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경계
(1)
패러렐?일수도 아닐수도있고. 쫌 미정. ㅁr부님이랑 ㅇ1느님이랑 이야기하다가 ㅎㅏ...넘조은...
부정기연...재..ㅇ.ㅣㅂ니다 이것도...하핫 연재를 하나 늘려버렸네 마감과 싸우면서 가끔 올라옵니다 운좋으면(...)
다음편은 아마 19금
릭벨. 바텐더 릭과 퇴폐업소 종사자(...)벨져.
왼손에는 손님이 마시다 남긴 와인병과 자질구레한 안주거리가 가득한 봉투. 빈 오른손으로 문고리에 열쇠를 넣어 돌린다. 달칵달칵. 오래된 문은 맞는 열쇠여도 쉽사리 열리지 않는다. 몇 번을 이리저리 돌리기를 반복하고서야 열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차가운 겨울에 싸늘해진 문고리. 맨살에 닿는 냉기에 놀라는 것도 잠시고 별다른 거리낌 없이 잡아 당긴다. 다녀왔소. 아무도 듣지 못할 인사를 버릇처럼 내뱉는다. 좁고 너저분한 아파트에 먼저 도착하는 건 항상 릭이었다.
릭이 아파트에 도착하면. 그즈음 되어 슬슬 오르기 시작하는 태양빛이 창문으로 쏟아진다. 창문은 동향으로 나있다. 이 아파트는 아침을 나기에 썩 좋은 곳은 아니었다. 집값이 싼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할까. 릭은 부신 눈을 가늘게 뜬다. 갈색 봉투를 식탁 위에 올려두며 창가로 다가갔다. 익숙한 손길이 블라인드를 치고 그 위로 덧대어 빨간 커텐을 흘린다. 작은 아파트에는 다시 밤이 찾아든다. 해가 뜨면 시작되는 밤이다.
공간을 밝히려 켠 전등은 슬슬 수명이 다해 그 빛이 어슴푸레하다. 오후에 새로 사와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식탁위에 널부러진 식사의 잔해들을 적당히 몰아 치운다. 빵이나 몇 개 줏어먹고 나갔으니 크게 더러운 건 없지만 귀찮지 않은 건 아니다. 전부 정리하고 나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니,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던가. 졸다 깨서 허겁지겁 먹고 뛰쳐나갔으니 영 기억이 정확하지가 않다.
어수선한 싱크대에서 비교적 깨끗한 접시를 두 개쯤 꺼내 물로 헹궜다. 냅킨으로 물기를 닦아 식탁위에 놓고 갈색 봉투를 뒤적인다. 잘린 치즈가 담긴 비닐봉투, 육포 몇 조각에 풀만 끼워진 샌드위치. 다 식은 너겟 몇 개. 손대지 않은채 남겨져있던 음식들이 하나 둘 접시위로 오른다. 제대로 된 식사는 되지 않겠지만 아마 그도 식사를 할 생각은 없겠지.
싸구려 유리잔에 붉은 와인이 담긴다. 유리잔을 절반쯤 채우고 다음 잔으로. 그렇게 그와 자신, 두 사람 몫의 두 개의 잔에 붉은 색이 깃들었다. 릭은 의자에 몸을 앉힌다. 시간이 흐른다.
옅은 빛이 퍼진 공간에 시계소리만이 울린다. 째깍. 째깍. 그리고 간간히 들리는 제 숨소리. 동거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올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릭은 벽에 걸린 시계를 흘겨보고 제 손목시계로 시선을 내렸다. 번갈아 본 두 개의 시계는 같은 시각을 가리킨다. 역시 평소라면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런 불안이 덜컥 뇌리를 스쳤으나 다음순간 릭은 고개를 가로저어 불안을 떨쳐냈다. 제 몸하나 건사 못할 사람은 아니다. 일 분, 이 분, 삼 분…시간이 약간 흐르고 심장을 떨게하던 릭의 근심걱정은 얼마 지나지않아 끝이 났다.
