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tobenu.postype.com/post/179226/
포오스타입에 샘플 왕창불려서 추가해둔
Raise Dead
R19/문고판/230P
17000원
표지: 타삐(@999_tapir)님
전프레로 엽서 2장(앞표지/뒷표지) 드려여~.~!
+로 2016 릭벨 연하장세트(...)도 드립니다
https://twitter.com/cyp_mambo/status/681333706489860096
이거
릭벨. 쌍방집착. 설정날조, 모브주의.
벨져 홀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은 제레온 프리츠일것이다. 아마도 영원히.
릭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벨져의 곁에 머무르며 그의 모습을 지켜본다.
벨져와 이도저도아닌 관계를 유지하던 사이 벨져가 인식의문에 도달하고.
문이 닫히는 순간 일어난 어떤 일에 릭은 충동적으로....
안사귀...는데...떡은치던 릭벨전제. 제법 순애물같기도하고...
인식의 문이 닫히고 릭이 문앞에 쓰러져있던 벨져를 주워 도망가는 이야기.
벨져의 신체연령(...)이 어...왔다갔다합니다
쌍방집착. 둘다 좀 병이 깊은것같은.......
19금파트 샘플 > http://manbounikki.tistory.com/123
문장부호같은거 교정이 덜된상태에여
◆샘플01
아이는 벤치에 앉아 딱딱한 나무의자와 함께 눈에 잠긴다. 여덟아홉 살쯤 되어보이는 어린 아이다. 코까지 둘둘 감은 빨간 목도리에 검은 털모자. 하얀 코트. 검은 바지. 인파로 북적이는 초겨울의 북적이는 역 앞을 졸린 듯 멍하니 바라보는 두 눈은 물에 잠긴 옥색이다. 땅에 닿지 못한 가느다란 두 다리가 느릿하게 흔들린다. 초겨울의 눈이 몸 위로 쌓여간다. 털어낼 생각도 않고 식물마냥 그저 쌓이는 눈을 그대로 맞고 있을 뿐이다. 하얀 머리카락과 쌓여가는 하얀 눈은 경계가 불분명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끗흘끗 아이를 한 번씩 쳐다보았다. 눈에 띄는 모습임은 분명하다. 외모 자체도 그러했지만 에워싼 분위기가 호기심을 돋운다고 해야할까. 모든 시선이 흘끗거리며 홀로 벤치에 앉은 아이를 흘기고 지나갔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대변하듯 먼저 말을 건 건 붉은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다. 눈이 쌓이는 하얀 우산의 그림자가 아이를 드리운다. 어머, 혼자니? 부인의 물음에 대답은 없다. 다시 한 번 질문.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여전히. 젊은 부인의 질문에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반쯤 잠에 감겨있던 두 눈이 슬쩍 부인을 치켜 보았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진다. 무례하다면 무례할 수 있는 행동이었으나 부인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하얀 장갑을 낀 손이 하얀 코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긴다. 어서 가자, 부모님을 찾아야지. 아이는 귀찮은 듯 눈을 찌푸리고 다른 손으로 제 소매를 잡은 장갑을 떼어낸다. 어머, 얘 좀 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옆으로, 남자의 목소리가 말을 건다. 죄송합니다 부인. 갈색머리의 청년이다.
"일행입니다. 저희 애가 감기에 걸려서…표를 사올 동안 잠시 기다리라 했는데 실례를 범한 것 같군요."
청년의 말에 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아이와 청년의 얼굴을 번갈아본다. 손을 입가로 가져가 머뭇거리는 것도 잠시. 어머머. 하고는 작게 웃었다.
"저는 또 미아인줄 알고. 저야말로 실례했어요."
젊은 부인이 종종걸음으로 멀어진다. 그 눈에 띄는 새빨간 드레스 자락이 시야에서 사라져간다. 남은 청년의 입에서 그제야 한숨이 푹 새어나왔다.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 동작을 파란 눈이 담는다. 청년은 고개를 멈추더니 눈을 깜빡거리고 아이를 내려다보며 시선을 마주한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아이의 하얀 소매 밖으로 나온 손을 다시 소매 안으로 집어넣어 준다. 아이는 그 움직임을 멀뚱멀뚱 응시하더니 슬쩍 시선을 들어 제 손을 담은 릭의 눈을 보았다. 릭, 늦었군. 목도리에 파묻힌 목소리는 작고 나른하다. 이어서 작은 웃음소리. 릭이 시선을 들어 푸른 눈을 마주한다.
"…'저희 애가'? 내가 언제부터 네 아이였나. 보기보다 거짓에 능하군?"
"너무 심한 소리 마시오 벨져. 그러면 뭐라 하겠소?"
눈가로 웃으며 자신의 거짓을 책망하는 벨져에게 릭이 너스레를 치며 대답한다. 벨져가 이마까지 꾹 눌러쓴 검은 모자에는 눈이 제법 쌓여 그 색이 얼룩덜룩했다. 그 아래로 흘러나오는 하얀 머리카락과 창백한 피부. 그야말로 하얀 거짓말이군. 릭은 하얗게 눈이 쌓인 벨져를 바라보며 순간적으로 내뱉었던 자신의 변명을 그렇게 자조한다.
"사람이 많아 줄을 서야 했어. 혹시나 만석일까 불안했지만 다행스럽게도 표는 무사히 구했다오. 이제 여정을 시작할 시간이야."
릭은 손을 뻗어 모자에 쌓인 눈을 털어낸다. 벨져는 미동도 않고 그 손을 받아들였다. 쌓인 눈을 가볍게 툴툴 털어내고, 목도리를 다시 둘러주었다. 파란 눈이 졸린 듯 깜빡거린다. 차가운 손으로 볼을 찰싹였다. 일어나시오, 아직 침대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해. 목도리로 얼굴을 칭칭 감겨 빼꼼히 나온 눈이 불쾌한 듯 가느다래진다. 지금은 그저 어린 아이의 투정으로만 보이는 표정에 릭이 다시 한 번 웃었다.
벨져의 두 눈이 릭을 올려다본다. 릭은 소매를 걷고 시계가 주렁주렁 감긴 제 팔을 바라보고 있다. 릭이 어느 시계를 보고있는지 벨져는 모른다.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다. 릭이 어떤 시계를 바라보는지, 이곳이 어디인지. 다만 그럼에도 묻는 것은 목적지를 알고 싶은 이유는 아니었다.
"어디로 갈 거지?"
벨져의 입술 사이로 새는 음성은 여전히, 한없이 작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칠 수도 있을 정도로. 릭은 그 작은 소리조차 당연하게 귀에 담고 벨져와 눈을 마주한다. 겨울이 짙어진 날에 여름을 품은 녹색 눈이 부드럽게 웃었다.
차가운 손이 검은 털모자를 벗기고 하얀 머리를 쓰다듬는다. 창백한 볼을 크게 다르지 않은 손으로 감쌌다. 추위 탓에 얼어붙은 살갗으로 전해오는 감촉이 무디다. 다만 맞닿은 피부가 지독하리만치 연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제 볼을 마구 주무르는 손도 내버려둔 채로 벨져의 눈이 깜빡인다.
그대로 하얀 머리카락을 헤집고 손끝으로 머리카락에 숨은 귀를 어루만졌다. 벨져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잠시 열었다가, 닫는다. 고개를 잔뜩 쳐든 얼굴을 내려다보는 감각은 제법 유쾌하다. 평생에 벨져 홀든을 내려다 보는 순간이 올 것이라 누가 생각했겠는가.
