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색잔향
90분리퀘 레티님/글벨-꿈 ㅎ...30분오버했음 흐으
나는 징글벨의 저주에 걸려있다…꼭 징글벨이라고 쓰고 징을 지우는 저주지
처음쓰는 글벨.작은형과 막내
벨져 홀든은 정말이지 재수없으리만치 완벽한 사람이었는데 그렇기에 이글은 자신의 작은형이 언젠가 바닥으로 떨어질 날이 있으리라 확신했었다.
작은형이 졌다며? 문을 열자마자 반쯤 소리치는 막내에게 첫째는 한숨을 쉬었다. 누가 보면 자기가 진 줄 알겠다. 이글은 침통한 다이무스의 모습에 그렇게 생각했지만 딱히 말은 하지 않는다.
"벨져를 너무 자극하지 마라, 이글."
큰형이 더 충격받은 거 아냐? 라는 생각은 곱게 머릿속으로 접어두고 이글은 싱글싱글 웃는다. 벨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다이무스가 이렇게 침울해하는 모습이라니, 역시 인생은 길게 살고 볼 일이었다. 뭐가 재밌냐며 눈을 찌푸리는 다이무스의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슬쩍 넘겨버린다.
재빠른 발걸음으로 이글은 벨져의 방에 도착했다. 나름 마음을 쓴다고 노크를 세번 두들긴다. 역시 나는 좋은 동생이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작은형 들어간다, 문을 열었다.
이글은 한쪽 입꼬리를 들어올린다. 역시 제일 충격받은 건 큰형이었잖아. 언제나 고결하고 오만한 자신의 둘째형은 패배따윈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의자에 앉아 찻잔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벌컥벌컥 예고도 없이 문을 열었던 어느 때와 같이. 안녕 작은형. 이글의 인사에 벨져가 슬쩍 시선을 준다. 이글은 그 앞으로 다가가 맞은편 의자에 몸을 앉혔다.
"삼류능력자에게 발렸다며?"
대놓고 도발하는 막내의 말에도 벨져는 동요하지 않는다. 찻잔의 홍차가 입으로 올겨가고 목이 움직인다. 이글은 턱을 받치고 그 움직임을 눈에 새겼다.
"쇼크였어? 작은형."
싱글싱글 놀리듯 능청스레 다시 묻는 이글에게 벨져가 미소짓는다. 집을 나섰을 때와 같은 오만하고 아름다운 미소. 누가 지금의 그를 보고 인생의 첫 패배를 겪은 뒤라 알 수 있을까. 그래, 이래야 작은형이지. 이글도 덩달아 웃었다. 제 형과 아주 닮은 미소로.
패배는 벨져를 더욱 완벽한 존재로 만들 것이다. 그런 확신이 이글에게는 있었다.
그렇기에 벨져가 훌쩍 집을 떠났을 때에도 이글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다이무스도 내심 알고는 있었을텐데. 다이무스는 꼬박 하루를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작은형도 이 모습을 봤어야 했다고 이글은 생각했다.
그 여유가 사라진 건 그로부터 나흘 뒤의 아침이었다. 꿈을 꾸었다.
하늘이 뿌옇다. 이글은 다이무스의 손을 잡고 걸었다. 눈 앞으로 보이는 건 큰형의 다리뿐이다. 열 살 즈음이었을까. 한참 어렸을 적의 자신이었지만 꿈 속의 이글에게는 현실이었다. 큰형, 큰형, 어디가는거야? 어린 이글이 묻는다. 다이무스는 걸음을 계속했다. 다이무스가 한걸음, 이글이 세걸음. 이글이 같은 질문을 꼬박 세 번 하고서야 다이무스는 입을 뗀다.
"작별인사를 하러 간다."
"작별인사?"
그제야 이글은 저와 큰형의 차림새를 보았다. 검은 정장. 손에 들린 백합. 종종걸음으로 옆으로 달려가 올려다본 다이무스의 눈가가 약간 붉게 젖어있다.
"누구한테 작별인사를 하는데?"
걸음이 멈춘다. 이글도 그대로 멈추어 섰다. 다이무스의 시선이 이글을 향한다. 어울리지 않게 머뭇거리는 큰형의 입술에 심장이 요동친다.
아니야 큰형, 말하지 마.
당장에라도 손으로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허나 애석하게도 꿈속의 이글은 너무나 작았기에 손은 다이무스의 얼굴까지 닿지 않는다. 입이 열린다. 그만.
눈을 떴다.
내가 생각보다 불안했던 모양이네? 웃어넘기는 것도 세 번까지. 해가 떨어지고 새카만 밤에 몸을 맡길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악몽에 이글은 눈을 찌푸렸다. 이틀을 큰형과 걸었고 매번 이름을 듣기 직전에 잠을 깬다. 세 번째 꿈은 사람이 많았다. 다이무스가 안겨준 새하얀 백합다발이 가슴팍에 가득했다.
꿈은 꿈이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 벨져 홀든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분명 작은형은 더욱 완벽해져서 돌아오리라. 그 확신조차 혹시나하는 불길함이 어둡게 가린다.
꿈 속의 자신이 큰형으로부터 백합 다발을 건네받은 날 아침. 이글은 벨져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자꾸만 가슴으로 스며드는 불안을 쫓아내려 사방으로 행적을 찾고 빛이 지나간 그림자를 밟았다. 매사에 완벽한 벨져기에 물론 제 길을 지우는 것도 능숙하겠지만 그 이상으로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사람이다. 분명 찾을 수 있으리라.
