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트위터 cyp_mambo 디엠으로 연락주세여
아니면 웹박수에 연락처 남겨주시면 됩니당
은 트위터 cyp_mambo 디엠으로 연락주세여
아니면 웹박수에 연락처 남겨주시면 됩니당
상권입니다.
R19/문고판/210P
16000원
망각의 정원(상권)
릭벨져. 상하...의 상입니다. 하권은 2월에 나와요
벨져를 잃은 릭이 과거와 현재를 왔다갔다하는 이야기입니다.
샘플 참고해주세요.
민증 검사 합니다.
숱한 꿈을 꾸었다. 그저 그대와 아이를 갖고 행복하게 웃고 지내는 꿈, 잘린 그대의 목을 곁에 두고 울지도 화내지도 못한 채 다만 주저앉던 꿈, 모든 것이 없던 일이 되어 꿈에서 깨어나던 꿈. 행복도 슬픔도 분노도. 꿈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게 깨어지는 순간 끝이 난다. 해도 뜨지 않은 새카만 새벽녘. 홀로 누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횟수는 이미 셀 수도 없다.
그렇기에 릭은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서도 몇 번이고 그렇게 생각한다. 이건 악몽일지도 모른다. 다시 눈을 뜨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언제까지 잘 생각이냐며 당신이 눈을 찌푸리고 있지는 않을까. 꿈 좀 꾸었다고 멍청한 표정을 짓는 건 그만 하라 타박을 주면서. 그러면 릭은 어찌 그렇게 쌀쌀맞게 굴 수 있냐고 괜히 툴툴댈 것이다. 엄살을 피우면서. 아, 끔찍한 꿈이었소,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이며 옷을 차려 입은 그를 끌어안을 것이다. 꿈이어서 정말 다행이오.
애석하게도 그런 꿈 같은 일은 없다. 악몽이 현실이고 그런 꿈을 꾸는 날이면 악몽은 더욱 지옥 같은 고통만을 릭에게 안겨주었다.
어느 땅도 자유롭게 밟을 수 있던 인생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며칠이 걸릴 거리도 릭 톰슨은 순식간에 원하는 곳까지 닿을 수 있었다. 공간에 자유로운 몸이었다. 능력이 닿는 모든 곳이 릭이 있을 곳이었고 그 능력은 공간이라는 단어로 이어지는 모든 곳을 허용했다. 허나 이제 두 발은 그 어느 곳에서도 땅에 닿은 것 같지가 않다. 그 어느 곳도 자신이 존재한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두리뭉실한 구름 위도 이보다는 견고하지 않을까. 그렇게나 되찾고 싶어 했던 것들인데도. 돌아온 고향과 일상은 그저 자신의 것 같지가 않고 아득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죄를 씻는 여행이 끝나던 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혹시나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 때. 언제, 언제부터…? 어느 순간부터 꿈이었을까. 사실은 알고 있다. 회피하고 싶을 뿐이다. 모든 현실로부터. 전부 악몽이다. 깨어난 순간 사라질 환상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했다. 릭 톰슨은.
잔인한 연인. 그토록 원했고 가지고 싶었다. 사람은 물건이 아니기에 소유한다는 것은 분명 적용할 수 없는 말임은 확실했으나, 릭은 언제나 벨져 홀든을 소망했다. 그의 연인이 되기를 원했고 벨져가 자신을 연인으로 여겨주기를 바랬다. 그 소원은 분명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릭 톰슨은 과거에 분명하게 확신했다. 그와 연인이라는 관계로 엮였던 모든 순간을 기억한다. 이제 와서는 정말로 그러했는지 불분명하지만.
-릭 톰슨.
자신을 부르던 벨져의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한다. 평소에 릭을 부르던 벨져와 조금도 다르지 않던 음성. 딱히 화가 났다거나, 조급하다거나, 아니면 들떠있다거나.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평소와 같았다. 잔혹하게도.
릭은 생각한다. 차라리 그대가 잔뜩 화가 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벨져 홀든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감정에 치우쳐, 그저 되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면. 그랬더라면 이 마음은 이보다 평온했을까?
그리고 바라기를.
그만, 그만하시오. 많이 들었소. 몇 번이고. 갖은 꿈. 머릿속에서 지긋지긋하리만치 반복되는 기억이 쇠사슬마냥 목을 옭아맨다.
벨져는 릭을 책망하지 않는다. 원망하지도 않았다. 미워하지도 않았다. 평소의 어조와 말투 그대로, 담담하게 당연한 사실을 전하듯 그저 입에 담았을 뿐이다.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너를. 너를? 입술이 움직인다. 보아선 안 된다. 악몽이다. 그 뒤로 이어질 말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르는 체 귀를 틀어막았다. 평생에 한 번 들으면 충분할 말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해답을 알려줄 사람은 곁에 없다. 저주 같은 말만이 귓가를 맴돈다.
나는 너를. 너를……단 한 번도.
