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이야기
R19/문고/78P/소설
표지는 기미(@89880CP)님. 저 허연부분은 무광은박입니다
릭벨. 패러랠은아닌데 좀 패러랠같기도하고... 원작기반.
산란비끄무리한거/약한 카니발리즘/임신비끄무리한거 주의 정말 비끄무리한느낌이에요
1. 파란 금
모든것이 일단락된 후. 슬슬 괜찮지않을까?하는 마음에 벨져에게 청혼하는 릭이었지만 벨져는 어렸을 적 정해진 정혼자가 있으니 그걸 거절하고 와서 받아들이겠다...며 확답을 미룬다. 그리고 행방이 묘연해진 벨져를 찾아서 릭은....
2. 네 번째 밤의 식사
벨져가 아직 축제를 치르기 전이었던 시기. 제레온의 생일을 맞이해 프리츠 저택으로 향하는 홀든이었으나 둘째 벨져는 다이무스의 계략에 빠져 홀로 집에 남겨진다. 어떻게 해서든 프리츠 저택에 가고싶었던 벨져가 그정도에 굴할 리 없고, 홀로 숲을 걸어 프리츠저택으로 향하던 도중 한 남자를 만나는데...
같은 내용으로 두개들어갑니다.
콜님이 축전주셨어여! 어예!
좋은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선선한 바람, 덥지도 춥지도 않은 기온. 개운하게 눈을 떴고 아침식사로 구운 토스트도 노르스름하니 맛이 좋았다. 릭 톰슨은 옷장에서 가장 하얘 보이는 셔츠를 골라 입은 뒤 집을 나섰다.
상대를 생각하면 약속 장소에는 10분 전에 도착하도록 맞추는 게 좋다. 시간 약속에 엄격한 그가 늦을 때마다 저를 빤히 쳐다보던 모습을 떠올리면 소름이 끼치기도 하고 신경이 긁히기도 한다. 어쨌거나 릭은 벨져의 그런 눈을 보지 않기 위해 십오 분 전에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만나기로 한 가게 앞에서 벽에 기대어 선다. 한 손에는 빨간 장미다발, 다른 손에 찬 손목시계--중에서도 장소에 맞는 시간을 가리키는 것에 눈을 주어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올 시간인데. 설마 늦는 걸까.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하고 작게 떠오르는 미소와 동시에 멀리서부터 시선을 끄는 인물이 등장했다. 눈이 마주친다.
호오.
벨져는 릭의 모습을 보자마자 감탄사를 입에 담았다. 멀리서 작게 입 모양으로 추론할 뿐이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하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야 별거 아닌 반응이겠지. 하지만 연인의 반응에 익숙한 릭의 눈에는 당장에 박수라도 칠 기세처럼 보인다. 누가 보면 항상 늦는 줄 알겠군. 씰룩이는 입가를 억지로 둥글게 만들고, 화사하게 미소 짓는다. 하지만 연인의 반응은 싸늘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싱글벙글대고 있군. 또 무슨 장난질이라도 준비했나?”
“기분 나쁘다니. 말이 심한데, 벨져.”
“네가 이렇게 웃을 때면 이상한 걸 가져올 때가 많으니 하는 소리다.”
아. 벨져의 말에 릭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짐작가는 게 한두 개 있다. 아니, 하나, 둘….
‘몇 개랄지, 한두 개가 아니군.’
그제야 떠오르는 자신의 업보는 생각보다 많았다. 처음에는 그저. 어지간한 일에는 흐음, 음? 그래서? 끝인가? 품위 없군. 이런 식으로 별 반응도 없는 벨져가 조금 더 놀라거나 조금 더 얼굴을 찌푸리는 게 재미있어서, 그래서 이따금 짓궂은 장난을 치는 정도였는데.
장난이라고는 해도 거한 건 아니고 소소하게 놀래키는 정도, 였다고 릭은 생각한다.
물론 아마도 벨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제법 화를 냈을 만한 것도 몇 개는 있었지만. 상대가 저 벨져 홀든인데 어쩌겠는가. 일반인이 가볍게 놀랄 정도의 사소함은 저 귀엽지 않은 연인에게는 손등에 한 방울 튀긴 물보다 별거 아닌 일이다. 릭은 그저 연인에 맞춘 장난을 쳤을 뿐이었다. 실제로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도 5초면 평정심을 되찾기도 했고.
일단 이거부터 받으시오. 일단 벨져에게 장미 다발을 건네 입을 막았다.
