀든에게 품었던 욕망은 예전과는 한참 달라진 그의 외견을 보고도 사그러들 줄을 몰랐다. 릭은 외견 그대로의 벨져를 보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기다리기로 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몇 십 년을 묵힌 감정은 지금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격렬했지만 상대의 육체는 이제 고작 열두 해를 자랐을 뿐이었다. 기억또한 불완전하다. 아무리 이 아이가 벨져 홀든이라 한들, 그 생각과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한들, 아직은 준비가 부족했다. 거기에 덧대어 당시의 릭은 아직 미성년이긴 하였으나 아직 12살에 불과한 벨져를 연인이라 말하고 다니기엔 세간의 눈이 가만 둘리가 없지 않은가. 이미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으니 더 기다리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참던 릭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기까지의 기간. 그 시간이 2년이다. 연초, 눈발이 흩날리던 겨울날 2년 전보다 머리 한 통이 자란 벨져가 문득 과거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것을 신호라고 여겼다. 그리고 초봄의 싸늘한 날에 벨져를 집으로 들였다. 벌써 셀 수도 없을만큼, 아무런 말 없이 데려가도 벨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 벨져가 릭의 집에 초대를 받아왔던 시점이었다. 그런만큼 릭의 사적인 공간을 두 사람이 공유하는 건 이미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언제나 그러했듯 벨져는 코트를 벗고 거실에 있는 작은 소파에서 릭을 기다린다. 벨져에게 적당히 마실것을 내오는 것 까지는 언제나와 같았다. 다만 두명이 앉기에 딱 적당한 소파, 릭이 그 옆자리가 아닌 앞에 무릎을 내렸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양손에 든 두개의 컵은 잠시 탁자 위로 밀어둔다. 잔을 받아들려했던 작은 손이 허공에 남겨진다. 눈을 살짝 찌푸리는 벨져의 손을 감쌌다. 그렇게 둔한 사람은 아니기에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으리라. 릭의 손에 쥐어진 손이 움찔거린다. 벨져. 부드럽게 깔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 듯, 벨져는 주어지는 시선을 받아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릭은 긴장에 마른 입술을 떼었다. 짧고 명료한 고백이었다. 받아 줄지 아닐지, 그런 예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더이상 주체할 수 없게 된 감정을 내뱉었다. 만족스러웠다. 그 짧은 말로 끝날 감정이 아니었으나 이미 제 감정은 세상의 어떤 언어로도 표현이 불가능했다. 숨을 고른다. 감싼 손을 다시 매만진다. 그리고 묘한 기시감. 릭은 생각한다. 가만 보자, 비슷한 일이 있었던가? 어린 벨져의 모습에 스물 여섯의 그 모습이 겹쳐진다. 희뿌연 기억을 완전히 떠올리기 전에 벨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진심인가?" 역시나 못 믿겠다는 눈동자. 그야 믿기 힘들것이리라. 그나마 벨져는 순수하게 14년의 인생만을 산 소년이 아니기에 덜 이상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아니 그래서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저 어느정도 친근한 사이이자 동료-- 였던 남자가 뜬금없는 사랑고백이라니. 하지만 그래 그래도 분명 고백은 처음이 아닌데. 기억은 제대로 나지 않지만서도. "기억하지 못하는군, 벨져." 저도모르게 말이 먼저 나왔다. 쓸쓸하게 들리는 릭의 말에 벨져가 시선을 내린다. 작은 입술을 굳게 다문다. 그리고 고민하나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그런 관계였나? 아직 그런 기억은 없다만. 내가 잊은 거라면 사죄해야겠군." "아니, 아니야. 그런 관계는 아니었지. 내 말은 잊어주시오. 아니, 내 말은 내가 방금 했던 말만 잊어달라는 뜻이야. 그대도 잘 알고있겠지만." 뭔가 대화가 꼬인다.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이미 입에 담아버린 말을 어쩔 수는 없다. 릭, 진정하게. 벨져가 한숨을 쉰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머리를 긁적이며 멋적게 입을 연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저 곁에 있어주기만 해도 좋소. 그런 뜻이야." 고개를 숙인다. 실수했군.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그만 허둥지둥 해버리고 말았다. 벨져 입장에서는 꽤 우스운 광경이었겠지. 그리 생각하는데, 눈앞으로 새카만 어둠이 흩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전인가? 릭은 눈을 깜빡인다. 바닥이 삐걱이는 소리. 창밖으로 후두두 빗소리가 난다. 새빨간 커튼이 펄럭였다. 열린 창으로 비가 들이친다. "정말 그걸로 만족하나?" 귀에 닿는 한숨. 릭은 깜짝 놀라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다. 빛이 눈앞을 하얗게 물들였다. 뒤이어 굉음.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린다. 번쩍이는 빛이 밝히는 얼굴은 분명 릭이 기억하는 스물여섯의 벨져 홀든이다. 열네 살의 그는 온데간데 없이 먼 시간을 거슬러올라간 그가 눈앞에 있다. 여전히 답답하군. 벨져가 고개를 젓는다. 기뻐해야하나? 릭은 잠시 생각한다. 하지만 고백에 있어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다. 스물여섯의 벨져 홀든은 분명 고개를 저을 것이기에. 그리고 벨져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쉰다. 릭은 그 속눈썹이 다시끔 올라가는 광경을 지켜보며 숨을 들이켰다. 검은 장갑에 쌓인 손이 릭의 손을 쳐낸다. 의자에 몸을 묻고 다리를 들어 꼬았다. 이제 그가 고개를 저을 타이밍이다. 붉은 입술이 열린다. 릭은 그 위의 푸른 눈을 응시한다. "--사사로운 감정에 허비할 시간은 없다." 냉담한 선고가 릭의 목을 친다. 차가운 시선이 몸을 꿰뚫고 먼 곳을 바라본다. 그 눈에 릭의 모습은 비치지 않는다. 매몰찬 반응에도 릭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 이래야 벨져 홀든이 아닌가. 모든 기억이 머리를 스친다. 마치 번개처럼, 순간을 틈타 뇌리에 새겨졌다. 릭은 과거를 거슬러 그 때 그 자리로 돌아간다. 어딘가의 전장. 검을 집어넣는 벨져를 불러세웠다. 싸늘한 두 눈에 릭이 담긴다. 벨져. 릭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고백. 뜬금없지만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벨져 홀든을 향한 릭 톰슨의 감정은 최고조에 달해있었다. 도저히 마음을 전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그 고백을 벨져는 지금과 같은 말로 거절했었지. 사사로운 감정에 허비할 시간은 없다. 소파에서 일어선 벨져가 검을 빼어든다. 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졌다. 릭 톰슨, 어디 정신을 두고 다니는 거지, 정신 차려라. 알고있소 벨져. "전장으로 향할 시간이다." 게이트를 열어. 일어선 벨져가 매끄러운 동작으로 허리를 숙인다. 망토가 위로 펄럭였다. 머리카락이 가늘게 아래로 떨어진다. 무릎꿇은 릭에게 가까워오는 얼굴. 차가운 손가락이 턱을 쓸었다. 릭은 그와 엇갈리듯 손을 위로 뻗어 머뭇머뭇 부드러운 볼에 손끝을 댄다. 시린 옥색 눈동자는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얕아야 할 바다로 빨려드는 감각. 길어진 싸움에 자라버린 손톱이 하얀 볼을 긁었다. 릭의 손톱을 따라 붉은 자죽이 남는다. 그대가 가야할 곳이라면 어디든. 그 말에 벨져가 미소짓는다. 귓가로 울리는 굉음. 소리가 귀를 찢는다. 다시끔 천둥. 깜빡깜빡 눈을 떴다. 빗소리가 귀를 메우고있다. 후덥지근한 여름의 습기가 피부에 들러붙는다. 침대 위였다. 어슴프레한 새벽의 어둠에 잠긴 하얀 천장으로 가만히 시선을 두었다. 두 번, 세 번, 넷, 다섯, 여섯 번. 그리고 몇 번을 더 깜빡이고서야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중략)
부르는 소리. 릭은 눈을 뜬다. 결국 깜빡 잠이 들었던가. 열차는 텅 비어있다. 역을 지나친 걸지도 모른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귀를 메운다. 다음 역은 어딘가라고 스피커가 웅얼거린다. 그 발음이 뿌옇게 뭉개진 채 귓가에서 흐트러진다. 눈앞에 선 새카만 그림자.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조금씩 들었다. 눈이 닿는 곳에서부터 그림자는 형체를 잡아간다. 검은 바지에 쌓인 얇은 다리, 허리춤에 찼던 긴 칼과 짧은 칼 두 자루 허리, 손, 팔, 어깨, 목, 얼굴. 전신이 선명하게,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하얀 조명이 그 뒤에서 쏟아져들어와 얼굴을 새카맣게 태웠다. 전등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깜빡인다. 빨간 물을 뒤집어 쓴 하얀 머리가 빛을 반사한다. 핏기가 가신 창백한 피부에 새빨간 입술이 시선을 끌었다. 누군가가 소리친다. 귓가로 쏟아지는 폭언은 머릿속까지 닿지 않는다. 누구나가 고개를 저으며 오만한 홀든이라 했다. 다만 릭은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오만이란 그러하지 않은 자가 타인을 업신여길때에 비로소 쓸 수 있는 단어다. 벨져 홀든은 그 누구보다 위에 있으며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자였다. 그런 자의 판단을 오만이라 할 수 있을까? 릭 톰슨에게 있어 벨져 홀든은 절대 그 자체였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다. 그러니까 그를 한 단어로 말하자면 마치 신과도 같은. 다만 릭 톰슨은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시계가 잔뜩 감긴 팔을 뻗는다. 손이 역광으로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볼에 닿았다. 치적한 혈액이 손끝에 늘어붙는다. 모두 그대가 죽었다 했지만 그럴리 없지. 새빨간 피를 흘리던 그에게서 억지로 떼어내졌을 때에도 그가 죽지 않았음을 릭 톰슨만은 알고있었다. 벨져 홀든은 죽지 않을 자였다. 죽지 않는다고 릭은 알고 있었다. 벨져 홀든을 이루는 수많은 단어중에 죽음이란 없을 것이 명백하므로. 모든 이가 부정한다 하더라도 릭은 알고 있다. 릭은 그렇게 알고 있다. 릭만이 알고있다. 릭의 벨져 홀든은 그러했다. "돌아왔군, 벨져." 릭은 닿지 않을 혼잣말을 입에 담는다. 시선의 끝에 선 벨져는 항상 보다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도 대동하지 않은 채 넓은 황야에 홀로 있었다. 그러다가 이따금 릭이 곁에 서는 것을 허락했다. 그에게는 고독도 외로움도 없었다. 홀로 선 그 자체가 완벽한 사람이었다. 릭은 그 곁에 제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런 릭을 바라보는 벨져의 표정은 조금 달랐지만서도. 벨져는 항상 그랬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릭을 바라보곤 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과거의 기억으로 추정하는 것이기에 확신은 할 수 없다. 처음에는 그저 좀 더 차가운, 무감정한, 그가 그보다 못한 수많은 자들을 바라보는 그런 눈으로 릭을 바라보았다고 릭은 기억한다. 