한참을 날개짓해서 이글은 벨져를 따라잡았다. 꿈에서 본 잿빛 하늘만큼이나 우중충한 날이었다.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황폐한 슬럼가에서 마주친 작은형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작은형."
뒷모습을 보자마자 달려가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목을 냅다 잡는다. 이글. 벨져가 돌아본다. 약간 놀라는 그 모습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날 그대로였다. 메마른 웃음이 흘러나온다. 찾았다, 찾았다 작은형. 손이 떨린다.
"…살아있었네?"
도망가지 못하도록 손목을 더욱 세게 쥐고 눈을 뜨지 않도록 먼저 눈을 감는다. 같은 눈높이로 보이는 입술에 입을 마주대었다. 첫키스는 예쁜 여자아이와 하기로 했었는데. 그런 다짐은 생각보다 부드러운 제 형의 입술을 느끼고서야 떠올랐다. 충동적으로 저지른 키스였지만 꽤 나쁘지 않다고 이글은 생각한다. 작은형이 얼굴은 예쁘니까 뭐. 큰형이 보면 기절하겠지. 이런저런 잡상이 머리를 스치고 그저 대기만 했던 입술이 떨어진다. 작은형 한 번만 더.
작은형이 변했나? 이글은 입꼬리를 슬쩍 올린다. 이렇게 응석을 받아주던 벨져 홀든이 아니었는데. 같은 키. 자신보다 얄팍한 허리춤에 팔을 감는다. 작은형. 다시 부르는 목소리에 대답은 없다.
장례식. 검은 상복. 잿빛 하늘. 아직 어린 자신. 가슴에 안긴 한아름의 백합. 큰형아. 불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옆에 선 얼굴을 올려다본다. 다이무스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자 네 차례란다, 작별 인사를 해야지. 등을 떠미는 손에 마지못해 걸음을 떼었다. 한걸음 한걸음 검은 관이 가까워온다. 저 안에 있는 사람은.
그래 그렇겠지.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쓴웃음. 관짝 가득 들어찬 백합에 파묻혀 누워있는 소년은 역시나 벨져 홀든이다. 작은형에게 작별인사를 해야지. 어른이 뒤를 떠민다. 이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도움을 요청하려 다이무스에게 시선을 돌려도 다이무스는 저 멀리에 있다. 어서 빨리. 재촉하는 수많은 손길에 마지못해 가득 안았던 백합을 풀어놓는다. 하얀 목이 생전에도 지금도 아름다운 둘째의 가슴팍으로 떨어진다.
작은형, 작은형, 작은형.
끝끝내 이름을 부르지는 못했다. 애석하게도 태어나기 전의 자신은 영혼을 팔지 않았던 모양이라, 이글 홀든은 홀든의 막내였으니까. 자신이 가진 형태없는 집착이 비록 피붙이간의 정이 아니라 할지라도 벨져 홀든은 이글의 두 살 많은 형이었다.
허름한 호텔의 한 방에서 눈을 떴다. 비좁은 침대가 삐걱이고 살이 맞닿는다. 기억에서는 항상 차가웠던 그 피부를 달아오르게 한건 친동생인 자신이었다. 한숨을 내쉬고 제 형을 끌어안는다.
"못 본 사이에 응석이 심해졌구나 이글."
귓가에 닿는 약간 나른한 목소리에 이글은 안심한다. 새하얀 백합은 어디에도 없고 두 사람의 같은 머리카락만이 이리저리 뒤섞였을 뿐이다.
이제는 머나먼 어린날. 길에서 넘어진 이글을 등에 엎고 돌아가던 건 항상 다이무스였다. 벨져는 옆에서 보기만 할 뿐 딱히 위로를 해주지도 그렇다고 책망하지도 않았다. 싫은 건 아니었지만 응석을 받아주는 형은 아니었다. 유년시절의 자신에게 지금 이 상황을 무어라 전할 수 있을까. 네 작은형이 너에게 안겨줄거다. 분명 믿지 않겠지.
가슴팍에 안긴 이글의 머리카락을 벨져가 쓰다듬는다. 작은형. 막내의 말에 대답은 없지만 듣고있는 거라고 이글은 알고있다.
"…집에는 안 올거지?"
"너도 가출했으면서 무슨 소리냐."
"됐어.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나랑 연락만 해주라. 작은형."
어렸을 적엔 그렇게나 제 형들보다 크고싶어서 안간힘을 썼더란다. 두고봐 작은형보다 클 거니까. 선전포고하던 막내 앞에서 작은형은 코웃음만 쳤었지. 결국 이글은 벨져와 눈높이가 같아진 시점에서 성장이 멈추었다. 그래도 이제 똑같네? 몸도 내가 더 좋잖아? 그건 몸이 좋은 게 아니라 미련한 거다 이글.
검을 쓰는 세 형제. 타고난 능력으로 제 키만한 검을 휘두르기에 그 몸이 여리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여리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다만 그래, 작은형의 자신보다 살짝 얇은 이 몸이 끌어안기에 딱 좋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제 악몽은 없으리라. 숨을 들이킨다. 오래된 호텔의 매캐한 냄새. 벨져에게도 이글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향에 뒤섞여 그리웠던 체취가 가득하다. 단한번도 끌어안아준 적 없던 손이 이글의 등을 쓰다듬는다.
"큰형한테는 비밀로 해줄게. 전부 다."
작은형의 행방도 오늘 있었던 일도. 이글의 말에 벨져가 작게 웃었다. 오늘 일을 말했다간 형이 심장마비로 쓰러질거다. 그건 그렇네.
15.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