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고해異端告解
R19/B6/20P/1,000원
한자 네글자 진짜좋아하는것같다 여튼...릭벨입니다. 제레온 빠질하던 벨져랑 보기만했던 릭 2탄같은.
http://manbounikki.tistory.com/134 <-궤도순례랑 설정공유. 후일담?같은건데 일단은 안읽었어도 별로 문제는 없게...하려고 노력은 했습니다
19금파트는 별로 없지만 기본설정이 좀 그런게있고 전편비끄무리한게 19금이고 씬도 쪼꼼 있어서 19금.
아마 조만간 뒤까지 써서 합본을 쓰지않을까싶은...게있어서 출력비정도만 받아 천원입니다...
냈을때 이거 가지구계신분은 뭔가 좀 특전같은걸 드릴 예정.
조금만 더. 작게 웅얼거리며 더듬더듬 머리맡의 시계를 다시 재운다. 귀를 때리던 시끄러운 소리가 멎었다. 혹시나싶어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린다. 겨우날의 새벽은 아직 어두컴컴하다. 옅은 등잔을 켜고 게슴츠레 뜬 눈에 비친 시각은 5시 정각. 너무 이르군. 한숨이 푸욱 새어나온다. 왜 이런 시간에? 벨져가 시계를 만졌던 것도 같다. 대체 이 시간에 일어나서 뭘 하려던 건지. 머리를 다시 푹신한 베개에 묻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인의 하얀 뒷통수는 미동도 없다. 그렇게 시계가 시끄럽게 울어댔건만. 막상 당사자는 시계가 시끄럽게 짖어대건 말건 여전히 잠든 채였다.
이불에 넣은 팔을 뻗어 깊게 잠든 사람을 가볍게 끌어안는다. 그 움직임에 살짝 이불을 벗어난 어깨로 초겨울의 쌀쌀한 공기가 닿았다. 릭은 한 번 부르르 떨고 몸을 다시 이불 속으로 밀어넣는다. 하얀 등에 찰싹 붙으니 온기가 퍼진다. 그 성격만큼이나마 쉽사리 따듯해질 줄을 모르는 신체였으나 열심히 덮혀둔 덕인지 적당히 따스하다.
눈을 감고 코끝을 하얀 목선으로 가져다 댄다. 못해도 두 시간은 더 잘 수 있겠지. 깊게 숨을 들이켰다. 무취에 가까운 그에게서 미약하게나마 풍기는 정사 후의 체취를 릭은 사랑했다.
당신은 이런 소소한 시간이 행복이라는 걸 알고있소?
이런 질문을 하면 벨져는 그 푸른 눈을 가늘게 뜨면서,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겠지. 무슨 쓸데없는 말이냐. 그리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활에 자신이 이전보다 훨씬 풀어져있다는 사실은 알까? 흐리멍텅해졌다고 생각하고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한계까지 다그치지 않는 건 자각하고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팽팽하게 잡아당긴 현같이 기민하고 예리했던 벨져 홀든은 아마 더이상 볼 수 없을 거라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가진 것을 지불해야 할 때가 있다.
가볍게는 사탕을 사기 위해 내는 동전들부터 전쟁에 희생되는 인명까지. 능력자들 간의 전쟁에도 지불해야 하는 것은 있는 법이라, 지금껏 온갖 이들이 자신이 연명하기 위해 혹은 무언가를 죽이거나 지키기 위해 이런 저런 것들을 지불하거나 사용해 왔다. 그와 마찬가지다. 벨져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무언가를 지불했다. 정확하게 그 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의 연인이 어떤 식으로 문을 닫았는지 릭은 알지 못한다. 그저 벨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털어넣은 지금의 결과만을 확인했을 뿐.
일촉즉발. 약간의 망설임이라도 있었다면 폭발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그런 때 이미 쓸만큼 쓴 능력을 쥐어짜 공간을 이동한 건 생존을 향한 본능이었을까. 하얗에 일어나던 폭발 속에서 릭은 먼 곳으로 도망갔고, 다시 문이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있던 곳으로 돌아오는데에 실수를 범한 적은 없으므로 그곳은 릭이 서있던 곳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기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너무나 달라져있었다.
새하얀 빛이었다. 하얗게 뒤덮이던 시야. 본능적으로 검은 공간을 열어 먼 곳으로 달아났다. 그 먼 곳에서조차 폭풍처럼 몰아치던 바람을 기억한다. 눈앞이 뿌옇게 흐렸다. 하얀 모래가 흩날렸다.