이빨이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숨이 차다. 버릇처럼 손목을 만지작거린다. 벨져 홀든이 사라졌던 그 날. 함께 깨진 손목시계를 찼던 자리다. 이미 깨지고 움직이지 않던 그것을 손목에서 끄를 수가 없었다. 간신히 그것을 벗어 서랍에 넣은 게 고작 엊그제다. 이젠 모두 털어내야 한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대도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버팀목이었다. 정신을 좀먹는 전쟁을 바닥도 없는 죄책감에 빠진 채 걸어가면서. 메말라가면서도 그와 자신의 관계에 의지해 살 수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이 언제 끝날지 기약은 없었다. 다만 눈앞에 있는 하얀 빛이 밤을 끝내고 자신을 안식으로 인도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벨져는 릭이 원하는 안식을 가져다주었다. 다만, 영원히 잊을 수 없을 저주를 함께 주었다.
모두 거짓이었나? 아니면, 그 말에 다른 의미가 있던 걸까.
끈적한 잠이 몸을 잡아당겼다.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내려앉는 눈꺼풀 사이로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그를 붙들려 했다. 몸이 휘청이다가 쓰러진다. 잠이 든다. 아래로 꺼진 시야에 구둣발의 잔상만이 흐릿하게 남는다. 어느새 이런 걸 준비했소. 아, 그대는 정말 영리해. 정말이지. 증오스러울 만큼.
꿈의 끝은 언제나 같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벨져가 자신을 두고 떠나는 결말. 악몽 속에서 릭은 언제까지고 해답지가 존재하지 않는 문제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벨져 홀든은 릭 톰슨을 사랑했을까? 아니면, 거짓을 연기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다른 진실이 있을까. 그러면서도 확신한다. 벨져 홀든이 릭 톰슨을 사랑했을 것이라는 확신. 그 자신의 입으로 부정에 가까운 선언을 들었으나, 그럼에도 릭은 벨져가 자신을 사랑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허나 그저 확신하고 가슴을 펼 만큼 자신감이 넘치지도 않다. 혼란스럽다.
그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타들어가던 계절은 어느덧 얼어붙는 추위를 데려왔다. 볼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마저도 차게 얼어붙을 즈음이 되어서야 릭은 계절이 이토록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릭은 그때가 되어서 자신이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갈망해 마지않던 결과였다. 다시 평온하게 살 수 있는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얼마나 원했던가. 자신이 외면한 모든 것이 불러온 죄를 씻고, 그저 계속 살아왔던 평범한 삶으로.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수 있기를. 달조차 뜨지 않은 밤에 항상 기도했다. 하지만 밤이 갠 순간.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은 채 떠난 여행에서 원하는 것이 생긴 탓이다. 벨져 홀든은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흔적도 없이. 그가 죽었는지, 아니면 살아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지독한 상실과 공허만이 가득했다. 살아가면서도 우두커니 서있었다. 한참이나.
홀로 떠난 여행의 귀로를 외톨이가 되어 걷는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른다.
한평생 짐을 만들기 싫어 누구와도 거리를 두고 진실을 감췄다. 비밀을 밝히는 순간 자유는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 무엇보다도 자유롭고 싶었다. 그렇기에 언제나 가볍게, 아무것도 들지 않고. 어디든 마음이 가는 곳으로 훌쩍 닿았다. 원하는 때 다시 떠날 수 있도록. 모든 것과 거리를 유지하며 위험하면 손을 떼어버리던 생활. 소중하게 여겼던 것도 한 발짝 더 가까워진 순간 밀어냈다. 손에 넣기는 어려워도 버리는 순간은 아주 간단하다. 릭에게 물리적인 거리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으니까. 단박에 거리를 두고, 멀어지면 모두 끝이다. 단 하루의 인연에 아무런 아쉬움도 없었다. 그렇게 살아온 업보였을까? 한 평생 가장 잡고 싶었던 것을 기어코 손에서 놓치고야 말았다.
멍하니 침대에서 눈을 떴다. 창 밖으로 겨울비가 내리는 소리가 자글자글하다. 날이 싸늘할 것이다.
해는 아직 뜨지 않았다. 어슴푸레한 새벽. 손을 뻗어 머리맡의 시계를 가져다 보았다. 아직 아침까지는 한참 남은 시각이다. 다시 시계를 제자리에 놓고, 손을 뻗어 천장에 제 손을 드리워본다. 방금 전까지 느꼈던 후덥지근한 열기는 온데간데없이 겨울의 찬공기만이 피부에 감긴다.
손을 이마 위로 떨군다. 한숨이 푹 새어나왔다.
“후…….”
숨을 돌린다. 몸을 뒤척여 옆으로 돌렸다. 눈을 감았다.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모든 것이 생생하다.
숨 막히던 장미향. 여름의 열기. 몸에 휘감기던 치적한 비. 새빨간 꽃에 파묻힌 저택. 익숙한 어조로 저를 부르던 한참이나 어린 음성. 익숙한 예리함이 서린 푸른 눈을 있는 힘껏 위로 치켜뜨고, 발돋움을 하고 싶어 했다. 릭의 부드러운 녹색 시선이 자신에게서 떨어지는 걸 용서하지 않았다.
첫눈에 알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청년은 아닌 그 소년이 곧 벨져라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성숙하던 시절의 연인.
