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PLE HELIX 트리플 헬릭스
R19 | B6 | 114P | 소설
릭벨져. 원작기반 대디플하는책...인데 전체적으로 아무말대잔치. 벨져한테 구멍하나 더생기고 작아지고 난리납니다.
릭이 마음고생하고 벨져가 몸고생하는 내용. 피는 안튀기지만 뭐가 어케되어도 ㅇㅋ하는분께...
표지 : 기미(@89880CP)님
샘플은 이어지지 않슴다
이변을 눈치챈 건 숙소로 돌아와 몸을 씻은 뒤였다. 벨져가 먼저, 그 다음으로 릭이 욕실을 썼다. 욕실에 들어갈 때만 해도 평소와 큰 차이는 없었다. 그랬는데. 릭이 머리를 털며 나올 즈음에는 벨져의 표정이 제법 일그러져 있었다.
징조는 왼팔에서 나타났다. 대체 어떤 고통이 있는 걸까. 입술을 어찌나 꾹 깨물었는지 핏기가 없다. 벨져? 머리를 털던 손을 멈추고 불러도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 사이로 왼팔을 늘어트리고 어깨 아래를 오른손으로 잡은 채 미동도 않았다. 릭은 곁으로 다가가 얼굴을 살핀다.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뺨이 식은땀으로 축축하다.
“뭔가 잘못됐소?”
그제야 벨져는 눈을 들어 릭과 시선을 맞춘다. 그런 것 같군. 지금 당장에라도 사그러들듯 작은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또렷하게 들렸다.
얇은 가슴이 크게 움직인다. 숨을 몰아쉬는 허파의 움직임이 훤하다.
벨져가 오른손으로 쥔 아래쪽으로 날붙이에 그인 자죽이 벌겋게 남아있었다. 오늘 상대가 나이프를 무식하게 던져대기야 했지. 사방에서 정신없이 날아오던 칼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걸 그 커다란 두 자루의 칼로 하나하나 쳐내는 모습은 역시 검 능력자라고 해야 하겠지. 릭은 벨져가 시키는 대로 옆에 찰싹 붙어 보이는 것만 간신히 능력을 써서 날려버리는 게 고작이었는데 말이다.
이거 잘못하면 칼이 내 심장에 박히는 거 아니오!? 박히면 빼면 그만이다!
그리 농담스런 말까지 하면서도 혼자가 아니라 릭에게 날아오는 것까지 쳐내던 탓인지. 벨져의 평소 표현을 빌리자면 짐덩이가 하나 있다고 하는 것도 좋겠다. 여튼 교전이 끝나고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여기저기 옷이 찢긴 상처가 있었다. 깊게 남은 상처는 없지만 이런 잡졸들을 상대한 것 치고는 잔상처가 많은 편이기도 하다. 릭 톰슨이 생각하는 벨져 홀든을 기준으로 보면.
벨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순간 몸이 크게 기울며 균형을 잃는다. 쓰러지려던 벨져를 간발의 차로 부축했다. 몸이 지독하게 차갑다.
“벨져…?”
“릭. …짐을 챙겨. 지금 당장 떠난다.”
잠깐이라도 쉬는 편이 나을 텐데. 이런 식으로 자신의 상태가 썩 좋지 못할 때 바로 장소를 옮겨버리는 건 벨져의 버릇이다. 워낙 자기관리가 철저한 탓에 그런 일이 빈번하지는 않으나 일단 위험요소를 줄이는 거라나.
짐이라고는 해도 꺼내놓았던 옷가지 몇 벌을 가방에 쑤셔넣는 정도가 전부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벨져 대신 옷을 주워 담는다.
“좋소. 어디로 가야 하지?”
“네 집.”
“내 집?”
되묻고, 벨져를 빤히 바라본다. 1분은 커녕 초 단위로 상태가 악화되고 있었다.
“병원이 좋지 않겠어?”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파란 눈이 차갑게 감겼다.
첫째 날. 릭은 자신의 집 침대에 누운 벨져 옆에서 하루를 보냈다.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 꽤 괴로워보이지만 내일쯤이면 낫겠지 싶었다. 아주 가끔 그러했듯. 큰 외상이 아니면 벨져는 하루, 길면 사흘 정도로 전부 훌훌 털고 일어났으니까. 릭은 벨져의 안전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이틀 째. 어제와 같았다. 사흘 째.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저녁에 벨져가 정신이 들었다. 스프를 몇 숟가락 먹였다. 나흘 째. 둘째 날과 같다.
그런 식으로 꼬박 열흘이었다. 릭 톰슨은 언제나 전장에 서는 제 애인을 만나고 처음으로, 난생 처음 벨져 홀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 열흘을 보냈다. 열흘 내내 불안해 했던 건 아니지만 불안하지 않았던 처음 며칠간의 안일함이 벨져를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두게 한 원인이 아닌가 싶어 릭은 더욱 머리를 싸맸다. 계속해서 밀려오는 자책을 어쩔 수가 없다.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싶어 이따금 간신히 눈을 뜬 벨져와 원인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했다. 벨져의 예상으로는 독이었다. 대체 어디서 독에 당했나 여러 번 생각해보았는데 피부를 스친 날붙이에 발라져 있었겠지 싶다. 대체 무슨 독이 묻어있었는지. 릭 톰슨이라는 인간은 워낙에 무난한 삶을 살아왔기에 성장하면서 독과 밀접해야 할 이유도 없었고 알 리도 없다. 그런고로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해가 뜨고 지기를 아홉 번 반복하는 동안 릭 톰슨은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벨져 홀든의 곁을 지켰다. 신체에 산처럼 누적되었을 피로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벨져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크고 무거운 두 칼을 휘두르고 던지며 전장을 누비던 청년이라고 누가 믿을까. 그렇게 넓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비좁지도 않은 침대에 누인 몸이 당장에라도 죽을 듯 괴로워 보인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는 벨져의 옆에 붙어 물을 주고 식사를 먹이고 몸을 닦아주며 간병에 매진하다보니 마지막 나흘은 정말 한숨도 잠들지 보냈다. 결국 열흘째 되던 날. 한계에 다다른 릭이 피곤에 지쳐 쓰러지다시피 잠에 빠지고. 눈을 떴을 때에는 반나절 조금 안되는 시간이 지나있었다.
조명으로 방이 환하다. 릭에게는 불을 켠 기억이 없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해가 저문 직후. 이제 잔뜩 어두울 무렵인데 방이 밝다. 내가 불을 켜고 잤던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이젠 기억마저 끊겼나. 깜빡깜빡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는 시야에 익숙한 천장이 가득 찬다. 언제 침대에 누웠더라. 워낙 피로가 쌓였던 탓에 몸은 찌부둥하다. 무거운 몸을 일으키자니 몸이 침대에 빠져드는 것만 같다. 다시 눈을 감는다. 머리 위, 옆에서 목소리가 떨어졌다. 릭, 정신이 들었나?
벨져? 인가. 벨져일 텐데. 벨져라고 생각했는데 순간 어라, 싶은 의문이 머리를 스친다. 벨져의 목소리가 이랬던가? 약간 다른 것도 같고. 눈을 감은 채 고민했다. 릭 톰슨은 잠결에 방금 전까지 벨져 홀든이 환자였다는 사실을 잊고 농담을 입에 담는다. 아침인사로는 달콤한 입맞춤이라는 달콤한 언어를 써보는게 어떻겠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른 손가락이 볼을 쭉 꼬집어 당겼다.
“아주 푹 잔 모양이군?”
“아악! 내가 잘못했소! 벨져! 농담 하나에 무슨…….”