릭이 히죽거리는 모습을 보다 못했는지. 벨져가 재촉한다. 릭, 대답해.
"멀리. 가능한 한 먼 곳으로 갈거요. 더 북쪽으로."
북쪽? 그렇소 북쪽. 벨져가 의아하다는 듯 눈을 약간 찌푸렸다.
"기차만으로는 네 집까지 갈 수 없다."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아."
릭의 말에 벨져는 눈을 약간 동그랗게 떴다. 돌아갈 생각은 없다. 릭은 아직도 그저 웃고있을 뿐 말을 잇지 않는다.
먼 곳으로 갈 것이다.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도록. 누구의 추격도 받지 않도록.
당초의 목표와는 달랐으나 어째서인지 제어가 되지않던 능력이 이곳으로 저와 벨져를 이끌었음은 필히 운명일 것이다. 언젠가 릭이 발을 디뎠던 북쪽. 누군가와 함께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곳으로 떨어졌다는 건.
지금 상황에서 더 이상 능력에 의존할 수는 없었다.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포탈은 그저 위험할 뿐이니까. 만약 지금 제 능력이 온전했더라면 조금은 다른 선택을 했을까. 그런 생각도 해본다. 약간 다른 길을 택했으리라 자조하면서.
그대는 항상 이동수단 따위를 쓸 필요는 없다 했던가. 릭은 쓸데없는 낭만이라며 벨져가 인상을 찌푸리던 것을 기억하고 작게 웃는다. 벨져와 한 번쯤 먼 길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능력을 크게 사용하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그것이 이런 식으로 실현되리라고 당시의 릭은 생각지 못했다. 눈이 잔뜩 묻은 모자를 두 번 털어, 머리에 씌워준다.
어린아이마냥 마음이 앞섰다. 손을 잡아 등을 돌리고, 당기듯 걸음을 떼었다. 몇 걸음 떼지 않아 뒤로 묵직하게 무게가 실린다.
차가운 손으로 이어진 몸이 바닥으로 질질 끌렸다. 하얀 코트와 검은 바지가 바닥으로 쓸리면서 눈에 젖는다. 릭은 손에 실리는 체중을 깨닫고야 뒤를 돌아 아래를 바라본다. 벨져는 다른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는 있었지만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릭의 입술 사이로 작게 한숨이 흘러나온다. 이런, 내가 실수했군. 지금 벨져의 상태를 잘 알고 있는데도 그만 순간의 충동에 멋대로 행동해 버렸다. 곤란한 듯 눈썹을 내리면서도 입가로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린다.
아직도 걷지 못하는 거요? 릭의 말에 벨져는 가만히 바닥을 바라볼 뿐이다. 그렇군. 약간 늦은 짧은 대답. 빨간 목도리에 묻힌 목소리는 한없이 작다.
두 다리가 느릿하게 접히고 검은 모자 위의 털방울이 흔들거린다. 벨져는 그답지 않게 꾸물거리며 일어나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조차도 제법 버거워보인다. 일어서지는 못하겠군. 릭은 고개를 젓는다.
"벨져 홀든이라는 자가 이렇게 무력해지다니. 며칠 전까지의 당신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고개를 들지 않는 벨져의 표정을 알 수가 있을까. 하지만 반응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릭은 손을 풀고 몸을 굽혀, 하얀 코트의 겨드랑이 아래로 제 팔을 넣었다. 그대로 한참이나 가벼워진 몸을 들어올린다. 힘이 들 것도 없었다. 머리가 어깨 언저리까지 스윽 들어올려지자 눈에 약간 젖은 하얀 팔이 릭의 목을 끌어안고, 릭은 팔로 엉덩이를 받쳐 벨져를 지탱했다. 작은 숨소리가 귓가로 닿는다.
누가 보아도 그저 닮지 않은 아버지와 아들, 삼촌과 조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벨져를 아는 이조차 이 아이가 그렇게나 고고하고 오만하게 비치던 검사 벨져 홀든이라고 누가 인식할까. 설마 그럴 리가. 얼굴을 아는 이조차 그리 생각할 것임이 분명했다. 벨져의 유년시절을 아는 근친자들이나 열 살조차 된 것 같지 않은 이 작은 몸이 자신들이 아는 벨져라고 깨닫겠지.
의사도 묻지 않고 그렇다고 협박을 하지도 않고 그저 그자리에서 들고 도망쳤다. 지금이라면 누구에게도 빼앗길 일 없이 어디로 도망갈 걱정 없이 벨져 홀든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완벽한 기회라는 악마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벨져는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릭을 따랐다. 그렇기에 납치극이 분명한 이 상황을 릭은 도피극이라 합리화한다.
벨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릭이 알 방법은 없다. 릭은 벨져가 눈을 뜨면 잔뜩 노려보고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무슨 짓이지 릭 톰슨? 나를 어서 제레온 경의 곁으로 데려가. 그런 식으로 잔뜩 화를 내며 서늘한 두 눈에 더욱 찬 기운이 서릴 거라 예상했었다. 하얀 입김이 눈앞으로 서리는 겨울의 북쪽 땅에서. 벨져의 푸른 눈과 마주한 릭은 잔뜩 긴장했다. 예상하던 답변이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무서웠다. 물론 지금의 벨져는 능력조차 무의미한 몸이 되었으니 제압하기는 쉬울 것이다. 다만 그런 식으로 함께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전쟁은 끝났다. 인식의 문은 릭이 보는 앞에서 닫혔고 아마도 안타리우스는 사라질 것이다. 확언하지 않는 이유는 안타리우스의 사멸이 후일담과도 같을 최종장에서 다루어질 이야기인 탓이다. 문이 닫히며 무대의 막이 내린 순간, 릭은 주역을 데리고 무대에서 도망쳤으므로.
막이 내리고 주역을 잃은 채 진행되어야 할 최종장에 릭은 아무런 감상도 느끼지 못한다. 등장인물들은 과연 주연의 부재를 어떻게 할까.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하며 찾을까? 그의 가족들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벨져 홀든을 찾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글쎄. 오히려 그가 무대를 떠남으로써 그의 공적을 나눠 먹는데 급급하겠지.
다만 만약, 지금의 벨져가 다시 무대로 돌아간다면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날 것이다. 릭은 그렇게 생각했다.
--우스운 일이지. 그대가 모든 것을 끝냈는데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잃다니. 누구도 당신을 찾지 않을 거요 벨져 홀든. 영웅이란 그런 법이거든. 전쟁이 끝나면 어둠을 밝히기 위해 강해졌던 빛은 너무나 밝아서 쓸모가 없어. 별이 터지는 순간처럼 죽어 마땅하다고 모두가 생각해.
흔들리는 기차에서 릭은 벨져를 앞에 두고 그리 말했다. 벨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긍정도 부정도. 그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을 뿐이다.
릭은 조금 웃었다. 이 무슨 꼴일까. 섬광이라 불리던 사내가 제 일을 모두 완수한 순간 역으로 무력한 존재가 되어버리다니. 어딘가의 희극에나 나올 법한 전개임이 분명하다.
무슨 생각을 하고있을까. 벨져에게는 후회도 탄식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개를 숙이며 운명에 순응할 것 같지도 않다.