그러고 보면 사진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다. 꿈에서 본 바로 그 저택, 홀든의 본가에서. 몇 번 발을 들이지 않았지만 릭은 아직 그 집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산과 숲으로 둘러싸인 저택. 빨간 장미가 화사하게 핀 정원. 벨져와 잠시 그곳을 찾았을 때 그가 집을 나갔을 때 그대로인 벨져의 방에, 어린 시절의 벨져가 찍힌 사진이 있었다. 그 소년은 분명한 벨져 홀든이다.
잊으리라 결심했다. 이제는 완전히 잊어야 한다고 다짐한 건 그만큼 그를 갈망한다는 반증이다. 지금까지도 벨져가 나오는 꿈은 수두룩하게 보아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작 사진에서 본 게 다인 소년 시절의 벨져까지 꿈에서 보다니. 그것도 그렇게나 생생하고 상세하게…….
피식피식 웃음이 자꾸만 샌다. 간만에 이렇게 입가가 올라가는 것 같다.
‘이상한 꿈이군.’
이렇게까지 그를 그리워했나. 쓴웃음이 새어나온다.
사라진 연인이 돌아오지 못하리라 인정하는 데에도 몇 달이 걸렸다. 거기에 덧붙여 억지로라도 그를 잊으려 한 지는 이제 고작 몇 주가 되었을 뿐이다.
철철 넘치는 미련과 후회를 어떻게든 버리려 했다. 미칠 것 같은 감정은 여전히 전신을 짓눌렀지만 릭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벨져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라졌다. 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릭 자신이 세계 곳곳을 찾아 헤매고도 결국 발견하지 못하지 않았나. 더 이상은 단순한 망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자신은 이곳에 남아 숨을 쉬며 살고 있고 살아가야 하고, 벨져는 없다. 아무리 미련을 품어봤자 변하는 건 없다.
벨져 홀든.
끝까지. 마지막까지 알 수 없던 사람. 아직도 그가 냉랭하게 내뱉었던 말을 기억한다.
그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릭은 벨져가 자신을 사랑했다고 여전히 믿는다. 동시에 그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두 가지가 동시에 진실일 수 있을까?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신뢰한 적이 없다.”
항상 차디찬 말만 쏟아뱉던 입이다. 갖은 말에 익숙해져 있던 릭이었다. 하지만 이별의 순간 그가 뱉은 말은 릭의 심장을 꿰뚫어버릴 쐐기가 되고 말았다. 그 말이 진실이었는지 거짓이었는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릭 톰슨이야말로 벨져 홀든을 목격한 마지막 사람이었으므로.
누군가에게 해답을 물어볼까. 그런 고민도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진의를 파악하기에 릭 톰슨과 벨져 홀든의 관계는 너무나 특수했다. 어디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 아니, 할 수는 있을까. 누가 릭의 말을 믿을까. 벨져를 잘 아는 사람일 수록 릭 톰슨과 벨져 홀든의 관계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가능석은 적을 것이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연인이었다고. 그저 그가 너를 가지고 논 건 아니냐. 동정심 가득한 눈초리로 그리 부정하겠지. 릭도 알고 있다. 그와 잠자리를 함께한 사람이야 수두룩하다는 것 정도는. 벨져를 곁에서 보아온 릭이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하지만 장담컨대, 연인이라 할 사람은 자신뿐이었으리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벨져의 입에서 그들의 관계를 비밀에 부치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으나, 릭에게는 비밀이었다.
숨기고 싶은 마음도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서로 반반이었다. 타인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저 고결한 청년이 오직 자신만의 것이라는 구차한 독점욕. 굳이 밝혀서 이목을 끌고 싶지 않다는
예를 들어 그와 절친했던 홀든의 막내라면. 아마 차마 말 못하겠다는 식으로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뭐? 애인? 당신이? 작은형 애인? ……지금이니까 말하는 건데, 거짓말 아냐? 아니아니, 내 말은 그거지, 작은형이 당신한테 거짓말을 한 게 아니냐 하는 거. 작은형은 요 머리가 잘 굴러가니까. 뭐 작은형이 좋은 거 좀 줬을 것 같긴 한데…. 꼴 보아하니 형씨가 작은형 얼굴에 홀려서 헬렐레하니 뒤좀 대줘서 묶어놓고 당신을 좋을 대로 부려먹은 거겠네. 작은형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암 그렇고 말고. 하이고, 불쌍해라……. 힘내셔.”
확실하다. 중간중간 벨져의 혈육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평범하고 풍부한 몸짓을 섞어가며. 감정 넘치는 어조로 동정과 공감을 표할 것이다. 어깨를 툭툭 치고 고개를 숙이고, 한숨도 같이 쉬어주고. 이제 당신도 당신 인생을 살라는 둥. 그런 인사도 해줄 것이다. 릭이 생각하는 그의 작은형과 릭의 관계가 릭 톰슨 혼자 한 착각이라는 전제를 아주 당연하게 깔고.
