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으로 지나가던 동료들이 히히덕거리며 릭을 보고 웃었다. 비웃음과는 약간 다르다. 그리 치적 거리지 않는 순수한 부러움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우스운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릭만 보면 갑자기 까르르 입을 돌리고 웃으니 릭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혹시 누가 등에 이상한 장난을 쳐놨나 했으나 어디에도 이상은 없다. 무슨 일일까. 혹시 삼십 분 남짓한 짧은 순간에 세상의 진리가 릭 톰슨을 보면 웃음이 나오도록 바뀌었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남녀 몇 명이 파티션을 에워쌌다. 조잘조잘 정신없이 수다가 터진다.
뭐야 톰슨, 숨겨둔 애가 있다며? 결혼엔 관심 없다고 하더니 벌써 애가 있었구만~. 아니야 설마 그 애가 이 심심한 톰슨 애겠어? 조카일 거라고. 하여튼 엄청 귀엽더라구요. 그래서 그 아이는 여자예요 남자예요? 톰슨 씨?
아이의 성별을 가지고 무슨 커피 내기까지 했다며 왁자지껄 분수가 쏟아진다. 숨겨둔 애? 귀여워? 무슨 소리인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는다. 서른셋 신대륙의 회사원인 릭 톰슨은 분명한 독신이다. 애인이 있기는 하지만 그 애인이라는 사람의 성별 상 아이는 생길 리가 없기에 숨겨둔 애 같은 말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 아닌가. 아니면 조카라니 조카가 회사에 왜.
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릭은 자신을 압박해오는 동료들에게 곤란한 듯 멋쩍게 웃으며 손을 젓는다.
“잠깐 진정해…애라니 무슨 말이오? 난 깨끗한 독시….”
“여 톰슨 주니어~, 아니 레이디인가? 아버지는 저쪽이란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들려온 말에 릭은 말을 멈춘다. 입구. 시선이 쏠린다. 톰슨 주니어? 약간 나긋하면서도 날 선 목소리. 그 목소리에 놀라 릭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입구 앞에 선 얼굴을 확인한다. 나이는 열둘이나 셋쯤 될까. 어깨 언저리에서 찰랑이는 하얀 머리카락. 나이 탓인지 약간은 성별이 헷갈리는 외모. 상대는 아직 릭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릭을 가리켰던 남자를 반쯤 노려보고 있다. 릭은 헐레벌떡 가방을 들고 파티션을 뛰쳐나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그 앞으로 도착한다.
“릭이 내 아버지라고?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군. 세상 어느 아버지가 아들을…읍.”
황급히 입을 틀어막는다. 몸이 작아진 탓인지 손은 과하다 싶을 만큼 얼굴을 가렸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릭에게 집중된다. 릭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다가, 헛기침했다.
“벨져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자 어서 나갑시다!”
그리고 냅다 달렸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 게이트를 열어 집으로 돌아가, 버럭 소리를 쳤다.
“왜 회사까지 온 거요!”
벨져는 말이 없다. 머리까지 애가 되었나. 자고 있었기에 말없이 출근하기는 했지만 회사에 가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텐데. 야근이 잦다는 사실도.
회사가 어디라고 말도 안 했는데 잘도 찾아왔군.
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한 번 소리를 쳤더니 기분이 조금은 풀어졌다. 릭은 한숨을 쉰다.
“여튼…아까 같은 발언은 참아주시오. 쓸데없는 오해를 살 테니 말이지.”
“쓸데없는 오해라고? 네가 내 아버지라고 오해받는 것보다 쓸데없단 말인가?”
이번엔 벨져가 날카롭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소아성애자로 오인받겠소.”
“나와 잔다는 사실이 어째서 너를 소아성애자로 만드는지 모르겠군. 릭 톰슨. 내가 ‘소아’다 이건가?”
까딱까딱 옆구리에 손을 대며 짜증스레 눈을 찌푸리는 벨져. 릭은 고개를 푹 숙인다.
“벨져, 그대가 현 상황에 불만이 많은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이런다고 그대의 몸이 순식간에 쑥쑥 자라는 건 아니지 않소!”
“지극히도! 옳은 말이군. 릭 톰슨. 그런데, 이러지 않는다고 해서 쑥쑥 자라나?!”
벨져어어. 한 발도 물러서지 않으려하는 벨져에게 릭은 슬슬 울며 매달리고 싶을 지경이었으나 그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기에 그저 한숨만 쉬었다.
어제저녁, 벨져 홀든이 작아졌다.
원인불명. 아니 굳이 따지자면 릭의 탓일까? 언제나처럼 공간을 잇고 게이트로 몸을 던졌는데, 게이트를 빠져나온 순간 릭은 혼자였다. 폐허다. 약간 멀리 떨어졌나? 릭은 주변을 걷는다. 여기저기 둘러보아도 벨져는 온데간데 없었다. 벨져―― 벨져! 어디 있소! 두리번거리던 릭의 바짓자락을 무언가가 잡았다. 기껏해야 열둘 셋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다. 어깨에서 찰랑이는 하얀 머리카락에 옥빛이 도는 눈. 벨져와 닮은 것도 같은데. 벨져 홀든은 릭보다 일곱 살 연하이긴 하였으나 이렇게 쥐똥만 하지는 않다. 이런 황무지에 아이가 왜 있는 건지. 그러면서도 무시하고, 벨져. 벨져~? 벨져 어디 갔소. 그리 찾고 있으니 아이가 말하는 것이었다.