전부 부질없지 않나? 당신이 그리 목숨 바쳐 경배한 제레온 프리츠에게 이런 그대는 그저 짐에 불과할 테니. 그가 그대를 보호하려 해도 그대가 거부하겠지. 이제 그대에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힘도, 능력도, 명예도. 벨져 홀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은 모래처럼 흐트러졌소.
제레온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 안색이 변할 것을 알기에 입에는 담지 않는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있을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벨져 자신일 터였다. 벨져가 자신의 인생을 바쳐 숭배하고 따르던 그의 곁에 벨져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설령 제레온이 원한다 하더라도 벨져가 고개를 저을 것이었다.
적이 많은 사람이다. 지켜질 수 밖에 없을 존재가 된 벨져를 곁에 둘 선택을 할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겠지. 이미 무언가를 짊어진 사람은 벨져가 짐이 될 수밖에 없다. 짐을 떠맡고 싶어 할 사람이 없을 것은 물론이요, 벨져 홀든이라는 자가 과연 짐이 된 자신을 용서할까?
"벨져."
부르는 소리에 푸른 눈이 릭을 향한다. 눈에 서린 고귀함은 예전과 같으나 그 빛은 예전 같은 위압감을 주지 못한다.
"그대를 사랑할 수 있는 건 나뿐이야."
두 눈이 깜빡깜빡 릭을 담는다. 졸린 듯 반쯤 감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었다. 조금의 기척에도 눈을 뜨던 사람이 코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잠에서 깨지 않을 정도로 깊게.
얼굴로 길게 떨어진 머리카락을 걷어주려 팔을 뻗는다. 손끝이 닿으려던 순간, 다시 팔을 거두었다. 잠든 얼굴은 벨져 홀든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한없이 무방비하고 유약하다.
◆샘플02
▼19금파트 샘플의 건전한부분과 동일합니다. 19금전에 자름
그저 새카만 암흑뿐이다.
분명 눈을 뜨고 있었다. 빛 한 점 없이 검정만이 짙게 퍼진
공간이었기에 제 손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그저 이상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릭은 혹시나 환상일까 싶어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한다. 약간 거칠어진 손은 릭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그 동작을 시각으로 확인하면서 엎드려있던 신체를 천천히 일으킨다.
시선을 제 손목, 팔로 올리고, 무릎 꿇은 허벅지로 옮긴다. 검은 어둠 속에 자신의 신체만이 명확하게 떠올라있다.
아마도 바닥이 아닐까. 평평하게 이어지는 면적에 그렇게 추측할 뿐이다. 시야가 완전히 새카맣게 막힌 탓인지 멀쩡하게 서있어도 선 것 같지가 않았다. 눈앞이 흔들리는 것 같은 묘한 메슥거림을 억누르고 눈을 찌푸린다.
좌우로 몸을 돌리고 마지막으로 뒤로 돌았다.
릭
은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나가는 빛의 경로를 보았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시작이 되는 지점은 암흑의 중간이다. 균열마냥 암흑의
중간에서 터져나오는 빛. 그 입구에서 쏟아지는 빛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사람을 릭은 아주 잘 안다. 신체의 윤곽을 따라 긴
그림자가 이어진다. 바람 한 점 없는 공간에서 뒤편으로 하얗게 흩날리는 머리카락. 익숙한 옆모습.
저도 모르게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 부름이 닿은 걸까. 반응이라도 하듯, 파란 눈이 시선으로나마 릭을 흘겨본다. 그리고 이내 다시 정면을 향했다.
무언가를 잡고 있는지 팔이 앞으로 뻗어있었다. 손이 무엇에 닿아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정신없이 그 옆으로 내달렸다.
주변으로 보이는 물건이 아무것도 없으니 거리를 가늠할 수 없었다. 몇 걸음이나 내달렸을까. 릭은 어느 순간 자신의 귀를 가득 채우는 잡음을 깨닫는다.
무
언가 돌아가는 소리. 인간이 가진 공포를 바닥부터 끌어올리는 기이한 소리다. 릭은 평생에 이러한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나마
유사한 것을 떠올리자면 거대한 환기구가 돌아가던 소리라고 해야할까. 기계적인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그 출처는 분명했다. 지금
자신이 나아가고 있는 바로 앞. 순간 두려워져 걸음을 멈춘다.
다시 한 번 그를 부르려던 찰나 시선이 맞았다. 뒤돌아본
벨져의 입가가 무언가를 그렸다. 자신의 이름임이 분명했지만 고작 한 음절인 제 이름은 미처 릭의 귀에 닿지 못한다. 무언가
소리내어 닫혔다. 그것은 아마도 문일 것이라 릭은 직감한다. 동시에 빛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시끄럽던 소리도 함께. 정적이
깔린다.
하얗게 직선으로 쏟아지던 빛이 사라지고 시야가 완전한 어둠으로 물드는 것은 순간이다. 문이 소리 내어 닫힌 순간, 바닥으로 쓰러지는 하얀 청년을 보았다.
"벨져!"
주변으로 릭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어디까지 닿아 어디에서 반사되는지 알 수 없을 공간에서 사방으로 릭의 부름이 잔상이 되어 떠돈다. 그 곁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남아있는 것은 허름한 망토와 옷, 마지막으로 검 두자루였다. 옷을 입고 있어야 할 사람이 막상 보이지 않아 릭은 덜컥 겁이난다.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몸이 스르르 주저앉고, 그제야 그 안에 무언가 있음을 깨닫는다.
벨져가 몸에 걸쳤던 옷가지 사이에 파묻힌 작은 그림자. 어린 아이. 아직 열 살조차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작은 아이였다. 릭은 눈을 크게 뜬다. 그 아이야말로 릭이 방금 보았던 스물 여섯의 청년. 벨져 홀든임이 분명했기에.
어
린 몸을 주워 올린다. 달각 소리를 내며 어깨갑주가 옆으로 구르고 그 아래의 자켓과 바지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그나마 입고 있던
셔츠만이 창백한 신체를 덮은 채 남아있었다. 헐렁하게 목을 감싸는 크라바트 사이로 가느다래진 목선이 얼핏 보인다.
당연하게도 릭 톰슨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손을 뻗고있던 벨져는 분명 자신이 기억하던 대로 이미 클 대로 큰 청년이었다. 그랬던 벨져가, 이렇게 순식간에, 어린 아이로 돌변한다고? 믿을 수 없지만 실재하는 현실에 머릿속이 하얗게 물든다.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릭을 벼랑 끝으로 몰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
디에서 들려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앞뒤양옆 사방, 팔방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벨져, 작은형, 벨져, 벨져 홀든. 벨져를
부르는 각양각색의 음성에 릭의 것은 포함되어있지 않다. 그 목소리들에서 릭이 구분할 수 있던건 벨져의 형제인 다이무스나 이글,
유독 기억에 남았던 제레온 정도였을까. 사람들은 여전히 릭의 품에 안긴 사람을 부른다. 벨져 홀든이라는 자와 연결되어있던 사람들의
목소리. 벨져 홀든을 여기까지 오게 한. 릭 톰슨은 생각한다.
문은 닫혔다. 벨져가, 그가 그리도 원하던 대로 문을 닫았다. 올곧게 뻗어온 섬광이 도달한 종착지였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 남았다.