직접 물어보고 들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단언하느냐. 이전에 벨져와 이글 사이에 가볍게 언쟁이 있던 순간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내가 작은형 취향을 가지고 뭐라 하진 않겠는데 좀 조심하셔? 오죽하면 내 귀에 다 들어오겠어?”
그런 그가 릭의 말을 믿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글도 벨져의 그런 표정은 아마 보지 못했겠지. 이따금 릭이 다른 곳을 바라볼 때면 어김없이 릭을 향하던 시선. 언제나 릭은 벨져를 눈으로 좇았다. 벨져는 이따금 릭을 바라보면서도 제 앞만을 향했다. 그렇게 항상 향하던 시선의 벡터가 아주 잠시 뒤집어지던 순간이다. 빤히 저를 보면서도 어딘가 불만스레 푸른 눈이 가늘어지고, 닫힌 입술이 일자로 꾹 눌렸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릭은 아주 잘 안다.
우습기 그지없었다. 항상 릭의 존재는 어찌 되어도 좋은 듯 고압적으로 행동하면서. 항상 자신을 향하던 두 눈이 잠시 다른 사람을 향한것 만으로 적나라한 불쾌감을 드러내다니. 이런 순간은 흔치 않다.
이따금 벨져는 그런 식으로 릭을 향해 감정을 드러내곤 했다. 다른 이에게 홀렸던 것도 아니다. 그저 길을 가던 아가씨, 아이. 움직이는 물체에 반사적으로 시선이 따라붙는 것처럼 단순하게 눈이 갔을 뿐이다. 고작 그뿐인데. 무엇이 방아쇠가 되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가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본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입가로 옅은 미소가 떠오른다.
“질투했소?”
장난스레 던진 질문에도 벨져는 표정을 바로잡을 생각도 않고 여전히 불쾌한 표정으로 릭을 흘겨본다.
“그러길 원하나?”
“아니. 귀찮은 건 질색이거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어깨를 들어올렸다. 조용히 저를 보는 벨져에게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린다. 절반은 거짓이었다. 질투 같은 귀찮은 감정은 번거롭기 그지없지만, 예외는 있었으므로.
본심을 내보이면 저 청년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까? 우위에 섰다는 우월감에 즐거워할까, 아니면 미치광이를 보는 경멸, 그도 아니면 놀랄까. 어느쪽이건 릭은 벨져와의 줄다리기에서 밀리고싶지 않기에 거기서 말을 끊는다.
‘하지만 그대는 그랬으면 좋겠군. 나를 그렇게 봐줬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을 그 푸른 눈에 담은 것만으로 감정이 격해지고, 그대가 나를 향할 때면 억지로 표정을 풀었다. 사실 벨져는 모두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총명하고 영특한 그이기에. 릭이 급하게 쓴 얄팍한 가면따위는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 해도 이상할 거 없지.
설령 그렇다 해도. 아니 그렇다면 더더욱.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느껴주기를 릭은 원했다.
‘내가 그런 것처럼.’
심장을 조이는 질투도, 목이 타는 갈망도. 전부 다.
출근길에 회사 직원 몇 명과 가볍게 술을 걸치고 나니 제법 밤이 깊었다. 두꺼운 코트 위로 두른 목도리에 얼굴 아랫부분을 있는대로 파묻고 밤길을 걷는다. 겨울의 찬 공기가 술로 후끈해진 피부에 서늘하다. 이따금 북풍이 세게 불어올 때마다 파르르 떨고, 기침을 한 번 했다.
주말을 앞둔 밤거리가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까 그 인원에서도 친하게 지내는 몇 무리는 더 마시러 간다고 했던가. 릭은 그 무리와도 적당히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시간을 함께하지는 않는다. 예전도 지금도.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제대로 취하기 시작하면 사람은 자신이 간직할 비밀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법이니까.
그래도 간만에 괜찮은 술을 입에 대니 은근하게 생각이 계속 맴돈다. 간만에 혼자 한 잔 해볼까. 프랑스에서 한 병 괜찮은 와인을 잡았다. 치즈 같은 안주거리도 조금.
여기에 꽃 한송이를 그럴 듯하게 곁들이면 제법 분위기 있는 밤이 되겠지. 혼자 즐기긴 아까운 밤에 적당히 말을 건네 낭만을 즐기던 때도 있었다. 지금이야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지만.
터덜터덜 인파를 지나 아파트에 도착했다.
계단을 오른다. 사는 층으로 가까워질수록 묘한 향이 짙어진다. 역한 냄새는 아니다. 꽃이나 식물에 가깝다. 이런 추운 계절에 여기까지 향이 짙을 만한 양이라니. 올라가면 갈수록 향은 더욱 확실해지고, 제가 사는 층에 도착했을 즈음 이것이 무슨 냄새인지를 기억해냈다. 꿈에서 지긋지긋하게 보았던, 장미였다.
누가 집에서 프로포즈라도 하나. 아니면 그런 향수라도 엎질렀나. 옆구리에 낀 와인병 안에서 와인이 미세하게 출렁인다. 불빛이 반쯤 꺼진 어두운 복도. 열쇠를 꺼냈다. 발밑으로 무언가가 채였다. 가볍게 짓밟히고도 딱히 이물감은 없어 릭은 깨닫지 못한다.손이 추위에 얼어붙은 탓인지 문을 여는 데에는 평소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을 밀어 연다.