“어디 있긴, 여기 있지 않나.”
약간 높은가 싶긴 해도 분명 벨져의 목소리다. 생긴 것도 벨져같긴 한데. 너무 어리지 않은가? 릭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당사자인 벨져는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얼굴을 찡그리고 팔짱을 낀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입을 연다. 흠? 어째 네 키가 많이 커 보이는군. 그리 말하는 벨져의 복장은 사실 아주 묘하다. 옷은 쪼그라들지 않은 건지. 어깨 갑주는 보이지 않고 그를 제외한 윗옷만 어떻게든 입고는 있는 꼴이었다. 설마 자각이 없는 건가.
어쩌지도 저쩌지도 못하고 굳어있다가, 급한 대로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되는 벨져를 들쳐업고 신대륙의 제 아파트로 몸을 날렸다.
벨져는 거울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제 전신을 몇 번이나 툭툭 치더니, 결국 수긍했다. 돌아갈 방법을 생각해봐야겠군. 크게 화를 내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목소리. 생각보다 적응력이 좋은 청년이라고 릭은 감탄했다.
열둘 셋. 릭에게는 벌써 이십 년도 전이다. 옷이 남아있을 리 없으니 결국 새로살 수밖에 없었다. 그대의 집에는 남아있지 않소? 그리 물으니 절대로 이 꼴을 하고 집에 가고 싶지는 않다고 결사반대다. 사긴 사야겠군. 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돈이야 벨져가 내겠다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일 당장 원래 몸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는데 많이 사두는 것도 의미는 없지 않을까. 결국 외출복과 속옷 정도만 두세 벌 장만하고, 집에서 입는 옷은 적당히 남는 릭의 윗옷을 쓰기로 했다.
그게 어제의 일이었다.
몸이 저 꼴이라 잠이 많아진 건지. 아침에도 영 일어나지 못하는 벨져를 냅두고 바로 후다닥 출근했었지. 출근이라고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 야근이 잦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을 텐데. 평소보다 불안정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벨져도 꽤 당혹스러워하는 듯하다.
식료품 가게와 마트에서 적당히 늦은 저녁거리를 사서 릭의 아파트로 돌아간다.
그 와중에도 벨져는 계속해서 릭의 아들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그새 회사에서 누가 여기까지 소문을 퍼트렸나? 아니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러면 대체 어딜 봐서. 대체 어딜 봐서 나와 벨져가 부자지간으로 보이는지. 릭은 허탈한 웃음을 흘린다. 벨져의 현재 외관상 나이는 10대 극 초반. 열둘이나 열셋쯤일까. 릭이 20대 초반에 사고를 쳤다면야 가능할 나이긴 하지만…. 얼굴 자체가 다르게 생긴 벨져와 자신이 어딜 봐서. 어딜 봐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영 답이 나오지 않는다.
방법은 얻어지는 이득에 비해 간단하다. 손상되지 않은 …의 원액을 이틀간 상온에 꺼내둔다… 도수가 높은 술에 갖은 꽃잎을 잔뜩 담아 향이 배이게 한다. 술에 꽃향이 배면 벌꿀을 넣어 달콤한 맛이 풍기게 한다. 그대로 주재료를 넣고 삼일 밤낮을 잘 숙성시킨다. 이 때 밀봉은 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마지막으로 갖은 향이 밴 재료를 안팎으로 잘 씻어서….
어린 눈과 입이 잔뜩 꼬부라진 글씨를 읽어내려간다. 거기까지 눈이 닿았을 때, 커다란 손이 앞에 놓여있던 책을 덮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종이가 노랗게 바랜 책이었다. 새빨간 가죽표지가 무거웠다. 아직 작은 손으로는 표지를 힘겹게 넘기고 종이를 한 장 한 장 팔을 전부 써가며 넘겨 읽을 수 밖에 없던 책이다. 그 무거운 책을 간단하게 다시 덮어버리던 거친 손이 기억에 남았다. 다이무스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위로 올린다. 어른의 손이 하얀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이무스, 검술 시간이란다. 네 아버지. 군살이 잔뜩 박힌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다이무스는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이는 그저 자신이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책을 펴들었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가장 화려했던 책이다. 가장 크고, 아마도 가장 무거웠을 것이다. 그 책이 어떤 책이었는지, 아직 여섯 살 된 아이에 불과했던 다이무스 홀든은 그 책에 쓰여있던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어린 기억은 쉽게 풍화된다. 그 때에는 강렬했던 기억이 옅어질만큼의 시간은 9년. 전후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게되고, 15세의 생일이 목전으로 다가온 밤. 다이무스는 아버지의 부름을 받았다.