그랬던게 어느새인가 미소같은 보다 풍부한 다른 감정을 담다가, 또 시간이 흐르니 먹먹한 얼굴로 변했다. 릭이 벨져 홀든이라는 자를 마음에 두고있다고 처음 자각했던 게 언제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처음만난 순간이었을 수도 있고, 네 시간의 여행이 끝났던 시점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명확한 순간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어느 순간 릭은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고백은 벨져가 제법 릭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했던 시점에 이루어졌다. 지나가는 말로 마음을 전했다. 뜬금없기는 했으나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그대를 사랑한다 입에 담은 릭에게 벨져는 담담하게 고했다. 사사로운 감정에 허비할 시간은 없다. 분명한 거절이었다. 릭은 분명 벨져를 원했다. 독점하고 싶었고 소유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릭은 벨져의 거절에 낙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거절로 인해 릭의 벨져 홀든은 더욱 완벽해지지 않았던가. 벨져 홀든이라면 그래야만 했다. 릭의 벨져는 그러했다. 릭 톰슨은 그 결과를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그가 가진 벨져 홀든을 향한 욕망과는 별개로. 누구보다 고귀한 존재다. 누구도 더럽힐 수 없고 누구에게도 더럽혀지지 않을 사람이다. 그리 되어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몇 번을 망상했던가. 두 칼을 쥐는 저 손에 제 성기를 쥐게 하고 패자를 짓밟는 몸을 제 아래에 두는 순간을. 모순이라면 모순이다. 다만 릭은 두가지 욕망이 모순됨을 알지 못한다. 그저 순간순간 바뀌는 제 욕망에 진심을 둘 뿐이었다. 알고 있소 벨져? 내가 그대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아니 아마 알고 있었겠지, 그대라면. 볼을 매만지던 손은 명백한 의사를 가지고 목으로 내려간다. 뜨거운 손끝에 닿는 차가운 감촉. 끈적하게 늘어붙는 혈액을 하얀 피부에 펴바른다. 벨져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릭을 내려다 보기만 한다. 그 눈빛은 여전히 어딘가 개운치 않다. 나를 항상 그런 식으로 보는군. 어째서요? 릭은 몇 번인가 그렇게 물었다. 대답은 없다. 몸이 흔들린다. 그 바람에 손이 떨어졌다. 열차가 크게 흔들렸다. 머리가 뒤에 부딪힌다. 충격에 눈이 뜨였다. 사람은 조금 줄어있다. 정면으로 푹 잠들어 옆으로 쓰러진 회사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여학생. 열린 문. 도착을 알리는 스피커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릭은 헐레벌떡 몸을 일으킨다. 아직까지 마르지 않은 신발이 축축하다. 발에 밟히는 질퍽한 느낌. 딛은 바닥으로 물자국이 남는다. 플랫폼의 스피커에서 출발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간신히 내린 릭의 뒤로 열차가 떠난다. 시끄럽게 열차가 멀어지고 빗소리만이 남았다. 릭은 깜짝 놀란 정신을 추스르고 무거운 머리를 한번 턴다. 머리가 울린다. 방금 본-- 그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이나 꿈을 꾼 건지. 지금은 현실인가? 팔을 꼬집어 통증을 확인하고서야 한숨을 돌렸다. 용케 내릴 곳에서 깼군. 술기운이 덜 가신 머리를 쓰다듬으며 숨을 깊게 쉰다. 방금 전 차가운 피부를 만졌던 손을 바라본다. 새빨갛게 젖었던 손은 말끔하기 그지없다. 질척한 피의 감촉이 아직 남아있다. 그렇게 차가운 사람이었건만 피는 지독하게도 뜨거웠다. 새빨간 체액. 누구나가 파란색일거라 흉보던 그 혈액. 저런 놈은 피도 퍼런 색일 거라고 손가락질 당했었지. 아무래도 상관 없다며 개의치 않던 벨져. 술 탓인지 유독 옛날일이 머릿속에 맴돈다. 고개를 젓고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벨져에게 연락을 할까. 그런 생각도 잠시, 금방 그만두기로 한다. 불러서 무슨 말을 하겠나. 피투성이 당신을 보았다고? 위로라도 받고싶은 건가? 아니 그건 아니다. 지금의 벨져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위로는 되지 않는다. 어째서. 어째서냐 하면. 밤 거리는 지독히도 조용하다. 역 앞 편의점에서 우산과 맥주 두 캔을 샀다. 이미 홀딱 젖었지만 비를 더 맞고싶지는 않았다. 우산을 한 손에 들고 비닐봉투를 흔들며 거리를 걷는다. 취기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걸음이 비틀거릴 정도는 아니다. 빗소리가 잡음을 지우고 릭의 공간을 우산 속으로 좁힌다. 열차에서 본 환영이 눈앞으로 아른거렸다. 꿈? 환상? 뭐라고 해야할까. 아마도 태어나서부터 학창시절까지. 릭의 일생동안 수도없이 보았던 벨져 홀든의 잔상이다. 2년 전 다시 그 모습을 보기까지 수백 수천번을 반복해서 보았던. 하지만 요 근래 영 보지 않았던 모습이었는데. 잔상으로 남은 벨져는 눈앞에서 피를 흘리던 스물 여섯의 벨져 홀든이었다. 그보다 깨끗한 모습을 훨씬 오래 보았건만 릭의 앞에 나타나는 그의 그림자는 항상 새빨간 피에 젖어있다. 아무런 말도 않고 피를 뚝뚝 흘리며 릭의 앞에 선 청년. 아직 기억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부터 몇 번이나 본 그림자. 스물 여섯, 서른 셋의 릭 앞에 나타났던 섬광. 둘은 존재하지 않을 절대적인 존재.
(중략)
유독 자신을 바라보던 두 눈이 기억에 남았다. 벨져, 걸음이 너무 빠르군,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벨져는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저 뒤로 쳐진 갈색머리의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네 시간의 짧은 동행 이후 드문드문 길을 함께 하게 된 미국인. 이름을 릭 톰슨이라 했다. 공간 이동 능력자. 누구나가 부러워할만 한 능력을 가지고도 크게 이용할 생각이 없어보이던 괴짜. 지금껏 벨져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는 일선을 긋는, 그러니까 벨져로서는 처음 보는 성향을 가진 남자였다. 지금껏 벨져를 보는 그 누구와도 다른 미소. 항상 벨져를 향하는 그 사람좋은 미소는 벨져에겐 영 익숙해지지 않는 이질적인 표정이다. 지금까지 벨져 홀든을 바라보는 시선은 악의나 질투, 시샘과 같은 지저분한 감정이거나 혹은 관계를 포기했거나 그도 아니면 저를 이용하려하는 속셈이 뻔히 보이는 일그러진 미소였으므로. 릭은 부드럽게 웃으며 벨져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는 친근함도 있었고 종착지를 모를 기대도 있었다. 그 기대가 무엇을 향한 건지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그저 그의 표정이 어떻건간에 벨져의 행동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흘려 넘겼을 뿐이다. 잘 먹고 잘 웃고 잘 침울해하는 남자였다. 벨져의 기준으로는 약간 품위가 모자라기도 했다. 전투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인 탓인지 때로는 한심하게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런 릭에게 벨져는 딱히 칭찬도 위로도 크게 건넬 일이 없었으나 릭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친밀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벨져를 대했다. 모르는 사이에 두 눈이 릭을 쫓기 시작했다. 벨져가 그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자각했을 때였다. 마치 오늘 하늘이 맑다는 듯한 어조로 릭이 말했다. 벨져, 그대를 사랑한다 하면 믿어주겠소?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으나 릭의 말은 마치 식사라도 권하듯 자연스레 귀에 닿았다. 그렇기에 벨져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숨을 두 번 내뱉고 깨달았다. 몇 초 지나, 눈을 깜빡인다. 사랑이라고? 이정도의 놀라움을 익히 겪어보지 못했기에 얼굴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순간 벨져를 지배한 감정은 분명한 놀라움이었다. 네가? 나를? 착각이 아닌가. 나를 바라보던 너의 기대는 그런 게 아니었을텐데. 그저 동경이나 호기심이라고만 생각했다. 사랑이라니.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던 걸까. 벨져는 지독하게 당황했다. 지금까지 벨져에게 사랑을 토로한 자가 없던 건 아니다. 대개는 더러운 육욕을 사랑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하여 벨져를 지배하기를 원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벨져는 항상 단칼에 거절하고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을때면 칼을 뽑곤 했다. 그러면 끝날 일이었다. 은근하게 종종 있던 일이기에 말 자체는 놀라워할 이유가 없다. 놀라지 않았어야 했다. 불쾌해야 했다.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당황스럽게도 놀라고 불쾌하지 않게 생각하고있다는 사실을 전부 자각하고나서야 벨져는 릭의 말을 곱씹는다. 늘상 자연스레 흘러나왔던 거절의 말이 순간 떠오르지 않았다. 벨져는 그조차 자각하지 못한다. 그저 당황할 뿐이었다. 릭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너도 나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던 건가? 아니 릭이 그럴리가 없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 지극히 감정적이고 사사로운 그런 마음을 품고있었단 말일까. 심장이 뛰었다. 사고가 얼어붙는다. 거절해야한다. 머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본능이 외쳤다. 명확한 이유도 없이 그저 거절해야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어째서? 먼저 내려버린 결론에 이유를 찾는다. 지금은 전시가 아니던가. 벨져에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제레온 프리츠의 부탁을 져버릴 수는 없었다. 지금 상황에 사랑같은 쓸데없는 감정에 휘말릴 수는 없었다. 다시끔 움직이기 시작한 머리가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입이 먼저 열렸다. 벨져로서는 드문 일이다. 이유까지 생각해낸 벨져는 이미 거절을 들은 릭과 마주한다. 사사로운 감정에 허비할 시간은 없다. 상처받았나? 저도 모르게 릭의 두 눈을 먼저 살폈다. 그리고 다시 당황한다. 아니, 눈치를 볼 이유는 없다 그 상대가 설령 릭이라 할지라도. 어차피 릭도 거절하리라 알고있었을 터. 어째서 신경을 쓰고있는 건가. 릭, 나는. 그 뒤가 떠오르지 않는 변명이 혀에서 맴돈다. 입술이 달싹였다. 어째서 변명을 하고싶은 건지 벨져는 계속해서 자문한다. 제 감정조차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었단 말인가. 아니 알고있다. 아마도. 저 남자를. 거기까지 생각하고 강제로 생각을 멈췄다. 이 이상은 위험하다. 거절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받아들일 여유는 없다. 다만. 아니, 아니다. 그 때는 그저 그렇게만 생각했던, 몸이 앞선 자신의 거절을 정당화하기위해 붙였던 수많은 이유가 그저 변명임을 벨져는 알고있다. 벨져는 릭이 두려웠다. 깊은 자신의 바닥부터 서서히 잠기게하는 저 부드러운 눈동자가 두려웠다. 벨져는 무엇도 두려워해서는 안될 존재였다. 그렇기에 거절했다. 도망쳤다.