품
에 안긴 어린 벨져 홀든을 응시한다. 앞에 서는 적을 모두 무릎 꿇게 하던 그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 부러트릴 수 있을
것 같은 가느다란 목도, 팔다리도, 그저 부드러울 살도. 릭 톰슨이 기억하는 완성된 벨져 홀든이 아니었다. 한참을 미완성이던
시절로 돌아간.
분명 벨져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다. 벨져 홀든이라는 자가 이 사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고
누구나가 알고있지 않던가. 그래서, 그런데 그 결과가 이거라고? 웃음으로 뱃속이 끓기 시작한다. 조금씩 끓던 충동이 입밖으로
터져나온다. 우습게도 입술 사이로 샌 그 소리는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릭은 어깨를 떨며 힘없이 몇 번 웃음소리를 내뱉고는, 작아진
신체를 품 안에 꼭 끌어안는다. 우스운 일이군, 모든 것이, 그렇지 않소? 하얀 이마에 입술을 짓누르며 속삭였다.
당신을 아는 사람들이 지금 당신 모습을 보면 뭐라 할까. 비통해할까 아니면 비웃을까. 어느 쪽이건간에 유쾌하지는 않다. 상대가 누구건간에 보여주고 싶은 생각은 없으므로.
그런 생각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벨져를 부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더욱 좋지 못하게도 발소리까지 섞이기 시작했다.
릭은 자신이 어떻게 이 공간으로 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길은 불명이었으나 어떤 수였든 이곳에 있는 이상 입구는 있겠지. 그 곳을 통해 누군가 지금 들어온다면….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릭을 선택으로 내몬다. 결정은 빨랐다.
들
지 못하는 검 두 자루와 무거운 어깨갑주는 내버려둔 채 적당히 옷가지와 거적때기 같은 망토만을 주워든다. 그것들로 작아진 벨져를
감싸고, 한 팔로 안아 올린다. 릭은 늘상 그랬던 것처럼 포탈을 열려 했다. 손을 뻗어 공간을 비튼다. 그때였다.
눈앞에서 공간이 터졌다. 완벽하게 이어질 새도 없이. 순식간에 팽창하고 수축하더니, 폭발했다.
그
야말로 찰나였다. 터진 것은 공간이기에 잔해는 남지 않는다. 누구도 이런 어둠 속에서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이나 릭은
능력을 사용하는 술자였기에 자신이 이은 공간이 비정상적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손이 저릿거렸다.
방금 그건. 릭은 눈을 깜빡인다. 저도 모르게 벨져를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능력을 제어할 수 없었다. 숨을 쉬듯 사용해온 힘이었건만. 제법 긴 세월을 이 능력과 함께 했음에도 이런 일은 처음이다. 고삐를 무시하고 폭주할 정도라니. 이상하리만치 힘이 강력해져있다. 술자의 제어력이 어쩌지 못할 만큼.
그렇다고 이곳에 가만 있을 수는 없다. 릭은 결심을 굳히고 다시 한 번 신경을 집중했다. 조금의 빈틈도 있어서는 안 된다. 약간 멀찍한 곳으로 공간이 회전한다.
불러일으킨 어둠이 새카만 칠흑 속에서 뱅글뱅글 돌아간다. 우주를 작게 모은 구멍이 조금씩 몸집을 불린다. 천천히 걸어 그 속으로 몸을 던졌다.
아
래로 떨어지는 감각. 아까와는 또 다른 어둠이 몸을 감쌌다.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별을 본다. 공간의 터널을 이렇게 길게
떨어진 적이 있던가. 옅은 공포가 뇌리를 스친다. 목표로 한 지점은 릭의 자택이다. 다만. 이 끝이 그곳으로 이어져있을 것이라고
지금의 릭은 장담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길 시간이었다. 눈을 감는다. 저 아래에서 냉기가 불어닥쳤다. 호흡을 멈춘다.
릭과 벨져는 허공에서 떨어졌다.
차
가운 겨울의 한기가 폐로 훅 들어온다. 입가로 하얀 숨이 흐트러졌다. 순식간에 피부로 스며드는 냉기에 망토로 감은 벨져를 더욱
품으로 끌어당긴다. 몸이 파르르 떨렸다. 걸친 옷이라곤 고작 하얀 티셔츠와 검은 자켓, 청바지가 전부다. 춥지 않을 수 없다.
12
월 초. 높은 벽돌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이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붉게 물들어간다. 눈의 기색이 짙다. 릭은 가만 인파가
스쳐 지나가는 대로 쪽을 보고 자세를 바로해 바닥에 앉았다. 지금 당장 눈이라도 내리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버티지 못할
추위까지는 아니어도 복장을 갖춰야 할 필요가 있겠지. 품에 안은 벨져를 잠시 바닥에 내리고 제 자켓을 씌워 그 위를 망토로
가려준다. 벨져를 데리고 골목을 나갔다간 쓸데없는 시선만 잔뜩 집중될 테니 데리고 갈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얼굴까지 망토를 덮으려던 순간, 눈꺼풀이 떨리고 벨져가 눈을 떴다. 서늘한 푸른 눈에 가느다랗게 릭의 얼굴이 비친다. 숨이 막힌다.
손바닥으로 식은땀이 배어나온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벨져의 시선을 그저 받아치기만 했다. 긴장 탓에 심장이 뛴다. 자꾸만 흔들리는 눈동자를 들키지 않으려 애를 썼다.
숨을 들이킨다. 먼저 말을 건넨다.
"일어났소?"
벨져는 눈을 깜빡거릴 뿐 대답이 없다. 아직 흐릿한 초점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말을 잇는다.
"그대를 조금 더 따듯한 곳으로 데려가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불가능해. …말하기 부끄럽지만. 지금 능력이 제어가 되지 않아."
"…릭.?
"잠시 여기 있을 수 있겠소? 금방 옷을 사서 돌아오도록 하지."
무언가를 말하려 하는 벨져를 두고 그 자리를 뜬다. 아니 도망쳤다. 거리를 달린다. 제정신을 차린 벨져가 무슨 말을 할지 가만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다
행이라면 다행일까.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익숙한 거리였다. 거리로 나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에 릭은 그 사실을
알아챈다. 몇 년 전, 축제가 한창이던 이곳에 잠시 들렀다. 잡지에서 사진을 보았던가. 릭의 여행이 늘상 그러하듯 그리 긴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다시 와볼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추운 겨울에 반소매 차림으로 거리를 달리는 릭을 호기심의
시선이 쿡쿡 찌른다.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신경쓸 새도 이유도 없었다. 가장 먼저 보인 곳으로 들어가 적당히 추위를 막을 만한
옷가지를 집어든다. 릭 자신이 걸칠 검고 두꺼운 코트. 벨져에게 입혀줄 코트나 바지 같은. 사야 할 것들을 전부 집어 들고서야
가진 금전이 걱정되었다. 침을 삼키며 눈을 가늘게 뜨고 바지 뒷주머니에서 꺼낸 지갑에는 생각보다 돈이 두둑하게 들어있다. 언제
이렇게 넣어놨지? 그런 의문도 잠시. 잡념을 털어버리고 계산을 마쳤다.
코트에 팔을 끼우고 가게를 나선다. 가게에 들어갔던 짧은 사이에 하늘에서는 작은 눈송이들이 떨어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릭은 많지 않은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아까의 그 골목으로 향했다.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갔다. 히죽거리는 얼굴을 어쩔 수가 없다. 누군가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까.