달칵거리는 소리. 릭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오래된 문이 끼익거리며 열리고, 누군가 작은 집으로 들어왔다. 그 정체는 몇 초 지나지 않아 현관을 지나 릭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오는 검은 코트. 그 아래로 가늘게 뻗은 두 다리 또한 검은바지를 입어 몸의 윤곽이 새카맣다. 시선을 약간 위로 올리면 반대로 하얀 머리카락과 피부가 눈에 들어온다. 대조적인 두가지 색깔을 한번에 몸에 두른 청년은 어디서도 눈에 잘 띈다. 벨져가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대충 걸었다.
"인사는 하고 들어오라 하지 않았소."
맞은편 의자에 몸을 내리는 벨져에게 릭이 쓴웃음짓는다. 벨져는 허리를 굽혀 앉다가 흘끗 눈을 들어 릭을 보았다. 추위에 질린 피부가 한층 더 희게 보인다. 동시에 반대로 약간 붉게 물든 콧등과 눈매가 시선을 끌었다. 흥. 작게 코웃음치고는 볼멘소리를 낸다.
"필요 없지 않나. 너도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테고."
"그게 둘이서 사는 의미라는거요."
들은체 만체, 벨져는 와인잔을 집어 붉은 액체를 한 모금 삼킨다. 건배는 해야지, 벨져. 릭이 웃으며 잔을 식탁에서 건져올린다. 푸른 눈이 가늘어진다. 잔을 들어올린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벨져가 릭의 잔에 제것을 가볍게 대었다. 짤그랑. 유리가 맞닿았다. 입가는 여전히 불만이 남아 약간 뾰루퉁하다.
기분 나쁜 일이 있던 모양이군. 릭은 벨져에게 시선을 둔 채 포크로 치즈를 조각내어 입으로 옮긴다. 안주를 우물거리며 입을 연다.
"평소보다 늦어진 것 같은데."
잘 정돈된 눈썹이 움찔거렸다. 반응 하나하나를 주시하며 릭은 와인을 목뒤로 넘긴다.
"손님…, 아니, 이상한 남자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따돌리느라 시간이 걸렸어."
벨져는 그리 말하고 다시 와인을 한 입 머금었다. 짜증스레 눈을 더욱 찌푸리는 걸 보니 제법 지독한 상대였던 모양이다. 누구일까. 오늘 바에서 보았던 사람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지레짐작한 대상을 입에 담는다.
"빨간 넥타이를 했던 남자를 말하는 거요?"
푸른 눈이 사선 아래로 회피한다. 정답이군. 와인잔을 둥글게 흔들며 벨져의 눈치를 살핀다. 릭이 보는 앞에서 붉은 입술 사이로 빨간 와인이 흘러들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유리잔의 바닥이 식탁에 닿는다.
유독 새빨간 넥타이가 눈에 띄던 남자. 릭이 떠올려보건데 그 손님이 변질자처럼 보였냐하면, 글쎄. 제법 멀쩡해보이는…애당초 벨져의 손님은 대개가 겉모습은 멀쩡하고 돈이 많아보이는 사람들 뿐이긴 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꽤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 아닐까 생각되는 남자였다. 벨져의 아버지뻘 되는 나이였을까. 폐점 두시간 전쯤에 와서는 폐점시간이 약간 지나 릭이 퇴근할 채비를 마친 때가 되어서야 가게를 나섰다. 돈이라도 써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벨져에게 붙어있었겠지. 그렇게 완전히 떠난 줄 알았는데, 근처에 숨어있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벨져와 함께했던 한 달 동안 이런 일이 없던 건 아니다. 한 네 번정도 있었나. 이따금 벨져가 늦어질 때면 이렇게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릭 앞에 돌아오곤 했다. 서로가 몸을 담은 장소가 어떤 곳인지 다 알고 있는데. 이제와서 무슨일이 있었냐며 호들갑을 떨 일은 절대 아닐 것이다. 분명히 누군가 저 청년의 밤을 사려 했겠지. 릭은 뻔한 사실을 몰라서 물을 정도로 어리석지도, 모르는 체 그저 넘어가줄만큼 상냥하지도 않다. 벨져 또한 오늘 불쾌한 일이 있었다며 나서서 하소연을 하지는 않으나 억지로 숨기지도 않는다.
릭은 몸을 살짝 일으킨다. 의자가 뒤로 밀린다. 넓지 않은 식탁이다. 그 위를 가로질러 손을 뻗었다. 차가운 볼이 손끝으로 닿았다. 냉한 피부에 닿는 사람의 체온에 벨져가 눈을 들어 릭의 시선을 받아친다.