순간적으로 뺨에 몰리는 고통에 눈을 번쩍 떴다. 눈앞으로 보이는 모습은 역시 벨져다. 그러나…. 무언가 달라진 부분에 저도 모르게 입가가 풀어졌다.
학창 시절 능력이 발현한 그 순간부터. 릭 톰슨은 흔한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그야말로 어디에나 굴러다니는 돌덩이처럼. 크게 튀어나온 부분 없이 주면에 묻혀 평범하게, 자신의 능력을 비밀스런 즐거움에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의 인생 목표였으나. 세상이 릭을 그리 두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런 능력을 준 세상이 릭을 가만 둘 리 없었던걸까. 결국 전장에 몸을 던지게 되었고, 지금 이 순간, 릭 톰슨의 평범하지 않은 특이한 경험에 다시 한 줄이 추가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다지 나쁜 경험이 아니다. 그야말로 피로가 싹 날아간 기분이라는게 이런 걸까. 열흘간의 불안도 고통도 전부 한 순간에 잊고, 그저 경이만이 가득하다. 몸은 아직 뻐근할 텐데도 전혀 그런 감각이 없었다.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이건…굉장하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한마디에 벨져가 눈을 찌푸린다. 그런 반응따윈 아무래도 좋다. 미소가 입가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대로 미끄러지듯 침대 옆 의자로 이동해 벨져에게 묻는다.
“정말 굉장해. 무슨 독이었는지 짐작가는 건 있소?”
“그게 중요한가?”
팔짱을 끼고 있던 벨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모르는군. 자신을 노려보는 벨져에게 멋쩍은 웃음을 흘린다. 푸른빛이 도는 눈이 가늘어지고, 고개를 숙였다.
“물--론…. 그래. 독의 종류라……. 중요하지 않은 사안은 아니겠군. 하지만 독의 종류 따윈 천천히 찾아봐도 괜찮을 문제다.”
“그러다가 또 같은 독에 당하면 어쩔 거요?”
“다음에 같은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독은커녕 옷깃 하나 스치는 상처조차 없을 거라 장담하지.”
성질 한 번. 지기 싫어하는 꼴은 사실 벨져나 릭이나 비슷비슷하였으나 벨져 쪽이 더 강박적이다.
무슨 고민인지 두 눈은 릭이 아닌 다른 곳을 본다. 시트 위의 두 손. 예전의 벨져를 생각해보면 지금의 저 손은 고민이 될 법도 했다. 벨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안색은 당장에라도 죽을 듯 골골대던 아까보다 훨씬 개운해보이지만 표정은 살벌하기 짝이 없다. 열흘 전이었다면 제법 긴장하고 또 시작이라며 기분을 맞춰줄 생각이 들었겠지. 그런 것이 다만 지금은 이런 신경질마저도 귀엽게 느껴지니 사람의 마음이 어찌 이토록 간사할까. 아니, 절대로 벨져가 이런 꼴이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내심 변명한다. 죽다 살아난 사람이 조금 신경질을 낸다고 미워보이기야 하겠는가. 그런 이유다. 절대로, 결단코 지금의 벨져 홀든의 모습이라는게 릭 톰슨이 보기에 조금 만만해보인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다. 뭐 외형이 제법, 아주 많이. 귀여워지기는 했지만.
아, 이거 정말. 정말이지. 굉장하군.
입을 가리고 작게 중얼거리며 감탄했다. 딱히 별 말이 없는 걸 보면 벨져에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입밖으로 꺼내지 않는 편이 가장 좋았을 감탄이긴 하지만 그래도 꼭 작게라도 말하고 싶었으니 그렇게 했다. 들었다면 화냈겠지 생각하니 더 두근거린다. 굉장해. 이번엔 마음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독인지 재주도 좋을 따름이다. 누구나 감탄하겠지. 릭은 확신한다. 저런 효과를 가진 독이라면 돈을 주고라도 먹겠다고 장사진을 이루기도 할 거고. 다들 젊어지는 건 아주 좋아하지 않던가. 아니, 젊어진다라고 하기에는 효과가 과한가? 이전과 확실히 달라진 벨져의 모습을 훑어보며 생각한다. 벨져는 불만이 가득해보이지만 릭은 제법 만족스럽다. 좋게 말해 젊어진, 대놓고 말하자면 쪼그라든 벨져 홀든이라. 신선하지 않은가. 익숙한 모습이 아니니 신선하고. 어리니 신선하고.
작다기보다 어리다. 그럭저럭 릭보다 한 스무 해는 적을까. 많아야 십대 중반쯤? 벨져의 유년시절을 본 적이 없으니 비교나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아마도 그쯤. 저 미간을 잔뜩 좁힌 얼굴도, 쥐었다 폈다 하는 손도 그저 귀엽게만 느껴진다.
“입을 옷과 식사나 좀 사오겠소. 쉬고있는게 좋겠어.”
하하 웃으며 방을 나선다. 완전히 나가려던 찰나. 미처 하지 못한 말이 떠올라 잠시 뒷걸음질쳤다. 방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눈을 마주한다.
“그대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작게 웃었다. 벨져는 눈을 가늘게 감고, 고개를 돌릴 뿐이다.
릭 톰슨에게는 자질구레한 행운이 잘 따르곤 한다. 행운의 사나이라고 하기에는 모든 운이 좋은 건 아니지만. 지금도 결과적으로는 운이 좋다면 아주 좋은 편이다. 몇 시간만 더 늦게 일어났더라면 상점들이 전부 문을 닫았을 테니까. 옷가지야 그렇다 쳐도 냉장고가 분명 텅텅 비어있던 걸 생각하면 텅텅 비어서 아픈 위장을 끌어안고 밤을 지새워야 했겠지. 그런 작은 행운에 감사하며 분주하게 저녁 거리를 활보한다.
옷은 외출하지 않는다면야 적당히 집에 널린 흰 티만 입혀도 문제없겠지. 우선할 쪽은 식량이다. 무언가 있긴 하던가. 직후에 그야말로 바닥만 보이는 냉장고를 떠올리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뭘 사야 할까. 하도 식사를 소홀히한 탓인지 당장 먹고 싶은 게 생각나지 않는다. 카트를 앞에 두고 잠시 멈춘다. 일단 맥주 몇 캔에 와인 한 병. 치즈 소세지 감자칩. 벨져의 건강이 좋아진 대신 다른 악재가 겹쳤지만 아무렴 좋지 않은가. 일단 축배는 들고 볼 일이다. 그리 생각하며 술과 안주를 잔뜩 챙기고 나서야 식사라는 단어가 제대로 머리에 떠오른다. 식사가 될 만한 것. 제 배를 채우는거야 그렇다 쳐도. 열흘을 사경에서 헤매던 환자에게 뭘 먹여야 할지. 물론 상대는 벨져 홀든이기에 며칠이나 빈 속에 갑자기 기름진 고기를 썰어넣어도 괜찮겠지만. 아니지. 쪼그라들었으니 그것도 아닌가? 뭐 그래도 벨져의 믿기지 않는 내구력을 생각하면 뭔들 못먹겠냐마는. 병자를 병자 취급해서 나쁠 건 없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며 항상 신경을 날카롭게 유지하라는 건 벨져가 하던 말 아니었나. 대강하지 말고 매사에 신중하게. 항상 잔소리라고만 생각했던 그 말에 이토록 충실하고싶던 적도 지금이 처음이다.
그러면 스프라도 만들까. 스프 재료에 릭 자신이 먹을 것들을 대강 쓸어담으니 금세 카트가 두둑해졌다.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 산 것들을 공간에 던져넣고 손목에 잔뜩 감아둔 시계 중에서 손에 가장 가까운 것을 확인한다. 아직 의류점 마감시간까지는 여유가 있다.
문을 여니 방울 소리가 울린다. 어서오세요. 점원들의 인사가 구석구석에서 들려온다.