릭은 벨져와 가게의 테라스 끄트머리 자리에 앉았다. 아직 시간이 이른 탓인지 가게 안에만 사람이 몇 있지 바깥자리는 텅텅 비어 릭과 그 연인뿐이다. 이걸 노리고 이 시간에 약속을 정하기는 했지만. 어째 생각보다도 더 모든 것이 술술 풀리는 것 같아 이쯤이면 조금 불길하기도 하다.
주문은 파스타와 샐러드. 벨져가 슬슬 메뉴판을 보는 타이밍에 릭이 주문을 끝내는 건 이미 예전부터 정해진 수순이다. 이것도 교제 시작 즈음에는 각자 고르기도 했고 벨져가 고르기도 했으나…릭의 입맛이라고 해야 할까. 릭의 상식. 아니 보편적인 감성으로는 도대체가 왜 그런 걸 시키는 지 알 수 없는 메뉴를 고를 때가 아주 많았다. 그것이 벨져의 입맛에 맞으면 모를까. 맛이 있냐고 물으면 그저 그렇다고 하지 않던가. 벨져 홀든이라는 자는 입맛이 까다로울 것 같으면서도, 아니 실제로 맛있다고 생각하는 선은 까다롭지만. 입에 들어가는건 그럭저럭 다 먹을 수 있는, 귀족의 이미지와는 묘하게 먼 식성을 가지고 있었다. 저러니 집에서 오래 나와 살았겠지. 그렇게 벨져가 주문한 정체불명의 음식을 보며 내심 한숨을 쉰 게 몇 번이던가. 참다못한 릭이 벨져가 고른 음식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시키기를 또 몇 번. 약간의 언쟁이 오가기도 했다. 왜 네 멋대로 시키는 거지? 그거야 그대가 이상한 걸 고르니까 그렇잖소, 내가 고르는게 더 맛있다는 건 그대도 동의할 텐데. 그 뒤로는 벨져도 릭이 자기 멋대로 고르는 메뉴에 대해 무어라 하지 않는다.
메뉴판을 회수해가는 종업원에게 들고 있던 판을 건네고, 벨져가 릭 쪽으로 시선을 들었다. 눈빛이 조금 불만스러워 보이는 것도 같고.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동그란 테이블 위로 얹힌다. 톡톡. 철로 된 바닥을 작게 두드리는 손을 잡아 손에서 장갑을 벗겨내었다. 두 장갑을 옆에 가지런히 두고, 웃으며 말을 건넨다.
“기분이 좋지 않아보이는데, 별일이군. 따로 먹고 싶은 게 있었소?”
“딱히 없다.”
괜히 돌려 말하거나 제 속을 숨기지는 않는, 아주 많이 굉장히 과할 정도로 솔직한 연인이니 저 말에 거짓은 없으리라. 릭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벨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크흠. 헛기침을 한 번 뱉는다. 벨져가 릭에게 주목한다.
“오늘은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아주 중요하지.”
그렇게 운을 띄우니. 저 일곱 살 어린 연인은 인상을 팍 찌푸리는게 아닌가. 이번엔 또 뭐요. 같은 소리는 목 안으로 밀어 넣어두기로 한다.
“릭, 본론을 말해. 넌 쓸데없는 전제가 너무 많아.”
“아니지 벨져. 이런 건 원래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 이런 거라는게 대체 뭔지 당장 설명하도록.”
성질 한 번 급하기는. 장미에 물을 줄 줄만 알지 도저히 낭만이라는 걸 모르는 기계 같은 연인은 늘상 이런식이다. 하지만 별 수 없다. 그런 면이 좋다고 사귀고 있으니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막상 결심하자니 벨져 홀든이라는 사람과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저 바닥에 내팽개쳐진 심정으로 터덜터덜 향했던 메트로폴리스. 얼굴은 예쁘지만 사람을 무슨 이동수단 취급하던 재수 없는 도련님. 별거 아닌 일에도 한심한 놈 취급하던 표정. 그를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얼굴 빼고는 귀여운 구석이 없었다. 그랬는데 대체 어느 시점에서 눈앞의 청년에게 빠져 고백을 하고 자연스럽게 그를 안을 생각을 했을까. 분명 몇 년전, 아니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연인의 가슴은 큰 편이 좋겠다고 웃었거늘. 적당히 10년 전 쯤의 자신에게 이봐 릭 톰슨, 너는 10년 후에 예쁘고 어린 애인을 가지게 된다고, 다만 그 애인한테는 너와 같은 게 달려있지, 구멍도 하나뿐이야. 그렇게 말하면 믿을까? 가슴도 없는 남자랑 자기가 왜 사귀냐고 얼굴을 찌푸리지나 않을까 싶다. 물론 벨져의 얼굴을 보여주면야 어린 시절의 자신도 이거 끝내준다며 박수를 치겠지만.