릭 톰슨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믿지 못한다. 조용히 해라. 귓가로 작은 소리가 속삭인다. 입술을 막는 건 앙상한 손가락이다. 어렵게 죽인 발소리조차 크게 울리는 밤의 복도에서 누군가가 릭을 끌어당겼었다. 눈앞으로 육중한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려던 릭의 입을 이 손가락이 막았다. 네가 왜 여기 있지? 그리운 목소리가 묻는다. 믿을 수 없으리만치 말라버린 손가락이 입술에서 떨어졌다. 릭은 천천히 몸을 뒤로 돌린다. 옅은 빛이 가득 찬 방에서 릭의 두 눈이 목전의 하얀 사람을 붙잡는다. 기억 속의 그보다 훨씬 마르고 수척해졌지만 틀림없는 그 사람, 벨져 홀든 이다. 꿈에서마저 원하던 결과였음에도 동공이 수축하고 제 손이 입을 틀어막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설마 환각은 아니겠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인다. 하지만 벨져는 사라지지 않는다. 꿈이 아니란 말인가. 정말로? 너무 그리운 나머지 눈을 뜨고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살을 꼬집어도 본다. 피부를 아리는 통증. 그제야 릭은 자신이 현실에 있음을 인정하기로 한다. 두 번 다시 살아서는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야 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말을 해버리면 사라질까 싶어 벨져의 두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딱딱한 뼈의 감촉. 가늘게 떨리는 입술이 열린다. 무언가에 홀린 듯 흘러나오는 소리를 막을 수가 없다. 그대는 죽었다고 들었는데. 제 목소리가 멀다. 오늘. 이른 아침. 우편물이 도착했다. 작은 상자였다. 발신자 미상. 릭의 주소만이 적혀있다. 이리저리 꼼꼼하게 포장된 외투를 뜯고 그 속에 들은 검은 물체를 꺼내 들었다. 나무로 된 검은 상자다. 딱히 잠금장치가 되어있지는 않은 그 상자를 열었다. 딸깍이는 소리가 들리고, 내용물이 드러난다. 검고 푸른 장갑. 군데군데 짙은 핏자국이 남아있는. 도저히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심장이 뛴다. 장갑 위로 작게 놓인 메모를 집어 들었다.
「B로부터. 친애하는 타키온, 릭 톰슨에게.」
마침표까지 눈이 이동하고, 시간이 멈췄다. 릭, 릭 톰슨. 벌써 들은 지 한참 지난 그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왱왱거리는 이명. 릭, 게이트를, 듣고 있나, 릭 톰슨, 릭 내 말을 들어. 몇 겹이나 겹쳐 들리는 목소리. 가슴팍을 잡는 검은 장갑. 숨이 막힌다. 어서 자신을 저 안으로 보내라던 벨져의 나즈막한 외침. 그 말에 응하지 않았더라면 무언가 바뀌었을까. 모든 것이 끝나고 몇 달이 지난 지금도 릭에게는 벨져의 모든 것이 생생하다. 다 끝났다고만 생각했다. 문은 닫혔다. 안타리우스는 괴멸했고 전쟁은 끝났다. 그리 믿어 의심치 않던 순간이었다. 벨져의 두 형제가 아직까지 남은 마지막 적을 상대하기 위해 무너지는 건물 안에 남아있다는 전보를 들었던 건. 형제들이 아직 저 안에 있다는 말을 들은 벨져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눈을 크게 뜨고 그대로 얼어붙는다. 릭이 황급하게 몸을 잡아 흔들었다. 벨져, 벨져! 두세 번 몸을 흔들고야 벨져는 릭을 눈에 담는다. 숨이 탁 트인 듯 목에서 소리가 난다. 빛이 돌아온 눈동자가 릭을 쏘아보았다. 곧게 응시하는 두 눈이 가늘게 흔들린다. 아니, 흔들린 건 릭의 눈빛이었다. 눈읖 깜빡인다. 입술이 움직인다. 벨져의 목소리가 멀게 들린다. 지금 뭐라 했소. 묻고 싶어도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벨져가 아무리 말해도 말을 듣지 못하고 얼어붙은 릭의 가슴팍을 잡는다.
"릭, 다시 한 번 말하겠다. 게이트를 열어라."
선명한 목소리. 고개를 저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렷한 두 눈에 비치는 제 얼굴이 그저 한심하게만 보였다. 예감이 좋지 않아, 이미 늦었어, 포기하시오, 나는 아직 그대를 잃고 싶지 않단 말이오. 잔혹하면서도 상냥한 말은 끝끝내 전하지 못했다. 벨져의 요청을 거절할 수 있는 릭이 아니었기에. 새카만 어둠이 뭉친다. 그 속으로 몸을 던지는 뒷모습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게이트가 닫힌다. 어둠이 흐트러져 사라졌다. 릭 톰슨은 벨져의 부탁에 따라 제 손으로 그를 사지로 내몰았다. 돌아온 건 두 사람과 하나였다. 저 멀리 서 있던 다이무스 홀든의 뒷모습. 무언가를 품에 들고 있었다. 사람이다. 장갑이 벗겨진 하얀 손이 힘없이 아래로 늘어져 있다. 피로 범벅이 된 하얀 머리카락. 이마는 보이지 않는다. 피가 뚝뚝 흘러 손끝을 타고 땅으로 떨어진다. 변색되지 않은 선혈이 지면을 적셨다. 다이무스의 등에 가려져 그가 안고 있을 첫째 동생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다가가려던 릭을 붙잡은 건 막내인 이글 홀든이었다. 이글 또한 상처투성이였다. 떨리는 시야로 고개를 젓는 이글의 모습. 주저앉은 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벨져는 죽었다. 나를 잊어라. 벨져의 유언이다. 그 뜻을 알고 있겠지 릭 톰슨. 한치의 떨림도 없이 담담하게 고하던 목소리는 벨져와 닮지 않았다. 그의 형은 그와 닮지 않았다고 릭은 항상 생각했다. 다만 그 순간만큼은. 힘없이 주저앉은 릭을 내려다보던 그 눈빛만큼은 그들이 형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벨져. 벌써 지친 건가. 잠시 바위에라도 앉을 세면 혀를 차며 내려다보던 눈동자. 다이무스 홀든은 벨져와 같은 그 눈으로 벨져의 죽음을 전했다. 살아 돌아오라 말할 새도 없었다. 작별인사를 입에 담을 수 있었을 리가 없지만, 미처 붙잡아보지도 못했던 자신에게 아쉬움보다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기회가 분명 있지 않았던가. 아니 기회 정도가 아니었다. 칼을 제 목에 들이민다 하더라도 거기서 게이트를 열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설령 그로 인해 벨져가 소중한 혈육을 둘이나 잃게 된다 하더라도. 그 결과 그가 미쳐버린다 하더라도 상관없지 않았는가. 릭에게 이만한 지옥은 없을 터였다. 그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설령 그 대상이 원한 일이라 해도 벨져를 사지로 내몰았던 것은 틀림없는 릭 톰슨의 능력이었음을. 죽었다 했다. 마지막 인사조차 전할 기회도 없이 그게 마지막이었다. 장례도 가장 밀접한 그의 형제들만이 모여 속전속결로 빠르게 행해졌다고 풍문으로 들었다. 크리스티네 프리츠조차 몰랐다 하던가. 어째서 그리도 은밀하게 이루어졌는지는 모른다. 늘어진 손끝으로 뚝뚝 떨어지던 붉은 피. 그 붉은 색만이 기억에 선명했다. 그 뒤로 내쫓기듯 일상으로 돌아왔다. 능력은 그대로 남아있었으나, 더이상 능력을 쓸 수가 없었다. 가만히 벽 앞에 서서 게이트를 열려 하면 귓가로 울리는 환청. 자신이 이은 공간으로 발을 들이던 뒷모습이 눈앞에서 몇 번이고 재생된다. 도망치듯 뛰어든 꿈에서조차 벨져의 뒷모습을 보았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간다. 몸은 충실하게 생활을 이행한다. 숨도 쉬고 음식도 섭취했다. 일을 하고 잠을 잤다. 기계처럼 정해진 일상을 소화해내면서도 흐름에 풍화되지 못한 감정이 릭을 붙들어 맸다. 모든 것은 아직 그곳에 있건만 릭에게는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그런 때였다. 이른 아침, 새카만 장갑이 릭에게 전해진 것은. 시간이 움직인다. 어떤 이가 이런 장난을 쳤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벨져 홀든의 장갑임이 분명한 그 오른손을 그의 방에 가져다 놓아야겠다고 릭은 마음먹었다. 미처 하지 못한 작별인사의 대신이기도 했으며 앞으로 전진하고자 하는 의사이기도 했다. 내가 언제까지고 꾸물거려봤자 그대가 나를 한심하게 볼 뿐이겠지 벨져. 한 짝뿐인 장갑을 두 손으로 감싸며 중얼거렸다. 밤을 틈타 언젠가 발을 들였던 홀든의 저택으로 누구도 모르게 잠입했다. 몇 달을 쓰지 않았던 능력은 어딘가 어색하기만 하다. 