제 방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밤의 발걸음이 들리고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종적을 감춘 시각. 무거운 노크소리가 다이무스의 귀를 떨었다. 똑똑. 누구세요. 대답을 대신하듯 문이 열리는 소리. 고개를 돌린다. 엄격한 아버지의 얼굴과 눈이 맞는다.
홀든의 장남은 반사적으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요즈음 부쩍 키가 컸는지 한참을 올려다보았던 아버지와도 이젠 눈높이가 비슷하다. 아니 오히려 약간 높을까. 그 사실이 버거워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숙이는 건 다이무스의 버릇이다. 아버지는 잠시 방 안을 둘러보고는 다이무스와 눈을 맞췄다.
"너도 이제 곧 열다섯이구나, 다이무스."
붉은 융단 위로 구두소리가 먹힌다. 네, 아버지. 다이무스는 조용히 답했다. 같은 눈높이. 같은 색깔. 거친 손이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자신에게는 항상 엄격한 아버지의 손길이 묘하게 상냥했다. 부드러운 미소. 다이무스는 약간 당황한다.
아버지는 다이무스, 벨져, 이글 세 형제를 경쟁속에 기른다--고 다이무스는 생각한다. 동등하게 세 개를 부여하는 건 드문 일이었고 대개는 하나를 두고 셋이 경쟁하도록 했다. 그러는 도중에도 가장 애정을 쏟는 둘째 벨져나, 막내인 이글에게는 제법 상냥하곤 했으나 장남인 다이무스에게 그 손길이 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선물이 있단다. 오늘은 일찍 잠들지 말고 기다리거라. 데리러 오마."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아버지는 등을 돌렸다. 열다섯 살 생일을 앞둔 다이무스는 살짝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해가 저물고 한참이나 흘렀다.
밖으로 뛰는 소리가 들린다. 막내도련님 이제 주무실 시간이에요! 뒤따르듯 높은 여성의 목소리. 이글이 오늘도 고용인과 한바탕 하는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아직 막내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가. 내일 입을 옷이다 뭐다 방에 붙들린 채 거의 모든 것을 해결했었지. 다이무스는 문을 열고 막내의 뒷꽁무늬라도 잡아 얼굴을 볼까 고민했으나 금세 멀어지는 소리에 그만두기로 한다. 책상 앞에 앉아 깃펜을 쥔다.
펜을 움직이는 사이에 자정이 되었다. 뎅그렁 뎅그렁 이방 저방에서 시계가 울었다. 다이무스는 펜을 내려놓고 일기장을 덮는다. 빨간 표지가 완전히 덮히며 작은 소리를 냈다. 문이 열린다. 몇 시간만에 보는 아버지의 얼굴. 복도의 어둠에 반쯤 잠겨 그 표정이 모호하다.
따라오너라.
조용한 목소리가 다이무스에게 명령한다. 갑작스레 일어난 탓에 의자가 뒤로 크게 기울었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다이무스는 옷걸이에 걸쳐두었던 검은 코트를 몸에 걸치고 그 뒤를 따랐다.
커다란 등을 따라 도착한 곳은 지하로 가는 나선계단의 입구였다.
지하실. 저택 지하의 가장 깊은 층에 있는 방은 미지의 영역이다. 열쇠를 가진 사람은 가주와 집사 단 둘뿐이라 했던가. 막내는 항상 저 안을 궁금히 여겼지만 다이무스는 그렇지 않았다. 언젠가 때가 되면 알게 되리라 생각했기에.
넓은 등을 따라 나선계단을 한없이 내려간다. 발을 딛을 수록 공기는 습해지고 피부가 서늘해진다. 여름을 넘기고 가을이 한껏 물든 계절이 체온을 빼앗아간다. 얇은 옷감 너머로 냉기가 스며든다.
앞을 걷는 손에 들린 불빛이 좌우로 흔들린다. 커다란 문 앞에 발이 멈추고 뒤따르던 다이무스도 걸음을 멈추었다.
하얀 면장갑을 낀 손이 문을 밀어젖힌다. 귀를 찢는 소리와 함께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화사한 향이 풍겨나왔다. 금방이라도 취할 것 같은 달콤한 향기. 알코올과 단내음, 꽃향이 뒤섞인 지독한 냄새. 현기증이 일어 숨을 참았다. 순간 눈앞이 일렁인다. 문앞에 멀뚱멀뚱 코를 막고 서있으니 그 사이에 아버지는 저 먼발치까지 가있었다.