고백하던 순간도 가슴깨나 졸였던 기억이 난다. 칼로 베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싶던 고백이었다. 벨져도 이 정도면 나를 꽤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은데. 그 정도의 애매한 확신을 가지고 마음을 전했고 벨져는 이삼 초 정도 입을 살짝 벌린 채 가만히 있다가 릭의 고백을 승낙했다. 즉답에 가깝게 떨어진 승낙에 놀란 건 릭이었다.
그 뒤로 키스도 했고. 같은 침대에서 잠도 잤고. 살도 섞었다. 연애 진도는 좀 더 더디게 흘러가지 않을까 싶었으나 릭의 예상보다는 일사천리였다. 적당히 이쯤이면? 싶을 때 하지 않겠소 하고 권유하면 벨져는 적당한 릭의 생각에 맞추어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침대에서도 알아서 다리를 벌리고 제 그것 위로 올라타 허리를 흔들어 주셨으니 황송하기까지 할 따름이지.
여튼. 이제 안타리우스는 없다. 연애를 하면서도 마음에 걸렸던 모든 큰일들에 종지부가 찍히지 않았나. 서른 셋과 스물 여섯. 세상도 안정되었고. 슬슬 이 연애도 안정적인 결말을 맺을 때라고 릭 톰슨은 생각한다.
곱게 감춰둔 작은 상자를 테이블 위로 꺼낸다. 파란 공단 리본이 매인 검은 상자다. 그것을 손끝으로 살짝 밀어 벨져의 앞에 놓았다. 옆에 있는 빨간 장미 다발이 썩 잘 어울린다. 상자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든다. 파란 시선이 따라 올라와 정면에서 마주했다. 벨져. 푸른 눈이 릭을 또렷하게 바라본다.
“나와 결혼해 주시오.”
무슨 영화처럼 바람이 불었다. 벨져는 릭을 빤히 바라본다. 눈을 쳐다보다가, 내밀어진 상자를 보고, 다시 눈으로 시선을 든다. 결혼? 되묻는 말에 릭이 고개를 끄덕인다.
“릭 톰슨. 보기보다 제멋대로인데. 성질도 급하군?”
“급하다니 그런 섭섭한 말을. 우리가 연인 관계가 된 뒤로 얼마나 지났다고 생각하는 거요? 아니, 아니야. 시간은 중요하지 않지. 하지만 그대도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대를 사랑해. 게다가 이제 세상은 평화로울 뿐이니 그대도 쉴 때가 되지 않았을까. 벨져, 당신이 내 곁에서 쉬었으면 좋겠소. 그대 생각은 어떻지?”
벨져는 릭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사선으로 돌리고 얼굴 앞에서 깍지를 낀다. 흐음…. 릭은 벨져가 가만히 고민할 때 가끔 흘리는 저 별거 아닌 소리를 제법 귀엽다고 생각했다. 버릇이오? 당신답지 않은 귀여운 버릇이군. 이라고 했더니. 자기는 그런 소리를 낸 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던가. 몰래 녹음해서 들려준 순간 또 으음하고 묘하게 앓는 소리를 흘리던 것까지. 저 차가운 검사는 이상한 곳에서 얼이 빠진 구석이 있다.
푸른 눈이 릭을 흘끗 쳐다본다.
“지금 꼭 답해야 하나?”
애매한 대답에 릭이 눈을 크게 뜬다. 벨져 홀든이 이런 애매한 대답이라니? 성질도 급해서 항상 싫다 아니면 좋다로 확실하고 빠르게 답하곤 했는데. 설마 이제와서 연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우회적인 표현을 쓰고 있는 걸까.
저도 모르게 몸을 테이블 위로 내민다.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뭔가 걸리는게 있소? 가문? 내가 미국인이라? 그대보다 돈이 없어서?”
릭의 격정적인 반응에 벨져가 퍼뜩 정면을 향한다. 약간 당황한 기색이 보인다.
“그럴 리가.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 착각하지 말도록. 금전적인 문제도 아니다. 그러니까…아니, 내 설명이 부족했군. 지금은 불가능하다. 답할 수 없어. 지금은. 지금은 이다. 일주일을 줘. 일주일이면 충분해. 지금은 받아들일 수 없다.”
