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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타입에 좀 샘플왕창올려두엇슴다
물이 없는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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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마부(@eaglet2775)님
릭벨. 환생+현대. 21x14.
어떤 이유로 벨져를 의심하는 릭과 릭을 많이 좋아하는 벨져.
이상과 현실이 달라서 생기는 문제.
자기멋대로 꿈꾸는건 별로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샘플은 교정xㅎ...
말을 마친 릭은 만족스레 입을 닫았다. 릭의 말에 벨져의 두 눈이 가늘게 찌푸려진다. 담아서 묵혀두기만 했던 말은 그저 입밖으로 내뱉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해방감이 말을 못할 정도였다. 소파에 앉은 벨져와 그 앞에 무릎을 내린 릭. 마치 무언가를 서약하는 장면 같기도 하다. 아직 한참 작은 두 손을 감싼다.
2년을 기다렸다. 무더운 햇빛이 내리쬐던 여름날로부터 2년. 꼬박 2년을 그저 바라만 보며 인내했다. 좋은 친구로 지냈다고 생각한다. 까마득하게 아래인 눈높이를 항상 고개를 숙여 맞추었다. 그 높이로 느껴지던 7년이라는 차이가 어찌나 크던지. 이미 성장을 마친 상태에서 만났던 옛날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가슴언저리에 닿기나 할까 싶던 작은 몸.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와는 같은듯 다르다. 이래선 아직 말을 꺼낼 수도 없겠군. 그리 생각하며 릭은 차오르는 감정을 잠시 접어 넣어두었다.
2년이라고는 해도 재회는 여름이었기에 365일을 두 번 빈틈없이 꽉 채운 건 아니다. 눈 앞에 있는 벨져 홀든은 이제 올해로 열네 살. 고작 며칠 전에 중학교에 들어갔던가. 그런 이른 봄이었다. 형이 성장을 고려한답시고 제멋대로 몇 치수 크게 샀다고 했었지. 헐렁한 교복을 몸에 걸친 모습이 아직 어색하다. 그 흘러내린 소매를 걷고 손등에 제 손을 포갰다. 아직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이 기분 좋다. 아이다운 피부를 재차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고개를 든다.
재회를 이루었던 여름날 릭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열 아홉의 소년이었다.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나 이제 스물 한 살이 된 릭은 벨져 홀든에게 고한다. 태어나기 전부터 간직해왔던 감정을.
나를 기억하고 있소? 물었던 질문에 벨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이내 저었다. 너를 기억하고 있다 릭, 하지만 불완전하군. 벨져의 말은 릭에게 그다지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 아예 잊은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릭은 그리 생각하며 손을 내민다. 다시 만나서 반갑소 벨져. 미소에 거짓은 없었다.
예전과는 확실히 다르다. 말투나 식성에 큰 변화는 없다 해도 한참 어린 외견이나, 눈높이같은. 어딘가 동행하게 될 때면 릭이 두 걸음 걸릴 거리를 벨져는 세 번을 걸었다. 항상 릭이 벨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걸 생각하면 정말 큰 차이였다. 이 작은 아이가 언젠가 릭보다 한참 앞을 걸으며 한숨을 내뱉던 청년이라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사랑스럽다고 릭은 생각한다. 다만 일반적으로 작은 동물이나 아이를 볼 때 느낄-- 대개의 사람이 저 나잇또래를 대상으로 느껴야한다고 여길, 그런 보호욕구와는 거리가 멀다. 예전에 그러했듯. 그 애정은 달콤하고 부드럽기보다는 진득하고 끈질기다. 정복욕과 독점욕이 얼기설기 얽힌 응어리에 가까웠다. 서른 셋의 릭 톰슨이 스물 여섯의 벨져 홀든에게 품었던 욕망은 예전과는 한참 달라진 그의 외견을 보고도 사그러들 줄을 몰랐다. 릭은 외견 그대로의 벨져를 보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기다리기로 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몇 십 년을 묵힌 감정은 지금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격렬했지만 상대의 육체는 이제 고작 열두 해를 자랐을 뿐이었다. 기억또한 불완전하다. 아무리 이 아이가 벨져 홀든이라 한들, 그 생각과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한들, 아직은 준비가 부족했다. 거기에 덧대어 당시의 릭은 아직 미성년이긴 하였으나 아직 12살에 불과한 벨져를 연인이라 말하고 다니기엔 세간의 눈이 가만 둘리가 없지 않은가. 이미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으니 더 기다리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참던 릭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기까지의 기간. 그 시간이 2년이다. 연초, 눈발이 흩날리던 겨울날 2년 전보다 머리 한 통이 자란 벨져가 문득 과거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것을 신호라고 여겼다. 그리고 초봄의 싸늘한 날에 벨져를 집으로 들였다. 벌써 셀 수도 없을만큼, 아무런 말 없이 데려가도 벨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 벨져가 릭의 집에 초대를 받아왔던 시점이었다.