릭이 이런 곳에 올 일이 있었을 리가 없다. 사람이 거진 다 빠지고 고객이라고는 저를 포함해 셋. 나이가 조금 있어보이는 여성이 둘, 노년의 남성이 하나. 자제분 옷을 고르러 오셨나봐요? 매장으로 들어선 릭에게 점원이 말을 걸었다.
“아….”
자제라는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벌써 여기 옷을 입을 만한 애가 딸렸을 것처럼 보이나? 물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이이긴 하지만 조금 충격적이다.
“앗, 죄송해요. 조카분 선물이신가요? 어떤 옷을 찾으시는지 말씀주시면….”
“괜찮소. 내가 편하게 고를테니, 저기 신사분께 가보는게 어떻겠소?”
릭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백발의 노신사가 손짓하고 있다. 앗, 잠시만요! 손님 지금 갑니다~!
점원이 저쪽으로 떠나고 남겨진 릭은 옷걸이를 빠르게 뒤적이며 머리를 굴린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알 리가 없었으니 미리 생각해둔 복장은 따로 없었다. 썩 익숙하지 않은 벨져의 미성숙한 얼굴을 떠올리며 어떤 게 괜찮을지 상상해본다. 먼저 본인의 희망은 무엇일까를 추측해보기도 했다. 벨져야 뭐, 머릿속은 여전히 스물여섯의 벨져 홀든 그대로이니 성인 남성의 복장에 가까운 복장을 생각하고 있겠지만. 기왕 저만치 작아졌는데 평소와 비슷한 옷은 아깝지 않은가. 릭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바라는 대로 지금의 벨져에게 입히고 싶은 옷을 고르기로 했다.
흰 블라우스에 무난하게 반바지. 스타킹. 흰양말. 멜빵. 코트. 이것저것. 사실대로 말하자면 팔랑팔랑 예쁜 옷들에 눈이 가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나. 그것들까지는 벨져가 입어줄 리가 없었으므로 그만두는 대신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하나 집었다. 이것도 치마나 마찬가지로 벨져가 화를 내기야 하겠지. 아니 분명 치마보다 더 화를 낼 것이다. 그래도 이정도면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니 잘 설득하면 다리 정도는 넣어주지 않을까.
옷가지를 한가득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식탁 위에 두었던 식재료를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은 뒤 옷을 들고 침실 문을 연다. 문이 열리는 기척에 일어난걸까. 벨져가 몸을 일으켜 릭을 바라보았다. 다녀왔소. 한 발 늦게 인사를 건넨다.
“아까 소리를 들으니 한가득 던져놓던데. 뭘 그리 많이 샀나?”
“음식이오. 열흘이나 나가지를 못했으니 냉장고가 텅텅 비었거든. 식사 전에 일단 씻겠어? 제대로 된 목욕은 며칠이나 못했을 텐데. 씻고 개운하게 먹는 편이 그대도 상쾌하겠지.”
“그렇군.”
“욕조에 물을 받아둘 테니 조금 더 쉬다가 들어가면 될 것 같소.”
벨져가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옆으로 몸을 내린다. 조금 쉬라고 했는데. 다시 침대에 편히 있으라고 권하려 했으나 눈앞으로 펼쳐진 작태에 그만 눈을 뺏기고 만다. 쓰러진 사람을 굴리고 굴려 간신히 입혀놨던 잠옷 상의는 거의 걸친 수준으로 헐렁해져 있었다. 허리에 걸쳐있지도 못하는지 바지가 바닥으로 주르륵 떨어지고, 발밑으로 흘러내린 바지에서 발을 뺀 뒤 들어올리더니 침대 위에 놓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릭은 등을 돌려 부엌으로 향했다.
그야말로 소년의 신체다. 신기하고. 놀랍고. 경이롭고. 정말 굉장하고…. 갖은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런저런 감상을 삼키며 요리를 계속했다. 스프 불을 끄고 오븐에 고깃덩이를 넣는다. 빵도 몇 점에 이파리도 대강 접시에 두었다. 생각나는 대로 준비하다보니 메뉴에는 영 조화라는게 없다.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릭은 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타올을 뒤집어쓰고 아직 젖은 채 나온 벨져와 마주친다. 귀찮게 굴지 말라며 뿌리치려는 손길을 피해 수건을 덥썩 잡는다. 잘 닦아줄 테니 가만 있으시오. 릭, 적당히 해! 그런 말을 들어도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몸을 수건 위로 이곳저곳 꾹꾹 누르고 더듬어 물기를 잘 닦아낸다. 그리고 전신을 다시 타올로 돌돌 말아 침실로 데려갔다. 벨져가 앞장섰으니 데려간 건 아닌가. 정확하게는 타올로 몸을 대강 말아두니 말린 타올이 제발로 침실에 들어갔다. 문자 그대로 타올덩어리 아래로 빼꼼히 나온 발이 움직이는 모습은 정말이지. 우습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에 들어간 벨져는 침대에 걸터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옷이야 당연히 입지 않았다. 없었으니까. 홀딱 벗은 애인을 보고서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옷 봉투에 눈이 간다.
“아, 그래. 사온 옷이 잘 맞나 확인해야겠군. 한 벌 정도 양말까지 전부 입어보겠어? 제대로 샀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오. 혹여나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내일 옷을 다시 구해와야 할 테니.”
종이 봉투를 들고 침대 쪽으로 다가간다. 푸른 눈이 고개를 들어 릭을 보았다. 어디 보자…. 여러 벌 산 만큼 이것저것 있는 봉투를 뒤적이다가, 시선을 맞춘다.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고개를 제법 숙여야 했다. 자제분 선물이신가요? 점원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손이 멈춘다.
분명 스물여섯 살인 애인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새삼 몇 번이나 떠올렸던 감상이 다시 떠오른다. 작군. 정말 작아. 어디 엄마젖이나 물고있을 아기마냥…아니 물론 갓 태어난 신생아나 이제 두세 살 된 아기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훨씬 큰 아이지. 느낌이 그렇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이 몸은 스물여섯의 청년이 아니었던가. 어제? 어제도 아니고 당장 몇 시간 전이다. 몇날 며칠을 밤을 지새우며 간병에 매진하다가 깜빡 잠이 든 사이. 길어야 여섯에서 여덟 시간. 300분에서 480분. 고작 그 정도 시간으로 스물여섯 해를 들여 릭과 같은 눈높이까지 쌓아온 이 청년의 시야가 아래로 푹 꺼져버리다니. 순식간에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어리지는 않은데도 릭의 눈에는 그러한 탓에 갓난아기와 다름없게 보인다.
벨져에게는 달갑지 않을 변화다. 검을 들고 싸워야 하는데 육체적 능력이 저렇게 실추되는 걸 바랄 리가 있을까. 그리고 릭 톰슨은….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싫지만은 않다. 물론 솔직하게 지금의 그대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가는 벨져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겠지. 딱 저런 느낌으로.
어깨로 걸친 커다란 타올 아래는 그야말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살이다. 티 하나 없이 하얀 피부. 유독 시선을 끄는 분홍빛 돌기에서 억지로 눈을 떼려 하니, 마찬가지로 상처하나 없이 깨끗한 다리로 눈이 갔다. 다리를 꼬아 침대 끝에 걸터앉은 탓에 그 사이는 단단히 가려져있다. 아니 저걸 보려던 건 아니고. 내려가 있던 시선을 황급히 들어 벨져와 눈을 마주했다. 시선이 썩 곱지 않다. 흐음. 벨져는 제 볼을 감싼 손가락으로 뺨을 툭툭 친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벨져?”
“즐거워 보이는군.”