기묘한 안개 속에서 릭은 다시 벨져를 기다리던 곳으로 돌아왔다. 피를 흩뿌린 듯한 빨간 안개가 자욱한 기괴한 공간. 모든 것이 평등하게 하얀 모래로 변해버린 사막에서 빨간 안개를 들이켠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녹색 눈이 주변을 훑었다. 시선이 멈춘다.
모래에 파묻힌 하얀 손이 누구의 것인지 안다.
아침이 왔다. 시계소리에 잠이 깨었던지 두 시간 뒤, 밍기적밍기적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씻고 차려입고 대략적인 하루의 식사를 준비해둔 뒤에야 아침의 모든 준비가 끝난다. 주욱 자고있던 벨져가 눈을 뜬 채 릭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릭이 집을 나서려 현관문을 잡았을 즈음이었다.
눈을 뜨기는 했는데. 아직 비몽사몽인지 얼굴이 썩 유쾌해 보이지는 않는다. 항상 릭보다 늦게 잠자리에 들고 한참을 일찍 일어나던 과거의 그로부터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 모습을 누가 벨져 홀든이라고 믿을까.
“출근인가?”
짧은 질문마저 피곤에 젖어 깊게 잠겨있다. 다만 척 보기에도 지쳐보이는 모양새와는 달리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자세는 이러나 저러나 여전히 벨져는 벨져라는 뜻이리라.
“오늘은 일찍 돌아올 것 같아. 먹을 건 식탁 위에 올려놓았소. 토스트는 직접 구워야 겠고…고기도 적당히 데펴 먹으시오. 점심에 들를 수 있으면 들러서 같이 식사를 하고 싶지만 오늘은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아.”
듣는둥 마는둥. 벨져는 신발을 고쳐신는 릭을 빤히 쳐다볼 뿐이다. 릭이 몸을 일으켜 곤란한 듯 눈썹을 내렸다.
“……벨져. 듣고있소?”
“듣고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정장이군? 무슨 약속이라도 있나.”
의아한 듯 릭의 차림을 훑는 시선에 식은땀이 흐른다. 아차.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어 일부러 옷을 차려입기는 했지만 설마 눈치를 챌 줄이야. 벨져가 의외로 자신의 옷차림에 신경을 쓰고있었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하고, 평소에는 잘만 자다가 이런 때만 칼같이 깨어서 물어보는 날카로움이이 야속하기도 하다.
약속상대는 벨져도 아주 잘 알고있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릭이 벨져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은 벨져가 그와 릭이 만나는 것을 그다지 반기지 않을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별로 말하고 싶지도 않고.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이럴 때도 있어야지. 여튼. 피곤해보이는군. 지금은 좀 더 자두는 게 좋겠어. 다녀오겠소.”
도망이라도 치듯 종종걸음으로 문을 빠져나왔다. 벨져가 부르는 소리는 딱히 들리지 않는다.
문을 닫은 뒤. 벨져는 한동안 하루에 대여섯시간조차 깨어있지 못했다.
능력을 모두 잃은 탓이다. 검을 다루는 능력의 특성상 능력 자체가 신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었던 것이 문제라고 할까. 능력을 모두 잃으면서 급격하게 바닥을 친 체력에 신체 적응하지 못하고있는 듯 했다. 딱히 병이 생겼다거나, 건강에 심각한 지장이 있는 건 아니니 다행이긴 하지만. 처음엔 평생 이렇게 지내야 하려나 했던 걱정이 날이 지날 수록 조금은 사라지고 있으니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기는 한다.
그렇게 몸도 가누지 못하던 연인이 일어나자마자 홀든 저택을 다시 떠날거라 했을 때는 심장이 철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성격에 몸이 약해졌으니 더더욱 집에 있지 않을거라 예상하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거 잠깐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고 바로 집을 떠날 채비를 하다니. 릭은 들려온 소식에 쉴 틈도 없이 바로 홀든 저택으로 달려왔다.
벨져는 얼마만에 돌아왔는지 모를 자신의 방에서 여행짐을 꾸리고 있었다. 집에서 떠난지도 한참이라더니, 이런 짐들은 다 어디서 났소? 그리 물으니 형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은신처를 죄다 처분하고 짐을 옮겨놨다며 눈을 찌푸린다.
그렇게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로. 벨져는 릭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몇가지를 작은 가방에 던져넣는다. 릭의 침실을 한 다섯 개쯤 붙여둔 넓이의 방을 돌아다니며 무언가 집어서 가져다 넣고, 잠시 쉬고. 가져다 넣고, 잠시 쉬고. 그러고 있는 벨져를 보고있으니 처연한 마음도 들면서 제법 웃기기도 하다.
“벨져. ……저기, 듣고있소?”