그런만큼 릭의 사적인 공간을 두 사람이 공유하는 건 이미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언제나 그러했듯 벨져는 코트를 벗고 거실에 있는 작은 소파에서 릭을 기다린다. 벨져에게 적당히 마실것을 내오는 것 까지는 언제나와 같았다. 다만 두명이 앉기에 딱 적당한 소파, 릭이 그 옆자리가 아닌 앞에 무릎을 내렸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양손에 든 두개의 컵은 잠시 탁자 위로 밀어둔다. 잔을 받아들려했던 작은 손이 허공에 남겨진다. 눈을 살짝 찌푸리는 벨져의 손을 감쌌다. 그렇게 둔한 사람은 아니기에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으리라. 릭의 손에 쥐어진 손이 움찔거린다. 벨져. 부드럽게 깔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 듯, 벨져는 주어지는 시선을 받아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릭은 긴장에 마른 입술을 떼었다.
짧고 명료한 고백이었다.
받아 줄지 아닐지, 그런 예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더이상 주체할 수 없게 된 감정을 내뱉었다. 만족스러웠다. 그 짧은 말로 끝날 감정이 아니었으나 이미 제 감정은 세상의 어떤 언어로도 표현이 불가능했다. 숨을 고른다. 감싼 손을 다시 매만진다. 그리고 묘한 기시감. 릭은 생각한다. 가만 보자, 비슷한 일이 있었던가? 어린 벨져의 모습에 스물 여섯의 그 모습이 겹쳐진다. 희뿌연 기억을 완전히 떠올리기 전에 벨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진심인가?"
역시나 못 믿겠다는 눈동자. 그야 믿기 힘들것이리라. 그나마 벨져는 순수하게 14년의 인생만을 산 소년이 아니기에 덜 이상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아니 그래서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저 어느정도 친근한 사이이자 동료-- 였던 남자가 뜬금없는 사랑고백이라니. 하지만 그래 그래도 분명 고백은 처음이 아닌데. 기억은 제대로 나지 않지만서도.
"기억하지 못하는군, 벨져."
저도모르게 말이 먼저 나왔다. 쓸쓸하게 들리는 릭의 말에 벨져가 시선을 내린다. 작은 입술을 굳게 다문다. 그리고 고민하나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그런 관계였나? 아직 그런 기억은 없다만. 내가 잊은 거라면 사죄해야겠군."
"아니, 아니야. 그런 관계는 아니었지. 내 말은 잊어주시오. 아니, 내 말은 내가 방금 했던 말만 잊어달라는 뜻이야. 그대도 잘 알고있겠지만."
뭔가 대화가 꼬인다.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이미 입에 담아버린 말을 어쩔 수는 없다. 릭, 진정하게. 벨져가 한숨을 쉰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머리를 긁적이며 멋적게 입을 연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저 곁에 있어주기만 해도 좋소. 그런 뜻이야."
고개를 숙인다. 실수했군.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그만 허둥지둥 해버리고 말았다. 벨져 입장에서는 꽤 우스운 광경이었겠지. 그리 생각하는데, 눈앞으로 새카만 어둠이 흩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전인가? 릭은 눈을 깜빡인다. 바닥이 삐걱이는 소리. 창밖으로 후두두 빗소리가 난다. 새빨간 커튼이 펄럭였다. 열린 창으로 비가 들이친다.
"정말 그걸로 만족하나?"
귀에 닿는 한숨. 릭은 깜짝 놀라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다. 빛이 눈앞을 하얗게 물들였다. 뒤이어 굉음.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린다. 번쩍이는 빛이 밝히는 얼굴은 분명 릭이 기억하는 스물여섯의 벨져 홀든이다. 열네 살의 그는 온데간데 없이 먼 시간을 거슬러올라간 그가 눈앞에 있다. 여전히 답답하군. 벨져가 고개를 젓는다.