새카맣게 빨려드는 어둠으로 몸을 던지는 게 이리도 기묘한 감각이던가. 게이트를 열어라, 릭. 환청이 들렸다. 귀를 막고 몸을 던진다. 그리고 그저-- 발이 이끄는 대로 거닐다가. 어둠 속 다가오는 등불에 몸을 숨기기도 했다가. 그러던 도중에도 이제는 분명 남지 않았을 그의 잔재가 릭의 감각을 뒤흔들었다. 벨져가 유년시절을 보냈을 저택은 어디를 가도 보이지 않는 그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귓가에 맴도는 부르는 소리. 서늘하던 피부의 감촉. 뒤돌아보던 날카로운 눈매. 진흙탕에 뒹굴어도 깨끗해야 했고 그 어디에 부딪혀도 가루조차 떨어지지 않던 사람. 그림자가 팔을 잡는다. 섬광은 이 세상에 없다고 그의 혈육이 전했다. 무엇을 원해 이곳에 발을 들였던가. 주머니에 구겨 넣은 장갑을 세게 쥐었다. 저 멀리서 등불이 다가온다. 숨으려 했으나 뒷편에서도 똑같이 다가오는 또 다른 불빛에 등이 벽으로 붙었다. 큰일났군. 그러던 찰나 등 뒤에서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하얀 손이 릭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지금으로 이어진다. 눈앞에 나타난 모습이 신기루가 아닐까 싶어 눈을 부빈다. 티 없이 하얀 머리카락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약간 짧다. 몸도 잔뜩 말라 두 개의 무거운 검을 휘두르던 모습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두 눈만큼은 여전히 강한 빛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그가 벨져 홀든이라는 가장 명확한 증거이리라. 벨져는 죽었다. 기억 속 다이무스의 목소리가 울린다. 몇 달이 지난 지금 그 말을 부정하려 고개를 저었다.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앙상한 몸을 품에 안았다. 말랐으면서도 단단하던 예전과는 달리 그저 잔혹하게 말랐을 뿐임에도 어찌 되었건 심장은 뛰고 있다. 여전히 서늘하나 틀림없는 벨져 홀든 본인의 감촉에 안도한다.
"블레이드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군."
소리가 떨린다. 하얀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기억에 남은 감촉보다 약간 푸석한 그 자락이 손에 감긴다.
"무슨 말이냐." "그대는 지금… 살아있잖소."
릭의 중얼거림에 벨져가 웃음을 터트린다. 크지는 않은 소리였으나 릭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가슴을 밀어내는 손짓에 릭이 몸을 끌어안았던 손을 풀어낸다. 저 멀리 침대맡에 놓인 옅은 등불이 어둡게나마 벨져의 얼굴을 비춘다. 입꼬리를 끌어올린 벨져의 미소는 어딘가 일그러져있다.
"내가 살아있다고?"
웃음이 남은 말끝이 작게 떨렸다. 벨져의 말에 릭은 덜컥 겁이 난다. 아래로 늘어진 손을 잡아들어 손가락을 얽었다. 차갑지는 않은 서늘한 피부로 체온이 스며든다.
"그럼 유령이란 말이오? 이렇게 따듯한데?"
벨져는 입을 다문 채 눈을 가늘게 뜬다. 벨져. 대답을 구하는 부름은 절박하다. 대답은 없다. 그 정적을 참지 못하고 릭이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연 순간, 벨져가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격한 기침이 몇 번. 손이 풀어진다. 허리를 숙이고 콜록거리는 벨져에게 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손을 허공에 띄울 뿐이다. 소리가 가라앉고 입술과 손바닥 사이로 붉은 타액이 늘어진다. 벨져는 한참이나 숨을 고르고 휘청거리며 침대로 다가가, 걸터앉았다. 어깨가 위아래로 움직인다.
"고작 반 시간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런 몸을 살아있다고 하나?"
창백한 얼굴. 입가로 흐르는 빨간 피. 거기에 과하다 싶으리만치 마른 몸까지. 릭은 그 앞으로 다가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벨져가 숨을 고르는 모습을 들여다본다. 확실히 살아있는 시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
"그래서,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릭 톰슨. 형이 내가 죽었다 전했다면 더욱이나 여기에 있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아니면, 형이나 이글에게 용건이 있는 건가? 이런 야심한 밤에?"
작은 목소리는 조용히 말해야 하기 때문은 아니리라. 그마저도 벨져답지 않은 유약함이었으나 그래도 음색은 또렷했다. 지끈거리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장갑을 꺼낸다. 릭의 손가락에 잡힌 검은 장갑을 보고 벨져가 눈을 크게 뜬다. 내 장갑이군. 그렇소. 왜 네가 그걸 가지고 있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벨져는 릭의 손에 들린 장갑을 가만히 바라본다. 어째서 자신의 물건이 릭에게 있는지 벨져 본인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벨져가 보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으면서도 혹시나 싶었건만. 역시 누군가 다른 이가 보낸 거겠지. 무슨 의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입술을 깨문다. 하얀 손이 눈앞에 내밀어 진다.
"돌려준다 하니 기꺼이 받도록 하지."
여기에 올려두라 까딱거리는 손가락을 빤히 보고, 릭은 장갑을 등 뒤로 숨겼다. 녹색이 번진 푸른 눈이 가늘어진다. 허공에 놓인 손이 아무것도 받아들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이런 이런, 기껏 보내주고 빼앗는 건 아니지 않나?" "난 준 기억이 없다 릭." "그대가 보냈잖소."
아니라고 알면서도 짓궂게 트집을 잡았다. 대답은 없다. 허공에 머물던 하얀 손이 허벅지 옆, 침대 위로 떨어졌다. 벨져의 두 눈이 릭을 응시한다. 마른 입술은 굳게 다물린 채 열릴 줄을 모른다. 패배한 건 릭이었다. 왼손을 등 뒤에 두고 장갑을 숨긴 채, 오른손을 뻗었다. 땀에 젖은 손이 차가운 볼에 닿는다. 순식간에 체온을 빼앗긴다. 비어버린 자리를 감정이 채운다. 꿈에나 보았던가. 손끝이 떨린다. 타액을 삼키는 목이 소리를 냈다. 입술을 축인다. 벨져. 이름을 불렀지만 이어질 말을 찾지 못했다. 금붕어마냥 입만 뻐끔거렸다. 저도 모르게 움츠린 손톱이 하얀 볼을 긁는다. 릭은 그조차 깨닫지 못한다. 그때였다. 조용히. 벨져가 무언으로 속삭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데. 저도 모르게 그리 말하려한 순간, 벨져의 손바닥이 릭의 입을 틀어막았다. 시선이 문을 향한다. 똑똑. 노크 소리. 릭의 몸이 경직된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조금 더.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손바닥이 입에서 떨어지고, 그 대신 가느다란 손가락이 릭의 입술 앞에 놓였다. 가만히 있어라. 그 중얼거림에 타액을 삼킨다. 그리고 잠잠해졌다가 똑, 똑. 노크가 두번 더. 마지막 노크는 무겁게 떨어졌다.
"…형이다."
끼익거리는 침대의 비명. 벨져가 몸을 일으킨다. 릭도 함께 소리죽여 몸을 일으키고, 옆으로 비켜섰다. 비켜서는 릭을 가만 보더니 손가락을 까딱이고는 바닥까지 드리운 침대 시트를 걷어 올린다. 숨어라. 그 말에 반박할 새도 없이 등을 떠밀려 침대 밑으로 몸을 숨겼다. 두꺼운 시트가 흘러내려 공간을 막는다.
"벨져, 열어라."
몇 겹이나 막혔음에도 명확하게 들리는 음성. 카펫이 벨져의 발에 스쳐 사박거린다. 새카맣게 뒤덮인 침대 밑은 그저 소리뿐이었다. 문이 열리는 경칩음. 심장이 크게 뛴다.
다무벨져. 제키벨&모브요소 약간있음. 제목그대로인 내용인데 기대할만큼은 아닌 탐미계소재가 있습니다 제목과 표지로 대강 눈치채주십사... 별거아니지만 피가 튀기니 주의. 어떤 귀족의 만찬에 초대받은 다무이야기.
길게쓰기엔 영 시간이없어서 쓰다쓰다 완성이 안되었던걸 좀 더써서 책으로(...) 들구갑니다
위에도 적었지만 좀 취향타는 소재가 있으니 조심해주세여 근데 그걸 기대하고보시기엔 또 그렇습니다...
샘플/교정 안되어있음. 편집-문장부호-문장자체가 아마 완성본과 다른곳이 꽤(...)