느리지만 분주하게 움직이는 연인은 릭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고 제 할일을 계속한다. 이런, 어떻게 해야 할까. 시선으로 벨져의 움직임을 따라다니다가. 침대 위에 놓여있던 열린 여행가방을 확 닫고 그 위에 앉아버렸다. 덜컥 가방이 닫히며 벨져가 릭을 홱 돌아본다.
“릭. 비켜.”
“잠깐 진정하고. 앉으시오. 벌써 지친 것 같은데 쉬엄쉬엄 해도 괜찮지 않겠어?”
슬그머니 가방 옆으로 내려 앉으며 침대 옆을 툭툭 친다. 벨져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로 한숨을 쉬나 싶더니. 릭이 원하는 대로 그 곁에 앉았다. 이제야 대화가 되겠군. 릭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고, 입을 연다.
“정말 지금 떠나는 건가?”
“꼬리가 길어봐야 뒤를 잡힐 뿐이지. 연락은 종종 할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어디로?”
“어디든.”
목적지도 없이? 그대답지 않게 성급하군…같은 말을 하기엔 릭은 벨져를 너무 잘 알고있다. 지금당장 벨져가 떠나려는 이유는 분명했다. 첫째가 제레온 프리츠이고, 두번째가 신변상의 문제겠지. 아마 후자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있겠지만. 릭 또한 지금 벨져가 처한 상황을 볼때, 그가 신변을 감추려 하는 것에 이의는 없다.
제레온 프리츠의 제정신이 돌아왔다. 기적이라면 기적일까. 한동안은 의자에 앉은 채 석상마냥 굳어있던 장년의 기사. 벨져의 신앙과도 같던 그가 이전과 같은 맑은 눈으로 돌아와 자신의 하나뿐인 딸을 안아주었다고 한다. 아직은 침대에 누워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체력이 떨어졌을 뿐이라 하니 기력을 되찾으면 다시 일선으로 나설 수 있으리라. 그리고 벨져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제레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듯 했다.
고작 방 안을 돌아다닐 뿐인데도 제몸하나 가누기 힘든 기색이 역력하다. 워낙에 정신력이 받쳐주는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면 실제 체력은 저것보다도 더 바닥이겠지. 한평생을 신체와 관련된 능력이 함께했으니 적응이 쉽지 않을 게 뻔하다.
“네 능력이면 언제든 원할 때 만날 수 있지 않나. 무슨 걱정이지.”
“별로…그런 건 아니야.”
“그러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확실히 해.”
그러면? 막상 그런 질문을 받으니 순간 말문이 막혔다. 원하는 바는 이미 알고있다. 다만 이것을 어떻게 전해야할지. 언어를 고르고 있을 뿐.
단순명료하게. 직설적으로 전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결국 벨져가 한 마디로 줄이건 아니건간에 릭에게 그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심정은 간절하게 짝이없고 부디 이루어졌으면하는 바램이다. 그렇다고 구차하게 비는 모습을 벨져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다. 릭 톰슨, 어서 말해. 파란 눈이 깜빡깜빡 릭의 대답을 기다린다. 예상컨대 그의 대답은 긍정적이겠지. 릭이 아는 벨져 홀든이라면 고개를 끄덕여 줄 것이라 믿는다. 그럼에도 지금 릭이 망설이는 건 오랫동안 묵히며 숙성시킨 염원이 부풀만큼 부풀었기 때문일까.
“벨져……. 정 이곳을 떠날생각이라면?”
이건 또 너무 둘러둘러 묻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냥 직설적으로 말할 걸 그랬나? 내뱉고서야 떠오르는 후회를 억지로 밀어낸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인 것을 어쩌겠는가.
시선만 맞물린 채로 의미없는 시간이 흐른다. 불만스런 시선으로 저를 빤히 쳐다보는 벨져의 눈초리가 영 따갑다. 흠흠. 괜시리 헛기침을 두 번.
“그대가 나와 함께 갔으면 해.”
일몰 너머의 저녁으로 달린다.
순식간에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하늘은 마치 자신이 시간조차 뛰어넘는 전능함을 손에 넣은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한다. 차가운 저녁이 내려앉은 대도시를 걸었다. 유럽의 그곳과는 달리 누구도 릭 톰슨과 벨져 홀든의 관계에 관심이 없고 벨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저 이웃만이 이따금 사소한 안부를 물어올 뿐이다. 예를 들자면 릭이 들고 다니는 음식이 늘어난 걸 눈치 챈 가게 점원 정도? 안부라고 해봤자 청년, 요즘 누가 같이 있는 모양이던데, 좋은 사람이라도 생겼나봐? 기껏해야 이런 소리랄까. 그럴 때면 릭은 그저 싱긋 웃으며 글쎄요, 라고 답하면 되는 사소한 질문이다.