"그대를 사겠다고 했소?"
"알고싶나?"
"알고싶어."
턱을 쓰다듬는다. 알코올에 달아올라 그 볼이 약간 붉다.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벨져의 전신에서 풍기는 문란한 밤의 냄새. 옷에 밴 타인의 체취. 모두 모르는 체 하고 입술을 맞대어 키스했다. 벨져에게서는 알코올 냄새가 난다. 방금 입에 댄 와인과는 다른. 그리고 그 술내음에 섞인 미세한 향. 후각을 자극하는 이 향은 향수일까. 여자 것은 아니고, 요즈음 유행한다던가했던 싸한 남자 향수다. 벨져가 선호할 향은 아닌데. 아마도 그에게 들러붙었던 손님중 하나에게서 옮았으리라.
입술이 떨어지고 그제야 벨져가 속삭인다. 꽤 큰 금액을 부르더군. 릭은 제로에 가까운 근거리에서 파란 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뚫어져라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썩 로맨틱하지는 않다. 그리고? 릭의 질문에 벨져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거기에 나에게 반지까지 주겠다고 했지."
"반지가 필요하오?"
릭이 장난스레 미소짓는다. 어느새 자신의 귀를 매만지는 손길에 벨져가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귓속으로 피부가 닿는 소리가 울린다.
"필요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돌아왔다고 생각하지 않나? 릭."
덤덤하게 되묻는 벨져에게 릭이 짧게 답한다. 그렇군. 손끝은 계속해서 귓가를 만지작거린다.
"아니면, 나에게 반지를 줄 생각이라도?"
"반지보다 더 좋은 걸 줄 수도 있어."
릭은 벨져에게 묻는다. 침대로 갈까? 좋다. 벨져가 짧게 답했다.
릭 톰슨은 그렇게 누구도 사지 못한 밤을 손에 넣는다. 돈 한 푼 내지 않고. 아니 집을 제공하고 있으니 벨져가 내는 숙박비라고 생각해야 할까? 아니다. 릭에게는 확신이 있다. 설령 집주인과 식객이 아니라 하더라도 벨져는 릭에게 다리를 벌렸으리라는 확신. 릭 톰슨이 아무런 말도,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해도 이 청년은 기꺼이 자신에게 몸을 내주었을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릭은 자신의 직감이 엇나가지 않으리라 알고있다.
아침의 하얀빛이 두꺼운 커튼 아래의 틈으로 새어들어온다. 침대 위는 아침에 벗어던진 잠옷이 널부러져있다. 손으로 대강 잡아 치우고 벨져의 몸을 끌어 성급하게 침대로 뒹굴었다. 다음은 없을 것 마냥 키스를 하며 서로 옷을 벗긴다. 벨져에게서는 여전히 릭이 알지 못하는 향수냄새가 난다. 침대를 벗어날 즈음이면 그 향도 전부 릭의 체취에 지워지겠지. 그리 생각하니 저도모르게 눈가가 가늘어진다.
이 이름모를 욕구를 무어라할까. 질투? 독점욕? 아마도 둘다 아닐 것이다. 그런 욕심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만한 애정이 선행되어야했다. 이 청년의 존재를 알게된지는 고작 두 달. 몸을 섞은지는 한 달. 질투로 활활 불탈만큼 정열적인 사랑을 하기에 부족한 시간은 아니었으나 릭은 자신의 감정이 사랑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그저. 그래. 생각치도 못하게 얻은 과일의 맛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남에게 나눠주고싶지 않을 뿐이다. 딱 그정도였다. 릭은 그랬다.
그러면 벨져는 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 화제에 대해서 이미 몇 번을 고뇌했다. 허나 벨져 홀든이라는 자의 속내는 그 기묘한 몸보다도 더 알기가 힘든 것이라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대는 내가 그렇게 좋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도 표정변화 하나 없이 고개를 돌려버릴 뿐이다. 하긴 뿌리도 무엇도 알 수 없는 존재의 생각을 어떻게 알겠는가. 릭은 타인에게 크게 집착하지 않는 자였기에 그 선에서 호기심을 멈추기로 했다. 어차피 살을 섞는데에 경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릭이 벨져 홀든이라는 청년을 자신의 집에 들인 건 지금으로부터 한 달쯤 전의 일이다.