약간 녹색이 도는 푸른 눈이 릭의 속내를 뻔히 들여다본다. 내 이 꼴이 좋은가봐? 음성은 없었으나 릭은 이어질 말을 똑똑히 들었다. 들은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소! 큰일이군! 정말 큰일이야. 억지로 소리내어 호들갑을 떨어봤자 입이 이미 헤실헤실 웃고 있으니 설득력은 없겠지. 못미덥다는 벨져의 얼굴을 어떻게든 못 본 체 하려 고개를 돌린다.
젖은 타올을 걷어내고 한참 좁아진 어깨에 흰 블라우스를 걸쳐주었다. 도와줄 심산으로 블라우스에 손을 대려 하니 벨져가 옷깃을 낚아챈다. 평소라면 단추를 잠그거나 소매에 팔을 넣는 정도는 거들어도 뭐라하지 않는데. 워낙 감이 좋은 사람이다. 벨져는 지금 릭이 자신을 아주, 좋게 말해 귀엽게 보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리라.
아무리 몸이 쪼그라들었다 해도 알맹이가 달라진 건 아니다. 아이의 손으로 능숙하고 우아하게 단추를 착착 채워가는 동작은 여전히 어디의 그런 기계인가 싶기까지 할 지경이다.
잘 엇갈려있던 다리는 다시끔 평행으로 놓여있다. 릭은 그 앞으로 몸을 내려 무릎을 바닥에 대었다. 제 무릎 앞으로 놓이는 갈색 머리카락에 벨져가 잠시 손길을 멈추고 릭을 흘끗거렸지만 시선은 다시 옷매무새를 다듬는 부분으로 움직인다.
그 틈을 타 군살 하나 없이 말랑말랑한 발을 이리저리 주물러본다. 살결은 그저 보드랍고 살이 그다지 붙지 않았음에도 만지기가 좋다, 이 작은 발가락 하나하나가 벨져 홀든의 일부라는 사실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발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위로 올려 발목을 잡아도 보고, 종아리를 쓸어만지기도 한다. 매끈하게 늘어진 다리는 릭이 알던 것보다 길이는 짧을지언정 훨씬 부드럽고 가늘다.
릭은 벨져의 유년시절은 고사하고 당장 작년의 모습조차 알지 못한다. 사진으로조차 본 적이 없다. 홀든 본가에 가면 혹시나 기록이 남아있을까. 아마도 있겠지만 벨져는 자신의 유년시절 기록따위는 가지고 나오지 않은 듯 했다. 집에서 나올 때 맨몸으로 나왔다나. 보여 줄 생각도 없겠지. 워낙에 앞만 보고 사는 사람이다. 릭이 그대의 어린 시절이 궁금하다고 할 때마다 이야기는 드문드문 풀어주어도 사진이 보고 싶다는 요청에는 고개를 까딱할 뿐이었다.
왜 그런 걸 굳이 보려 하지? 내가 모르는 시절이 궁금한 건 인간이라면 당연한 거 아니오?. 정 그렇다면…언젠가 기회가 되면 보여주도록 하지.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 말인즉슨 알아서 찾아봐야 한다는 뜻이다. 딱히 정말로 보여주지 않을 생각은 아니지만 열심히 기억해두지도 않겠다는. 주로 홀든 본가와 관련된 호기심일때 저런 반응이곤 했고, 아무리 설득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도 릭 톰슨은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거기서 그 화제는 일단락났다.
계기와 과정이 유쾌하지는 않았으나 지금 눈앞에 보이는 상황은 썩 나쁘지 않다. 뭐가 어찌되었건, 어떤 모습이건 간에 건강하고 멀쩡한 모습으로 앉아있지 않은가.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간 또 화를 내겠지만.
정말 벨져의 어린 시절이 이러했을지는 사실 그와 그의 가족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조차도 기억이 퇴색해 모호해졌을지도 모를 노릇이지. 정말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육체를 보고 있으면 그 시절을 재현했다기보다 그냥 신체나이가 어려진 정도일 거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어차피 사진조차도 렌즈를 통해 본 모습이다. 무엇으로 보아도 원본과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을 텐데. 심지어 티 하나 없이 아주 깨끗하게 복원한 모습이라니. 열흘 간 심신 양면으로 죽도록 고생한 보답이라도 받는 듯 하다.
하얀 종아리를 만지던 손이 다시 발로 내려왔다. 며칠 전까지의 벨져도 피부가 굉장히 좋은 편이었으나 아무래도 지금에는 비할 바가 아닌 것 같다. 제대로 밖을 걸은 적이 없으니 발바닥마저 말랑말랑하고 한 꼴이 입에 물어보고 싶기까지 하다. 지금이라면 발만이 아니라 벨져가 한 손에 잡히지 않을까. 그런 착각마저 드는군. 그리 솔직하게 말하면 벨져는 말이 되는 소리냐고 눈을 찌푸리겠지. 눈앞으로 표정이 그려지고 귓가로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두 손으로 발을 감싸고 만지작거리다가. 끌리는 대로 하얀 발등에 입을 맞췄다. 목욕을 마친 몸에서는 거진 다 써가던 샴푸 냄새가 났다. 솔직히 벨져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향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걸 사다 놓았을 텐데. 캬라멜이나 초콜릿 같은. 물론 릭 본인은 쓰지 않았겠지만.
그런 잡상에 정신이 팔려있으니. 한참 작아진 발이 릭의 턱을 걷어찼다.
“컥.”
“언제까지 내 다리를 주물거리고 있을 셈이지?”
한창 만져대고 있던 발이다. 계속 끌어안고 조물거리고있던 부분인 만큼 차마 방어할 겨를이 없었다. 이빨이 서로 부딪혀 제법 찡하니 얼얼하다. 혀를 깨물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불만스러운 벨져에게 릭이 얼얼한 턱을 어루만지며 투덜거렸다.
“뭐. 닳는 것도 아니잖소. 조금 신기해서 만져봤을 뿐이야.”
“네 표정은 별로 그렇지 않던데?”
“내 얼굴이 뭐가 어쨌다고 그러는 거요?”
당당하게 되물으니 벨져는 순간 답을 하지 못한다. 시선이 얽힌 채 몇 초의 시간이 흘렀다. 당장에라도 한 번 더 찰 것처럼 들려있던 발이 아래로 떨어진다. 벨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할 말이 없군.”
“거 보시오.”
훗. 입가를 끌어올려 웃으니. 이번엔 두 발이 릭의 양 볼을 끼고 꾹꾹 좌우로 누르기 시작한다. 어이가, 없다는, 뜻이다. 마디마디 강조할 때마다 얼굴을 꾸욱 눌렸다. 옆에서 보면 제법 바보같은 모습이겠지. 그래도 아까보다야.
“오. 아프지 않군.”
“세게 차주길 원하나?”
“아니, 됐소, 괜찮아. 사양하겠어. 잠깐 벨져, 악!”
장난이겠지만 벨져에게 이런 식으로 가격당하는 건 난생 처음 있는 일이다. 어떤 형태로든 벨져는 릭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단어를 빌리자면 품위가 없는 행동인 탓이겠지. 육체적 성능이 달라도 너무 다른 상대에게 힘을 쓴다는 것은 벨져 홀든의 정의에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그랬던 그가 반은 장난이겠으나 릭의 뺨을 누르고 턱을 발로 찬 건 본인이 느끼기에 지금의 자신이 전혀 위협적이지 못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리라.
“이렇게 기운이 넘치는 걸 보니 앓던 건 정말 다 나은 모양이군. 어디 양말부터 신어보겠소? 내가 돕게 해줬으면 하는데.”