등 뒤로 제 무게에 문이 닫히고 지하는 조금 더 어두워졌다. 자세히 보니 천장으로 샹들리에인가싶은 유리의 윤곽이 보였으나 제구실은 하지 못한 채 잔뜩 낀 거미줄이 빛을 옅게 반사할 뿐이다. 아버지가 든 작은 빛, 벽면으로 따라붙은 등불. 어둠을 밝히는 도구는 많았으나 공간을 전부 메우기에는 미약하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공간이다. 고문도구인가 싶은 살벌한 칼이나 철퇴가 있는가 하면 한쪽 구석에는 지푸라기인지 무엇인지 모를 풀자락이 쌓여있다. 찬장을 가득 메운 다기도 있었다. 잡동사니를 모아뒀을 뿐인가? 그렇다고 평범한 창고라고 생각하기에는 이 의미모를 엄중함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창고라면 저택 본체 밖에 있지 않았던가. 심지어 이런 곳에서 생일선물이라니. 다이무스는 고개를 살짝 까딱이며 어둠 속을 둘러본다. 커다란 항아리가 보인다. 아버지가 그 앞에서 손짓한다. 불빛이 흔들렸다.
"이쪽이다."
이유모를 불안감에 머뭇하다가 결국 발을 뗀다. 팔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질척한 습기가 엉겨붙었다. 익숙해지지 않는 향이 코를 찌른다. 숨이 답답하다. 무슨 냄새일까. 향에 이름을 붙일 수는 없었으나 그 진원이 저 커다란 독이라는 사실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커다란 항아리. 주둥이가 어깨에 닿는 정도의 높이다. 밤을 녹여 발랐나 싶을 정도로 새카만 바탕에 파란 알갱이가 별마냥 박혀있었다. 그 바로 앞까지 두 발짝정도 남은 곳에서 다이무스는 걸음을 멈춘다. 하얀 장갑을 낀 커다란 손이 들고있던 램프를 안으로 드리웠다. 들여다 보거라 다이무스. 아버지의 말에 다이무스는 걸음을 옮긴다. 한 발, 두 발, 그리고 반 발자국 더. 차가운 주둥이에 손을 댄다. 기울인 램프의 빛이 수면을 비춘다. 염료라도 개워넣은 듯 새파란 물이 작게 흔들린다. 고개를 숙여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바닥으로 하얀 윤곽. 얕게 흔들리는 표면에 함께 흔들린다. 그 끝부터 안쪽으로. 몸을 따라 시선이 움직인다. 푹 파여들어간 벽면으로 기댄 동체.
--요 며칠 영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제부터였나 아니 사흘쯤 되었다. 식사시간에도 대련장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도 몰라. 행방을 묻는 첫째의 질문에 막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그아이가 잠시 그 집에 갔다 했다. 막내는 자기만 빼놓고 놀러갔냐며 볼을 부풀렸다. 지금껏 혼자 그 집에 간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나 그아이가 그 집의 주인을 따르던 것을 생각하면 올게 왔거니 생각했다.
하얀 다리가 새파란 물 속에 일렁인다. 헐렁한 흰 옷감 사이로 보이는 어깨가 가늘게 떨었다.
아버지.
다이무스는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든다. 옅게 미소짓는 눈과 시선이 얽힌다. 지독하게 닮은 얼굴. 누구나가 네가 크면 저리 될 것이라 했다. 누구나가 어린 시절의 당신이라 했다. 그 사실이 이리도 끔찍하게 여겨졌던 순간이 있던가.
소매를 걷어올린 어른의 손이 독에 잠긴 것을 끄집어낸다. 젖은 몸에서 물이 튀어 바닥을 적셨다. 작은 숨소리. 눈을 떼지 못한다. 어린 몸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새파란 물이 돌바닥을 검게 적셨다. 그 순간을 잊지 못하고 기억한다.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열다섯 살 생일을 축하한다, 다이무스 홀든.
귓가로 상냥한 목소리가 맴돌았다.
밤이 깊었다.
자정을 알리는 종이 크게 울렸다. 방음이 허술한 건물 가득 소리가 퍼진다. 허름한 여관이다. 오늘 손님이 셋은 된다 했던가. 남은 손님 하나도 몇 시간 전 여관을 뜬 모양이니 지금 이 여관에 있는 손님이라고는 릭과 벨져가 전부일 것이다. 종소리를 들으며 릭은 수첩을 덮는다. 열한시쯤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음날 예정을 전해준다 했었다. 시간 약속을 1초라도 어길 벨져가 아닌데. 혹여나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릭은 조용히 방을 나왔다. 벨져의 방은 바로 옆. 몇 발짝 떼지 않는데도 복도 가득 나무가 삐걱거린다.
똑똑. 노크를 두 번, 그리고 헛기침. 대답은 없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세 번 더 문을 두드렸지만 여전히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벨져? 다시 노크. 복도는 조용하다. 들어가겠소. 문을 밀어 열었다.
"벨져, 내일에 대해 상의를……."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저도 모르게 코를 틀어막았다. 무거운 나무문이 조금 열린 순간. 순간 눈앞으로 불꽃이 튈만큼 짙은 향이 몰려왔다. 현기증이 난다.
