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드는 숲
R19|B6|40P전후(카피본)
표지: 기미님(@89880CP)
릭벨. 원작기반.
홀든의 둘째 벨져는 성격이 고약하기로 이름이 자자하다.
가문에서도 조금 골을 썩던 도중. 축제를 앞둔 벨져의 앞에 가정교사라는 한 남자가 나타나는데....
첫부분 생략되어있습니다.
폭풍우가 시끄럽게 몰아치는 밤이다.
첫째 다이무스는 집안일로 멀리 나갔다. 막내 이글은 한창 꿈나라에 있을 것이다. 집에 남아 아직까지 깨어있던 둘째 벨져만이 아버지에게 불리고, 아버지의 부름에 답해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카만 새벽. 우르릉 쾅쾅 하늘이 부서질 듯 큰 소리가 울린다. 쩌렁쩌렁 이어지는 천둥 사이사이로 번뜩이는 번개가 매섭게 눈을 찔렀다. 순간 하얗게 바래고 검게 돌아오는 시야가 흐리멍덩하다.
걸음과 함께 손에 든 등불이 일렁인다. 벨져를 부른 시종은 어딜 그리 빠르게 사라졌는지, 복도의 끝과 끝으로 보이는 건 오직 가운데에 선 제 몸뚱이뿐이다.
무릎 아래로 흔들리는 잠옷 끝자락. 부드러운 옷감이 살갗을 한없이 스쳤다. 계단 아래쪽에서 하녀가 손짓한다. 도련님, 빨리요, 주인님께서 기다리셔요. 걸음을 재촉했다. 반 층 위에서 발을 멈춘다. 현관을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현관문은 아직 열려있다. 빗방울이 거센 바람에 문가로 들이쳤다. 천둥이 친다. 커다란 문밖이 한순간에 밝아지고, 문 앞에 선 새카만 윤곽이 보였다. 순간 동화나 소설에 나올법한 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자세히 보니 인간의 형상이었다. 정확하게는 인간과 옆에 놓인 커다란 여행 가방. 가방은 남자의 허리에 닿을 정도로 크다.
밝지는 않지만 어둡지도 않은 현관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어른이다. 어깨부터 아래는 푹 젖었는데 길지 않은 머리는 물기 하나 없이 보드랍게 마른, 아마도 말랐을 꼴이 이상하다. 물기 가득한 코트 아래로 물방울이 툭툭 떨어져 카펫을 적셨다. 발밑으로 검은 얼룩이 퍼진다.
남자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벨져는 계단 위에서 난간을 잡고 둘의 모습을 가만 바라본다. 기척을 내기 전에 남자의 두 눈이 먼저 벨져를 향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녹색. 묘한 안광을 느끼는 시선과는 대조적으로 부드러운 미소는 많은 사람이 좋은 느낌을 받을 법한 인상이다. 남자가 손을 흔든다. 아직 다 크지 않은 손이 난간을 꾹 쥐었다.
커다란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힌다. 두 고용인이 남자의 젖은 코트를 받아들고 뒷걸음질 쳐 사라졌다. 그제야 입구의 조명이 밝게 켜졌다. 무난한 갈색은 역시 젖은 기색 하나 없이 보드랍게만 보인다.
“전해 들은 것 보다 훨씬 굉장한 저택이군요.”
자잘자잘한 빗소리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맑게 닿는다. 젖은 공기에 숨이 약간 답답했다. 문이 닫혔다. 조용해진 현관에서 녹색 눈이 다시 계단 위를 향한다. 벨져는 눈을 깜빡였다.
“저 아이입니까?”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군요.”
별거 아닌 대답이 이어졌다. 남자가 손사래를 친다.
“아, 별거 아닙니다. 들은 것보다 훨씬 귀여워서요.”
그러는 동안에도 남자는 흘끗흘끗 시선을 옆, 위로 들어 벨져를 기웃거렸다. 인상 좋은 표정에 얼굴, 분위기. 누구도 이 남자에게 위험하다거나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었으나 벨져는 자신을 자꾸만 바라보는 저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아무리 아버지의 손님이라 하더라도 제대로 된 소개도 없이. 훔쳐보듯 향하는 시선. 뭐에 관심이 있길래. 외모에서 오는 호기심? 아니면.
아니면, 그런 건가?
다시금 집주인을 향하는 옆모습을 살핀다. ‘그런 눈빛’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허물없고 부드러운. 사람을 편안하게 할 줄 아는 눈빛. 속내까지는 알 수 없으나 저 남자는 아마 그런 쪽으로 재주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기에 벨져는 남자를 다른 사람을 대할 때보다 조금 더 경계했다. 적나라하게 제 욕망을 드러내는 편이 다루기 쉽다. 원하는 바를 숨길 줄 아는 사람은 위험하다.
