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렛님[릭벨,줄곧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끝내 전하지 못한 말, 꿈처럼 아득한 너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까지가 리퀘였어여
제목이 좋은게 생각이 안났다
릭>벨?여튼 그런관계. 쪼꼼 길어진 여행에서 비오는 날에.
주변으로 민가 한채 보이지 않는 길에서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갑작스러운 비였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났나. 보슬보슬 내리던 비는 눈을 세 번 네 번 깜빡이는 사이에 장대비가 되고 퍼붓기 시작했다. 소나기겠지. 릭과 벨져는 그리 생각하고 적당히 나무 아래로 몸을 피한다. 하지만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릭이 하늘만 바라보던 사이에 동행인은 몸이 반쯤 젖어있었다. 릭도 그러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나마 자켓이 있기에 낫다고 해야할까. 벨져의 긴 머리카락은 푹 젖어 얼굴에 찰싹 밀착해있고 하얀 피부는 더더욱 창백하게 식어간다. 저정도면 꽤 추울텐데. 그럼에도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나무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앞을 응시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벨져 홀든이다.
아마도 비가 그칠 때까지 그곳에 계속 있었다 해도 벨져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벨져를 자신의 집에 초대함은 그저 릭의 욕심이었다.
솔직히 말해 릭도 벨져가 고개를 끄덕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낭비할 시간은 없다. 그런 말과 함께 노려볼 줄 알았는데 어연일인지 벨져는 아무말도 없이 고개를 위아래로 한번 내렸다가는 올렸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냥 그 능력으로 호텔을 가면 되는 거 아니었나."
"뭐 괜찮잖소. 숙박비도 절약하는 셈."
어쩐지 아무 말도 않더라. 벨져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내뱉은 말에 릭은 소탈하게 웃는다. 잠시 기다리시오. 그리 말해 벨져를 작은 거실에 내버려두고 방으로 가 옷가지를 몇개 꺼내온다. 목욕을 권하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수도관은 공사중인듯 했다. 집을 오래 비우다 보니 건물에 문제가 생긴 줄도 몰랐군. 릭은 가끔 얼굴이라도 내밀자고 다짐한다.
"벨져?"
"여기도 비가 내리는군."
창가에 서서 벨져는 밖을 내다본다. 그 발치로 빗물이 스며든다. 구름에 가려진 옅은 빛이 역광처럼 벨져의 뒤에서 쏟아졌다. 회색 하늘 사이로 보이는 하얀 머리카락은 더더욱이나 하얗고 순결하다.
릭이 내민 옷을 벨져가 받아들었다. 무늬없는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 지극히 무난한 옷을 벨져가 몸에 걸치면 어떤 느낌일까. 옷을 꺼내며 그런 생각도 했다. 그 결과는 곧 알게되리라.
벨져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옷을 갈아입는다. 릭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하나 고민하다가 일단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면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볼 수 있었을텐데. 그러하지 못함은 릭 톰슨이 벨져 홀든에게 작은 기대를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는 체 하고 돌아오니 벨져는 창가에 의자를 가져다놓고 그곳에 앉아있었다.
오스트리아의 귀족이 신대륙의 민간인의 허름한 집에 앉아있음은 심으로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어슴프레한 잿빛이 내려앉은 방에서 벨져는 의자에 앉아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한다. 머리카락은 여전히 푹 젖어 무겁게 아래로 떨어졌고 항상 무겁게 어깨를 감싸던 갑주는 저 테이블위에. 그를 대신하듯 어깨에는 릭이 걸쳐준 바스타올이 드리워있고 숨막히게 차려입은 옷도 릭의 가벼운 옷으로 바뀌어있다. 뭘 해도 그림이 되는 사람이라고 릭은 생각한다.
커피는 어떻소? 다즐링으로.
커피라고 했는데 기어코 그 입에서 나온 말은 홍차다. 다즐링, 다즐링이 있던가. 아니 그전에 홍차를 벨져의 입맛에 맞게 제대로 달일 수 있을까.
티팟은 있을리가 없고 대신해서 대강 끄집어낸 주전자가 소리를 내며 끓는다.
줄곧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물이 끓고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며 릭 톰슨은 그 말을 몇번인가 곱씹어보았다. 소리로 이 말을 그려내었을때 벨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찻잔정도는 있던 것 같은데, 어찌 그조차 보이지 않아 적당히 머그컵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거실로 향한다.
"벨져. 차를 가져왔소."
릭, 뭐지 그 컵은. 그런 말이라도 듣지 않을까. 한숨도 쉬겠지.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말을 건넸으나 돌아온 것은 침묵이었다.
벨져는 아까와 똑같이 의자에 앉아 머리를 깊게 숙이고 있었다. 미동도 대답도 없다. 설마. 들고있던 머그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조심스레 그 곁으로 다가간다. 살짝 어깨를 흔들어보기도 했지만 대답은 여전히 무반응이다.
"벨져?… 오 이런, 완전히 잠들었군. "
머리카락을 걷어올려도 반응이 없다. 대신에 나타난 무방비하게 감은 눈에 릭은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푹 잠든 벨져 홀든을 본 적이 있었던가. 릭이 기억하는 벨져는 릭보다 늦게 잠들고 릭보다 일찍 일어나는 청년이었다. 이동시간에 잠시 눈을 붙이는 순간은 분명 있었으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지 기척만 있어도 바로 눈을 뜨곤 했다.
벨져, 일어나시오 차가 다 식겠소.
릭은 벨져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면서 벨져를 흔든다. 그 움직임에 아래로 툭 떨궈져있던 머리가 어깨위로 얹히고 입이 살짝 벌어졌다. 풀어지지 않도록 교차시켰던 두 팔이 슬며시 느슨하게 풀린다.
얼굴에 드리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고 빗물에 차갑게 젖은 볼을 손으로 감싸본다. 잠든 두 눈은 여전히 감긴 채 푸른 빛을 감추고 있다. 항상 오만한 명령조를 내뱉는 입도 지금은 힘없이 풀려있을 뿐이다. 그 모습을 그저 한참 바라보고만 있었다.
빛은 항상 아득히 먼 앞을 달리고 있다. 순간의 꿈처럼 섬광이 옆을 스쳐지나간 순간 릭은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듯 섬광에 매료되었다. 릭에게는 그 빛을 따라잡을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따라잡았다해도 끌어안은 순간 빛은 입자가 되어 틈새로 빠져나갈 것이 분명하기에. 릭은 그 결과가 두려웠다. 그렇기에 몽환처럼 아득한 섬광을 그저 지켜보았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조심스레 손을 뻗어 섬광과도 같은 청년을 그 품에 안아본다. 깊은 휴식에 빠져든 빛은 밤에 가두어지듯 아무런 저항없이 릭의 체온에 젖어든다. 아마도 전하지 못할 말도 함께.
이렇게 깊게 잠든 손님을 의자에서 자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스스로 변명하며 릭은 청년을 안아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