분명 기쁜 것은 사실이다. 그토록 원하던 것을 드디어 손에 넣었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그저 기분이 좋기만 한 것도 아니다. 벨져가 처한 가엽고 비극적인 상황을 생각하면.
벨
져 홀든이 이 전쟁의 끝을 위해.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의 모든 것을 소모했다는 사실을 릭은 알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누구나가 이기적이고 오만하다 평했던 청년이 자신의 전부를 쏟아부어 시작을 끝으로 이었다. 그에겐 그만한 명예가 주어져야
했다. 설령 그러지는 못할지라도 이제 평온한 생활이 찾아와도 좋았을 것이다. 릭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 결과가
무엇이던가.
한없이 미완성이고 보호받아야 했던 모습으로 회귀한 검사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두 검을 들지 못할 것이다.
그가 아니면 들 수 없을 것들이었기에 릭은 새카만 어둠 속에 그것들을 버려두고 왔다. 무거운 어깨의 장식도 떼어놓고, 지금 그가
가지고 있을 것은 기껏해야 거적때기 같던 망토와 몇몇 옷가지만이 전부다. 벨져는 아마 지금에야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나 자신을 갈고닦기에 여념이 없던 사람이.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무로 되돌려진 지금을 어떻게 느낄까. 절망이라는
단어는 벨져 홀든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받아들이고 다시금 잘 벼린 검이 될 수 있도록 나아갈 길을 수정하겠지. 다만 그
과정을 다른 사람이 그대로 내버려 둘 지는 알 수 없다.
적이 많은 사람이다. 벨져 홀든이 지극히도 무력해진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사람은 사방에 깔렸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의 집안이 보호하려 한다 한들. 그렇기에 릭은 모든 것으로부터 그를
숨기기로 했다……. 아니, 이 모든 논리가 자신이 벨져 홀든을 구속할 변명임을 안다.
원인도 대의도 아무래도 좋다. 그저 그렇게나 원해온 사람을 곁에 두고 있을 수 있다면. 본심은 틀림없이 이쪽이었다.
벨
져는 릭이 그를 두고 온 그 자리에서 꼼작도 않은 채 릭을 기다리고 있었다. 건물의 그림자에 숨듯 옆으로 누운 어린 신체. 옷을
가져왔소. 그 앞에 무릎으로 섰다. 벨져는 작은 목소리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릭은 작게 웃는다. 그렇군. 더 이을
말은 없었다.
목에 감긴 헐렁한 크라바트를 풀고, 사온 털옷과 코트, 바지를 입혀주었다. 크라바트에 묻혀있던 목걸이는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아직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유약한 육체는 그저 릭이 일으켜 세우는 대로 일어나고,
팔을 들리고, 옷을 입혀진다. 릭을 바라보는 두 눈은 그저 조용하다. 분노도 감사의 말도 없다. 릭은 그 정적에 감사했다.
그저 가벼울 뿐인 신체를 안아 올려 골목을 나선다.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이 모든 것을 릭에게 맡긴다. 마치 짐짝을 나르는 기분이군. 그리 웃으니 벨져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날은 점점 추워진다. 으슬으슬 노출된 살갗으로 느껴지는 한기는 지금 이 복장으로는 조금 참기 힘든 정도로 춥게 느껴진다. 다른 가게에 들러 목도리를 두르고 모자를 씌워주었다.
쉴 새는 없다. 만약 그 곳에서 누군가 능력의 잔해를 발견한다면. 잘못하면 추적당할 위험이 있었다. 릭은 지친 몸을 이끌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복
잡한 역 밖에 잠시 벨져를 기다리게 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급하게 시간표를 훑어본다. 그리고 가장 먼 곳으로 향하는 차표를
끊었다. 일단 목표는 있다. 티켓에 찍힌 목적지는 이곳에서 다시 한참이나 북쪽. 출발은 두 시간 뒤. 벨져를 데리고 기차에 올라탄
시각은 밤이 다 될 무렵이었다.
야밤의 열차엔 손님이 드문드문하다. 4인석. 옆자리에는 가방을 두고, 자신과 마주보는
자리에 벨져를 앉혔다. 이마를 다 가리던 검은 털모자를 벗기고 목도리를 풀어준다. 그리고 손을 놓자 거진 녹아내리다시피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지만 늘어져있다는 표현이 옳을까. 몸에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니 어쩔수
없는 결과이기도 하다. 졸린 듯 깜빡이던 두눈이 조금 씩 더 내려앉는다. 릭은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숫자가 스물을 셀 즈음 두 눈이 완전히 감겼다. 그제야 릭의 몸에서 긴장이 풀린다.
입에서 깊은 숨이 푹 새어나온다. 등받이로 등을 기대고 의자 깊숙이 몸을 묻는다. 문득 내려다본 시계는 출발시각으로부터 삼십 분이 지난 시각을 가리킨다. 도착까지는 아직 한참 멀다.
조
금 있다가 차량의 불이 꺼졌다. 작은 비상등만이 바닥을 밝힌다. 덜컹거리는 열차 안이 밤으로 물들었다. 얼마 안 가 멀리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릭의 녹색 눈이 느릿하게 어둠에 익숙해져갔다. 하얀 머리카락은 밤에도 작은 빛을 모아 옅게 떠오른다.
액자를 쫓아갔던 메트로폴리스에서 만난 사내다. 첫 만남은 네 시간. 고작 네 시간을 함께했다. 릭 톰슨의 인생에서 손에 꼽힐 만큼 강렬한 네 시간이었다.
첫
눈에 반했다거나. 그런 낭만적이기만 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멋대로 생각했을 뿐이다. 이 청년이야말로 자신을 원래 있던 장소로
데려다 줄 빛이라고. 시작은 그런 제멋대로인 기대에 가까운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것이 언제부터 연정이 되고 소유욕이 되었던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두 눈이 어둠 속에서 희망을 보려고 하얀 청년을 쫓는 동안 마음의 형태는 조금씩 바뀌어갔다.
그를 향한 일반적인 평판과는 다른 면모에 이끌렸다. 벨져 홀든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릭은 직감하고 있었다.
벨
져 홀든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손에 넣을 수 있을 사내가 아니다. 아니, 릭 톰슨만이 아닌 그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사사로운
감정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제 길만을 나아가는 저 청년이 한 사람에게 제 감정을 부으려 할 리가 없었다. 첫 생각은 그러했다.
그런 릭의 직감은 벨져를 알 만큼 알게 된 지금엔 빗나갔다면 빗나갔다고도 할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생각했던 이유와는 약간 달랐지만 릭 톰슨이 벨져 홀든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으므로.
릭 톰슨과 벨져 홀든의 관계는 약간은 친구같은, 상당히 사무적인 관계였다. 릭은 그렇게 생각한다. 비록 셀 수 없을 만큼 살을 섞었으나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벨져와 릭은 조금도 서로의 감정을 나누지 못했기에.
벨
져의 두 눈은 항상 어떤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옆에서 녹색 눈으로 그 시선을 보았다. 그가 보는 사명과 나아갈 길은 오로지 한
남자를 위한 것이었다. 누구도 벨져를 길에서, 무대에서 내려오게 할 수 없다. 벨져는 제레온 프리츠의 제일가는 신도이자
추종자였다.
그렇기에 릭 톰슨은 지금 이 상황에 약간의 의아함을 떨쳐낼 수 없다. 납치극과도 같은, 납치극이 분명한 이 도피를 그저 순순히 받아들일 이유가 무엇일까. 무슨 생각이오? 그대가 바라보던 건 내가 아니었을 텐데.