“어차피 받아들일 거라면 대체 뭐가 문제요?”
연인의 이런 어정쩡한 반응을 릭은 처음 보았다. 매사에 칼 같고 모 아니면 도로 답하는 벨져 홀든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모호한 답변이라니. 뭔가 있군.
그리고 돌아온 벨져의 답변에 릭의 표정이 얼어붙기까지 딱 3초가 걸렸다.
“정혼자가 있다.”
정혼자? 상상도 못한 단어다. 정혼자. 혼약자. 벨져 홀든이 귀족이라는 걸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법한 존재다. 다만 지금까지 벨져가 그 사실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안 했었다는 게 이상할 뿐.
좋은 면으로도 좋지 못한 면으로도 지나치게 솔직한 사람이다. 지나치게 진지하기도 하다. 벨져가 결혼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연애를 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네 청혼을 받아들이려면 그걸 먼저 파기해야……릭. 왜 그런 눈으로 보는지 모르겠군.”
아무도 없다고는 하지 않았으니 거짓말은 아니겠지. 단. 그 혼약자인지 하는 사람과 아무 일도 없었다면.
벨져가 저 성격에 집에서 정해주는 사람과 순순히 결혼을 약속했을 리는 없다. 분명 뭔가 있을 텐데. 머릿속을 스치는 여러가지 기억이 릭을 혼란스럽게 한다.
“지금까지 나와 나눈 사랑은 모두 거짓이었소? 키스도 잠자리도. 이런 감정도 전부 내가 처음이라고 했으면서!”
릭이 버럭 소리질렀다. 벨져가 대꾸한다.
“워낙 어린 시절에 했던 약속이라 완전히 잊고 있었을 뿐이야. 정혼자와 성행위를 왜 같이 취급하는지 모르겠군.”
“그러면…설마 제레온 프리츠의 후처로 들어간다는 건 아닐 거라 믿겠소.”
이번에는 벨져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저 릭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그럴듯한 예상을 말했을 뿐인데 저 표정은 대체 뭔지. 이상하게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슬쩍 설명을 덧붙인다. 그런 거 있잖소, 저 커서 제레온 아저씨랑 결혼할 거에요~같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벨져가 철로 된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농담은 적당히 해라 릭 톰슨! 제레온 경이 그런 걸로 혼약을 해주실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상대는 내가 고작 한 번! 본! 이름도 모르는 남자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랑 왜 혼약을…? 정략결혼이오? 그대가 집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고? 그거야말로 믿을 수 없군.”
“아니. 제레온 경께 데려가줄 테니 커서 자기를 도와달라는 말에 넘어갔었다. 적당히 서류를 읽지도 않고 서명한 내가 어리석었지.”
벨져가 고개를 홱 돌렸다. 릭은 도저히 할 말이 없다. 무슨 납치유괴범의 수법도 아니고. 아마도 어린 시절이었겠지만 벨져가 그런 거에 넘어간다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무 말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대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가. 간신히 입이 떨어진다.
“벨져 홀든이 그랬다니 믿을 수 없군.”
“난 그때 고작 여섯 살 이었다. 이십 년 전의 약속이야. 결혼의 의미도 몰랐다는 건 변명이지만, 그렇다.”
“상대는 어떤 사람이오?”
“북쪽 성의 성주라고 했던가. 어린 시절의 내가 봤을 때도 까마득한 어른이었으니 너보다 스무 해는 더 살지 않았을까 싶군.”
여섯 살의 벨져 홀든. 릭은 사진으로 딱 한 번 본 적 있는 벨져의 유년기 모습을 떠올린다. 사진으로 봐도 억 소리가 나게 예쁘장한 얼굴이었으니 실물은 더 굉장했겠지. 적당히 미래를 보고 침을 발라놓는 심정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두 달 전, 집으로 약속한 때가 되었다는 통첩이 날아왔다. 숨길 생각은 없었다. 혼약은 파기하고 올 셈이고. 그리고….”
그리고…. 벨져답지 않게 같은 단어를 두 번 반복하며 말을 흐린다.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린 하얀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굳이 지금 말할 필요는 없겠군.”
“벨져?”
“네 청혼을 받아들일 때. 말하도록 하지.”
일주일 안에 돌아오겠다. 벨져는 분명 그리 릭에게 약속했다. 벨져 홀든이라는 자는 시간 약속에 까다로운 사람이다. 약속을 어기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그렇기에 릭은 가만히 일주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벨져와 만난지, 그 뒤로 일주일이 지났다.