달그락달그락 말발굽 소리와 덜컹거리는 마차의 바퀴 소리가 이어진다. 차창 밖으로 잿빛 하늘의 그림자가 푸른 정원을 물들이고 다이무스의 하얀 머리에 빛을 드리웠다. 얼마 가지 않아 소리는 멈추고 다이무스는 마차에서 몸을 내렸다. 그 앞으로 집사가 우산을 펴며 다이무스를 맞이한다. 집사는 눈이 살짝 비치는 검은 천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다. 홀든 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안으로 오시지요. 가볍게 목을 숙이고 다이무스는 우산을 받아들었다. 집사의 뒤를 따라 정원을 걷는다. 다이무스 홀든은 어느 귀족의 저녁 만찬에 초대받아 저택에 발을 들였다. 미묘한 계절이다. 봄이라고 해야 할까 여름이라 해야 할까 가을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겨울? 추적추적 진눈깨비가 내리는 정원은 푸른 잎새와 하얀 꽃으로 가득하다. 백합. 백합의 군락. 새하얀 백합과 그 무리가 내뿜는 코를 찌르는 향기. 저도 모르게 그대로 걸음이 멈춘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하얀 입김이 잿빛에 퍼지고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검은 코트 자락이 진눈깨비에 젖어든다. 만개한 채 축 처진 백합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당장에라도 그 목이 떨어질 듯 무거워 보이기만 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홀든 경. 앞서가던 집사가 묻는다. 문제는 없습니다. 다이무스가 짧게 답했다. “백합이 잘 피었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저희 주인님의 자랑거리랍니다. 이렇게 가꾸는 데 얼마나 사람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흠. 다이무스는 시큰둥하다. 평소라면 더욱 관심이 갔을 텐데 어쩐 일인지 그다지 흥미가 동하지는 않았다. 치적치적 진눈깨비가 우산 위로 떨어진다. 아직은 평범한 귀족의 저택이다. 아직은. 옆으로는 정원, 앞으로는 저택. 곧게 뻗은 길을 검은 우산을 들고 걷는다. 문마저도 하얀 백합이 달린 리스가 걸려있었다. 이 정도면 집착인데. 다이무스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린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시종이 검은 우산을 건네받아 곱게 접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문이 열린다. 틈이 점점 벌어지면서 샹들리에의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다이무스는 살며시 모자를 벗어 가슴으로 가져갔다. 제레온 프리츠와 비슷한 연배일까.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이무스를 맞이했다. 다이무스보다 머리 반 통 정도 작은 중년의 남자다. 남자는 두 팔을 벌려 반갑게 다가온다. “오오. 저명한 홀든 가의 후계자 되시는 분께서 직접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시다니. 아버님과는 오래전 잠시 교류가 있었지요. 아버님은 잘 계십니까?” “여전하십니다.” “그러고 보니 경께는 동생분들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 아버님은 일이 바쁘시다 해도, 어찌 혼자 오셨군요.” “가정 사정으로.” 벨져는 가출한 채 연락 두절, 그나마 집에 잠시 와있던 이글은 거절. 내부 사정을 굳이 밖에서 주절거릴 필요는 없으리라. 그 뒤로도 몇 번인가 받은 질문에 단답형으로 짧게 답하며 다이무스는 기억을 훑어 내려갔다. 혹시 아는 사람인가? 아버지의 지인, 이라고 해도 한둘이 아니다. 딱히 전해 들은 말도 없었다. 그나저나 지독히도 넓은 저택이다. 정원에서 보았을 때도 꽤나 큰 건물이었는데 내부는 예상을 뛰어넘은 규모였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위에서 화려하게 쏟아져 내리듯 매달린 샹들리에. 다이무스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지독히 밝은 빛에 눈을 찌푸리고 팔을 들어 빛을 가린다. 그 짧은 순간, 남자는 이미 저 앞에 있었다. 이쪽입니다 홀든 경. 정면의 계단 위. 거대한 초상화 아래에서 남자가 손짓한다. 기묘한 초상화였다. 파란 머리, 파란 입술의 젊은 남자가 그려진. 아무리 보아도 눈앞의 남자와는 닮은 구석이 없다. 먼 조상인가. 다이무스는 시선을 살며시 옆으로 돌리며 추측했다. 계단을 올라 재차 복도를 걷는다. 같은 풍경이 몇 번이고 옆을 스친다. 뒤를 돌아보아도 끝없는 복도만이 계속되고 있다. 남자는 어떻게 알았는지 다이무스가 뒤를 돌아볼 때마다 이제 곧입니다, 라고 말을 건넨다. 검은 장갑에 쌓인 손가락이 칼끝을 매만진다. 이렇게나 커다란 저택인데 인적은 지독히도 없다. 사람이라곤 처음에 마중 왔던 집사. 입구에서 마주친 하녀 두 명. 기껏해야 이 정도였나. 모두가 얄팍한 검은 천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아직까지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걸 보면 가족은 아마도 없는 거겠지. “아까부터 계속 그러시던데…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다이무스에게 남자가 묻는다. 창문 너머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열린 창문도 없는데 어디서 들어오는지 짙은 백합 향이 코를 찌른다. 습기가 폐에 엉겨 붙는다. 남자가 몸을 돌리고 눈이 마주친다. 눈동자 너머를 꿰뚫는 시선에 다이무스는 순간 말을 잊고 칼에 손을 대었다. 머리보다 본능이 먼저 움직였다. 아니, 아니지. 손을 떼고 침착하게 답한다. “아닙니다. 그저… 저 혼자 이 넓은 곳에 초대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불편하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오 이런, 제 불찰입니다. 이거참 죄송하게 되었군요. 동생분들도 계시다기에 다른 분은 초청하지 않았습니다만….” “그건 제가 죄송하게 여겨야 할 부분이군요. 제가 동생들을 데려오지 못했으니.” 두문불출은 물론이오 살아있기나 한건지 알 수 없는 첫째 동생, 연락은 되지만 죽어도 안온다던 막내동생. 직전까지 만류하던 막내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아, 큰형. 가지 말라니까. 큰형님. 꼭 가야해? 거기 소문이 좋지 못한데. 공포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다. 이글. 아 진짜. 한 번 쯤은 말 좀 들어주면 안되냐고. 알았어 맘대로 해. 난 모른다. 안 갈 거야. 뭐가 그리 오기가 싫었는지. 이글은 결단코 고개를 저으며 말을 듣지 않았다. 불안타는 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안절부절못하던 막내. 이글은 세 형제 중 가장 감이 좋았다. 다이무스도 못 미더운 막내의 감만큼은 어느 정도 신뢰하고 있었기에 이 초대가 그저 내키기만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누군가는 와야 하는 것을. 그래 누군가. 홀든의 이름을 짊어지는 누군가는 와야 했다 누군가는. 셋이 다 있었다면 아마도 벨져가 이 일을 맡지 않았을까. 성인을 맞이하고부터 1년 남짓. 짧은 기간이었으나 이런 일은 항상 둘째가 맡곤 했다. 가문의 이름이 걸렸지만 맏이가 나서기엔 약간 위험한 일. 오만하고 완벽한 둘째는 언제나 그 옷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말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벨져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오지 않겠다던 이글을 억지로 끌고 오고 싶지는 않았다. 혼자 나선 다이무스는 그저 긴장을 풀지 않고 언제든 칼을 뽑아들 수 있도록 할 뿐이었다. 안내받은 식당에는 창문 하나 없다. 발을 들인 다이무스의 뒤에서 문이 닫히자 바깥의 빛은 모두 차단되고 식탁 위에서 흔들리는 촛불과 천장에서 드리운 작은 조명만이 공간에 빛을 채웠다. 문이 있는 벽의 반대편, 한쪽 벽면에 검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사용인들이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주르륵 늘어서 있다. 하나 둘 셋 넷… 세어보다가 그만 어디까지 세었는지를 놓치고 만다. 기분 나쁜 모습이군. 눈을 찌푸렸다. 이쪽입니다, 홀든 경. 남자는 어느새 제 자리에 앉아있다. 의외로 예상보다는 작은 식탁이다. 자리는 각자 식탁의 양 끝 부분 상석. 남자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자리에 다이무스 홀든의 이름이 놓여있었다. 남자와 다이무스 사이에는 의자가 둘씩 더 있다. 옆으로 다가온 하녀가 다이무스에게서 약간 젖은 코트를 건네받아 어딘가로 사라진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방, 식탁 위에서 촛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제 곧 만찬이 시작된다. 전채는 간단한 빵. 다음으로는 샐러드. 수프. 고기가 몇 점 들은 것들이었다. 메뉴를 듣지 못했기에 무슨 고기인지는 모르나 난생처음 먹어보는 부드러운 물건이다. 야릇한 맛이다.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는 듯 부드러운 감촉. 생피의 미처 지우지 못한 비린내에 은근하게 뒤섞인 달콤한 향. 혀에 남은 맛을 음미하며 다이무스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맛은 어떻습니까. 다이무스 경.” “…괜찮군요. 무슨 고기인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질문하는 다이무스에게 남자가 웃는다. 불쾌한 웃음에 다이무스는 저도 모르게 나이프를 쥐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늘 느낌이 안 좋다니까. 막내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아직 몸에 이상은 없다. 약은 들어가지 않았을 텐데. 갖은 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다이무스에게 남자는 말을 잇는다. 얼마 전에. “진귀한 짐승을 잡았습니다. 크게 기대를 않았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수확이었지요.” 남자는 생글생글 웃는다. 장갑에 쌓인 손이 턱 앞에서 교차하고 가늘게 뜬 눈은 살짝 위를 향했다. 다이무스의 눈에 남자의 얼굴이 비친다. 식기를 쥔 손이 멈춘다. 주름이 자글한 얼굴. 생기없는 눈동자. 다시 보아도 유쾌한 인상은 아니다. 남자의 시선이 다이무스의 입가를 훑었다. 고기가 담긴 접시, 식기를 쥔 손, 그리고 다시 입가를 거쳐 눈으로. 흠. 콧소리가 귀에 닿는다.