함
께 노숙을 하거나 호텔 같은 방을 쓴 적도 많다. 그럼에도 고작 잠든 얼굴 하나가 이렇게 생소하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아이가 가지는 특유의 무방비함 때문이리라. 벨져는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정신이 깨어있을 때에도, 잠들었을 때에도. 저런 식으로
잔뜩 풀어진 표정을 볼 수 있는 이는 얼마 없었겠지. 제 육체를 어쩌지 못하고 쌕쌕 소리내며 눈을 감은 모습이 그가 빼앗긴 모든
것을 대변한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를 자신만이 사랑할 것이다.
벨져 홀든은 릭 톰슨의 것이 된다. 온전한 형태로. 손을 잡아끌었다. 벨져는 거부하지 않는다. 벨져의 진심이 그것을 원하건, 혹은 원하지 않건. 이젠 돌이킬 수 없다. 간신히 허락된 손을 놓을 리가 없었다.
맞은편의 고개가 푹 숙여진다. 그 움직임에 머리카락이 앞으로 흘러내려왔다. 릭은 무의식적으로 머리카락을 뒤편으로 넘겨주려 손을 뻗었다가, 닿기 직전에 팔을 거둔다. 잠시 머뭇거리고는 다시 등받이로 몸을 묻었다. 눈을 감는다.
종착역을 알리는 소리가 스피커로 울려퍼졌다. 릭은 그 소리에 눈을 뜬다. 아침이 밝아 커튼 너머로 밝은 빛이 스며들어온다. 창밖으로 하얀 눈이 쌓인 플랫폼이 펼쳐져있다. 다른 승객들이 짐을 들고 열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인다.
맞은편으로 아직도 눈을 뜰 줄 모르는 어깨를 흔든다. 벨져, 일어나시오. 얇은 눈꺼풀이 움찔거리고 무겁게 들렸다. 잠에서 덜 깬 눈이 가늘게 뜨인다. 벨져가 입을 열기 전에, 릭이 먼저 말을 건넨다.
"도착했소, 아직 조금 더 이동할 생각이지만 며칠은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아."
몸
을 앞으로 잡아당겨 모자를 씌운다. 털방울이 머리 위로 달랑거리는 것이 영 벨져와는 어울리지 않아 작게 웃었다. 그리고 목도리를
다시 감아주려 하는데, 벨져가 릭의 손에 들린 그것을 낚아챘다. 내가 할 수 있다. 그리 말하며 붉은 것을 제 목에 감기
시작한다. 꾸물꾸물 목도리를 두르는 손이 바들바들 떨었다. 릭은 한숨을 쉰다.
코트 앞섶을 다시 채워주고, 한쪽 어깨로
가방을 멨다. 그리고 릭이 묻는다. 걸을 수 있겠소? 몸을 일으키면서 손을 잡아당겨보았지만 벨져는 가만 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다. 아직 무리인 것 같군. 그러면 내 목에 매달리시오. 허리를 숙인다. 벨져가 릭이 말한 대로 그 목에 팔을 감고,
릭은 있는 힘껏 자신에게 매달려오는 몸을 들어올렸다. 팔을 하반신에 감아 지탱한다. 어린아이의 체취가 물씬 풍겼다. 그래도.
벨져가 입을 뗀다.
"조금 낫군."
릭은 조금 더 가까이 몸을 끌어안으며 코트 위로 등을 쓸어준다. 열차를 내렸다.
어제보다 몸이 가벼워. 다행이군. 릭. 왜 그러시오. 날이 차갑다. 겨울이 다 된 탓 아니겠소. 벌써 겨울이던가. 날짜조차 모르다니 벨져경답지 않은 소리군. …너는 따듯하군. 체온이 높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
오
늘따라 말이 많다. 이렇게나 잘 조잘거리는 사람이었던가. 릭은 시선을 내린다. 작아진 등을 바라보며 가만 생각했다. 아니면 작아진
몸에 걸맞게 응석이라도 부리는 건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해도 해답은 알 수 없겠지. 이따금 보드라운 볼이 릭의 목 언저리로
닿는다. 들어올린 몸의 무게도 잊고 길을 걸었다. 벨져답지 않다고밖에 할 수 없는 시답잖은 소리에도 모두 답하면서.
얼마
지나지않아 호텔을 결정했을 땐 이미 말은 멎고 작은 숨소리만이 들려오는 상태였다. 벨져, 여기로 할까 하는데. 호텔 카운터에서
잠든 벨져에게 말을 걸어보았지만 눈은 뜨일 생각을 않는다. 자제분이 많이 피곤하셨나봐요. 아, 먼 길을 왔거든요. 멋쩍게 웃으며
방을 잡는다.
길에서도 몇 번을 잠들었다 일어났다 반복했으니 적당히 부르면 다시 눈을 뜰 거라 생각했는데. 이번엔 침대 위에 내려놓는데도 영 반응이 없는 것이 완전히 잠든 모양이다.
작
은 호텔의 침대에서 잠든 벨져를 보며 릭은 자신의 턱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이렇게 계속해서 자고 깨고를 반복하는 건 그만큼 체력이
부족하다는 뜻이겠지. 어디로 도망갈 염려는 덜었으니 나쁘지만은 않지만 역시나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다음 계획을 생각한다. 조금 더, 북쪽으로 갈 생각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눈여겨봐두었던 지역이 있다. 한적하고, 중심부에서 떨어진. 숨을 죽이고 은둔하기에 좋을 곳. 그곳의 어디에 거처를 둘지 정보가 필요했다.
아
직 문이 닫히고부터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다. 릭은 벨져를 찾는 이가 얼마 없을 거라 예상하였으나 실제는 닥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찾으려는 이도 있을 수 있고, 혹은 흠을 잡으려 찾는 이도 있을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능력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어떻게든 몸을 숨기고 있을 심산이었다.
벨져를 침대에 재운 채 탁상에 가방의 내용물을
전부 털어놓는다. 가방에 들어있던 것이라고 해봤자 별거 아닌 간식거리나 벨져가 원래 입고있던 옷가지가 전부다. 옷가지를 가지런히
개고있는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반짝거림이 있었다. 그가 크라바트에 달아두었던 푸른 브로치다.
벨져의 서늘한 눈과 잘 어울리는 색이다.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푸른색이 아름답지 않다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잘 어울린다 하니 작게 코웃음만 치던 기억이 난다. 브로치를 크라바트에서 떼어 손에 쥐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왔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적당한 여행사에 발을 들였다. 한동안 쉴 곳을 찾고 있소만. 원하는 지역과 함께 그리 말하니 직원은 종종걸음으로 자료를 한가득 들고왔다.
대
략적인 위치는 이미 생각해두었다. 그곳에서도 더욱 깊숙한 곳일수록 좋다. 인적이 닿지 않는 곳으로. 비용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면적도 화려함도 상관없고 그저 시간을 죽일 곳이면 충분하다. 오랜 시간은 필요 없다. 몇 달. 아니 몇 주만이라도. 능력이
조금만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설명을 늘어놓으려 하는 직원을 만류하고 제 손으로 종이를 뒤진다. 이것저것 매물을 뒤적이며 마음에 드는 것을 몇 개 추렸다. 오늘 하루 고민해보겠소. 자료의 사본을 건네받아 거리로 나왔다.