양손 끝에 집은 흰 양말을 팔랑거리니 벨져가 눈을 가느다랗게 뜬다. 흐음. 생각하는 것도 잠시, 상대가 원하는 대로 발끝을 뻗어 릭 앞에 내밀었다. 아까 그렇게 쥐었던 것처럼 한 손으로 발을 감싸쥐고 끄트머리에 흰 양말을 건다.
끝까지 잘 집어넣고 흰 끝자락을 위로 잡아 올린다. 발꿈치에 걸리는 부분을 두 손으로 능숙하게 넘기며 종아리, 무릎 바로 아래까지 쭉 끌었다. 잡아 올리는 손가락으로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이 생생하다. 얇고 흰 천 너머로 이따금 작은 발가락이 꼼질거렸다.
무릎까지 오는 하얀 양말을 손수 신기고. 다음은 하반신을 잘 가려줄 속옷이다. 릭에게는 이것도 지금처럼 직접 입혀줄까 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벨져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밍기적거리지 말고 속옷과 바지를 내놔. 혼자 할 수 있다.”
릭은 마지못해 벨져의 손에 속옷을 들려주었다. 일단은 이 속옷이다. 다른 것도 있지만. 혹시나. 뻔뻔하게 내밀면서 훌쩍거리는 시늉을 했다. 때리다니 정말 너무하오. 차오르는 웃음을 고개를 돌려 가리고 있으니, 역시나 호통이 떨어진다.
“조롱은 적당히 해라 릭!”
아무리 그래도 여자 속옷을 얼굴에 집어던질 것 까지는 없지 않나.
그 뒤로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간 벨져는 뭘 할 수도 없는 몸으로, 뭘 할 수가 없는 탓에 더욱 바쁜 날을 보냈다. 릭에게 자신의 사명이나 책임 같은 것을 구구절절 말하는 타입이 아니었으므로 벨져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처리하고 있는지 릭이 알 방법은 없었으나, 칼만 없을 뿐 무언가 계속 하고있다는 사실 정도는 육안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해가 떠도 저물어도 끊임없이 어딘가로 연락을 하거나 무언가를 쓰거나 읽거나 찾거나. 외출이다. 라며 릭을 데리고 밖에 나와서는 쉬지도 않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쉬어가며 하는 편이 좋지 않겠소?
항상 마시던 진한 홍차 대신 내민 밀크티에서는 단내가 풀풀 풍긴다. 처음에는 항상 마시던 차는 어디 가고 이걸 마시라는 거냐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는데. 이제는 달다는 혹평으로 매번 각설탕을 하나씩 빼게 만드는 정도다. 여덟 개에서 세 개까지 줄였으면 많이 줄인 거지 여기서 뭘 얼마나 더 빼라는 걸까. 물론 릭은 저 밀크티를 마실 생각이 조금도 없지만.
바쁜 일과야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고. 그 이외에 무언가 특별한 변화가 있는가 하면…. 억지로 밀크티나 주고는 있지만 선호하는 음식도 같고 행동이나 반응의 버릇도 여전하다. 필적은 처음 몇 시간 정도는 좀 당황했던가. 글씨를 휘갈기더니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빈 종이에 다른 글씨를 마구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시간쯤 보내고 나서 개운한 표정으로 하던 일을 계속 했었지. 손이 갑자기 작아지고 악력이 바뀌니 적응이 안되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 말고는…. 수면시간 정도는 조금 변한 것도 같다. 평소에는 릭보다 한참이나 늦게 잠들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자정이 되기 전에 칼같이 눕고 릭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난다. 한 두세 시간 정도 더 수면을 취하게 되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무려 수면시간이 길어지기까지 하다니 아주 벨져 홀든답지 않은 변화다. 행동거지나 생각하는 점에서 애같은 면은 전무하건만 몸은 아주 솔직하게 자신의 신체나이를 말한다고 해야할까.
잘 자고, 먹고, 움직이고. 그렇게 건강하고. 성장기 아이는 그거면 충분하다고들 하지만 그건 그것이 정말 미성숙하고 순진한 아이일 때의 이야기이지 벨져 홀든은 릭 톰슨에게 있어 그가 보호하고 키워야 할 아이는 절대 아니었다. 건강하기를 바라기야 하겠으나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가 아니지 않던가. 릭 톰슨은 벨져 홀든에게 따로 바라는 바가 명확했고 고로 현 상황에 대해 릭은 불만이 아주 많다.
씻었으니 다음은 누울 것을 알고 있다. 알고는 있었다. 이럴 줄 알고는 있어도. 그렇다고 실망하지 않는다와 동의어는 아니었다.
벨져가 씻고 그 다음이 릭이다. 항상 그래왔던 대로 역시나 벨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릭은 문가에 몸을 기대고 팔장을 낀 채 게슴츠레한 시선을 침대로 흘린다. 딱히 기대도 안 했지만 칼같이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대가 이렇게 착한 아이던가?
며칠 전. 지금처럼 칼같이 누워버린 벨져에게 물었던 한 마디였다. 그 말에 감춰둔 뜻을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알 수 있을 것이라 릭은 생각하고 있으나, 동시에 벨져는 별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안다. 이제와서 릭은 자신의 질문을 조금 후회했다. 그런 식으로 돌려 묻지 말고 대놓고 물어봐야 했는데. 예를 들자면 이런 식으로 말이다. 잠들지 말고 놀아주시오. 그랬다면 대답이 조금은 달랐을까? 어쨌거나 기회는 한 번뿐이었으므로 이제와서 과거의 선택지가 현재를 바꿨을 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그 당시 벨져는 눈도 뜨지 않고 짧게 답할 뿐이었다. 필요한 수면을 취할 뿐이다. 수면욕구라고는 1g도 느껴지지 않던 대답으로부터 완전히 잠들기까지 3분.
아무리 몸이 애라고는 해도 알맹이는 스물여섯된 청년이다. 어느 정도의 졸음 정도는 정신력으로 버틸 수도 있지 않은가? 하물며 벨져라는 사람이. 이건 해도해도 너무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벌써 자려고?”
문가에 기대어 선 채 말끝을 올렸다. 누워있지만 아직은 잠들지 않았을 것을 안다. 명확한 질문에 등 돌린 어깨가 꿈틀거렸다. 벨져, 정말로, 지금, 잘, 생각이오? 음절마다 악센트를 주며 끊어 묻는다.
누운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어깨까지 올라가있던 이불이 아래로 흘렀다. 벨져는 제 형마냥 미간을 잔뜩 좁히고 짜증스레 되묻는다.
“너는 밤에 수면을 취하는 게 이상하다고 하는 건가?”
이게 육체적 관계를 맺고 감정 교류를 하는 사이에 할 대답인지 뭔지. 사람의 감정에 이해가 없는 건 아니니만큼 벨져의 대답은 한마디로 툴툴대지 말고 잠이나 자라 이 뜻인 건 확실하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냥 물러설 릭도 아니다.
“너무 이르잖소. 그대가 평소 자던 시각보다 세 시간은 빨라.”
들으라는 듯 평소를 강조한다. 릭의 대답에 벨져가 릭을 흘겨보고는 입을 다문다. 딱히 뭐라 할 말은 없을 것이다. 벨져의 성격상 순순히 지금은 몸이 착한 어린이라서, 라고는 절대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 그 세 시간동안 내가 해야 할 게 남았나?”
“아주 많지! 예를 들자면….”
예를 들자면. 뒤에 이어질 말을 어디까지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상 순간이 오니 말문이 막힌다. 원래 예정으로는 「와인이나 한 잔 하면서 침대에서 뒹구는 건 어떻겠소.」 같은 거였지만 벨져와 눈을 마주한 순간 그 말은 쏙 들어가버린 게 아닌가. 그도 그럴 것이 저렇게 귀여워진 애인의 아래 구멍에 제 것이 들어가기는 할까 하는 의문이 머리를 스친 탓이다.