(중략)
어깨까지 닿았던 하얗고 머리카락은 새빨간 핏물에 푹 잠겨있었다. 팔과 다리는 각각 다른 쪽이 잘려나가 사라진 채고, 시리도록 싸늘하던 두 눈 중 하나는 피가 잔뜩 스며든 붕대에 가려져 있었다. 저 피를 보아하니 아마도 붕대 아래에 더이상 푸른 빛은 남아있지 않겠지. 입도 몇 번이고 피를 토해냈는지 입가는 장미보다 붉고 새카맣게 늘어붙은 자죽에 처참하기만 하다. 숨을 쉬고는 있는지 얄팍한 가슴이 작게 움직인다. 간신히 움직이는 눈이 다이무스를 바라본다. 다가가자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잔혹하게 들려왔다. 기억에 길이 남을 친동생과의 재회였으나 다이무스는 그만 몇 발자국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숨을 깊게 삼킨다. 진득한 비린내에 뒤섞인 달콤한 향이 코에 얽혀든다. 그 야릇한 느낌에 방금 전 입에 넣은 살점이 떠올랐다. 설마. 좋지 못한 확신이 머릿속을 스친다. 현기증에 몸이 흔들렸다. 바닥에 한 손을 짚는다. 구토감이 치밀어 오르고 위장이 뒤틀린다. 허리를 숙이고 몇 번을 토해냈다. 테이블 위에 남겨진 손이 천 자락을 쥐어 잡는다. 흔들리는 시야를 몇 번이고 깜빡이며 두 팔을 테이블 위로 짚어 몸을 끌어올린다. 도통 힘이 들어가지를 않는 다리를 억지로 세웠다. 잘못 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믿으며 다시금 응시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피가 한가득 고인 커다란 은쟁반 위에 몸을 동그랗게 만 실루엣은 분명 다이무스의 첫째 동생 벨져 홀든이었다. 맙소사. 다이무스 답지 않은 놀라움과 경악이 섞인 세 글자가 입에서 흘러나온다.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형? 검붉은 체액이 늘어붙은 입에서 흘러나온 부름에 다이무스는 반사적으로 피에 젖은 상체를 들어 올렸다. “벨져, 벨져!” 얼마 만에 들은 목소리일까. 벨져의 목소리는 다이무스가 기억하던 오만하고 맑던 음색과는 달리 지독하게 메마르고 갈라져 있다. 기침이 이어지고 또다시 그 입에서 왈칵 피가 쏟아져 나온다. 다이무스는 옷깃으로 입술을 닦아주었다. “괜찮다. 괜찮다 벨져. 이제 괜찮을 거다.” 반쯤은 자신에게 하는 주문이었다. 괜찮을 거다. 몇 번이고 되뇌지만 상황이 썩 좋지 못함은 잘 알고 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는 벨져의 모습은 더욱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행방을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각기 다른 쪽의 팔, 다리. 그 절단부를 가리기에는 충분하나 역시 찢어져 나간 소매와 바짓단. 동체 부분도 옷감이 멀쩡하지는 않다. 이리저리 찢어진 옷 사이로 군데군데 살점이 떨어져 나간 흔적이 확연했다. 얼굴은 마지막으로 봤던 그때 그대로 오만하고 아름다우나 보다 창백하게 질려있다. 혹시나 싶어 새빨갛게 물든 붕대 위로 손을 가져가 보지만 움푹 파인 그 감각에 다이무스는 더욱 얼굴을 찌푸릴 뿐이다. 순간 말도 행동도 잊고 다이무스는 동생을 안아 올린 채 숨을 멈췄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일단 여기서 데리고 나가야 한다. 하지만 이 피는? 지혈은? 순번이 뒤죽박죽이 된 머리가 터질 듯 돌아간다.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이글이었다면―― 이글이었다면 본능에 따라 올바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역시 뒷목을 잡아끌고라도 왔어야 했다. “성급하시군요 홀든 경.” 허리춤에 찬 칼에 본능적으로 손이 닿는다. 느껴지는 기척에 날렵하게 뒤로 몸을 돌렸다. 이 저택의 주인이 기분 나쁜 미소로 다이무스를 응시하고 있다. “왜 그리 화를 내십니까. 입에도 잘 맞으셨으면서. 조금만 더 기다리셨다면 동생분의 더욱 맛있는 부분을 드실 수 있으셨을 텐데, 아쉽군요.” 턱을 슬슬 매만지며 흐음, 웅얼거린다. 속을 읽을 수 없는 두 눈이 다이무스와 그 뒤의 벨져를 번갈아 본다. 남자가 벨져를 봄과 동시에 다이무스도 식탁 위에 얹어진 동생과 눈을 마주쳤다. 벨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심히 불쾌해 보이는 눈초리로 다이무스를 쏘아본다. “…정말 나를 먹었다고?” “아니, 안 먹었다. 먹지 않았어. 믿어라.” 눈을 피해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린다. 남자의 말에 당황한 나머지 지나치게 대답을 여러 번 하고 말았다. 등 뒤의 시선이 따갑다. 눈치가 좋은 녀석이니 바로 알았겠지. 입가에 맴돌던 맛이 상기되고, 다시 본능적인 역함이 위장에서 스멀스멀 올라온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동시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감미롭던 그 맛에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아니 조금이라도 맛있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입맛을 다져서도 안 된다. “동생분이 괜찮으실지는 당신 하기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홀든 경. 당신만 제대로 처신하신다면 동생분은 얼마든지 살려드릴 수 있습니다.”
슬며시 위에 올라타 침대위로 퍼진 풍성한 치맛자락을 잡았다. 목적이 확실한 움직임이었으나 그 대상은 잠이 들었는지 눈을 감은 채 딱히 저항하지 않는다. 가슴팍위로 놓인 검은 장갑이 꼼지락거린 순간 막내는 잠시 숨을 멈췄다. 하지만 이내 작은 숨소리만이 계속된다.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드레스 아래로 보이는 발목을 잡아 슬쩍 옆으로 벌렸다. 무릎을 밀어넣어 다리 아래로 깔린 두터운 치맛단을 안쪽으로 밀어넣는다. 그리고 시야를 가리는 하얀 프릴을 손에 쥔다. 몇겹이나 되는 프릴을 조용히 하나하나 걷어올리고, 드레스를 띄우는 패티코트마저 걷어올린 아래로는 검고 얇은 스타킹. 그리고 가터벨트. 애석하게도 그 위는 하얀 드로워즈에 가려져 둔부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칫. 혀를 차는 막내의 머리를 내려치는 검은 장갑.
"아야." "장난이 심하구나, 이글."
입만 다물고있으면 조숙한 아가씨라고 우겨볼 수 있을법한.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그야말로 확실한 청년의 음색이다. 이글 홀든의 둘째형인 벨져 홀든이 어쩌다 이런 아가씨의 행세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그 이유는 실로 간단하다. 임무니까. 성인이 목전이라고는 하나 아직 아이의 모습이 남은 벨져 말고는 아가씨를 소화해낼 사람이 없다나. 그런 연유로 벨져는 검고 푸른 드레스를 억지로 몸에 둘렀다. 다만 좀 더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몸치장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으나 입을 일이 없던 중무장과의 전투에 체력을 쏟아버린 나머지 화사한 드레스가 몸을 감쌌을 때 이미 벨져는 기진맥진이었다. 사람이 데리러 올 때까지 눈이라도 붙일 셈이었는데. 누워있다 보니 절로 잠에 빠졌던 모양이다. 벨져가 한숨을 내뱉는다. 다행히 옷매무새가 크게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상체만 멀쩡하다면 뭐. 혹시나 몸을 뒤척여 코르셋이 어떻게 되지라도 않았나 걱정했지만 허리를 끔찍하게 조이는 그건 퍽이나 멀쩡해 보인다. 이거하나 조이는데만 어찌나 힘이 들었는지. 생각만해도 미간이 좁아진다. 아직 어린 막내는 아직도 치맛자락에 몸을 파묻고 제 형을 올려다보고있다. 내려가라고 눈짓을 해보았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스레 웃을뿐이다.
"이글. 비켜라." "아 왜~ 회사에서 연락도 왔다니까? 쫌 늦는다구." "하."
여기서 더 늦는다고? 복장과 어울리지않게 더 구겨지는 얼굴. 막내의 부드러운 맨손이 살짝 고개를 돌린 그 턱을 잡는다. 다른 사람의 손이었으면 당장에라도 내쳤을 무례한 손길을 내버려 두는 건 어디까지나 막내의 이 손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작은형."
어느새 막내의 얼굴이 코앞에 와있다. 이제 10대 후반에 접어드는 막내. 언제까지고 어리고 귀여운 막둥이라고 생각했건만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어른스런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된걸까. 아직 장난기 가득한 미소는 이글 홀든의 본성이며 마른 입술을 적시는 혀는 수컷의 본능이다. 그렇다고 순순히 장난에 응해주기에 지금 복장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동생의 이정도 도발에 홀랑 넘어갈만큼 만만한 벨져도 아니다. 키스를 하려 더욱 얼굴을 가까이 대는 이글의 이마를 스윽 밀어낸다. 이글은 그 손목을 잡아 아래로 눌렀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뿌리치려면 뿌리칠 수도 있는 손이지만 어쩔까. 벨져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막내의 귀여운 시선을 받아친다.
"이글, 옷 구긴다." "벗기지는 않을게?"
한쪽 손은 시트 위에서 벨져와 손가락을 얽고, 나머지 손은 풍성한 드레스 아래로 슬그머니 들어온다. 스타킹을 쓸어올리며 가터벨트 옆의 맨살을 더듬는 손길에 벨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응석이라도 부리는 건지 이빨을 보이며 막내답게 웃는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마음대로 해라. 잡히지 않은 손을 시트위에 짚고 고개를 돌린다. 어정쩡하게 들었던 상체를 커다란 베개위로 파묻는다. 잡힌 손으로 이글의 손가락을 맞잡으니 젖은 입술이 장갑위로 입술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보란듯이 미소. 어디서 보고 배운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정도면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들에겐 백발백중이겠군. 동생의 성장에 벨져가 한숨을 내쉰다.
치마아래로 파묻은 손이 드로워즈를 끌어내린다. 허리를 들어 그 손을 도왔다. 그 와중에도 새파란 시선은 제 형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그런 속셈이 있었군. 벨져는 이글의 귀여운 수작에 답이라도 하듯 검은 스타킹에 싸인 다리를 하나 들어 그 허리로 얹는다.
"흠, 결혼장난이라도 하자는 건가?" "싫어?"