릭
은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벨져의 크라바트를 장식하던 브로치를 팔았다. 보석상은 푸른 브로치를 가만 들여다보더니, 릭과 그것을
번갈아본다. 척 보기에도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인데, 손님은 이걸 어디서 손에 넣으셨습니까?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것이오, 사연이
있어서…. 그렇군요. 질문은 그걸로 끝이었다. 상당한 대금이 손에 들어왔다.
보석상에서 호텔로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객실로 돌아와 열쇠로 문을 열었다.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문을 열 때까지만 해도 잠들어있던 벨져가 침대에 앉아있었다. 달칵. 문이 완전히 닫힌다.
"어딜 다녀왔지?"
어
조가 날카롭다. 릭은 침대로 걸어가 그 앞의 융단이 깔린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리고 릭이 다가오는 사이에 침대로 걸터앉은
벨져의 손을 잡는다. 본 연령에 맞는 신체를 가졌을 때보다 한없이 어려진 손의 감촉은 말그대로 아이같이 보드랍다. 항상 벨져
쪽이 차가웠는데. 밖에 나갔다 온 탓인지 지금은 릭의 체온이 더 낮게 느껴진다. 차가운 손으로 따스한 온기가 스며든다.
푸른 눈이 커다란 손에 잡힌 자신의 손을 가만 보고는 눈을 치켜떠 릭에게 시선을 돌린다.
"손이 차갑군."
"잠시 나갔다 왔소. 우리가 있을 곳을 알아보러."
릭
이 미소로 답했다. 흐음. 무표정한 벨져의 속내는 영 알기가 힘들다. 시선은 어느새 다시 내려가, 제 손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그저 차가웠던 커다란 손은 벨져의 그렇게까지 따듯하지는 않은 손에 제법 미지근해졌다.
"그대가 하고다니던 브로치가 제법 비싸게 팔리더군."
굳
이 지금 하지 않아도 좋을 말을 내뱉은 건 약간의 짓궂음이었다. 제 물건을 멋대로 남에게 팔아넘긴 자신에게 어떻게 반응할지. 그런
호기심이다. 푸른 눈이 릭의 눈과 마주친다. 벨져의 눈에 담긴 릭의 모습은 어딘가 일그러져있었다. 릭은 그런 자신을 외면하며
말을 잇는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이제 내가 계속 곁에 있을테니. 그저 내 옆에 있는 걸로 충분해. 그대에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
감싼 손을 세게 쥔다. 릭은 약간 아래에서 벨져를 올려다보았다. 벨져 또한 그저 조용히 릭을 응시할 뿐이다.
쓸
데없는 말이었다. 브로치따윈 실수로 두고 왔다 거짓을 말해도 충분했을테니까. 그럼에도 이런 말을 내뱉은 건 벨져가 너무나 그답지
않게 릭에게 고분고분하기에 짓궂게 시험하고 싶었던 탓이다. 벨져의 본심인지 아니면 약해진 탓에 매달리며 약한 소리를 한 건지.
하
지만 본심이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릭은 벨져가 자신에게 보이는 순종적인 면모를 전혀 믿지 않는다. 릭이 기억하는 벨져
홀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아니던가. 벨져는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 사내였다. 물론 벨져가 거짓을 말하리라 생각지도 않지만,
나서서 릭에게 배를 보일 거라 생각할 수는 없었다. 동시에 벨져가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깨닫고 저를 따르기를
원하니 여러 감정이 뒤섞인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자신에게 복종하라는 강압적인 선언에도 벨져는 눈만 깜빡일 뿐 대꾸하지 않는다. 릭의 짙은 녹색 눈을 빤히 바라보는 속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릭은 그 너머를 보려 했다. 서늘한 푸른 빛 너머로 무언가 보일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저도 모르게 집중하려던 순간, 정적을 깨고 벨져의 목소리가 닿는다.
"맞는 말이군."
작
은 웃음소리. 벨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옅게 웃는다. 두 눈이 다시 맞닿은 손을 담는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릭의 손에서
빼어냈다. 하얀 손이 헐렁한 셔츠 아래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어 머리 위로 벗는다. 그 동작이 느릿하게 이어진다.
그것은
곧이어 릭의 손에 쥐어졌다. 릭은 멍하니 고개를 내려 제 손에 담긴 것을 본다. 무언가의 문장이 새겨진 목걸이였다. 벨져의 손이
릭의 손가락을 접어 그것을 손 안으로 쥐어준다. 고개를 들었다. 뭐라 할 틈새도 없었다. 침대에서 미끄러지다시피 주르륵 내려온
몸이 릭의 목에 매달렸다.
"이게 더 돈이 될거다."
완전히 저에게 체중을 싣는 신체를 허리를 끌어안아 고정한다. 목걸이는 손에 쥔 채로. 목에 감긴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안다. 아직 약한 육체이기에 아프거나 괴롭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기묘한 감각이다. 항상 밀면 밀었지, 다가온 적은 없던 사람인데.
"이상한 기분이군."
작아진 등을 쓰다듬으며 다른 손으로 다시 허리를 감쌌다. 그에 호응하듯 벨져가 볼을 맞댔다.
"뭐가 이상하지?"
"당신이 나에게 이렇게 매달리다니. 아주 이상하지 않소."
그대에겐 나보다 더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혀끝까지 올라온 말은 억지로 삼킨다.
"달라진 건 없다. 릭. 모든 것이 끝났을 뿐. 네가 말한 대로, 나에겐 이제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으니까."
가느다란 두 팔이 릭의 머리를 감싼다.
"이제 나를 어디로 데려갈 건가? 릭 톰슨."
벨져 홀든이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던가. 그런 놀라움마저 느낄 정도로 달콤한 음성. 귓가를 간질이는 소리에 릭은 깜짝 놀라 허리를 잡고 작은 몸을 떼어놓는다. 벨져. 부르려던 순간, 입술이 닿았다.
작은 입이 몇 번이나 릭의 입술을 빨았다. 작은 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딱히 혀를 얽은 것도 아닌 유치한 입맞춤일 텐데 순식간에 몸으로 열이 오른다. 뒤통수에 묻은 손가락이 갈색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이거 위험한데. 젖은 혀가 입술을 핥는다. 동시에 억지로 몸을 떼어 놓았다.
불
만스레 미간을 좁히는 벨져를 억지로 다시 재웠다. 약해진 게 다행은 다행인 건지. 침대로 눌러놓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씌운 채 잠시
누르는 것만으로도 금세 잠이 오고 몸에서 힘이 풀린 모양이었다. 버둥거리기야 했지만 크게 위협적일 리 없었다.
한숨을 돌리고 협탁 옆의 의자에 몸을 내린다. 여행사에서 가져온 자료를 위에 펼쳐 놓는다.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깜짝 놀랐군."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다. 심장이 뛰었다. 고작 이런 일로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철없지는 않은데도. 하지만 이 느낌은 순수하게 첫사랑을 겪는 아이라기보다 무슨 무서운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놀라움에 가깝다.
벨져가 먼저 릭에게 입을 맞춘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칼을 들이대며 협박해도 이런 일이 생기기는 쉽지 않을 거라 추측했던 상황이다. 옆으로 돌아누운 채 잠든 뒷모습을 곁눈질한다.
벨져. 그대가 나를 이렇게까지 좋아했던가?