벨져를 빤히 보는 녹색 눈이 가늘어진다. 고민과 함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아……. 열린 입 사이로 멍청한 소리가 샌다. 작아졌다고 좋아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작아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불에 몸의 반을 담그고 있으니 제대로 보이지를 않아 더 가늠이 되지 않는다.
벌써 일주일이나 되었는데 어찌 파악한 게 없느냐. 여러모로 겨를이 없기야 했다. 열흘은 상대가 사경을 헤맸고 일주일은 이 믿을 수 없는 사태에 적응하는 데만도 벅찼으니까.
정말 쥐똥만 해졌다고만 생각했지. 구체적으로 뭐가 얼마나 어디까지 가능한 정도로 작아졌다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머릿속까지 저 나이 또래로 회귀했다면 좀 심각한 문제였겠지만. 칼이 자기 키만 해진 탓에(정확하게는 반대겠으나) 휘청이는 것을 빼면 쓰던 칼도 잘 휘두르고. 하는 짓이나 말도 여전히 스물여섯의 벨져 홀든 그대로였으므로.
성적인 요소는 잠시 배제하도록 하고. 남는 건 문 뒤에 슬쩍 감춰둔 와인뿐이다.
“예를 들어…나와 함께 와인을 즐긴다거나?”
생글생글 띄우는 미소는 작위적이기까지 하다. 흐음. 짧은 콧소리. 이것만으로도 이어질 대답은 뻔하다.
“그렇군. 그건 다음에 즐길 여흥으로 남겨두도록 하지.”
그런 말이나 하며 다시 돌아누우려는 벨져에게, 벨져가 완전히 돌아눕기 전에 소리친다.
“벨져 지금 너무 매정한 거 아닌가!? 열흘이나 성심성의껏 그대 뒷바라지를 하고 지금도 일주일이나 애아빠가 되어있는 내 생각은 하지 않는군! 무리한 부탁도 아니고 고작 와인이나 같이 홀짝이자는 거 아니오. 그것마저 매몰차게 거절하다니!”
쪼잔한 서러움이 폭발했다. 당사자가 아니면 딱히 받아줄 사람도 없기에 더욱 폭발하는 감정이다. 지 냉혈한 같은 검사와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야 툴툴거리며 털어놓기라도 할 텐데. 애석하게도 관계를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의 혈육마저도 벨져가 릭과 함께 있으면서 무엇을 하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는 사실과 전혀 다른 예상을 하고있겠지. 작은형이, 혹은 동생놈이 그럴리 없다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간에 애인이라는 작자가 오밤의 오붓한 데이트를 거절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벨져의 저 선선한 반응이 처음인 것도 아니고. 자주 있던 일이건만 왜 이렇게 미묘한 기분일까. 물론 평소라고해서 저런 반응을 좋아한 건 아니다. 하물며 이런 때는.
자제분 선물이신가봐요. 아버지랑 밥먹으러 왔니? 어머, 아이가 참 곱네요. 사모님이 미인이시겠어요.
눈이 절로 찌푸려진다. 분명 애인이 맞는데…. 며칠간 들었던 말들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쿡쿡 찌른다. 사실과는 백만광년 떨어진 말들이긴 하지만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이해한다.
‘이거 애인이라기 보다 부모자식이군.’
그런 생각을 간간히 하기는 했다. 저만한 나이의 애가--그래 있을 수도 있지. 불가능하지는 않다. 물론 벨져는 절대로 자신의 씨로 태어난 친자식은 아니지만, 닮지도 않았지만. 제아무리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낭만적인 장소에서 데이트를 한다 헌들 연인으로 볼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좋게 봐줘야 조카삼촌으로 보일까. 그리 생각하니 더 서운해졌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그대 혼자 나갈 수 없으니 따라다녀야 하기까지 하지. 이래서야 연인은 커녕 친구도 아니고 내가 무슨 그대 아버지쯤 되는 것 같군. 뭐 이래봬도 나도 슬슬 그대만한 애가 있을 수도 있는 나…….”
나이, 라고 단어를 끝마치기도 전에 벨져가 콧소리를 흘렸다. 호오. 말을 가로채는 반응에 릭은 조금 짜증이 났다. 꽤나 한참 아주많이 작아진 연인이 못미더운 얼굴로 릭의 눈을 흘긴다.
“네 나이에 이만한 애가 있다는 건 어른이 되자마자 사고를 쳤거나, 어른이 되기 전에 사고를 쳤다는 뜻인데. 꽤나 방탕한 젊은 생활을 보낸 모양이야?”
“예시요 예시. 그런 느낌이라는 거지. 거참 까다롭군.”
툴툴거리는 몸짓이 그야말로 아동수준이다. 누가 애인지. 벨져는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으나, 릭이 자신을 위해 애를 써준 것도 사실이다. 와인 정도야 나쁘지 않겠지.
“알겠다. 정 원한다면 한 잔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까지 내보이고 싶어하는 와인이라…기대해도 되겠군?”
그렇게 두 사람은 거실에 앉아 잔을 기울였다. 값비싼 와인은 아니어도 분위기만 괜찮다면야 제법 맛이 좋다. 거기에 함께 잔을 드는 사람이 현시점에서 누구보다 마음이 가는 인물인데 오죽할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술맛 자체가 그렇게까지 좋다고는 하기 힘들었으나 이 정도면 마실만 하고, 결론은 아무래도 좋다. 벨져도 같은 생각일까, 하는 불안은 뭐 본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잘 마시니 괜찮은 거겠지.
맛은 그럭저럭인 주제에 도수는 높은 모양이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알코올에는 강한 편이라고 자부하는 편인데. 고작 이 정도에? 싶으면서도 눈앞이 흔들흔들 일렁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머리가 흔들리는 것도 같고.
얼마나 마셨더라. 탁자 위로 놓인 빈 병을 세어본다. 하나, 둘, 셋……. 몇 잔이 아니었군. 설마 취기 탓에 병을 잘못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싶어 손으로 하나하나 확인까지 해본다.
두 병째의 절반 정도까지는 정신이 말똥했던 기억이 난다. 평소처럼 실없는 소리도 주절주절 늘어놓아 보고. 벨져는 듣는둥 마는둥 잔을 비우고.
릭이 벨져와 그럭저럭 좋은 관계가 된 이래 술잔을 함께 기울인 것도 슬슬 셀 수 없을 정도는 된다. 처음에야 어딘가 금욕적일 것같은 이 청년이 술을 즐길 줄은 알까? 하는 걱정이 있었으나. 의외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역시 귀족이라고 해야 할까. 릭이 술을 권할 때면 벨져는 크게 거절하는 법이 없었고 오히려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취하지 않는 선에서 잔을 멈춰 버리는 건 그가 자신을 얼마나 파악하고 있고 자제력을 갖추고 있는 지에 대한 척도라고 해도 괜찮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철통 같아서야 같이 술을 마시는 재미가 없다.
취해서 어디 가로수를 끌어안고 울거나 하기를 기대하지는 않았어도. 좀 휘청거리거나 몸을 기대오는 정도의 가벼운 술주정 정도야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제 아무리 철통 같은 벨져 홀든이라 해도 인간이다. 계속 마시다 보면 언젠가는 취할 텐데. 문제는 어떻게 해야 계속 잔에 입을 댈까라는 점이겠지.
릭 톰슨은 이 문제에 대해 아주 많은 고민을 했다. 술을 계속 마시게 해야 하는데. 무릎 꿇고 빌면서 그대가 술독에 빠져서 헤롱대는 모습을 보고 싶으니 제발 계속 마셔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기절시켜놓고 목에 들이부을 수도 없다. 아니 물론 릭에게 벨져를 술자리에서 기절시킬 방법이 있느냐 하면 당연히 없지만서도. 그렇다고 벨져에게 혀가 없는 것도 아닌데 물이나 음료를 술로 바꿔두는 것도 불가능한 수단이고.