계단 위에서 조금 큰 목소리로 아버지를 부른다. 나이든 눈이 벨져를 향하고, 그것을 신호로 말을 잇는다.
“그분은 누구시죠.”
고개는 곧게 든 채. 시선만 약간 내리고. 남자를 직시한다. 남자가 생긋 웃었다. 눈을 찌푸린다.
누구시죠라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벨져가 예상했던 것과는 약간 다른 것이었다. 아버지의 친구, 혹은 가문의 손님, 아니면 업무적인 문제로 방문한 사람. 이런 한밤중에 폭풍우를 뚫고 올 만한 건 그 정도라 예상했건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생님?”
저도 모르게 말꼬리가 올라갔다. 남자는 아버지의 옆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든다.
며칠 전 가정교사 하나가 일을 그만둔 참이다. 세 형제를 감당하지 못하겠다며 저택을 뛰쳐나가던 뒷모습은 아직 기억에 생생했다. 딱히 언행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가르쳐주는 것이 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을 뿐이다. 배울 건 없을 테니 가정교사는 이제 됐다고 했던 건 다름 아닌 아버지였을 텐데.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검술? 검술 교사를 외부인에게 맡길 리는 없다.
흐음. 내심 혀를 차며 멀리 있는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바깥에서 커다랗게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무가 쓰러진 모양이다.
낮은 목소리가 전하는 대답에 벨져는 눈을 찌푸린다.
“선생님, 이라구요?”
찌푸려진 눈 그대로 남자를 본다. 남자는 여전히 생글생글 미소를 거두지 않는다.
“그렇소. 같은 집,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숨 쉬면서, 그대의 일거수일투족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왔어. 가볍게 한 달 정도? 함께 할거고.”
남자가 계단을 오른다. 하나, 둘, 셋, 넷.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진다. 네다섯 개의 계단이 남은 시점에서 눈높이가 같아졌다.
“…당신이?”
“물론 같은 방까지 쓰게 해달라고는 하지 않아. 사생활은 중요하니까 말이오. 옆 방이면 충분해.”
“아버지.”
뻔뻔한 남자의 말에 벨져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계단 아래에 있는 아버지를 바라본다.
나이든 얼굴이 천천히 좌우로 움직인다. 난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입술을 깨문다.
시종들이 남자가 현관에 둔 커다란 짐을 들고 뒤를 따른다. 나무로 된 커다란 여행 가방이었다. 어린아이 하나 정도는 가뿐히 들어갈 만한 크기다. 부피가 꽤 있는 탓에 계단을 오르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그걸 들어야 했다. 계단에 부딪힐 때마다 달그락 소리가 났다. 뭐가 들었나 궁금하오? 남자의 말에 다시 고개를 홱 돌려 정면을 보았다.
층을 하나 더 올라 왼쪽 복도로. 덜컹거리는 창문이 요란하다.
하녀가 이쪽입니다, 라며 문을 연 건 벨져의 방에 도착하기 직전에 있는 바로 옆방이었다.
벨져는 몸을 반쯤 돌려 뒤를 보았다. 남자는 정말로 벨져의 방 바로 옆에 자리를 잡게 된 모양이다. 문을 잡은 하녀의 옆. 열린 문을 사이로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때, 남자가 얼굴을 옆으로 내밀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알게 된 지 고작 몇십분도 되지 않은 사이에 이렇게 아는 척이라니. 신경 거슬리는 족속이 아닐 수 없다. 본체만체. 무시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잠근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침대에 다가가 몸을 던졌다. 짜증 나기 그지없는 밤이다.
집에 손님이 온다던 말도 없었고 선생이 온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덕분에 슬슬 잠자리에 들까 하던 찰나 졸린 눈을 비벼가며 배불뚝이의 시중을 들지를 않나, 도중에 불러낸 거에 나가서 내키지도 않는 인사를 해야 하질 않나. 무엇하나 벨져의 의사가 포함된 건 없었다.
베개에 얼굴을 누인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귀를 기울인다. 방의 사면은 두껍지 않은 벽이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걸 봐선 남자도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바로 옆은 본래 중요한 손님이 하룻밤 머물고 가는 손님용 방이다.
집에 널린 빈방들 중에서도 제법 갖춰져 있다고 해야 할까. 나름대로 값이 나가는 침대와 옷장과 탁자가 구비된. 결코 가정교사가 쓸 방은 아니었다. 가정교사는……그러고 보니 숙식까지 하면서 머물던 가정교사가 있던가? 유모였던 한나는 방을 하나 받았었지만 그 이후로 숙식까지 저택에서 해결하던 가정교사는 없었으니 비교할 대상이 없다.