벨져는 하염없이 숲을 걷는다. 서둘러야 한다. 남은 시간은 앞으로 일주일.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까? 얼마나 먼 곳인지는 안다. 벨져 홀든은 워낙에 명석한 아이였기에 제 걸음으로는 사실 이미 늦었다는 사실도 아주 잘 깨닫고 있었다. 그래도 출발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길을 몰랐지만 출발을 망설일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저 기억하는 방향으로, 벨져는 혀를 한 번 차고, 고용인들 모르게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다.
제레온 프리츠의 생일이 일주일 뒤로 다가왔다.
벨져 홀든에게 있어 제레온 프리츠의 생일은 그 어떤 성인의 축일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신일보다도 더 가치 있는 날이다. 석 달 전부터 잊지 않으려 날짜를 세어온 제 첫째 동생이 그렇게 아니꼬웠던 걸까? 묘하게 들뜬 제 모습을 보던 다이무스 홀든의 그 불쾌한 얼굴이 벨져의 뇌리를 스친다.
이틀 전, 다른 가족들과 함께 프리츠 가로 떠날 예정이었다. 출발 시각은 저녁. 준비는 되었겠지 다이무스, 벨져, 이글?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건 아침 식사 직후였다. 잠시 훈련을 하다가, 점심을 먹고. 갑자기 잠이 쏟아져서……. 눈을 뜨니 해가 뜨고 지기를 두 번이나 반복하지 않았나. 점심 식사에 무언가 들어있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범인은 멀리 생각할 필요도 없이, 벨져의 세 살 많은 형, 다이무스 홀든이리라. 벨져는 그렇게 확신한다. 자신이 제레온 프리츠와 있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니 슬쩍 재워놓고 잠든 모양인데 저희끼리 출발하죠, 같은 말이라도 했을 것이다. 쓸데없는 짓을.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제 형의 그림자에 벨져는 이를 악문다.
돌아오면 결투라도 신청할까? 저도 모르게 허리춤에 찬 칼을 만지작거린다. 아직 굳은살이 박이지 않은 어린 손은 검은 장갑에 곱게 담겨 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반복한 대련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썩 좋은 결과는 도출해 낼 수 없다. 대략 반년 전, 축제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다이무스 홀든은 그전보다 훨씬 강해졌으니까. 이미 반년 사이 몇 번인가 칼을 맞대며 차이를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차이. 지금의 다이무스는 그야말로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힘의 차이도 모르고 분노에 타오르는 불나방처럼 덤빌 만큼 둘째는 어리석지 않다. 결투는 좋은 방법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형이 원하는 대로 얌전히 집에 있을 만큼 고분고분하지도 않다. 프리츠 저택에서 저를 발견할 첫째의 좁아질 미간을 생각하며 벨져는 제 기분을 달래기로 했다.
저택을 나온 뒤로 반나절을 계속 걸었다. 강을 하나 건넜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높은 나무가 빼곡한 숲으로 들어섰다. 이어지는 숲은 끝날 줄을 모른다. 그렇게 해가 저물고도 하염없이 걸었다. 걷고 걷고 또 걷고. 새카만 밤이 나무 사이로 내려앉을 무렵, 시선 끝으로 불빛이 보였다.
‘민가인가?’
이런 숲 깊은 곳에 사람이 산다고?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도 벨져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빛 쪽으로 다가갔다. 작은 오두막이다. 잘 되었다면 잘된 일이다. 숲에 사는 사람이라면 길도 알고 있겠지. 비록 1초가 아까운 시간이지만 불확실한 길을 계속해서 걷는 것보다 길을 확인하고 가는 것이 더 시간을 절약하는 길일 것이라고 벨져는 생각했다.
똑똑. 노크를 했으나 대답은 없다.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주먹을 쥐고 문을 세게 두드렸다. 쾅 하고 치는 소리가 세 번. 나무로 된 두꺼운 입구 너머로 작은 발소리가 울린다. 이어서 남자의 목소리. 잠깐 기다리시오! 문이 열린다.
“거 참, 문이 부서지겠어. 옆에 초인종은 보이지도 않나?”
짜증스런 음성과 함께 실내의 조명이 문밖으로 길게 드리웠다. 집주인인가 싶은 남자가 고개를 내려 벨져와 시선을 마주한다. 머리가 하나하고 반 정도 더 높이 있는 남자다. 아마도 어른. 빛을 등진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갈색 머리카락, 맑은 녹색 눈, 부드러운 얼굴은 인상이 좋다.