틈이 조금 벌어진 순간 바람이 세게 몰아쳤다. 창문을 열고 나갔던가? 제법 높은 층이다. 설마 도둑이 들었을 리는 없고. 그런 걱정이 잠시 머리를 스치고, 그제야 발에 채이는 자잘한 감촉에 정신이 닿는다. 발밑으로 무언가가 잔뜩 깔려있다. 워낙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어렴풋하게 보이는 바로는 저 앞쪽까지. 발목까지 푹 잠기는 양이다. 한 발 디딜 때마다 짓이겨지고 파스스 사라지는 감촉이 선명했다. 허리를 숙여 한 장을 들고, 보이지도 않는 새카만 밤 속에서 뚫어져라 바라보고 냄새를 맡는다.
“장미…?”
그 냄새가 전부 제 집에서 나왔다니. 그나저나, 대체 무슨 장미란 말인가. 정말 도둑이 들었나. 술기운이 싹 가시고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아직까지 집에 있는 건 아니겠지. 여차하면 들고 있는 와인병으로 도둑의 머리를 내려쳐야 할지도 모른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와인병의 목 부분을 잡고 슬금슬금 현관에서 거실 쪽으로 이동했다. 약간 먼 창문이 건물 아래 가스등의 희미한 빛을 받아 흐릿하게 빛난다. 조용한 집 안에서 다른 이의 기척은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벽에 몸을 붙이고 귀를 기울여도 보았지만 역시 바람소리만 들릴 뿐이다.
기우였을까. 막 내리칠 기세로 들어 올렸던 술병을 다시 아래 쪽으로 늘어트린다. 도둑이 들었건 아니건 지금은 자신뿐이라 확신한다. 잠시나마 막혔던 숨이 트였다.
지독한 냄새에 파묻힌 짧은 복도를 걸어 거실로 나온다. 하얀 달마저도 전부 가려진 밤이기에 역시 창이 크게 뚫린 거실이라도 어둡기는 마찬가지다. 잠시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나마 주변을 둘러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나 하긴. 들고 있던 술병으로 어깨를 툭툭 친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기이한 능력자들이 모인 전쟁까지 참여했으면서 한낱 도둑 걱정이나 하는 신세라니. 벨져가 봤으면 한심하다며 혀를 찼겠지.
발밑으로는 여전히 출처를 알 수 없는 꽃잎이 굴러다닌다. 산뜻하면서도 묘하게 단 냄새가 계속 코를 찌른다. 도둑의 소행이라 하기엔 기묘한데. 그런 생각을 하며 전등을 켰다. 전기가 들어온 등이 지직거리며 깜빡이고, 방을 환하게 비춘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새빨갛게 뒤덮인 바닥이다. 바닥에 깔린 꽃잎은 알고 있었으나 새빨갛게 물든 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맙소사. 중얼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순간에도 빨간 꽃잎이 릭의 발에 짓이겨졌다. 고개를 들어 거실을 둘러본다. 빨간 잎이 비처럼 쏟아진 직후처럼 한가득 흐트러진 공간. 유독 새하얀 것을 발견한다. 숨을 들이켰다. 목이 막힐 정도로 달고 시큼한 향이 폐로 들이친다.
가까이 가야 할까? 아니면. 도망치나? 릭은 이도저도 못한 채로 그저 고개를 가로젓는다. 버릇처럼 깨진 시계를 찼던 손목을 매만졌다. 피부와 그 너머의 뼈만이 만져진다. 시계는 서랍의 어둠에 잠겨 있을 것이다.
숨 막히던 그날. 아지랑이마냥 릭의 눈앞에서 증발했던 청년이다.
새빨간 장미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릭이 아는 누구보다도 고결하고 고상한 사람. 릭 톰슨을 그토록 원하던 일상으로 돌려보내준, 잔혹한 구원자.
결코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던 연인.
마지막까지 그랬고,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전부 잊으려 했다. 그럴 수 없을 것을 알면서. 이미 사라진 자를 어떻게 하겠는가. 벨져는 그날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고 릭에게는 수단이 없었다. 이제 흘려보내야 할 때라 결단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있는 한 나아가야 했으니까.
병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꽃잎들은 모두 가루가 되어 바스라졌다. 유리병이 구르는 소리. 손이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정말 그대라는 사람은 내 소원은 하나도 들어주지 않는군.”
새빨간 장미를 즐기던 청년이었다.
본인은 항상 아니라고 했던가. 잘 어울리는군. 뭐가? 장미 말이오, 당신과 잘 어울려, 좋아하나봐? 아니, 좋아하는 건 아니다. 꽃병에 물을 넣으면서도 벨져는 내키지 않는 듯 고개를 약간 튼다. 말은 그렇게 해도 유독 그 빨간 꽃을 곁에 두었기에 릭은 그의 행동을 더 믿었지만.