청년은 그날로부터 다시 한 달 전, 그러니까 두 달 전에 불현듯 가게에 나타났다. 릭 톰슨은 벨져 홀든이 가게에 발을 들이던 순간을 목격하지는 못하였으나, 입구로부터 가게가 술렁이기 시작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릭은 옷을 갈아입던 도중이었다. 야 봤냐? 점장은 어디서 '저런'걸 주워왔대? 재주도 좋지. 몸값 장난 아니겠더라. 요즘 그렇게 장사가 안됐나? 뒤에서 들리던 다른 점원들의 조잘거림.
릭이 바에서 준비를 끝마칠 즈음, 벨져가 그 앞을 지나갔다. 헐렁한 면티에 청바지. 하얀 머리카락이 옅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평범한 사복임에도 그가 입으니 어딘가 다른 고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릭은 저도모르게 시선을 그에게서 떼지 못했다. 톰슨 씨, 들었어요? 저게 그 신입이라던데, 제발로 왔다나봐요 저 얼굴이면 더 좋은 곳에 갈 만도 한데, 왜 여기로 왔을까요. 동료가 귓띔했다. 릭은 곤란한 듯 웃을 뿐 답하지 않았다. 그 때만 해도 이런 관계가 되리라고 그 누가 알았을까.
벨져 홀든 26세. 두 달쯤 전에 제발로 입고되어 쇼윈도에 걸어들어간, 릭이 일하는 가게의 상품이다. 이름과 나이. 본인이 언급한 두 가지 이외에는 모두 불명인 청년. 어깨 약간 아래로 찰랑이는 새하얀 머리카락에, 싸늘한 두 눈은 따스하고 얕은 바다의 푸른 빛이던가. 가게에 발을 들이는 누구나가 지갑을 열며 그 가느다란 허리를 제 품에 끌어안고자 소망했다. 두터운 돈다발이 몇 뭉치나 그 눈 앞에서 흔들렸다. 이런 바닥에 있지 말고 제 품에 안기라며 마른 손목을 쥐는 손은 한둘이 아니었다. 정작 본인은 필요가 없는지 코웃음치며 전부 손등으로 쳐낼 뿐이었지만.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났던 때였나. 벨져는 여전히 가게에서 약간 뜬 존재였다. 어울리지 못한다기보다 존재 자체가 타 종업원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형성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하는 게 옳으리라.
벨져를 에워싼 잡음은 끊일줄을 몰랐다. 시기, 질투, 호기심. 그 무엇하나 빠지지 않고 주변을 맴돌았다. 그의 외모와 분위기에 이끌려 거리를 좁히려 한 사람들도 사흘이 지나기 전에 혀를 차며 멀어졌다. 누가 배좀 갈라봐, 저자식 피가 빨간색일리 없어. 얼굴을 좀 가까이 댔다가 죽을뻔 했다나. 믿거나 말거나. 제 팔에 길게 난 상처가 그 말라빠진 청년의 소행이라며 탈의실에서 소리지르던 근육질의 동료를 믿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허나 벨져 홀든의 피가 붉지 않을 것이라 주장하는 그의 말에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릭은 당번으로 남아 가게의 뒷정리를 했다. 청소가 막바지에 이르고 쓰레기를 버리려 열었던 뒷문. 지저분한 뒷골목. 릭의 등 뒤로 새는 노란 빛이 밤의 어둠을 가른다. 그림자가 중앙으로 길게 늘어진다. 밖으로 나와 더러운 봉투 옆으로 봉투를 하나 더 세웠다. 손을 탁탁 터는 릭의 귀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도모르게 고개를 돌린다. 맑은 녹색 눈에 두 남자의 옆모습이 비친다.
척 봐도 제법 값이 나가보이는 정장을 몸에 걸친 남자. 양쪽 눈을 멀쩡히 뜬 채 그 남자의 키스를 받는 청년. 검은 코트에 허름한 청바지 차림인 청년이 아직도 말이 끊이지를 않는 벨져 홀든임은 명백하다. 가게에서 저런 옷을 입힐리는 없으니 사복이겠지. 귀찮은 장면을 목격해버렸군. 릭은 내심 한숨을 쉰다. 그 동안에도 남자의 손이 벨져의 마른 허리를 쓸었다. 목적이 확실한 손짓이다.