쉬운 길은 아니지만 한 번쯤은 보고 싶다. 작은 욕망이 인간을 움직인다.
릭 톰슨은 계속 노력했다. 그렇게 짧지만은 않은 기간 동안. 결과적으로 릭은 스스로 알아낸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수단을 알아냈다.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아주 많이.
한 밤중에 벨져로부터 호출이 있었다. 이런 밤중에 무슨 일인가 싶어 한걸음에 달려가니, 평소보다 나른해보이는 벨져가 평소보다 입을 일자로 꾹 다문 채 골목에서 팔짱을 끼고있는게 아닌가. 눈을 반쯤 감은 꼴이 졸고 있는 것도 같았다.
“무슨 일이오?”
얼굴을 살피려 반 발짝 앞까지 다가간다. 동시에, 릭은 벨져의 이 기묘한 태도가 무엇에 기인하는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지독한 술냄새.
많이도 마셨군. 허허헛 허탈하게 웃고나서야 이 사람이 이렇게 마시던가 하는 의문이 머리를 스친다. 누구랑 마셨길래? 내 앞에서는 그렇게 마시지 않는데. 그런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벨져의 입이 스스로 밝혔다.
“릭, 들어봐. 제레온 경과 오랜만에 긴 이야기를 나눴지.”
제레온 프리츠. 저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때마다 입가가 실룩거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벨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작은 웃음을 흘려댄다. 후후. 아니 그게 뭐가 즐겁소? 따지듯 묻고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벨져를 들쳐 업었다.
그 뒤로 지독하게 연습했다. 취한 벨져가 입에 담았던 단어나 문장을 바탕으로 어떤 식으로 마셨을지를 추론하는 식이었다. 처음 방법을 찾고, 한 서너 번쯤 반복하다 보니 제법 요령이 붙었다. 부추기는 타이밍이나 칭찬하는 방향 등. 어떤 때 술을 더 부어주고 어떤 때 같이 홀짝이고, 어떤 점을 칭찬하면 되는지. 벨져는 그 성질이 릭이 평소 대하는 보통 사람들과 많이 달랐으나 변칙이라는 게 별로 없는 사람이므로. 한 번 법칙을 머리에 익혀두고 거기에 충실하게 대응하면 될 노릇이었다. 게다가 더 먹이는 것에 치중한 나머지 릭 자신은 덜 마시게 되고, 결과적으로 점점 술에 잠기는 애인을 아주 말똥한 정신으로 볼 수 있게 되니 어찌 바라던 바가 아닐 수 있겠는가.
다만 오늘은 딱히 그렇게 먹일 생각은 아니었다. 그랬는데도 버릇처럼 몸에 밴 대로 부추겨버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이미 하염없이 병을 비운 뒤였다. 게다가 그럴 셈이 아니었으니 그만 덩달아 자신까지 계속 마셔댄게 아닌가. 그 결과가 이 헤롱거리는 머리다.
날숨에서 풍기는 술냄새가 지독하다. 머리가 울린다. 벨져는 벌써 한 병쯤 전에 뻗어 눈을 감은 채다. 먼저 나가떨어졌다고는 해도 릭보다 두 병은 더 마신 것 같긴 하다. 아무리 독한 술이라는 걸 감안한다 하더라도 평소의 그보다 일찍 방전되긴 했는데…뭐 몸이 반토막난 탓이겠지.
소파 팔걸이에 엎드린 몸을 일으켜 제 허벅지 위로 머리를 얹었다. 완전히 감긴 눈은 도통 뜨일 줄을 모른다.
“벨져, 이런 데서 자지 말고 침대에 가서 자는게 좋겠소.”
뺨을 톡톡 쳐봐도 반응이 없다. 벨져~, 벨져 일어나시오~. 흔들어도 묵묵부답. 볼을 다시 세게 쳐봐도 움직이지 않고. 어디 왕자님마냥 키스라도 해볼까 허리를 숙였지만 훅 풍기는 알코올향에 그럴 생각이 사라진다.
등받이에 몸을 푹 파묻고 힘을 뺀다. 나른한 눈으로 바라본 하얀 머리통은 역시 작고 몸도 마찬가지다. 정신이 멀쩡할 때야 워낙 태도가 위압적인 탓인지 그가 크게 달라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잠든 꼴은 영락없는 어린애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누가 보면 이런 어린애한테 술을 얼마나 먹인 거냐고 화를 내겠군.
하얀 머리를 쓸어만지며 감상에 젖는다. 정말 작다.
‘이렇게….’
완전히 남 일처럼 그런 생각도 든다. 애가 아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좋게 봐줘야 조카뻘인 어린애겠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쪼그라들다니…….’
눈물이 핑 돌고 물기가 눈앞을 가리고. 인생아. 그런 세 글자도 떠오른다. 릭 자신보다야 벨져의 인생이 더 큰일이겠지만 그런 벨져를 연인으로 둔 제 인생도 슬프다면 슬프지 않겠는가. 아직 어디 가서 애인이라고 말도 못 해봤는데 그 길은 더 요원해질 뿐이니. 벨져라면 어떻게든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내겠지만 일단 그때까지는 그럴 것이다.
물기 어린 눈을 손등으로 훔쳤다. 제 무릎을 베고 가로누운 몸을 스윽 훑어본다.
작아진 걸 누가 모르겠냐마는, 이렇게 보니 더 작다. 허벅지가 널널하게 남는 머리크기하며 오밀조밀하게 자리잡은 눈코입.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하얀 손. 조물조물해서 기분 좋아지는 보드라운 피부야 마음에 들지만 이건 작아도 너무 작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이래서야 들어갈 것 같지가 않군.’
역시나 원래보다 훨씬 작아진 골반 언저리를 보며 한숨을 쉰다. 설마 일어날까. 몸을 당겨 안으로 끌어안고, 옆으로 굴린 등을 어루만지다가. 슬쩍 손을 내렸다.
벨져 홀든의 골반이라니. 전세계 통틀어 만져본 사람이 몇 없을 곳이다. 릭이라고 해서 항상 주무른 건 아니고 기껏해야 침대에서나 슬슬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가 전부였다. 벨져의 성격을 생각해볼때 만져서 그렇게 환영받을 곳은 아니긴 하다. 일단 잡아 벌려야 뭘 갖다 넣든 말든 하지 않겠는가. 만지작거리다보니 누운 몸이 움찔거려 호흡이 멎을 뻔 했지만 역시 눈을 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엉덩이도 작고. 골반도 좁겠고. 당연히 넣을 구석도 좁겠지. 눈대중으로 계산을 해본다.
성욕 해소만을 위해 유지하는 관계는 절대 아니다. 정 안 되겠다면야 금욕생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래도 시도도 해보지 않고 뒤로 물러서지는 않을 거지만.
가만히 고민해본다. 손대중으로는 영 들어갈 것 같지가 않은데. 처음 벨져와 잤을 때도 그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벨져의 신체 사이즈가 전부 훨씬 작다. 역시 무리일까? 저 정도 되는 애랑 어떻게 성행위를…. 아니, 아니지…. 애가 아닌데.
‘못 할 건 없나?’