지독한 향이었다. 아무리 릭이 코가 좋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알파도 아닌 베타를 이정도로 자극하는 향이라니. 이따금 약을 먹을 시기가 오면 달달한 향을 두르고 다니곤 하였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코를 적당히 즐겁게 할 정도였지 본능을 자극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조차도 릭 자신이 코가 좋은 사람이기에 알 수 있던 향이다. 보통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누군가 문을 조금이라도 열어본다면 순식간에 풍기는 이 향취에 화들짝 놀라겠지. 벨져와 알게된 지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이정도로 끔찍한 단내는 처음이다.
오메가의 체향이 이정도던가. 정도가 심한 오메가는 대개 처신에 신중을 기하기에 이렇게 ‘무르익은’ 오메가를 근거리에서 접할 일은 많지 않다. 심한 부류는 베타마저 유혹한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릭은 향을 조금이라도 덜 맡기 위해 얕은 숨을 반복하며 등뒤로 문을 닫는다. 환기를 위해 문을 열고싶은 게 본심이었으나 지금 이 향이 밖으로 새어나가 좋을 게 없다. 혹시나 누군가 2층으로 올라오지는 않겠지. 그런 걱정을 하며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을 끝까지 밀어넣었다. 벨져는 침대에 어깨 위를 놓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있다. 어깨가 크게 흔들린다. 하얀 손이 하얀 시트를 세게 쥐어잡고있었다. 하얀 손등위로 선 핏줄이 시퍼렇다. 베타인 릭은 모를 괴로움과 싸우는 이 청년을 보는 게 벌써 몇 번째던가. 청년이 고귀한 벨져 홀든이지 못하고 그저 저 바닥의 오메가가 되는 순간.
인간의 성별이 여성과 남성으로 갈리고, 남성은 또다시 세 종류로 나뉜다.
알파, 베타, 오메가. 제2의 성별이라고도 불리우는 세 가지 형질은 비록 외견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하나 그 특성을 생각하면 남성, 여성으로 나뉘는 1차적 성별보다도 악독하다.
평상시라면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성질이다. 딱히 특성이 없는 것이 특성인 베타나 ‘먹이사슬’에서 가장 우위를 차지하는 알파에게는 크게 상관이 없는 형질일 수도 있다. 아니, 오히려 특정계층을 자연이 부여한 본능으로 지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알파에게는 축복일까. 문제는 오메가였다.
다만 어떤 주기가 올때, 오메가는 자신의 형질을 만천하에 드러내게 되어있다. 히트 사이클이라고도 불리우는 번식기가 오면 몸이 달아오르고 성감이 증가하며 유혹이라도 하듯 달콤한 향을 풍기게 된다. 개인마다 그 주기가 다르다는 점이나 목적은 여성의 생리, 배란과도 비슷했으나 훨씬 강압적이고 흉폭하다. 알파는 이 시기의 오메가를 알아채고 욕정한다. 오메가는 알파를 거절하지 못한다. 제 목을 조르고 찍어누르려하는 포식자에게 다리를 벌리려 하는 것이 본능이었다.
의학의 발전에 따라 갖은 약물로 제 형질의 발현을 억누를 수는 있다. 그러나 결국 제 몸 자체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기에 그것이 만능은 아니었다. 어떤 사고로 약을 제때 섭취하지 못할 수도 있고 약이 듣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주기를 제어하지 못했을 때 먹기좋은 먹이를 물지 않을 알파는 없다. 이는 분명 강간에 가까운 형태였으나 누구나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코웃음칠 뿐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사람의 능력이 이 세 가지 성질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오메가는 알파나 베타에 비해 하등한 존재이다. 자연이 그리 결정했으며 사람은 본능으로 그것을 느꼈다. 아무리 현명하고 신체적으로 우월한 오메가라 할지언정 알파의 앞에 서는 순간 얼굴을 붉히며 다리사이를 적시는데 어찌 그리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령 이성이 본능보다 우월하다 생각되는 시대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본능에 새겨진 먹이사슬은 여전히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이 정당하다고.
알파도 오메가도 베타에 비해 수가 많은 존재는 아니다. 숫적으로는 비슷한 존재임에도 알파는 자신이 알파라는 사실을 사방에 과시하며 살아가는데에 비해 오메가들은 제 형질을 사실을 필사적으로 감추거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뒷골목에서 제 몸을 열며 살아간다. 그러다보니 알파나 베타는 물론 여성들 조차 오메가를 하대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리나 벌리는 창부들, 더러운 구멍으로 새끼를 낳는 가축. 알파나 베타에게는 인간 이하의 취급이오, 그 어떤 여성도 제 남편이 오메가이길 바라지 않았다.
벨져 홀든이 오메가라는 사실은 비밀에 부쳐져있다. 아니, 설령 누군가 그 비밀을 까발린다해도 눈앞의 청년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누가 믿을 사람은 몇 없으리라. 오메가가 태어나면 몰래 버리거나 소리소문없이 죽인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알파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귀족출신. 오만하고 당당한 태도. 전신으로 흐르는 고결함과 품위. 어디를 보아도 알파로밖에 보이지않는 벨져 홀든이 알파앞에 벌벌 떨며 번식기가 오면 제 구멍을 적시는 오메가라고, 그 누가 생각하겠는가?