종업원은 손님과 잠자리를 가질 수 없다. 표면상으로는. 몰래 속옷에 웃돈을 찔러넣고 멀리서 합류하는 경우야 증거가 없으니 묵인해주고있지만 이렇게 넘어지면 코닿을 곳에서 2차라니. 과연 가게에서 제일 비싼 몸이라 더 대범한가?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어찌되었건 얽혀서 좋을 건 없다. 적당히 모르는체 피해볼까. 뒷걸음질 치려는데 그만 다리가 쓰레기통에 부딪혀 소리가 났다. 덜컹. 아차 싶은 다음 순간 뚜껑이 떨어져 바닥으로 구른다. 콘크리트 바닥으로 철제 뚜껑이 구르면서 더욱 큰 소리. 남자가 퍼뜩 고개를 돌려 옆을 본다. 릭과 눈이 마주쳤다. 릭은 양손을 가슴언저리로 들어 바닥을 보인다.
"오 이런, 내가 좋은 시간을 방해해버렸나?"
멋쩍게 입가를 끌어올렸으나 이미 남자는 잔뜩 굳어있다. 어버버 입만 뻐끔거리더니, 벨져쪽으로 눈을 슬쩍 흘긴다. 시린 두 눈의 안중에 남자는 없고 그저 릭을 응시할 뿐이다. 남자는 그대로 릭을 어깨로 치며 줄행랑을 쳐버렸다. 어둡고 냄새나는 골목에는 릭과 하얀 청년만이 남져긴다. 그제야 릭의 귓가에 닿는 혀차는 소리.
"쓸데없는 짓을."
처음 듣는 벨져의 목소리였다. 스쳐지나가는 얼굴을 본 적은 있으나 말을 나눈 적도 없고, 일하는 장소도 다르니 목소리를 들을 일이 있을리가 없었다. 낮고 조용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릭의 귀에 편안하게 닿는다. 눈이 마주친다.
푸른 눈이 릭을 흘겨본다. 그 시선에 딱히 노여움이나 분노는 없었으나 부드럽지도 않다. 한숨을 내쉬는 벨져에게 릭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슬쩍 피했다. 턱을 긁는다. 그리고 작게 두 번 헛기침. 흠, 흠, 뭐. 뜸을 들이고 슬쩍 맑은 녹색 눈만을 살짝 벨져쪽으로 향한다. 벨져의 싸늘한 시선이 그 눈길을 받아친다. 릭이 그에 질세라 입을 연다.
"그쪽이야말로. 손님과 자는 건 규율위반 아니던가? 홀든."
릭의 말에 벨져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잠시 텀을 두고. 흐음. 하얀 손가락이 제 붉은 입술을 매만졌다.
"나를 알고있는 모양이군."
"당신은 유명하니까. 가게에서……벨져 홀든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 않겠어?"
입술을 끌어올리는 릭에게 벨져가 되묻는다.
"그뿐인가?"
짧게나마 시간이 멈췄다. 릭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차가운 두 눈이 가만히 릭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잠시 시선을 빗겨둔다.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젓는다. 그리고는 두 걸음, 릭에게 다가갔다.
아니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군.
벨져의 혼잣말같은 중얼거림이 귓가에 멀게 닿는다. 릭은 저도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났으나 거기서 멈출 뿐이었다.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비슷한 눈높이. 검은 코트 안에 입은 헐렁한 흰 티가 눈길을 끈다. 탁탁. 구둣발이 두 번 바닥을 쳤다. 릭은 그 소리에 벨져와 눈을 마주한다. 자신만만한 푸른빛에 제 모습이 비친다.
"네가 내 잠자리를 없애버렸으니 네가 책임을 질거라 생각하겠다. 정 원한다면…."
두 팔이 릭의 어깨에 닿았다. 릭은 딱히 거절하지 않고, 그렇다고 그에 응답해서 안아주지도 않고 그저 벨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둔다. 하얀 손이 어깨 약간 뒤로 놓였다. 그 이상은 없다. 대신 입이 열린다. 너와 자줄 수도 있고? 생각했던 그대로의 말이다. 입가에 띄우는 미소는 그에게 돈을 내는 남자들의 식욕을 돋구기에는 충분하리라. 릭 톰슨은 이정도로 당황할만큼 순진하지 않다.