릭 톰슨이 곁에서 보아온 벨져 홀든은 자신의 어떤 물건에도 크게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원하는 건 손에 넣으면 된다고 했던가. 동시에 그 가진 물질적인 소유물에 대해서 딱히 별 말이 없긴 했지. 자주 쓰는 찻잔이나 펜 같은 거야 있었다. 그러나 없어지면 다른 걸로 보충하면 그만이라며 없어져도 별로 애석해 하지도 않던 그인데. 유독 빨간 꽃만큼은 시들어갈 때마다 다른 빨간 꽃으로 바꿔두곤 하는 게 아닌가.
꽃을 항상 꽂아두던 크지 않은 꽃병만이 아니다. 설탕과 벌꿀에 절인 새빨간 장미 꽃잎. 그걸 매번 찻잔에 담아 차로 내어주면서 별로 좋아하는 건 아니라니. 이봐, 세간에선 그런 걸 좋아한다고 한다오. 그런 말을 건네봤자 어려서부터 집에서 자주 주던 것이라 익숙할 뿐이라고만 하지, 릭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항상 가볍게라도 부정하며 아니라고 하더니. 돌아올 때도 기어코 새빨간 꽃과 함께 오지 않았나.
아무리 흔들고 치고 불러도 눈을 뜨지 않는 연인을 들어 침대로 옮겼다. 훨씬 가벼워진 몸에 잠시 불안이 앞섰지만 눕혀 놓고 보니 다행히도 숨은 쉬고 있다.
그제야 열려있던 창문을 전부 닫았다. 그토록 넘치던 꽃잎은 어느새 전부 사라지고 없다. 분명히 만지기까지 했던 것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릭에게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까지는 남아있지 않다.
꼬박 하루를 보냈다. 하루종일 피곤한 것도 배가 고픈 것도 잊은 채 가만히 자신의 침대에 눕힌 청년만을 바라보며 있었다. 그러다가 배가 낸 꼬르륵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냉장고에 묵혀두었던 햄버거를 꺼냈다. 식탁에 앉아 다시 열어둔 방문 너머를 응시했다. 지금 입에 들어가는 게 햄버거인지 인간인지 모를 만큼 시선은 못박아둔 채 식사를 이어간다.
정말 벨져일까? 그냥 닮은 사람이 자신을 조롱하고있는 건 아닐까. 그런 의심을 스물넷 가까운 시간 동안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마다 릭은 고개를 저었다. 누가 벨져 홀든 특유의 느낌까지 그대로 닮고, 따라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자신이 그를 착각할 리가 없다. 아마도.
침대 옆에 끌어다 둔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거센 바람에 창이 덜컹거린다.
릭은 몸을 숙여 가까이에서 그 얼굴을 살핀다. 미동은커녕 잠꼬대도 없이 정말 숨만 붙은 채 잠든 청년. 조금 긴가 싶은 하얀 머리카락과 그에 걸맞게 깨끗한 피부. 단정이나 정갈이라는 단어는 이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있을 것이다.
벨져가 사라진 이래로 마냥 짧지만은 않은 시간이 흘렀다. 하루하루가 천년만년 같기도 했고, 때로는 잔인하리만치 빠르게 흐른다는 생각도 했다. 침대 위의 연인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릭이 가진 기억 그대로. 쓰러져 잠든 릭 톰슨을 두고 떠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입고있는 옷마저도-.
결론을 내린다. 릭이 알던 벨져 홀든이 분명했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덜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러니까.
이대로 지내도 괜찮지않을까.
잔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어차피 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이렇게 품에 두고 놓지 않는 것도 방법일지 모른다. 설령 그 차갑고 시린, 푸른 두 눈을 다신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어디로도, 누구에게도 가지 않고 곁에 있어준다면.
딱히 그가 눈을 뜨지 않아도 괜찮다. 이렇게 앞에 나타나준 것만 해도 기적이 아니던가. 그렇게 자위하면서도 다시 그 음성을 듣고 시리도록 푸른 눈으로 저를 보고 싶다며 갈망한다. 동시에 그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워 눈을 뜨지 않기를 빌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가 잠이 든 채 죽어버리는건 아닐까 악몽을 꾼다.
그대는 어느 때도 나를 괴롭게 하는군.
검을 들고 앞을 걷던 시절도, 증발하듯 사라지고 나를 홀로 남겨뒀을 때에도, 다시 나타난 지금도.
벨져 홀든의 존재는 항상 릭을 고뇌에 빠트린다. 그리고 릭을 번뇌와 고민에서 구원한다. 벨져를 탓할 수는 없었다. 그를 향한 고뇌는 릭이 벨져 홀든을 가지기를 원했기에 고통받고 괴로워 하는 거였으니까. 그를 탓할 순 없다. 벨져는 언제나 릭의 구세주였고 구원자였다. 다른 누구도 벨져를 대신할 수 없다. 벨져만이 오직 유일한.
다음 날도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정신이 깨어나자마자 열린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요란하다. 비몽사몽간에 창 너머를 먼저 보았다. 빗줄기는 어제보다 더욱 세진 모양이었다. 세상이 떨어지는 빗줄기로 새하얗다.