떠
오르는 의문을 목 뒤로 삼킨다. 릭이 기억하는 벨져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살을 섞은 횟수야 많았지만 이런 식으로 기묘한
달콤함을 수반하는 경우는 없었다. 항상 사무적이고, 애정을 나눈다기보다 욕구를 처리한다는 표현이 적합할 행위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마음을 주지 않던 상대다. 분명 다른 이보다 훨씬 호감을 두고있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그게 다였다. 벨져는 릭을 바라보지 않았고 그저 몸이나마 허락받은 것에 만족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벨져가 변모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본질은 여전히 릭 톰슨이 원했던 벨져 홀든 그대로일 것이다. 근거가 확실한 믿음은 아니지만 릭은 자신의 직감에 자신이 있었다.
한
없이 의자에 앉아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자료와 씨름을 했다. 소거법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을 모두 쳐내고 결국 잠이 든
시각은 새벽녘이 다 되어서였다. 그것마저 서너 시간 후에 눈이 뜨이고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 별수 없이 눈을 완전히 뜬다. 해가
막 뜨기 시작한 시각의 옅은 빛은 두꺼운 커튼에 가려 닿지 않는다.
꿈조차 이상했던 것 같다. 무슨 꿈이었더라. 상체를 일으키고 손으로 이마를 감쌌지만 무언가 먹먹한 감정만이 가슴을 조일 뿐 구체적인 내용은 도통 떠오를 생각을 않는다.
가
만히 눈을 감으면 밤보다 짙은 어둠이 몸을 감싼다. 물론 그 어둠이 문 앞에서 보았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기묘한
어둠이었다. 빛 한 점 남기지 않고 전부 삼켜버리면서도 몸의 윤곽은 뚜렷했다. 모든 것을 검은 장막으로 가리는 밤과는 다르다.
그것을 어둠이라 해도 좋을지 릭은 모른다.
자꾸만 가슴이 뛴다. 묘한 조바심이 릭의 불안을 부추겼다. 무엇이 이토록 불안한지 릭은 자신의 불안 자체가 불길하게 느껴졌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의 커텐을 걷는다. 빛이 들어왔다.
침
대 위로는 등을 둥글게 만 어린 신체가 가로누워있다. 청년이었던 그가 입던 셔츠가 아닌 호텔의 헐렁한 가운이 살갗을 가린다.
이불을 슬쩍 걷어보아도 벨져는 그저 잠에 취해있을 뿐이었다. 팔다리는 그를 문앞에서 건져냈을 때보다 약간 길어진 듯 했다. 다시
이불을 어깨까지 덮어준다.
작은 냉장고를 연다. 결국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누웠던 탓에 어제 사온 샌드위치는 전부 고스란히
냉장고에 남아있었다. 그것을 꺼내 탁상 위에 두고 작은 쪽지를 적는다. 아침 대신이오. 그리고 채비를 하고 호텔을 나섰다. 아직
아침이 이른 시각이다.
밤 사이에 또 눈이 내린 모양이었다.
거리가 새하얗게 물들어있다. 릭은 산책 겸 거리를 걸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가슴이 조여들어가는지.
대답을 발견하지 못한 채 거리에서 시간을 죽였다. 벤치에 앉아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기도 했다.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흐르고, 거리로 사람이 늘어갔다.
여행사가 문을 열자마자 발을 들여 계약을 끝마쳤다. 웃돈을 주고 이런저런 조건을 붙이니 모레쯤부터 사용이 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모레라. 릭은 역에서 가져온 시각표를 살핀다. 나쁘지 않은 시간이다.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그럭저럭 점심시간이 막 지났을 즈음이었다.
달칵. 문을 연 순간. 무언가와 부딪혔다. 복부로 닿은 감각에 고개를 내린다. 검은 털모자가 아랫배 언저리에서 흔들린다. 벨져가 고개를 바싹 들었다. 눈이 마주친다. 푸른 눈이 가늘어진다. 릭도 놀라 얼굴을 찌푸렸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조금 늦게 왔더라면. 그런 불안이 심장을 조인다. 그대로 몸을 밀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벨져가 엉거주춤 뒷걸음친다. 문을 닫는다. 등 뒤로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어딜 가려 했소."
저도 모르게 낮게 깔리는 목소리를 어쩔 수가 없다. 눈에 힘이 들어간다. 뒤로 한 발 더 물러나려는 어깨를 꽉 붙잡아 막았다. 벨져는 입을 살짝 연 채 말이 없다. 한참이나 눈싸움을 하다가 드디어 벨져가 입을 열었다.
"…너를 찾으러 가려던 참이다."
대답을 듣고도 릭은 얼마 동안 손을 놓지 않았다. 파란 눈을 빤히 바라본다.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한숨이 푹 나왔다. 힘이 풀어진다. 무릎을 바닥에 대어 눈높이를 맞추고 팔을 벌려 끌어안았다.
"미안하오. 잠이 부족하니 날카로워지는군."
툭툭 등을 서너 번 두드린다. 재차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벨져는 그다지 화가 난 것 같지도, 그렇다고 당황한 것 같지도 않았다.
피로가 순식간에 몰려왔다. 눈꺼풀이 무겁다. 침대 위로 엉덩이를 내려 걸터앉는다. 스프링이 삐걱인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벨져가 그 앞에 선 채 릭을 바라본다. 릭. 부르는 소리에야 정신을 차리고 미소 지었다.
점
심시간을 넘긴 시각이다. 나가면서 다시 커튼으로 창문을 가려 놓은 탓에 방 안은 살짝 어둡다. 시선을 돌리니 분명 식사 대용으로
남겨두었던 샌드위치도 고스란히 그대로 있었다. 위치마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탓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포장은
커녕 손조차 대지 않은 듯 했다. 릭이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쉰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군?"
"식사는 필요 없다."
"어제 저녁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했을 거 아니오. 이래서야 언제까지고 나에게 안겨 다녀야겠군."
벨
져의 어깨를 잡아 테이블 앞으로 질질 끌었다. 작은 테이블 옆 의자에 억지로 앉히고 샌드위치의 포장을 벗겨 앞에 놓아준다.
불만스레 바라보는 푸른 눈을 무시하고 말로 강요한다. 이거 잡으시오. 제 말에도 빤히 릭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다. 릭은 그 손을
억지로 잡아 펴고 샌드위치를 들려주었다. 그래도 거들떠도 안보는 벨져의 입에 가져다 누르기까지 한다.
"뭘 먹어야 움직일 수 있지 않겠소. 난 잠시 눈을 좀 붙여야겠어. 출발은 내일이오."
입이 우물거리는 걸 확인하고야 릭은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이불조차 덮지 않고 벌러덩 누운 채 손등으로 눈을 가린다. 넓지 않은 객실은 한없이 조용하다.
눈을 감으니 감각은 청각밖에 남지 않는다. 들리는 소리는 고작해야 샌드위치 포장이 바스락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규칙적인 소리가 피곤한 몸에 수마를 불러온다.
꿈조차 꾸지 않고 수면을 취했다. 얼마나 잤을까. 생각보다 깊게 빠졌던 잠은 예상치 못한 상황과 함께 깨어졌다.
민감한 곳으로 느껴지는 감촉에 눈을 떴다. 비싸다곤 할 수 없는 호텔의 약간 얼룩덜룩한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길게 이어진 빛의 길은 아마 커튼의 틈일 것이다. 그 길로 뽀얀 먼지가 빛을 받아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