남자는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변을 두리번거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다시 벨져를 바라본다.
“누구시오?”
“길을 찾고 있어. 프리츠 저택은 어느 쪽이지?”
지극히 고압적인 어조다. 까마득하게 어려 보이는 아이의 건방진 태도는 아무래도 좋은지 남자의 표정이 굳지는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 질문에 답하지도 않고. 그저 놀란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어 음, 그러니까. 입가를 긁적이며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간신히 입이 열렸다.
“당신 혼자요? 부모님은?”
나 말고 누가 더 있다는 거지? 잠시 대화가 오가고 곤란한 듯 눈을 찌푸리더니, 남자는 몸을 옆으로 비켜선다.
“밤이 늦었으니 일단 들어오시오.”
“시간이 없다. 대답이나 해. 바로 떠나야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더 대답할 수가 없겠군. 이 근방엔 맹수가 나오거든. 어른으로서 아이를 혼자 숲에 내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게다가 밤에 숲을 걷다간 길을 잃을걸. 해가 뜨면 보내줄 테니 머물다 가는 게 현명한 판단일 텐데.”
남자의 주장에 호응하듯 멀리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무의식중에 허리춤의 칼로 손이 닿는다. 아무리 축제조차 거치지 않은 반쪽짜리 검사라고는 하지만 나면서부터 검을 쥐도록 훈련받은 몸이다. 짐승 한두 마리 정도야 충분히 베어 넘길 수 있으리라. 허나 새카만 밤의 숲이라는 험한 환경에서, 위험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을 노출할 필요가 있을까. 이성이 그리 말한다.
“알겠다. 실례하지.”
반나절 이상 비슷한 풍경을 계속 걸은 탓에 쌓인 피로도 있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휴식을 취하는 편이 좋다는 건 아주 잘 안다.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무거운 문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문득 떠올렸다.
눈앞의 남자가 과연 안전한 사람일까?
벨져는 그제 와서야 오늘 처음 보는 남자의 신변에 대해 생각한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문을 두드렸고, 집으로 들어오라 하는 지금도 남자가 위험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렇게 이 남자를 상대로 위험감을 갖지 않는 근거가 있나? 남자가 선량하게 보여서? 고작 가죽에 불과한 외견이 안전할 것 같은 느낌의 근본이라면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그뿐이 아닐 텐데. 뭘까. 생각하다가, 생각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내린 결론이다. 번복은 무의미했다.
넓지는 않은 오두막이다. 들어서자마자 식탁이 보이고 약간 구석에 침실이 있다. 남자는 식탁의 의자를 당겨 벨져를 손짓한다. 벨져는 남자가 손짓하는 대로 의자에 앉으려 했으나 의자가 높아 땅에 발이 닿지 않았다. 남자가 부엌 구석으로 향한다. 푸른 눈으로 그 움직임을 좇았다. 냉장고를 열어 무언가를 들고 남자는 다시 식탁으로 다가온다.
릭 톰슨이오. 당신은?
“벨져 홀든.”
벨져보다 훨씬 큰 손이 벨져 앞으로 컵을 내밀었다. 하얀 우유로 반쯤 채워진 파란 머그컵이다. 맥주는 몇 년 더 있어야 마실 수 있겠군? 맥주캔을 따며 너스레를 피워 웃는 얼굴에 벨져가 미간을 좁혔다. 아이 취급은 썩 달갑지 않다.
릭은 저 바다 너머에서 왔다고 한다. 장기 휴가를 내어 일을 쉬고, 휴양 겸 숲 속의 오두막을 하나 빌려 머물고 있다고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휴식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나. 이런 구석진 숲이라면 사람이 오지 않으니 마음대로 쉬기에는 더할 나위 없다는 것이 릭의 주장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벨져가 여기까지 와버렸지만. 확실히 홀든 저택을 제외하면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사흘은 걸어야 하니 일리는 있다.
한손으로는 맥주를 들이켜며 다른 손은 옆에 말려 세워져 있던 지도를 식탁 위로 도르르 편다.
“프리츠라고 했나?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런 먼 곳에 가는건지 모르겠지만, 긴 여정이 될 텐데 괜찮겠소?”