평소보다 늦은 시각이다. 푹 잤는데도 몸이 무겁다.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이런 적은 처음이다. 원인은 역시 뻔하다. 미숙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소파를 노려보고, 텅텅 빈 소파에 잠이 완전히 달아난다.
릭. 이라고 혀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등 뒤로부터 뻗어온 차가운 무언가가 뺨에 닿아 반사적으로 팔을 휘두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손에 닿는 인간의 감촉. 팔뚝을 세게 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상대를 확인한다. 벨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 라고 하면 지는 것 같아 다시 입을 닫는다.
세게 얻어맞은 릭이 고통으로 덜덜 떨고 있었다. 함께 몸 쪽으로 쪼그라든 다른쪽 팔. 그 손에 들린 젖은 꽃송이가 부들부들 흔들린다. 릭이 덜덜 떨며 중얼거린다.
“일…어났군.”
다행이라면 다행인지. 장미를 들고 있는 손은 얻어맞지 않은 쪽이다. 이거 받으시오…. 고통을 간신히 참으며 중얼거리는 릭에게서 꽃을 건네받았다.
빗물에 젖은 새빨간 장미꽃 한 송이. 투명한 빗방울이 촉촉하게 떨어져 침대시트에 스며든다. 장미? 정원에 널린 게 장미기야 하지만. 의아한 눈으로 릭을 바라보니, 대답이 돌아온다.
“창문을 여니 정원 장미들이 탐스럽길래. 그대가 좋아할까 싶어 하나 따봤소.”
“따러 나갔다 왔다고?”
“다루기 힘든 천방지축 아가씨긴 해도 그 정도 거리야 식은 죽 먹기지. 순식간에 다녀왔으니 걱정 마시오. 들키지 않게 조심하니까. 여긴 사람이 별로 없더군?”
간이 큰 남자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라 했는데. 벨져가 함께라면야 확실하게 사람이 없는 곳이나 시간대를 파악해서 갈 수 있다. 허나 그렇게 이 저택에 발을 들인 게 고작 어젯밤이고. 아무리 인기척이 얼마 없는 저택이기는 하지만. 이 남자에게는 미지의 공간이 아니던가. 무엇을 믿고 당당하게 돌아다녔는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능력. 그 제어가 힘들다던 그걸 믿고?
정말 알 수 없는 남자군. 젖은 꽃을 보며 그저 혀를 찼다.
장미. 정원에 잔뜩 피어있으니 익숙하기야 하다. 싫지는 않다. 딱히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게 그렇게 좋을까. 벨져는 릭이 장미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장미와 눈앞의 남자. 달콤한 말을 뱉고 다정하게 손을 뻗는 부드러운 녹색. 그럭저럭 잘 맞는 한 쌍일지도 모른다.
꽃은 꽃병에 꽂아두고, 식사를 가져왔다. 어머, 작은 도련님. 여기 준비해두었어요, 막내 도련님이 방금 밖에서 드신다고 하시던데 작은 도련님도…아, 오늘은 방에서 드시려구요? 하긴, 비가 말이 아니네요, 이런 날은 나가지 않는 게 좋죠. 딱히 대꾸를 하지 않아도 몇 없는 하녀들은 조잘조잘 붙임성이 좋다. 어차피 다른 가족들도 알아서 식사를 하고 있을 시간이다. 부엌을 나와서부터는 다시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방에 도착했다.
창 밖으로는 여전히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온다. 이런 날씨에 밖에 나가서 먹는다니. 벨져는 하녀들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워낙에 괴짜 같은 막내다. 이글은 이렇게 비가 오니까 밖에 나가서 먹겠다고 한 거겠지. 첫째 다이무스는 창가에서 궁상맞게 하늘이나 보며 차를 마시고 있을 거고.
비가 이렇게까지 내리면 일정이 전부 바뀔 수밖에 없다.
매일같이 하던 검 훈련이 금지되어버리니까. 검술이 빠지면 순식간에 할 일이 사라진다. 벨져가 아직 장난감 칼조차 쥐지 못했던 시절에는 비가 심하게 와도 하고 싶으면 나가서 휘둘렀다던가. 그것도 그 어린 시절 집에 있던 일 탓에 몰아치는 날에 밖에서 하는 검술 연습은 금지하는 걸로 바뀌었기에 다 의미 없는 일이다.
방에서 책을 뒤적이는 벨져를 릭이 가만 바라본다. 뭐가 그리도 재미난지. 벨져도 간간이 흘끗흘끗 저를 보는 시선을 받아치다가, 뒤로 돌아 입을 열었다.
“고용인들에겐 들어오지 말라고 했으니까 편하게 있어.”
남자는 충분히 편하게 있다. 그러니까, 자꾸 쳐다 보지 말고 적당히 방을 둘러보든 뒹굴든 책을 읽든 하라는 뜻이다. 대답이야 바로바로 나왔다. 음. 알겠소. 워낙 표정도 음성도 건성이라 듣기는 한 걸까 했는데. 역시나 하는 짓은 같다.