메마른 화초마냥 시들시들한 애인에게 체력이 붙으려면 뭘 먹여야 할까. 스테이크 용 고기와 곁들일 야채, 감자, 갓구운 하얀 빵. 남은 손에는 프랑스에서 급하게 골라온 한 병의 레드와인.
식재료를 들자마자 능력을 쓰는 방법도 있으면서 굳이 도보를 택하는 건 어디까지나 릭의 낭만이나 신념과 관련된 선택이다.
너는 네 능력을 얕잡아 보고 있다고 벨져가 핀잔을 줬던가. 벨져 홀든을 알게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너에겐 그만한 힘이 있을텐데. 고압적인 말투로 풀어내던 칭찬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묘한 말을 기억한다. 다만 릭은 그런 벨져의 말에도 자신의 힘을 최대한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런 짓을 저질렀다가는 릭 톰슨이라는 자신을 버려야 할 것이라 직감하고 있었으므로.
겨울 밤을 걸으며 릭은 벨져에게 전해야할 소식들을 정리한다. 편지라도 써서 보내라더군. 이 말은 적당히 마지막에 꼬리처럼 붙이는 걸로 충분하겠지. 다이무스가 돈봉투를 쥐어줬다는 건 숨기고. 제레온 경은 잘 지내신다…. 벨져에게 가장 중요할 소식에서 생각이 막힌다.
장년의 기사가 벨져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아주 잘 알고있다. 릭에게 있어서의 벨져. 아니 그 이상일까. 벨져가 제레온에게 바치는 헌신만큼 릭이 벨져에게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고개를 바로 끄덕일 자신이 없었으니까.
광신도의 신앙. 아니. 그 이상 이리라. 세상 어떠한 신자도 신에게 그토록 열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릭은 벨져의 제레온을 향한 마음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벨져이기에 좋아했다. 벨져가 릭이 자신에게 했던 대로 제레온에게 행하는 키스를 신성하다 여겼다. 저열한 이들에게 기꺼이 몸을 내주는 것 조차 지켜볼 수 있었다. 릭 톰슨은 벨져 홀든의 비뚤어진 신앙과 헌신마저도 사랑했다. 허나 동시에 릭은 연인이 숭배하는 제레온 프리츠가 달갑지 않다. 제레온 프리츠는 벨져 홀든의 신이지, 릭 톰슨의 신은 아니었으므로. 자신의 신이 숭배하는 신이라 해서 그 자가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대에게 이런 말을 하면 화를 낼까.
결론을 내리기 전에 두 다리는 집에 도착했다.
“다녀왔소.”
등 뒤로 문을 닫는다. 해가 저문 지 몇 시간. 집 안은 어두컴컴하다. 자주 그러하듯 아마 깜빡 잠이 들었겠지. 설마 식사도 않고 하루 종일? 그런 걱정도 했으나 차려두었던 식사가 전부 잘 정돈되어있는 걸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침실까지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은 모습이 보였으니까. 등받이에 푹 몸을 묻은 채 잠든 벨져의 옆에는 읽고있던 책이 펼쳐진 채 놓여있다. 다 읽은 건지 읽으려고 했던 건지 싶은 대여섯 권의 책 무더기도.
릭은 조용히 소파 아래로 무릎을 꿇는다.
소파 위로 툭 떨어진 하얀 손을 건져 올렸다. 무겁고 큰 검을 두개나 휘두르던 팔은 이제 제 분신같던 그것들을 더이상 들 수조차 없게 되었다. 아직 자잘하게 남은 이 군살들도 얼마 안가 보드랍게 변하겠지. 몇 번이고 릭의 앞에 서서 그를 구원하던 벨져 홀든은 이제 그와 같을 수 없다. 벨져는 긍지높은 기사였으나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이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무대를 떠났다. 벨져 홀든을 이루던 긍지가 변색되기 전에.
마르고 하얀 손으로 릭의 체온이 스며든다. 차가운 피부를 따스하게 어루만지며 릭은 그의 현이 팽팽하게 긴장하고, 칼날이 예리하게 빛났던 때를 생각한다.
갖은 책과 서류가 가득하던 작은 공간. 구석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두 자루의 검. 그곳에 젊은 단장의 사유물은 거의 없고 태반이 제레온 프리츠의 것이라 했다. 장년의 기사가 가졌던 긍지와 기억으로 숨이 막히던 밀실에서. 제레온 프리츠가 사용하던 나이들고 무능한 검들로서 자신의 충의를 되새긴 청년은 얕은 잠을 청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