기뻐해야하나? 릭은 잠시 생각한다. 하지만 고백에 있어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다. 스물여섯의 벨져 홀든은 분명 고개를 저을 것이기에. 그리고 벨져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쉰다. 릭은 그 속눈썹이 다시끔 올라가는 광경을 지켜보며 숨을 들이켰다. 검은 장갑에 쌓인 손이 릭의 손을 쳐낸다. 의자에 몸을 묻고 다리를 들어 꼬았다. 이제 그가 고개를 저을 타이밍이다. 붉은 입술이 열린다. 릭은 그 위의 푸른 눈을 응시한다.
"--사사로운 감정에 허비할 시간은 없다."
냉담한 선고가 릭의 목을 친다. 차가운 시선이 몸을 꿰뚫고 먼 곳을 바라본다. 그 눈에 릭의 모습은 비치지 않는다. 매몰찬 반응에도 릭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 이래야 벨져 홀든이 아닌가.
모든 기억이 머리를 스친다. 마치 번개처럼, 순간을 틈타 뇌리에 새겨졌다. 릭은 과거를 거슬러 그 때 그 자리로 돌아간다. 어딘가의 전장. 검을 집어넣는 벨져를 불러세웠다. 싸늘한 두 눈에 릭이 담긴다. 벨져. 릭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고백. 뜬금없지만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벨져 홀든을 향한 릭 톰슨의 감정은 최고조에 달해있었다. 도저히 마음을 전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그 고백을 벨져는 지금과 같은 말로 거절했었지. 사사로운 감정에 허비할 시간은 없다.
소파에서 일어선 벨져가 검을 빼어든다. 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졌다. 릭 톰슨, 어디 정신을 두고 다니는 거지, 정신 차려라. 알고있소 벨져.
"전장으로 향할 시간이다."
게이트를 열어. 일어선 벨져가 매끄러운 동작으로 허리를 숙인다. 망토가 위로 펄럭였다. 머리카락이 가늘게 아래로 떨어진다. 무릎꿇은 릭에게 가까워오는 얼굴. 차가운 손가락이 턱을 쓸었다. 릭은 그와 엇갈리듯 손을 위로 뻗어 머뭇머뭇 부드러운 볼에 손끝을 댄다. 시린 옥색 눈동자는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얕아야 할 바다로 빨려드는 감각. 길어진 싸움에 자라버린 손톱이 하얀 볼을 긁었다. 릭의 손톱을 따라 붉은 자죽이 남는다. 그대가 가야할 곳이라면 어디든. 그 말에 벨져가 미소짓는다. 귓가로 울리는 굉음.
소리가 귀를 찢는다. 다시끔 천둥. 깜빡깜빡 눈을 떴다. 빗소리가 귀를 메우고있다. 후덥지근한 여름의 습기가 피부에 들러붙는다. 침대 위였다. 어슴프레한 새벽의 어둠에 잠긴 하얀 천장으로 가만히 시선을 두었다. 두 번, 세 번, 넷, 다섯, 여섯 번. 그리고 몇 번을 더 깜빡이고서야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중략)
부르는 소리. 릭은 눈을 뜬다. 결국 깜빡 잠이 들었던가. 열차는 텅 비어있다. 역을 지나친 걸지도 모른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귀를 메운다. 다음 역은 어딘가라고 스피커가 웅얼거린다. 그 발음이 뿌옇게 뭉개진 채 귓가에서 흐트러진다. 눈앞에 선 새카만 그림자.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조금씩 들었다. 눈이 닿는 곳에서부터 그림자는 형체를 잡아간다. 검은 바지에 쌓인 얇은 다리, 허리춤에 찼던 긴 칼과 짧은 칼 두 자루 허리, 손, 팔, 어깨, 목, 얼굴. 전신이 선명하게,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하얀 조명이 그 뒤에서 쏟아져들어와 얼굴을 새카맣게 태웠다. 전등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깜빡인다. 빨간 물을 뒤집어 쓴 하얀 머리가 빛을 반사한다. 핏기가 가신 창백한 피부에 새빨간 입술이 시선을 끌었다.
누군가가 소리친다. 귓가로 쏟아지는 폭언은 머릿속까지 닿지 않는다.