어쩐지. 그러고 보니 아까 방으로 찾아온 손님은 한참 먼 곳의 방을 받았다고 했다. 그 방이 뻔히 비어있는데도. 별거 아닌 노인이니 그런 방이나 받았겠지. 그리 생각했으나 원인은 다른 모양이었다.
이미 잔뜩 구겨져 발밑에 뭉쳐있던 이불을 잡아 뒤집어쓴다.
한여름인데도 비가 잔뜩 내리는 탓인지 밤이 쌀쌀하다. 몸은 피곤하지만 잠에 푹 빠지기엔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째깍 이는 시곗바늘, 창밖의 폭풍우. 모두가 거슬리게만 느껴질 즈음. 누군가 문을 작게 두드렸다.
똑똑.
잠든 척을 하며 무시한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그 사이에도 잠시 간격을 두고 노크가 이어졌다. 똑똑. 똑똑. 눈을 감는다. 누가 저 밖에서 문을 두드렸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다. 얼마 안 가 밖이 조용해졌다.
갔나? 눈을 뜨고 살며시 몸을 일으킨 찰나. 문고리가 달칵거렸다. 눈치채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눈을 꾹 감은 노력은 귓가로 들린 말에 물거품이 된다.
“일어나 있으면서 왜 대답이 없소?”
카펫이 짓이겨지는 미세한 소리마저 귓가에 닿는다. 몇 걸음 뗀 다음 멈췄다. 대신에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듯 달칵달칵한다. 흐음. 콧소리. 벨져는 싫은 내색을 감출 생각도 않고 몸을 일으킨다.
“정리는 잘 되어있군.”
“멋대로 들어와서 하는 말이 그건가? 문은 분명 잠갔는데 어떻게 들어왔지.”
뒷쪽. 닫힌 문 쪽으로 시선을 던진다. 확실하게 걸어 잠근 기억이 난다. 벨져가 가지는 의문에 남자가 웃으며 손가락 끝으로 익숙한 것을 뱅글뱅글 돌렸다.
“아, 열쇠라면 아까 받았소. 그대가 배워야 할 게 아주 많다고 들었어.”
몸을 돌려 침대 아래쪽으로 다리를 늘어트린다. 고개를 내렸다가, 들었다. 눈썹이 씰룩인다.
“내가?”
“보시오, 지금도.”
남자의 손이 천천히 들린다. 검지 끝이 벨져를 가리켰다. 삿대질이라니 무례하군. 불쾌함이 더욱 끓어오른다. 싱글싱글 웃는 낯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다른 손을 허리에 짚고, 고개를 저을 뿐이다.
“너무 드세잖아. 이래서야 귀여운 맛이 부족하지. 예쁘장한 얼굴이 아깝지 않소? 예의만 적당히 지키면 훨씬 귀여움받을 수 있어.”
무례한 발언과 함께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온다. 푸른 눈을 잔뜩 치켜떠 시선을 받아쳤다. 남자의 얼굴이 높다.
“뭘 가르쳐주러 온 지는 모르겠지만……. 네 교습 따윈 필요 없을 만큼 내 발밑에 엎드리는 사람은 널렸으니 신경 쓰지 마.”
“그럴 순 없어. 나를 고용한 건 당신 집안이거든. 예절과 인성을 잊지 않게 잘 알려줬으면 한다더군. 아, 아직 통성명을 안 했나. 릭 톰슨, 이오. 미국에서 왔고, 그대 이름은 알고 있어. 벨져 홀든이지?”
허리를 숙이는 남자를 있는 힘껏 밀어냈다. 남자가 뒤로 엉덩방아를 찐다. 그리고 멋쩍게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달래는 몸짓을 취했다.
“진정하시오. 지금 당장은 하지 않을 거요. 교양있는 아이라면 밤에는 얌전히 이불을 덮고 잠을 자야지. 이런, 벌써 세 시가 지났잖아. 이 시간까지 깨어있다니. 어서 자도록 해.”
헤실헤실 웃는 저 얼굴. 벨져는 가만히 얼굴을 본다. 남자는 벨져가 경계하는 걸 알고도 모른 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장난스레 말한다.
“예로부터 잠을 안 자는 못된 아이는 괴물이 꿀꺽 잡아먹는다지 않소. 단숨에 잡아먹히기 전에 잠자리에 들어야지. 그러면, 좋은 밤 되시오.”
릭 톰슨이 방을 나섰다. 벨져는 릭이 나선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괴물. 괴물따윈 검을 들고 베어버리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릭이야말로 괴물이라는 말을 어떻게 입을 담을 생각을 했을까. 그저 우습게만 느껴진다. 괴물로서 초대받은 사람의 입에서 괴물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