손이 떨어진다. 몸이 더욱 가깝게 밀착했다. 옷감 몇겹 너머로 묵직한 하체가 닿는다. 적나라한 욕망과 장난스런 어린 미소가 지독히도 언밸런스했다.
"지금 여기서, 작은형이 내 신부가 되는거야."
파란 눈이 목전이다. 막내의 손이 제 형의 한쪽 손목을 잡아 그 앞으로 가져온다. 하얀 이빨이 보란듯이 장갑 끝을 물어 벗겨내었다. 그래 이러라는 거군. 둘째는 막내의 목으로 팔을 감아 당긴다. 목뒤에서 손을 맞잡는다. 한쪽은 장갑, 한쪽은 맨손. 묘한 감각. 입술이 닿는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닿은 입술로 전한 속삭임을 분명 막내도 들었으리라.
이럴때면 첫째는 둘째가 제법 저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앞에 앉아 찻잔에 입을 대며 얼굴을 있는대로 구기고 있는 저 모습이란. 막내라면 툴툴거리면서 솔직하게 토로할 불만도 둘째는 신경을 살살 긁어가며 입꼬리를 올린다. 그러면서도 핵심은 말하지 않는 꼴이 본인이 말하는 답답한 저와 닮았다고 말하면 화를 낼까. 벨져, 말 할게 있으면 말을 해라. 흠 뭔가 내가 말 할만한 걸 만들었나보지? 눈을 흘기며 말꼬리를 올리는 둘째에게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 순간 분위기가 변한다. 얼굴로 미적지근한 액체가 쏟아진다. 그게 둘째가 마시던 홍차라고 손에 쥐어진 컵을 보고 알았다. 미안 형, 어젯밤 일을 생각하니 손이 그만 미끄러졌어. 평소라면 참았을 무례함이었으나 더해진 한마디가 그만 첫째의 화를 돋구고 만다. 몸을 일으켜 손을 뻗는다. 그대로 머리를 잡아 테이블로 내리쳤다. 나도 그만 손이 미끄러졌군. 빈 찻잔을 쥐는 하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꼴이란.
릭벨
벨져 홀든이라는 사람은 타인의 도움을 요청하는데 거리낌은 없으나 애당초 요청할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고 릭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눈앞에서 자신의 도움을 기다리며 미동도 않고 있는 벨져를 바라보고있으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가만히 있지 릭? 벨져의 약간 퉁명스런 목소리에 릭은 화들짝 놀라 보이지도 않을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오. 하얀 등을 새빨갛게 가로지르는 상처에 약을 바르는 손길과 함께 파르르 떨리는 피부. 그만 실수로 손톱을 대니 어깨가 놀라 몸이 작게 뛴다. 릭 톰슨. 아 미안하오. 벨져의 질책에 사과를 전하면서도 슬며시 고개를 드는 작은 쾌감.
제키벨져
제키엘17/벨져15정도
가만히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건너편으로 세명의 하얀머리가 섰다. 제키엘에게 그 세명은 다시 태어나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존재다. 다이무스, 벨져, 이글 홀든. 그 중에서 특히나 둘째인 벨져 홀든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세포 하나까지 전부 손에 넣었었지만 마지막 손을 놓친 짧은 순간 제 심장에 칼을 들이밀었던. 세 형제는 제키엘을 눈치채지 못하고 조잘거린다. 정확하게는 막내가 혼자 조잘거리고 두 형제는 가만히 웃는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다. 약간 녹색이 섞인 푸른 빛. 지중해의 얕은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날카로운 시선이 놀라움에 물들어 크게 열리고 제키엘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다. 언젠가 지배했던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다. 제키엘, 가자. 손을 잡아끄는 메이의 손, 열차가 들어오기 직전 손을 흔들어 건너편으로 인사했다.
다이글
앞에서 고기를 써는 막내를 보는 자신의 눈빛은 마치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비슷하다는 자조. 뭐야 큰형 안먹어? 그럼 내가 먹는다? 얼마나 나이를 먹어도 해맑게 첫째를 올려다보는 막내 앞으로 접시를 밀어준다. 얼마만이더라 이렇게 식사를 같이 하는게. 재미없게 자기까지 회사로 가기 싫다며 집을 뛰쳐나가 연합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얼굴도 보기가 힘들어졌지. 밥이나 제대로 먹고사는지 걱정이 되던 때였다. 간만에 밥이나 먹지 않겠냐고 연락이 왔던 건. 그래서 해가 질 즈음 얼굴을 맞대고, 큰형 오랜만이라며 달콤하게 입술을 대던 막내와 키스를 하고 저녁은 그래 룸서비스였다. 그리고 아침부터 이렇게 고기놀음. 밥까지 챙겨 먹이다니 정말 부모같군. 내가 네 아버지도 아니고. 한숨을 쉬는 첫째에게 아버지와는 살을 섞지 않는다며 웃는 막내.
티엔마틴
지금은 당신 생각을 알 수 있어요, 굳이 내 능력이 티엔 정, 당신에게 통하지 않더라도 말이죠. 마틴 챌피가 어쩌다가 티엔 정에게 올라타게 되었는지는 정말 많은 설명이 필요하리라. 장담하건데 그 원인은 절대로 사랑은 아니다. 그렇다고해서 티엔을 당황하게 하고 싶어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좀더 복잡한 여러가지 요인이 얽혀 마틴은 반라의 티엔 위에 올라탔으나 사실 그 원인을 직접 말하라 하면 본인도 설명을 힘들어 하겠지. 사람들의 마음을 다 읽어내는 그 마틴 챌피가. 하지만 마틴은 확신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티엔 정의 저 철벽같은 표정도 무너질 것이라고. 하지만 티엔 정의 입에서 나온 말이란. 흠 복근운동을 하라는 건가? 네 무게정도면 좋은 운동이 되겠군.
루톰
선배 제가 준 초콜릿…드셨어요? 몸을 살짝 꼬며 수줍게 물어보는 후배의 질문에 루이스는 입에 물었던 커피를 대차게 뿜었다. 초콜릿, 맞다 큰일났다. 그랬었다. 토마스가 준 초콜릿도 트리비아의 입에 우적우적 씹혀나갔겠지. 잊고있었다. 토마스가 줬다는 사실도 내일, 그러니까 화이트데이때 보답해야 한다는 사실도. 트리비아와의 격한 신경전에 그만 잊고말았다. 그래 토마스 맛있더라. 억지로 띄우는 미소는 루이스의 상냥함이다. 그리고 토마스의 눈에 맺히는 기쁨의 눈물. 선배 너무 그러실 필요 없으신데…트리비아씨가 다 드신거 알아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내일 화이트데이까지 겸해서…지금 제 앞에서 먹어주세요 선배! 그리고 내밀어진 거대한 아이스크림홀케이크.
3월에 냈던 돌발본의 다른버전...인데 내용을 깡그리 새로썼으니 다른물건이라 보시면 될것같습니다.
현대물. 다무(20)벨져(17)이글(15)정도. 모브주의. 전생물같기도하고 좀 뒤죽박죽.
표지는 페오님( @jiyaka )
샘플. 문장기호나 편집이 인쇄물과 쫌 다릅니다
홀든 가 둘째의 생일에는 항상 눈이 내린다. 이제 하루 앞으로 다가온 첫째 동생의 열한 번째 생일을 생각하며 다이무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른 오후, 메마른 나뭇가지로 뒤덮인 푸른 하늘에서 하얀 눈이 떨어진다. 내일까지 계속 내리겠군. 이대로 눈이 쌓이면 막내가 기뻐하겠지. 둘째는 그 옆에서 아무래도 좋다는 듯 눈을 반만 뜨고 있지 않을까. 그런 잡스러운 감상이 머리를 스친다. 한겨울, 해가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은 날, 홀든 가의 사유지. 평소보다는 날이 좀 푸근한가 싶어 밖으로 나와 가볍게 시작했던 숨바꼭질은 벌써 몇 시간 째 이어지고 있다. 늘상 있는 일이다. 다이무스도 벨져도 이글도, 이런 사소한 놀이에조차 언제나 전력으로 임했다. 그러다 보니 숨바꼭질 같은 별거 아닌 놀이에도 몇 시간씩 걸리는 건 부지기수다. 누가 술래고 누가 숨는 입장이 되어 누가 이겨도 절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다만 끝은 항상 정해져 있다. 몇 번이고 술래가 바뀌다가 다이무스가 술래가 되어 죽어라 숨은 동생들을 찾아내면, 그게 길고 긴 놀이의 끝이다. 아까는 그래,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있던 이글을 잡아 끌어내렸다. 이번엔 좀 어렵게 숨었나.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보이지 않던 차에 고개를 드니 바로 보였지. 여기까지 올라오냐며 치사하다고 버둥거리던 막내. 도망갈 곳이 없는 곳에 숨은 너의 실수다. 못 찾을 줄 알았지! 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막내를 감기라도 걸릴세라 목도리를 둘둘 감아 집으로 보내놓고 다시 남은 동생을 찾아다녔다. 첫째 동생은 어디에 있을까.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걸어 꽤 먼 곳까지 왔다. 동생들은 항상 다이무스의 발이 멈추는 곳에 있다. 직감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 다이무스지만 그만큼은 확실했다. 목표로 하는 곳 없이 발을 계속 움직이다가, 어느 곳에서 발이 멈춘다. 근거는 없지만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역시 여기 있지 않은가. 커다란 바위 아래로 작게 주먹을 쥔 하얀 손이 보인다.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인다.
"여기 있었군."