누구나가 고개를 저으며 오만한 홀든이라 했다. 다만 릭은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오만이란 그러하지 않은 자가 타인을 업신여길때에 비로소 쓸 수 있는 단어다. 벨져 홀든은 그 누구보다 위에 있으며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자였다. 그런 자의 판단을 오만이라 할 수 있을까? 릭 톰슨에게 있어 벨져 홀든은 절대 그 자체였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다. 그러니까 그를 한 단어로 말하자면 마치 신과도 같은. 다만 릭 톰슨은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시계가 잔뜩 감긴 팔을 뻗는다. 손이 역광으로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볼에 닿았다. 치적한 혈액이 손끝에 늘어붙는다.
모두 그대가 죽었다 했지만 그럴리 없지.
새빨간 피를 흘리던 그에게서 억지로 떼어내졌을 때에도 그가 죽지 않았음을 릭 톰슨만은 알고있었다. 벨져 홀든은 죽지 않을 자였다. 죽지 않는다고 릭은 알고 있었다. 벨져 홀든을 이루는 수많은 단어중에 죽음이란 없을 것이 명백하므로. 모든 이가 부정한다 하더라도 릭은 알고 있다. 릭은 그렇게 알고 있다. 릭만이 알고있다. 릭의 벨져 홀든은 그러했다.
"돌아왔군, 벨져."
릭은 닿지 않을 혼잣말을 입에 담는다.
시선의 끝에 선 벨져는 항상 보다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도 대동하지 않은 채 넓은 황야에 홀로 있었다. 그러다가 이따금 릭이 곁에 서는 것을 허락했다. 그에게는 고독도 외로움도 없었다. 홀로 선 그 자체가 완벽한 사람이었다. 릭은 그 곁에 제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런 릭을 바라보는 벨져의 표정은 조금 달랐지만서도.
벨져는 항상 그랬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릭을 바라보곤 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과거의 기억으로 추정하는 것이기에 확신은 할 수 없다. 처음에는 그저 좀 더 차가운, 무감정한, 그가 그보다 못한 수많은 자들을 바라보는 그런 눈으로 릭을 바라보았다고 릭은 기억한다. 그랬던게 어느새인가 미소같은 보다 풍부한 다른 감정을 담다가, 또 시간이 흐르니 먹먹한 얼굴로 변했다.
릭이 벨져 홀든이라는 자를 마음에 두고있다고 처음 자각했던 게 언제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처음만난 순간이었을 수도 있고, 네 시간의 여행이 끝났던 시점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명확한 순간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어느 순간 릭은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고백은 벨져가 제법 릭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했던 시점에 이루어졌다. 지나가는 말로 마음을 전했다. 뜬금없기는 했으나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그대를 사랑한다 입에 담은 릭에게 벨져는 담담하게 고했다.
사사로운 감정에 허비할 시간은 없다.
분명한 거절이었다. 릭은 분명 벨져를 원했다. 독점하고 싶었고 소유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릭은 벨져의 거절에 낙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거절로 인해 릭의 벨져 홀든은 더욱 완벽해지지 않았던가. 벨져 홀든이라면 그래야만 했다. 릭의 벨져는 그러했다. 릭 톰슨은 그 결과를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그가 가진 벨져 홀든을 향한 욕망과는 별개로.
누구보다 고귀한 존재다. 누구도 더럽힐 수 없고 누구에게도 더럽혀지지 않을 사람이다. 그리 되어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몇 번을 망상했던가. 두 칼을 쥐는 저 손에 제 성기를 쥐게 하고 패자를 짓밟는 몸을 제 아래에 두는 순간을.
모순이라면 모순이다. 다만 릭은 두가지 욕망이 모순됨을 알지 못한다. 그저 순간순간 바뀌는 제 욕망에 진심을 둘 뿐이었다.
알고 있소 벨져? 내가 그대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아니 아마 알고 있었겠지, 그대라면.
볼을 매만지던 손은 명백한 의사를 가지고 목으로 내려간다. 뜨거운 손끝에 닿는 차가운 감촉. 끈적하게 늘어붙는 혈액을 하얀 피부에 펴바른다. 벨져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릭을 내려다 보기만 한다. 그 눈빛은 여전히 어딘가 개운치 않다.
나를 항상 그런 식으로 보는군. 어째서요?
릭은 몇 번인가 그렇게 물었다. 대답은 없다. 몸이 흔들린다. 그 바람에 손이 떨어졌다.