대담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그러고보니 누구도 벨져의 거처를 아는 사람이 없다던 이야기도 새삼스레 기억이 난다. 딱히 살 곳을 확실히하지않고 이런 식으로 매일 밤 장소를 정했던 걸가. 그렇다면 상습범이 따로없다. 일단 발각되어서는 안될 행위이기는 하다. 설령 벨져라 하더라도 이렇게 당당하게 푼돈을 벌다가는 멀쩡하지 못할 것은 분명한데. 릭에게 들켜버렸으니 이젠 입막음으로 물귀신인가? 릭은 자신마저 늪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벨져의 권유에 쓴웃음을 흘린다.
"종업원끼리 자는 것도 규칙 위반이라는걸 모르오?"
"종업원의 규칙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어. 나는 '상품'이지, 종업원이 아니다."
"홀든."
난 종업원이오. 이어져야할 말은 형태가 되지 못했다. 고개를 저으려던 찰나. 하얗고 마른 검지가 릭의 말을 가로막는다. 말뿐만이 아닌 호흡마저 멎었다. 차가운 눈동자가 더욱 가깝게 다가온다. 릭은 눈을 감는 것도 잊고 그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입술에 닿는 감촉.
벨져.
청년이 제 목소리로 제 이름을 읊는다. 입술을 맞댄 채 릭은 귀를 기울였다.
좀 더 부드러울거라 멋대로 예상했는데, 막상 맞닿은 감촉은 잔뜩 메말라 까칠하다. 하지만 과연 가게에서 제일 비싼 입술이라고 해야 할까. 쌀쌀맞아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입술을 가볍게 빨아올리는 움직임에서 흐르는 색향은 그가 이런 일에 능숙하다는 지표이리라.
생각보다 훨씬 차가운 입술에 금세 릭의 체온이 녹아든다. 조금 더. 그런 생각이 들 즈음, 입술이 떨어졌다. 벨져가 한 발 뒤로 물러난다. 약간 거리가 생기고 시선이 자연스레 입술에 머물렀다. 그 눈을 붙들기라도 할 셈인지 차가운 손이 한쪽 올라와 릭의 볼을 감쌌다. 시선이 얽힌다. 파란 눈 아래의 입술이 작게 움직인다.
"벨져라고 부르도록…불러도 좋다."
속삭이는 소리. 마치 주문처럼 들리기도 한다. 싸늘한 태도를 전부 잊게 만드는 그 속삭임이 무기라고 깨닫는다. 타액이 소리내어 목 뒤로 넘어간다. 퇴로는 이제 없다고 알고있다.
릭 톰슨.
릭이 생각하는 벨져와는 맞지 않는 달콤함.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집중한다. 하얀 손이 목에 감기기 전에 허리로 손을 둘렀다. 나쁠 것이 있겠는가. 이쯤에서 백기를 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것이라 자조한다.
세상물정을 모르고 다짜고짜 돈을 원해 업계에 뛰어들었나 싶었다. 적당히 아무데나 보이는 가게를 잡아 기어들어왔고 그게 릭이 일하는 가게였나 하던 정도였다. 아니 기어들어왔다기 보다 와주셨다고 해야할까? 성격에 흠은 있어도 저정도 얼굴에 넘쳐흐르는 고상함이면 어디에 가서도 특급대우는 따놓은 당상일텐데. 바보같기는. 누구나 그리 쑥덕였고 릭도 그에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같은 공간을 공유하게 되면서 그러한 추측이 틀렸음을 금세 깨달았다. 그가 끌러둔 소지품을 보면 부는 오히려 넘쳐 흐른다 싶을 정도가 아니던가. 릭은 벨져의 크지 않은 가방에서 이따금 새어나오는 물품이 아주 값어치있는 물건들이라는 것을 안다. 현금도 적잖게 있을 것이 분명했다. 허나 벨져는 어째서인지 그 돈을 쓰려하지 않는다. 수전노마냥 쥐고 놓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서도. 하여튼 중요한 점은 벨져 홀든은 비싼 값에 제 몸을 팔면서도 그다지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5.10.02