다시 말리려하 는 지도의 끝자락에 릭이 컵을 얹는다. 다시 맥주를 한 모금 입에 대면서 녹색 눈이 벨져를 곁눈질했다. 그 손끝이 지도 위의 한 지점을 톡톡 친다. 그 손끝을 가만 보았다. 여기는 이쯤이고. 릭이 설명을 시작한다. 손끝이 지도 위를 미끄러져 멀리에서 멈춘다. 프리츠 저택은 이쯤이지. 음성과 함께 시선이 얽힌다.
“보시오. 산을 네 개 넘고, 강을 두 개 가로질러야 하오. 걸어서라면… 당신 걸음으로는 못해도 열흘은 족히 걸릴 거야.”
지도 위를 손끝으로 두드리는 소리. 녹색 눈이 벨져를 위아래로 훑는다. 릭의 확신에 찬 어조에 벨져는 눈을 찌푸렸다. 열흘? 묘하게 깔보는 듯한 말투가 신경을 긁었으나 벨져 자신도 그 정도는 걸리리라 각오하고 있었기에 무어라 반론을 할 수가 없다.
시간이 없다. 식탁 위로 얹어놓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는 또 제레온 경을 찾는 건가. 머리 한 통 위에서 내려다보던 얄미운 형제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거지 같은 다이무스 홀든.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집으로 돌아온 다이무스는 담담하게 그리 말하겠지. 네가 가봤자 제레온 경께 폐만 끼치지 않겠나. 생각만 해도 화가 치민다. 폐를 끼친다고? 형은 그냥 내가 제레온 경을 따르는 게 싫은 거잖아. 내뱉어봤자 듣지도 않을 말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짧은 인생을 통해 알고 있다.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도착해야 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러나온 음성은 벨져 홀든답지 않다. 한탄과 절망, 패배감이 묘하게 섞인. 아직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묘안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대책 없이 그저 밀어붙여서 해결될 것은 없다고 어린 홀든은 교육받았지만 물리적인 거리는 어쩔 도리가 없다.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릭은 고개를 숙인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이를 가만 바라보았다. 턱을 받치고, 견과류를 집어 입에 넣는다.
“프리츠 저택에는 무슨 볼일이?”
“제레온 경의 생신이다.”
제레온 경? 릭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멀리서 왔다더니 제레온 프리츠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모양이었다. 프리츠 저택의 위치는 알면서. 라고 하기에는 워낙 큰 저택이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벨져는 고개를 한 번 좌우로 젓는다. 캔이 식탁 위로 소리내어 놓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다른 캔이 소리내어 따인다. 식탁 위에 놓인 캔은 어느새 세 개째다.
잘도 마시는군.
꼴깍꼴깍 삼키면서 움직이는 목젖의 움직임이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벨져 주변에 저렇게 술을 벌컥벌컥 마시는 사람은 없기에 조금 신기하기도 하다. 마시는 모습을 흉내라도 내듯 우유를 한 모금 입에 넣는다. 컵을 내려놓고 입가에 묻은 우유를 닦으려 했지만 닦을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벨져를 잠시 보다가, 릭이 말을 시작했다.
“하긴…그 제레온 경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군. 어쨌건, 길은 알려줄 수 있는데…걸어갔다간 제때 도착하는 건 무리일 거요. 나흘이라니 택도 없지.”
전부 사실이고 맞는 말이다. 날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나흘 안에 프리츠 가에 도착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치고 벨져는 자신을 감싸는 처절함과 비참한 감각에 이를 악문다.
패배를 확신하면서도 가야만 한다. 열심히 가면 엿새 안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라도 제레온 경의 생신을 직접 축하할 수만 있다면…. 아니 그래서는 의미가 없다. 어떻게 해서든 제때 맞춰 도착해야만 한다. 늦는다고 문전박대할 제레온이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욱.
절박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릭은 태연한 어조로 말문을 연다.
“원한다면 내가 데려다줄 수도 있소. 눈 깜짝할 새에.”
“방법이 있나!?”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의자 위에 무릎으로 선 채로 두 손을 식탁 위로 내리 짚는다. 몸을 앞으로 내밀었지만 묘하게 식탁이 넓은 탓에 릭까지는 아직 거리가 꽤 있다.
그리고 깨닫는다. 릭의 말이 벨져의 상식으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평소의 벨져라면 나를 조롱하는 건가, 혹은 허무맹랑한 소리는 집어치라 했을 것이나,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함이 판단을 흐리게 한다. 속았나? 이제 와서 의심을 품으면서도 기대를 버릴 수가 없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억지로 타액을 삼키며 릭의 녹색 눈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녹색 눈이 깜빡깜빡 벨져를 비춘다. 잠시 시선을 돌리기도 했다가, 검지 끝으로 제 뺨을 긁적였다. 음…. 한심한 소리. 묘하게 잡고 늘어지는 간격이 벨져의 혀를 바싹 말린다. 탁탁. 작은 손끝이 식탁을 두드린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릭. 참지 못하고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 릭이 오른손을 어깨 위로 들었다.