열차가 크게 흔들렸다. 머리가 뒤에 부딪힌다. 충격에 눈이 뜨였다. 사람은 조금 줄어있다. 정면으로 푹 잠들어 옆으로 쓰러진 회사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여학생. 열린 문. 도착을 알리는 스피커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릭은 헐레벌떡 몸을 일으킨다. 아직까지 마르지 않은 신발이 축축하다. 발에 밟히는 질퍽한 느낌. 딛은 바닥으로 물자국이 남는다. 플랫폼의 스피커에서 출발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간신히 내린 릭의 뒤로 열차가 떠난다. 시끄럽게 열차가 멀어지고 빗소리만이 남았다. 릭은 깜짝 놀란 정신을 추스르고 무거운 머리를 한번 턴다. 머리가 울린다.
방금 본-- 그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이나 꿈을 꾼 건지. 지금은 현실인가? 팔을 꼬집어 통증을 확인하고서야 한숨을 돌렸다. 용케 내릴 곳에서 깼군. 술기운이 덜 가신 머리를 쓰다듬으며 숨을 깊게 쉰다. 방금 전 차가운 피부를 만졌던 손을 바라본다. 새빨갛게 젖었던 손은 말끔하기 그지없다.
질척한 피의 감촉이 아직 남아있다. 그렇게 차가운 사람이었건만 피는 지독하게도 뜨거웠다. 새빨간 체액. 누구나가 파란색일거라 흉보던 그 혈액. 저런 놈은 피도 퍼런 색일 거라고 손가락질 당했었지. 아무래도 상관 없다며 개의치 않던 벨져. 술 탓인지 유독 옛날일이 머릿속에 맴돈다. 고개를 젓고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벨져에게 연락을 할까.
그런 생각도 잠시, 금방 그만두기로 한다. 불러서 무슨 말을 하겠나. 피투성이 당신을 보았다고? 위로라도 받고싶은 건가? 아니 그건 아니다. 지금의 벨져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위로는 되지 않는다. 어째서. 어째서냐 하면.
밤 거리는 지독히도 조용하다. 역 앞 편의점에서 우산과 맥주 두 캔을 샀다. 이미 홀딱 젖었지만 비를 더 맞고싶지는 않았다. 우산을 한 손에 들고 비닐봉투를 흔들며 거리를 걷는다. 취기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걸음이 비틀거릴 정도는 아니다. 빗소리가 잡음을 지우고 릭의 공간을 우산 속으로 좁힌다. 열차에서 본 환영이 눈앞으로 아른거렸다.
꿈? 환상? 뭐라고 해야할까. 아마도 태어나서부터 학창시절까지. 릭의 일생동안 수도없이 보았던 벨져 홀든의 잔상이다. 2년 전 다시 그 모습을 보기까지 수백 수천번을 반복해서 보았던. 하지만 요 근래 영 보지 않았던 모습이었는데.
잔상으로 남은 벨져는 눈앞에서 피를 흘리던 스물 여섯의 벨져 홀든이었다. 그보다 깨끗한 모습을 훨씬 오래 보았건만 릭의 앞에 나타나는 그의 그림자는 항상 새빨간 피에 젖어있다. 아무런 말도 않고 피를 뚝뚝 흘리며 릭의 앞에 선 청년. 아직 기억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부터 몇 번이나 본 그림자. 스물 여섯, 서른 셋의 릭 앞에 나타났던 섬광. 둘은 존재하지 않을 절대적인 존재.
(중략)
유독 자신을 바라보던 두 눈이 기억에 남았다.
벨져, 걸음이 너무 빠르군,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벨져는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저 뒤로 쳐진 갈색머리의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네 시간의 짧은 동행 이후 드문드문 길을 함께 하게 된 미국인. 이름을 릭 톰슨이라 했다. 공간 이동 능력자. 누구나가 부러워할만 한 능력을 가지고도 크게 이용할 생각이 없어보이던 괴짜. 지금껏 벨져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는 일선을 긋는, 그러니까 벨져로서는 처음 보는 성향을 가진 남자였다. 지금껏 벨져를 보는 그 누구와도 다른 미소. 항상 벨져를 향하는 그 사람좋은 미소는 벨져에겐 영 익숙해지지 않는 이질적인 표정이다. 지금까지 벨져 홀든을 바라보는 시선은 악의나 질투, 시샘과 같은 지저분한 감정이거나 혹은 관계를 포기했거나 그도 아니면 저를 이용하려하는 속셈이 뻔히 보이는 일그러진 미소였으므로.