손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얼음처럼 하얗게 질린 손은 아직 다이무스의 손에 비해 한참이나 작았다. 다이무스의 손에 폭 담기는 작은 손을 만지니 이렇게나 작았던가 싶다. 갑자기 몸이 작아질 리는 없는데. 그리고 자신이 훌쩍 커버렸음을 인지한다. 나날이 더 높아만 가는 눈높이에 둘째도 셋째도 볼을 잔뜩 부풀렸더라지. 다이무스 요즘 키가 많이 컸구나. 아버지의 그 한마디에 방방 뛰던 막내와 옆에서 군말 없이 우유만 들이키던 둘째의 모습이 떠오른다. 작은 손을 쥐고 잡아당기니, 벨져가 순순히 그 움직임을 따라 밖으로 기어 나온다. 창백한 얼굴에 코언저리만이 유독 붉다. 보아하니 한참이나 이 아래에 숨어있었을 게 뻔했다. 꽤나 추웠을 텐데 지지 않으려고 별 곳에 다 숨는 꼴이 과연 홀든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슬슬 양지로 기어 나온 둘째는 항상 어른을 가장하던 모습답지 않게 코를 훌쩍거린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벨져에게 건넸다. 이글이었다면 직접 코를 풀어줬겠지만 이 자존심 센 첫째 동생이 그런 취급을 견딜 리가 없었다. 차가운 손이 다이무스의 손 위에 놓인 하얀 손수건을 건네받아 코를 훔친다. 추위에 젖은 눈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다이무스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제대로 숨은 줄 알았는데. 형에게서 완전히 숨으려면 한참 멀었군." "네 생각이야 뻔하지 않나."
진 게 분한 건지 토라져서는 고개를 홱 돌려버린다. 항상 당당하던 동생은 사시나무 떨듯 가늘게 떨고 있다. 무리하기는. 다이무스는 그런 벨져가 약간은 가엾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사실 벨져의 생각을 알고 찾으러 다닌 건 아니었지만―― 말을 해도 벨져는 믿지 않으리라. 직감이라니, 형이 직감을 믿는다고? 그럴 리가 거짓말이지. 귓가에 들리는 듯한 벨져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퍽이나 추워 보이는 동생에게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어깨 위로 덮어씌운다. 녹색 섞인 푸른 눈을 슬쩍 치켜뜨면서도 싫다는 소리가 없는 걸 보면 춥긴 추웠던 모양이었다.
"내가 못 찾으면 어쩔 생각이었나." "적당히 때를 봐서 나갔어. 형이 못 찾겠다고 눈물을 흘리고 있을 즈음?" "벌써 세 시간이나 지났는데, 네가 알아서 나온다고?"
정곡을 찌르는 말에 벨져는 볼을 슬쩍 부풀린다. 다이무스의 손이 하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드러나는 이마에 입술을 한번 짓눌렀다. 그저 발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면 그곳에 동생들이 있었다. 동생들은 항상 불만이었다. 어떻게 찾는 거야. 치사해. 우리 몰래 무슨 이상한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 아냐? 옳소 옳소. 귀엽다면 귀여울 투정을 부리던 동생들. 언제까지고 그러리라 믿었다. ――그런 무렵의 꿈을 꾸었다. 먼 옛날의 꿈. 검을 들고 거리에 나서기가 꺼려지지 않았던 시절의. 증기가 하늘을 메꾸고 어딜 가나 석탄 내음이 가득하던 시대. 어두운 밤이다. 적막이 유독 무겁게 다이무스를 짓눌렀다. 째깍째깍. 시계침 움직이는 소리만이 요란하다. 새벽 세시. 식탁 맞은편으로 어린 막내가 팔을 베개 삼아 잠들어있다. 소식을 기다리고 있건만 남겨진 소식은 없다. 오늘 좀 늦는다던 메시지가 전부였다. 전화를 해도 답이 없다. 있을 만한 곳은 전부 연락을 해보았지만 역시나 좋은 대답은 듣지 못했다. 고작 하루, 아니 아침부터였으니 아직 24시간이 채 되지 않은 몇 시간. 몇 시간 동안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건만 왜 이리도 불안한 걸까. 끝도 없는 불안이 다이무스의 심정을 초조함으로 짓누른다. 아니 괜찮을 거다, 그 아이니까. 얄미우리만치 영특하고 흔들림이 없는 첫째 동생이기에. 분명 어쩌다 보니 늦었다며 문을 열고 그 얼굴은 뭐냐며 오만하게 웃지 않을까. 해가 뜨기 전에는 분명. 아니 해가 뜨고 난 후라도. 세상 물정 모르고 자고 있는 막내의 어깨를 흔든다. 올해 겨우 열다섯. 오늘 꿈에서 마주한 동생보다 세 살 더 많던가. 다만 막내의 눈가에는 벌써 기다란 흉이 져 있다. 이글, 이글. 몇 번을 흔들어 깨우자 그제야 깜빡깜빡 새파란 눈을 뜬다. 이글은 잠에 젖은 눈으로 다이무스의 시선을 받아친다.
"이글, 방에 들어가서 자라." "작은형은?"
역시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이글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나온다. 다이무스 또한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별수 있는가, 아까 잠시나마 걸려왔던 전화에서도 그저 좀 늦는다는 말 뿐이었는 것을. 아니 그 전화를 믿을 수는 있을까? 그런 식으로 어리숙하게 답하던 둘째는 처음이었다. 시간만이 멈추지 않고 흐른다. 다이무스는 이글을 방에 들여보내고 다시 식탁에 앉아 눈을 감았다. 벨져가 돌아오지 않는다.
(중략)
홀든의 첫째, 다이무스 홀든이 회사에 있어 얼마나 유능하고 중요한 인재인지 굳이 설명해야 할 필요는 없으리라. 올해 스물넷. 아무리 대대로 회사를 도와온 홀든의 장자라지만 그 유례없는 좋은 대우는 분명 다이무스 자신의 능력에 따른 결과였다. 형이 또 갑갑하게 구는군. 벨져는 작게 혀를 찬다. 분명 타인에 비해 다이무스의 생각을 더 잘 알고 있다고는 생각하나 그래도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게 있다. 눈치로 보아 썩 좋은 말은 아닐 것 같지만. 벨져가 집무실로 발을 들이고 그 뒤에서 다이무스가 문을 닫는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건지 문을 가로막았다. 다이무스의 집무실은 그야말로 다이무스 홀든 그 자체였다. 깔끔하게 정리정돈된 책상, 여러 종류의 책이 빽빽하게 늘어선 책장. 군데군데 보이는 영 본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시집들.
"벨져, …사실인가?" "뭐가." "소문 말이다."
소문. 그래 소문. 벨져가 눈을 찌푸린다. 최근 들어 지독하리만치 벨져의 발목을 붙잡는 그 저열한 단어의 나열. 회사에 들어오고 벨져가 슬슬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아니 그전부터. 홀든의 둘째이자 다이무스 홀든의 동생으로 입사한 그 시점에서 시작되었던. 저게 그 다이무스 홀든 동생이라고? 생긴 건 완전 딴판이구려. 저 면상 뒷구멍으로 잘 물게 생겼지 않습니까. 높으신 분들께서 재미 좀 보고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맞아 몸 좀 판다는 말 들어봤냐. 나도 들어봤다 나한테도 좀 팔았으면 좋겠군. 반은 다이무스의 회사 내 입지를 시기 질투한 화풀이였고 반은 벨져를 아니꼽게 보는 무리의 비아냥이기도 했다. 다이무스는 이미 그런 식으로 뒷담을 풀기엔 너무나 입지가 견고했으며 그 성격이 도저히 뒷담이 성립될 틈을 주지 않았기에 아직 신입이고 흠이 많은 벨져를 타겟으로 삼은 것이리라. 치졸한 놈들. 벨져는 그 추잡한 소문이 불쾌하기는 했으나 내버려 두기로 했다. 반박할 가치도 없는 말에 시간을 들일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소문은 소문에 불과한 것을. 그런 그 소문이. 이제야. '이제야 형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군.' 귀찮게 되었다고 벨져는 생각한다. 하지만 굳이 변명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이무스가 믿고 있다면, 혹은 믿고 있지 않다면, 벨져의 말 한마디로 그 결정이 흔들릴 리 없으니까. 굳이 설득하고 싶지도 않고 신뢰받고 있다고 가슴을 쓸어내릴 만큼 비참한 신세도 아니다. 들은 둥 만 둥 아무 말도 않는 벨져에게 다이무스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마 이런 벨져의 반응을 짐작은 하고 있었을 텐데. 이마에 손을 짚고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다. 벨져는 형의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언을 지속한다. 다이무스의 어두운 눈동자가 가만히 벨져를 응시했다. 입술이 떨어진다. 벨져. 저를 부르는 소리에 문득―― 충동이 일었다. 왜 굳이 그런 행동을 했던가. 벨져는 후에 자신이 한 행동의 의미를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보았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키스를 했다. 기습적으로 얼굴을 들이대고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제 형의 몸이 뒷걸음질 치기 전에 팔을 그 목에 감아 매달리듯 밀착했다. 그저 입술을 이어붙이기만 한 행위임에도 다이무스는 평소의 침착함은 온데간데없이 화들짝 놀랐다. 키스가 길어질수록 제 형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해진다. 손이 허리 언저리에서 붙지도 떨어지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목을 더욱 가까이 당긴다. 가슴팍이 서로 맞닿는다. 눈빛이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유, 글쎄. 벨져는 이유를 찾는다. 하지만 딱히 이유는 필요 없지 않은가. 이토록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을. 서로의 타액으로 젖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말은 다이무스가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다.
"이런 걸 원하는 거, 아니었나?"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딱히 비꼰 것도 떠본 것도 아니다.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으리라 다이무스 또한 알고 있을 터인데. 굳이 물어본 건 그런 거 아니냐는 반문이었다. 가슴팍을 붙잡혔다. 그리고 있는 힘껏 소파 위로 내쳐진다. 신장 차는 그렇게 심하지 않으나 체격 차가 꽤 나는 몸이 거진 전력으로 강제하니 당할 도리가 없었다. 손 하나 까딱 못하고 몸이 소파에 부딪히고,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다이무스의 몸에 두 다리가 소파 위로 올려진다. 이제 저도 성인이 되었건만 제 형의 그림자에 여백 없이 잠기는 몸은 평생 다이무스 홀든을 따라가지 못하리라는 증거였다. 어두운 눈동자가 싸늘한 시선으로 벨져를 내려다본다. 지독하리만치 뜨거운 몸과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의 대조가 자극적이다. 지금보다 훨씬 컸던 자신. 긴 팔과 다리. 소파의 가죽냄새와 함께 한가득 들이차는 혈육의 체취. 형이 믿어줄까 모르겠지만 그게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