남의 시선 따위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다만 저 남자는 예외였다. 묘하게 계속 신경이 쓰이도록 행동한다. 릭이 가진 무언가가 벨져를 그렇게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참다못해 책을 덮었다. 큰 소리는 내지 못하는 게 벨져의 몸에 밴 품위라는 무언가다. 몸을 완전히 돌려 릭 쪽을 향해 앉았다. 릭은 여전히 멀뚱멀뚱 벨져를 본다.
“왜.”
“뭘 하나 싶어서.”
“숙제. 내일 가정교사가 와.”
“아직 아침인데? 이런 시간부터? 기특하군.”
딱히 손에 잡히는 게 없으니 미리 처리할 뿐이다. 릭이 자신을 단순히 아이처럼 칭찬하는 것같아서 괜히 기분이 나쁘다.
조금 토라져있으니 릭이 곁으로 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옆에 놓인 작은 의자에 허리를 내린다. 머리에 닿는 감촉이 편안하다. 그러면서도 역시 아이취급하는 것같아 불쾌했다. 몸을 다시 돌려 책상과 마주한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어깨로 올라왔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 벨져에게 릭이 묻는다.
“오늘은 검술 연습은 하지 않는 거요?”
벨져가 손으로 창가를 가리킨다. 쏟아지는 폭우에 밖이 하얗다.
“이 날씨에 야외 검술 연습은 금지다. 집안 규칙이야.”
“조금 내릴 땐 하고?”
“당연하지. 비가 온다고 검을 휘두를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전에는 이런 날에도 원하면 나가서 휘둘렀다던데…지금은 못 하게 되어있어.”
“그대는 하고 싶은가 보군.”
“하고 싶고 싫고가 아니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어떻소, 좋은 생각인거지.”
릭이 싱글싱글 웃는 모습이 보지 않아도 훤하다. 고개를 홱 돌려 웃는 얼굴을 노려본다.
“쓸데없는 말 그만 해. 애취급은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애 취급이라니, 말이 심하잖아. 그런 적 없소.”
“지금 나를 조롱하는 건가?”
얼굴을 찡그리는 벨져에게 릭이 어깨를 으쓱한다. 한숨을 푹 쉬고, 머리를 긁었다.
“내가 당신을 그래…젖비린내 나는 어린애로 보고있지는 않아, 하지만 그런 거에 집착하는 건 당신답지 못한 것 같군. 그러니까,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뜻이지.”
대꾸할 말이 없다. ‘어른스럽지’ 못한 반응인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은 벨져를 이런 식으로 대하지 않는다. 릭 톰슨만이 자신을 이렇게 대했고, 릭 톰슨이기에 과하게 반응하게 된다.
입을 다물어버린 벨져에 비해 릭은 여전히 여유롭다. 커다란 손이 정수리에서 뒷통수까지를 걸쳐 쓰다듬는다. 그만해. 거절하려던 순간, 릭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바싹 치켜들어야 했다.
“그렇게 어른이 되고 싶으면, 되면 되잖소.”
“누가 그런 말을…….”
“그대가 계속 그러고 있잖아? 빨리 자라고 싶다고.”
릭이 몸을 숙인다. 얼굴이 바로 앞으로 다가온다. 그에 맞춰 억지로 치켜들었던 시선이 조금씩 내려왔다. 정면에서 멈추고, 잠시 그대로 있다가. 코끝이 닿았다. 맑은 녹색에 눈을 빼앗긴다.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안했어. 대꾸하려던 말이 목 너머로 사라졌다. 코끝이 살짝 엇갈린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동시에 입술에 숨결을 느낀다. 차마 밀쳐낼 새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입술 위로 입술이 겹쳐지고 뒤이어 젖은 혀가 그 위를 핥는다.
입술이 몇 번이나 닿았다 떨어졌다. 꾹 다물었던 입술도 혀끝이 사이를 비집는 순간 어이없이 열린다. 어느새 허리에 감긴 팔이 몸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숨을 쉴 수가 없다.
키스는 어느 순간 끝나고, 몸이 간단하게 남자의 손에 들렸다. 상자를 정면으로 안듯이 들린 채 소파에 놓인다. 벨져는 뒤를 팔로 짚어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제 것보다 큰 손이 이끄는대로 천천히 등부터 머리까지. 소파에 전부 놓인다. 그 위로 릭이 덮어씌우듯 올라탔다. 미성숙한 몸은 남자의 그림자에 쏙 담긴다.
의도는 일목요연하다. 순진한 아가씨처럼 무슨 짓이냐는 말은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아니. 담을 생각조차 없다고 이제는 인정해야 할까?
R19/.문고판/226P
표지 오타냈는데 애교로 넘어가주십셔
17000원
다무벨져 재록본(15년도에 냈던 4권+추가원고 12페이지)
15년도에 냈던 다무벨져 네권
유년기의 겨울 [SAMPLE]
겨울숲의 종언 [SAMPLE]
만찬의 순서 [SAMPLE]
그림자에 묻어둔 풍경 [SAMPLE] [R19_SAMPLE]
에
스칼렛 시네마(추가원고 12P)
가 더 들어가있습니다.
전부 성인향.
전부 빨간책이고...스칼렛시네마...는 짧아서 샘플까진 뭐하네여 일단 개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