릭은 부드럽게 웃으며 벨져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는 친근함도 있었고 종착지를 모를 기대도 있었다. 그 기대가 무엇을 향한 건지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그저 그의 표정이 어떻건간에 벨져의 행동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흘려 넘겼을 뿐이다.
잘 먹고 잘 웃고 잘 침울해하는 남자였다. 벨져의 기준으로는 약간 품위가 모자라기도 했다. 전투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인 탓인지 때로는 한심하게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런 릭에게 벨져는 딱히 칭찬도 위로도 크게 건넬 일이 없었으나 릭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친밀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벨져를 대했다. 모르는 사이에 두 눈이 릭을 쫓기 시작했다. 벨져가 그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자각했을 때였다. 마치 오늘 하늘이 맑다는 듯한 어조로 릭이 말했다.
벨져, 그대를 사랑한다 하면 믿어주겠소?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으나 릭의 말은 마치 식사라도 권하듯 자연스레 귀에 닿았다. 그렇기에 벨져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숨을 두 번 내뱉고 깨달았다. 몇 초 지나, 눈을 깜빡인다.
사랑이라고? 이정도의 놀라움을 익히 겪어보지 못했기에 얼굴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순간 벨져를 지배한 감정은 분명한 놀라움이었다. 네가? 나를? 착각이 아닌가. 나를 바라보던 너의 기대는 그런 게 아니었을텐데.
그저 동경이나 호기심이라고만 생각했다. 사랑이라니.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던 걸까. 벨져는 지독하게 당황했다.
지금까지 벨져에게 사랑을 토로한 자가 없던 건 아니다. 대개는 더러운 육욕을 사랑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하여 벨져를 지배하기를 원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벨져는 항상 단칼에 거절하고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을때면 칼을 뽑곤 했다. 그러면 끝날 일이었다. 은근하게 종종 있던 일이기에 말 자체는 놀라워할 이유가 없다. 놀라지 않았어야 했다. 불쾌해야 했다.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당황스럽게도 놀라고 불쾌하지 않게 생각하고있다는 사실을 전부 자각하고나서야 벨져는 릭의 말을 곱씹는다.
늘상 자연스레 흘러나왔던 거절의 말이 순간 떠오르지 않았다. 벨져는 그조차 자각하지 못한다. 그저 당황할 뿐이었다. 릭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너도 나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던 건가? 아니 릭이 그럴리가 없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 지극히 감정적이고 사사로운 그런 마음을 품고있었단 말일까. 심장이 뛰었다. 사고가 얼어붙는다.
거절해야한다.
머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본능이 외쳤다. 명확한 이유도 없이 그저 거절해야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어째서? 먼저 내려버린 결론에 이유를 찾는다. 지금은 전시가 아니던가. 벨져에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제레온 프리츠의 부탁을 져버릴 수는 없었다. 지금 상황에 사랑같은 쓸데없는 감정에 휘말릴 수는 없었다. 다시끔 움직이기 시작한 머리가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입이 먼저 열렸다. 벨져로서는 드문 일이다. 이유까지 생각해낸 벨져는 이미 거절을 들은 릭과 마주한다. 사사로운 감정에 허비할 시간은 없다.
상처받았나? 저도 모르게 릭의 두 눈을 먼저 살폈다. 그리고 다시 당황한다. 아니, 눈치를 볼 이유는 없다 그 상대가 설령 릭이라 할지라도. 어차피 릭도 거절하리라 알고있었을 터. 어째서 신경을 쓰고있는 건가.
릭, 나는. 그 뒤가 떠오르지 않는 변명이 혀에서 맴돈다. 입술이 달싹였다. 어째서 변명을 하고싶은 건지 벨져는 계속해서 자문한다. 제 감정조차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었단 말인가. 아니 알고있다. 아마도. 저 남자를. 거기까지 생각하고 강제로 생각을 멈췄다. 이 이상은 위험하다.
거절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받아들일 여유는 없다. 다만. 아니, 아니다. 그 때는 그저 그렇게만 생각했던, 몸이 앞선 자신의 거절을 정당화하기위해 붙였던 수많은 이유가 그저 변명임을 벨져는 알고있다. 벨져는 릭이 두려웠다. 깊은 자신의 바닥부터 서서히 잠기게하는 저 부드러운 눈동자가 두려웠다. 벨져는 무엇도 두려워해서는 안될 존재였다. 그렇기에 거절했다.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