귀족들은 아이가 오메가라면 죽인다고 하던데.
릭이 벨져에게 그리 물었던 적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대는 어떻게 살아남았소? 죽지는 않았지만 죽은 거나 다름없이 살아남았지.
벨져 홀든이라는 존재 자체가 가문 내에서 쉬쉬되고있다고 했던가. 릭은 오스트리아 사람은 커녕 유럽인도 아니오, 귀족또한 아니기에 그 사회를 알 수 없었으나 벨져 본인이 그리 말했다. 홀든의 둘째를 알 사람은 모두 알고 있지만 공적인 장소에 잘 내보내지는 않았다고. 거기에 덧붙여 그냥 살려둔것은 아니라는 말까지. 그 뒤는 함구하였으나 제 아들이니만큼 자비를 베풀어 살려두었나, 그래도 알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오메가라는 사실이 수치스러웠겠거니. 릭은 생각했다.
벨져의 등을 쓸어준다. 벨져는 릭이 알지 못하는 괴로움에 허덕이며 숨을 몰아쉴 뿐이다. 하얀 목이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저걸 핥으면 단 맛이 날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주변은 이성을 흐리게하는 향이 진동을 한다. 무르익은 오메가를 앞에 둔 알파의 심정이라는게 평생 모를 것도 아니군. 웃을 수 없는 농담이 머리를 스쳤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거칠던 호흡이 조금은 안정되었나 싶을 무렵, 릭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주기’가 왔소?"
그제야 벨져는 시선을 릭에게 두었다. 얼굴을 살짝 돌린 정도였다. 날카로워야 할 두 눈이 정욕에 젖어 다 풀린 채 물기를 머금고 있다. 벨져 홀든은 바라지 않을 것을 그 육신은 바라고있음이 분명하다. 릭은 애써 제 눈에서 불이 붙으려던 정욕을 지운다. 어차피 자신의 태생이 베타인 한 저 열기는 가라앉힐 수 없다.
벨져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려 등을 침대로 댄다. 주기 탓인지 입술이 더욱 빨갛게 보였다. 붉은 입술 사이로 뜨거운 한숨이 터져나왔다. 이마에 달라붙는 하얀 머리카락을 옆으로 걷어내어준다. 벨져가 눈을 찌푸리며 심호흡한다. 푸른 눈이 감긴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꾹 다문다. 입술을 한번 달싹이고, 소리를 낸다.
"약은 먹었소?"
"먹었다. …곧 나아지겠지."
릭은 흘끔 시선을 올린다. 평소 들고다니던 작은 약통이 침대위로 뒹굴었다. 릭은 눈을 감은 벨져 몰래 그 약통을 집어 털어본다. 한 알, 두 알…다섯 알. 바로 전날 벨져가 손에 두고 만지작거렸을 때는 한참 더 있던 것 같았는데. 약을 꺼내 세는 모습까지 보았으니 잘못봤을 리도 없고.
벨져 홀든의 성격을 생각해보건데 중요한 약을 흘리고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사라진 약은 전부 벨져의 뱃속에 있겠지. 거진 즉효성 약이라고 들었는데 여기까지 털어넣고도 이렇게 괴로워 한다는 건――.
약이 듣지 않는 모양이군.
릭은 조용히 병을 닫는다. 그렇게 생각하니 맡아본 적 없는 강렬한 향도 이해가 된다. 벨져 홀든이라는 자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자신의 주기정도는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었을테니. 사실상 릭이 지금껏 보아온 주기는 맛보기에 지나지 않았던 거겠지. 오메가들의 주기는 어느정도라 했던가. 아무래도 본인들의 가장 무방비하고 위험한 시기인만큼 외부에 알리지 않으려 하니 알려진 것이 적다. 어쨌거나 도저히 아침까지 벨져의 상태가 좋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아침이 아니라 저녁도 지금은 장담할 수 없지 않을까. 평범한 여행도 아니고 위험을 수반하는 임무이니만큼 이대로 일을 이행하는 건 불가능하리라.
"이래서야 내일 출발하는 건 무리겠군."
릭의 혼잣말에 벨져가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킨다. 벨져. 제지하려는 릭의 손을 검은 장갑이 뿌리쳤다. 붉은 입술이 다물렸다 열린다.
"아니, 출발한다."
침대 위로 젖혀져있던 고개를 들어올리는, 일련의 크지 않은 동작만으로도 잠시 잠잠해졌나 싶던 향이 확 강해진다. 본능을 자극하는 감각에 순간 몸이 굳는다. 저도모르게 주춤하는 릭의 모습에 벨져는 눈을 약간 찌푸렸다. 미, 미안하오. 파란 눈이 잠시 시선을 빗겨놓았다가 바닥을 훑는다. 후들거리는 손이 침대를 짚고 몸을 그 위로 올렸다. 위태로운 동작에 릭이 벨져를 부축하려했으나 떨리는 손이 그를 거절했다.