물론 평범한 애라면 될 리가 없다. 하지만 평범한 아이가 아니니까. 본인의 그 무거운 칼도 평소보다 느리지만 잘 휘두른다. 칼이 자기 키만 한게 문제일뿐. 껍데기는 멀쩡했을 때의 반타작 이하일지언정 벨져는 역시 벨져 홀든. 생각해보니 딱히 가여워하거나 봐줄 것도 없지 않은가. 작아져도 벨져는 벨져고 평범한 아이와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제로 딱히 평범한 어린아이처럼 보고 있지 않기도 하고. 어차피 벨져도 이전과 같이 대하지 않으면 화를 낼 테니까. 모든 면에서 예전과 똑같이 대해야겠지.
그래. 벗겨서 한 번 박아봤다가 정말로 정 무리겠다 싶으면--…. 생각해보니 굳이 아래에 넣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즐기는 방법이야 많다. 이미 서로 볼 거 다 본 사이에 그 정도야 부탁하면 들어줄 테니.
왼손으로는 하얀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오른손은 골반에서 엉덩이 근처를 슬슬 쓰다듬는다. 이렇게 머리만 굴려봐도 명확한 해답이 결정나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 탁상공론일 뿐이다. 직접 해보지 않고 해답을 얻을 수는 없다.
이전 같았더라면 이런 헤롱헤롱한 상태로 얼싸안고 침대에 굴러들어갔을 텐데. 그랬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오늘은 벨져가 먼저 곯아떨어졌으니 어찌 해야 할지.
벨져 일어나시오 그렇게 꿈 속이 좋소? 나보다? 벨져~ 그대의 제레온 경이 부르시던데. 벨져~ 그대 형 되는 사람이 쫓아오고 있어! 벨져!
갖은 소리를 다 해도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들린다. 아니, 쌕쌕거린다니, 이런 데서만 아이같이 굴고 너무하지 않은가. 뺨도 찰싹찰싹 쳐보고 흔들어도 보았다. 은근슬쩍 방금 쳤던 뺨을 조물락거리다가 잡아당기고 귀도 좀 만져보고 가슴에 손도 넣어 장난질도 해봤는데 웅얼거리지도 않는다.
이쯤이면 당혹스럽다. 설마 벨져쯤 되는 사람이 아무리 몸이 이 꼴이라고는 해도 고작 술 탓에 정신을 완전히 잃어 못 일어나는 건 아닐 테고. 깊게 곯아떨어진 모양인데, 이거 정말 집어넣기 전에는 안 일어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니, 오히려 기회가 찾아왔나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기회. 기회일지도 모른다. 기회인 것 같기도 하다. 기회라면 기회겠군. 그것이 도대체 무슨 기회냐 하면, 제아무리 침대에서 우위를 선점한다 해도 쉽게 할 수 없는, 한마디로 이 애인을 마음대로 주물러볼 기회쯤 되겠다.
병이라도 나지 않는 이상은 릭보다 늦게 잠들고 일찍 일어나던 사람이다. 이따금 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해도 워낙 신경이 예민해 조금만 움직이거나 기척이나면 금세 눈을 번쩍 뜨곤 했다. 릭은 으레 벨져를 놀래키거나 하는 장난을 치고 싶어 했지만 저런 철벽같은 요새를 어떻게 공략할 수가 있었겠는가.
오후부터 갑작스레 장대비가 쏟아졌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니 바래다 주기라도 할까. 그런 생각은 약간의 배려와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사심의 결론이다. 커다란 장우산은 하나만 잡고. 여름에는 약간 덥지 않을까 싶은 긴 코트를 둘렀다. 이어진 공간은 릭을 조용한 복도로 안내한다. 얇은 우주를 경계로 공기가 사뭇 달랐다. 물냄새가 독하다. 푹신한 융단 위로 구둣발이 떨어진다.
오래된 건물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난다. 제아무리 닦고 쓸어도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흔적은 지금 이 건물에서 가장 지위가 높을 이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무거운 문은 나무로 되어있다. 노크를 했다. 네 번. 똑, 똑, 똑, 똑. 약간의 시간을 두고 대답이 돌아온다. 들어와.
힘을 주어 문을 열고 인사를 했다. 좋은 저녁이군, 일은 끝났소? 창가에 서있던 하얀 사람이 뒤를 돌았다.
“무슨 일이지?”
“아, 우산을 가져왔소. 비가 워낙에 갑작스러웠으니 아무리 벨져 당신이라고 해도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멋쩍게 웃으며 우산을 들어보인다. 흐음. 벨져는 릭과 우산을 잠시 번갈아보더니, 검지로 책장 한 쪽을 가리켰다.
“있다.”
“음?”
“우산 말이다. 집무실에 하나쯤은 예비용으로 두고 있지.”
저기에. 벨져의 손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확실히 검은 우산이 하나. 릭이 들고온 것보다야 작지만 그렇다고 아주 작은 것도 아니다. 아마 비싸기는 저게 더 비싸겠지.
정말 치밀한 사람이군. 릭은 내심 혀를 찼다. 사람이 좀 틈이 있어야 거길 잘 만져볼텐데. 벨져 홀든이라는 사람은 영 그 틈이라는게 보이지를 않는다. 칼이라도 들고 틈을 내줘야 할까.
그렇다고해서 포기할 릭은 아니다. 한 번 더 끈질기게 붙어보기로 했다.
“뭐, 내 우산이 더 크니 이거 하나면 충분하지 않겠소? 훨씬 합리적이고.”
합리적. 이라는 단어가 들리자마자 벨져가 소리내어 웃었다. 뭐가 그리 재밌소? 퉁명스레 물으니.
“제일 합리적인 방법은 네가 손 한 번 까딱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 비는 구경할 필요도 없지.”
라고 답하는게 아닌가. 맞는 말이다. 이럴 때 자신의 능력은 정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굳이 능력을 쓰지 않는 것에도 이점이 있다는 것을 릭 톰슨은 아주 잘 안다. 그러한 것이 자신의 신조이기도 하고.
“거참 재미없는 사람이야. 그래서야 낭만이 없잖소.”
“이상한 녀석. 그래. 우산은 네 것을 쓰도록 하지.”
벨져가 쿡쿡 웃으며 코트를 걸친다. 책상 위에 서류는 없고, 준비는 끝난 거겠지. 우산을 한번 탈탈 털어 본다.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장갑을 낀 기사가 릭의 곁으로 다가왔다.
“근처에 좋은 식당이 있던데, 생각이 있으면 잠시 들러도 좋겠고. 어떻게 생각하오?”
싱글싱글 웃는 릭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딘가 그의 평소 모습보다 유해보였다. 부드럽다기 보다는 무언가 어리숙한. 속을 떠보려는 것처럼 녹색 눈을 빤히 들여다본다. 호기심 넘치는 어린아이 같기도 하다.
왜, 왜 그러시오. 그렇게 묻기도 전에. 벨져의 입이 열린다.
“릭.”
부름은 언제나처럼. 다만 조금 더, 처음 보는 표정, 반응.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로의 거리는 얼추 세 걸음 정도. 멀지도 가깝지도 않다. 벨져의 질문은 릭을 새빨갛게 만든다.
“나를 좋아하나?”
빗소리가 요란한 날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벨져는 언제나 릭의 예상을 넘어선 행동을 하곤 했는데. 그 때가 가장 그랬었다고 릭은 회상한다. 항상 그렇게 되기를 원했지만 지금은 그저 자신의 공상에 불과하다고 릭은 언제나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자신에게 보이는 호의는 분명 타인에게 향하는 호의보다 더욱 향기롭고 진했지만. 그렇지 않은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허락하는 행위라니. 벨져 홀든에게는 끔찍하게 어울리지 않는다.
언제나 고결하고 티 없는 그이기에 갈망했으나 그렇기에 인내심이 필요했다. 상처주지 않고 곱게 쓰다듬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때로는 호기심이 저 밑바닥에서 고개를 들곤 한다. 그대가 어디까지 나를 허락해주는지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