무언가의 신호 같기도 하다. 반사적으로 손을 따라 벨져의 시선이 올라간다. 릭은 손을 허공에서 몇 번 휘젓고, 헛기침했다. 그러자 손이 갑자기 생겨난 새카만 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고개를 갸웃할 새도 없었다. 손의 행방을 찾으려 하기도 전에, 바로 얼굴 앞으로 손이 나타났다. 벨져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다. 놀라는 벨져의 입가를 커다란 손이 손등으로 닦아준다. 그리고 작은 코를 살짝 쥐었다. 푸른 눈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깜빡일 뿐이다. 릭이 싱글싱글 웃었다.
“이런 뜻이오. 난 공간능력자거든. 사람도 옮길 수 있어. 어디라도 몇 초 안에 도착할 수 있지.”
손은 다시 검은 구멍으로 사라져 제자리로 돌아갔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벨져 앞에서 릭은 보란 듯 아까의 그 손끝으로 작은 동전을 튕기기 시작한다. 위로 날려지고, 다른 방향으로 떨어지나 싶다가도 검은 구멍에 쏘옥 빠져서는 릭의 손 위로 정확하게 떨어진다. 그런가 하면 허공에서 검게 삼켜지더니 주먹을 쥔 손 안에 고이 담겨있기도 하다.
눈이 떨어지지 않는다. 푸른 눈을 가늘게 뜨고 제 손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벨져에게 릭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다.
“신기하지?”
“그…렇군.”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공간능력자라니. 물론 이 세상 모든 능력자를 벨져가 알던 것도 아니지만. 저 정도 능력이면 풍문으로나마 흘러들어올 법한데. 아니, 저 능력을 써서 자신의 능력을 감춘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두 눈은 릭의 손끝에서 희롱당하는 작은 동전의 움직임을 따라 바쁘게 움직인다.
여기까지요. 손장난은 릭이 동전을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끝이 났다. 그제야 벨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릭과 눈을 맞춘다. 싱글싱글 웃는 릭 톰슨의 여유로운 표정이 어딘가 얄밉다. 하지만 이거면 분명 충분하다. 아니, 오히려 과한 능력일 것이다.
나를 데려가.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 릭이 몸을 내밀어 벨져의 입가에 제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쯧쯧. 혀를 차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푸른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감한다. 그리고 그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내 능력을 맨입으로 이용하겠다는 거요?”
장난스레 웃는 릭에게서 악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의자 깊이 묻고, 벨져는 숨을 들이킨다. 과열되어 있었다. 침착해야 한다. 릭이 말을 잇는다.
“아홉밤을 눈 깜짝할 새로 줄이는 황금 같은 수단이 아니겠어? 그에 걸맞는 무언가를 줘야지.”
정론이다. 오늘 처음 본 남자가 거기까지 도와줘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아무런 대가 없이 친절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벨져가 원하는 바도 아니다.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게 뭐지?”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대 같은 어린 아이에게 거금을 가져오라거나 하지는 않아. 음……도착해야 하는 날까지 일주일이 남았다고 했지? 닷새간 내 뒤치다꺼리를 도와주는 정도면 괜찮을까? 그러니까. 설거지나 식사준비 같은? 전날 저녁에는 도착하게 해주겠소.”
“좋다.”
그렇게 벨져 홀든과 릭 톰슨의 소소한 계약이 성립되었다.
그 날은 밤이 깊어 일단 수면을 취하기로 했다. 잠옷은 릭이 흰 티가 많다며 적당한 것을 빌려주었다. 정말 맨몸으로 집을 뛰쳐나왔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이렇게 아무 대책없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을. 한숨을 쉬는 벨져의 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세안을 마친 릭이 웃으며 말을 건네온다. 침대가 넓은데 괜찮으면 같이 어떻소? 저렇게 넓은 걸 두고 그대를 소파에서 재우자니 내 마음이 아프군. 난 상관 없다. 아마도 이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으리라.
케스자리는 믹스존이라 좀...묘한데
토욜 일반:M26/레드:M07 일욜일반M25/레드M08
일케에여
나머지는 > http://blog.naver.com/cottonsmilk/220715669913 요기 요거들구가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