"벨져."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릭."
조용하면서도 날선 목소리에 닿으려던 손끝을 뒤로 물린다. 입을 다문다. 확실히 그의 과거를 잘 알지 못하는 자신이 간섭할 영역은 아닌것도 같다. 하물며 베타인 릭이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는가. 저 달아오른 몸을 어찌 할 수 있는건 알파뿐이다. 릭은 벨져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벨져는 침대에 걸터앉아 손을 맞잡고 숨을 고른다. 잔뜩 열에 젖은 호흡이 터질 때마다 방을 메우는 향은 더욱 진득해졌다.
"괜찮겠소?"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도착했어야 하는데…또 늦는 모양이군."
작게 혀를 차는 소리. 젖은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질 것 처럼 흔들렸다.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린다. 도와줄 사람이라. 벨져가 그의 기사단에게 이런 상황을 보일 만큼의 신뢰를 주고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릭은 잠시 생각하다가 와야 할 사람은 그의 동생 이글 홀든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지금까지도 벨져의 부름을 받고 몇 번 얼굴을 보였으니 정확하겠지.
오늘 밤은 여기 있어야겠군. 릭이 그리 생각하며 벨져 옆으로 걸터앉으려는데, 벨져의 목소리가 릭을 뿌리친다.
"이제 방으로 돌아가도 좋다."
그 말에 릭은 가만히 벨져와 시선을 마주했다가 잠시 눈을 피한다. 이런 모습을 별로 보이고 싶지는 않다는 뜻인가. 아니면――그럴리는 없지만, 두려운 건가. 벨져가 지금 자신이 약해져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텐데. 릭의 눈에는 그저 오기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그 사실을 입에 담는다고해서 벨져의 결정이 바뀌지 않을 것도 알고있다.
"그대만 괜찮다면 여기 있고싶소."
"아니, 이제 곧 약효가 나타날 거다. 네 방으로 돌아가."
말에는 가시가 돋아있다. 날선 어조가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젖은 눈이 흔들린다. 릭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대의 말에 따르도록 하지."
릭은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벨져는 침대 위로 몸을 누이고 눈을 감는다.
이틀 전. 어떤 정보를 입수하고 바로 이 마을에 잠입했다. 안타리우스의 연구소가 있다는 정보. 조사서에는 곧 철수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내용도 있었기에 서둘러야 했다. 제대로 절차를 밟아 인원을 꾸릴 시간은 없었다. 그렇기에 벨져는 누구에게 크게 알리지 않고 공간능력자 릭 톰슨 한 명만을 데리고 조사에 나섰다. 마을에서 연관된 듯한 사람을 찾아 뒤를 밟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조사여야 했다. 아직 며칠 남았다고 예상되었던 주기가 이리도 빨리 닥쳤다는 사실만 없었더라면.
이변을 깨달은 건 아침이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려는데 불현듯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컵 하나 제대로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그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랜 세월의 경험으로 알고있었기에 벨져는 자신이 알고있는 단 하나의 해결책을 서둘러 실행했다.
약은 먹을 만큼 먹었다. 몇 알이나 입에 넣었던가. 네 알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통에 약이 얼마 남지 않은 걸 확인하고서야 손을 멈췄다.
약효가 미미하다는 건 저번 주기때 이미 어느정도 눈치를 챘다.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관계했던 게 두 달 전이던가. 상당히 강한 억제제를 먹고는 있으나 슬슬 약만으로는 효과가 없을 시기가 되긴 했다. 그렇기에 이글을 불렀건만. 막내는 언제나 지각이다. 그렇게 당부했는데도 또 늦다니. 아니 증세가 이렇게 심해서야 막내로 가라앉힐 수 있을 지 의문이지만――.
어떤 이유로. 벨져는 일반적인 오메가와는 약간 다른 특성을 가지고있다. 그 특성 덕에 어지간한 알파는 두려움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지만, 동시에 그 어지간한 알파로는 발정이 가라앉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었다.
약을 씹으며 억누르다가 한계가 오면 상대를 찾고. 이런 생활을 얼마나 계속했던가. 집을 나와서부터였으니. 그리 떠올리고서야 벌써 5년이 흘렀다는 걸 깨닫는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벨져는 열이 오르는 눈을 손등으로 가리며 숨을 내뱉었다. 반 십년이니 오래 버틴 것도 같다. 더 버틸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하필 이럴 때 한계가 오다니.
어쩔 수 없는 태생적 한계에 진저리가 난다. 강제로 몸을 뜯어고쳐졌던 그날이 떠오른다.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누군가에게 종속된다는 건 분노보다 공포가 앞서는 일이었다. 의식은 멀쩡한 채로 몸이 조금씩 변해간다. 도망칠 수 없게 사지를 결박당한 상태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수면으로 떨어지는 물소리. 머리가 아프다.
째깍째깍. 조용한 방. 시계소리가 유난히 귓가에 울린다.
싸구려 침대에 몸을 누인 채 눈을 감는다. 체력을 생각하면 잠이 드는 편이 나을 것이나 경계를 늦추지 못하는 몸은 그저 정신을 곤두세울 뿐이다. 수면이라 하기도 힘든 얕은 물에 몸을 담갔다가 눈을 뜬다.
큰 소리. 폭발음은 아니다. 무언가가 문에 부딪힌 듯한. 아마도 옆 건물이거나, 이 여관의 현관이거나.
새벽 세 시. 새카만 어둠뿐인 시간이다. 서둘러 몸을 일으킨다. 갑작스런 동작에 현기증이 날까 했지만 다행히도 멀쩡했다. 뒤늦게나마 약이 조금 돌았는지 몸은 한결 가볍다. 옆에 기대어두었던 칼을 쥔다. 바깥으로 느껴지는 인기척이 하나, 둘, 셋, 넷…. 창밖으로 슬쩍 내려다 본 아래로 또 둘.
‘…포위당했나?’
혀를 찬다. 상태만 좋았더라면 좀 더 일찍 알아챌 수도 있었는데 여기까지 기척이 가까워진 지금에야 알아채다니. 생각보다 훨씬 불완전한 자신의 상태를 직시하고 벨져는 검을 다시 잡는다.
문 밖으로 하나. 재빨리 문을 열어 모습을 확인하지도 않고 단칼에 베어넘겼다. 피가 튄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거대한 몸을 재빨리 지탱해 소리가 나지 않게 바닥으로 눕혔다. 지금 큰 소리가 나면 누군가 달려올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바닥에 사체를 눕히고야 벨져는 그 모습을 확인한다. 멀쩡한 인간의 형태조차 갖추지 못한 이상한 괴물. 살점이 이리저리 부푼 모습이 흉측했다. 살갗이나 부분부분 보이는 인간의 형상으로야 이 괴물이 인간임을 확신한다. 인체실험을 자행하고 있다더니 사실이었군. 벨져는 붉은 선혈이 뚝뚝 흐르는 칼날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눈을 찌푸렸다.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아래층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난다. 느껴지는 인기척은 아직 다수. 창 밖에도 무언가 있었으니 적은 아직 한참 남아있음이 분명하다.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는 편이 현명하리라.
릭이 곁에 있다면 훨씬 수월했을 것을. 쯧. 작게 혀를 찼으나 그를 밖으로 물린 건 다른 이도 아닌 벨져 자신이었다. 그의 도움이 필요한게 확실하건만 순간의 굴욕에 판단을 흐리고야 말았다. 이 시기면 모든 능력이 널을 뛰는 탓인지 이성이 흐려진다. 어쩔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 또한 인정해야할 것이었으나 그 탓에 위기에 몰렸으니 약간의 후회는 별 수 없다.
잘 교육받은 몸은 이런 때조차 익숙한 동작으로 부드럽게 노크를 한다. 대답은 없다. 두 번은 없이 그대로 문을 열어젖혔다.
문을 열자마자 좌우를 살펴보았으나 있어야 할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설마 외출한 사이에 기습당했나. 이 상황에서 릭마저 없다는 건 치명적이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데, 침대 그림자에서 사람이 불쑥 튀어나왔다. 릭 톰슨. 검을 쥔 손에서 약간 힘이 풀린다.
"릭, 여기서 빠져나가…."
"뒤를 조심하시오! 벨져!"
동시에 벨져는 뒤에서 자신을 덮쳐온 인물과 바닥에 뒹군다. 뒷목을 후려쳐진 탓에 순간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눈을 찌푸려 억지로 시야를 붙든다. 검으로 쳐올리려는 손을 두꺼운 팔이 붙잡아 패대기쳤다. 무거운 쇳소리가 바닥을 울린다. 커다란 손이 목을 한손에 쥐었다. 칼을 주울 새도 없이 목을 졸린다. 릭이 다급한 목소리로 벨져를 불렀다. 그가 어쩔 새도 없이 릭 또한 바닥으로 쓰러졌다.
커다란 손이 다시끔 힘을주어 얇은 목을 짓누른다. 턱 세게 누르는 힘에 숨이 막혔다. 강화된 근육으로 흉측한 손목을 떼어내려해도 적은 꿈쩍도 않는다. 눈앞이 흐려져간다. 얼굴의 형태가 변화한다. 누구, 누구지? 벨져는 이를 악물고 그 눈을 노려본다. ――형? 아니, 아니야. 아니다. 다이무스가 아니다. 벨져는 눈을 찌푸리며 그 얼굴을 직시한다. 그래야만 했다. 형과 닮은. 아니 형이 저 사람을 닮았다고 해야하나. 그런 사람. 아버지.
목을 한 손에 붙잡는 손이 몸을 들어올린다. 숨이 턱 막히고 발끝이 들렸다. 등 뒤로 차가운 물체가 닿는다. 둥그렇게 척추를 누르는 이 물체가 무엇인지 벨져는 잘 알고있다. 몸이 뒤로 기운다. 머리 끝부터 잠기는 차가운 감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